회갑이란 자기가 태어난 육십갑자로 60년만에 되돌아 오는것이 회갑의 의미다.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는것처럼 시간은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는것처럼 시간은 회귀한다.

초상집에 갈때 우리 선조들은 모두 흰색옷을 입었다.

검정옷은 입지않았다. 검정색은 죽음을 상징하지만,흰색은 시작과 탄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는 죽음의 장소에 가서 시작과 탄생을 기원했던것이다.
60년이라는 주기는 시간이 지닌 고천문학적 의미는 입춘날짜의 시간을 맞추는데 있다.
매년 입춘이 되는 날짜는 같지만 세밀하게 들어가면 입춘시작시간은 약간씩 다르다.

출처: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 지음

 

강릉 남대천 둔치 벽화 조성(무월랑.연화부인)

강릉시는 지역을 재발견해, 도시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사업비 1억원을 들여 중앙동 남대천 둔치 옹벽에 무월랑과 연화부인에 얽힌 이야기를 벽화로 그린다.
무월랑은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의 셋째 아들인 문왕의 4세손으로 젊어서 공부하러 강릉에와 지역 토호의 딸인 연화와 사랑을 꽃피운 이야기이다.
무월랑이 연화아씨와 사랑하다 서라벌로 돌아가자 연화는 무월랑을 그리워 하며 사랑의 편지를 써 잉어에게 줬는데 잉어는 경주에서 잡혔다.
우연히 무월랑이 이 고기의 배를 갈라 먹으려 하니 뱃속에서 천에 쓴 글이 나와 읽어보니 자신에 관한 것이어서 연화를 다시 찾아가 결혼을 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이후 무월랑과 연화는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을 낳았다.
강릉시는 이 같은 내용을 길이 60m, 높이 3m의 벽에 타일을 붙여 조형물을 만들어 오는 10월부터 관광 자원화할 계획이다.
강릉시 관계자는 “강릉시만의 정체성을 갖는 매력적이고 차별화된 도시 이미지 구축을 위해 스토리가 있는 창조도시를 만들게 됐다”며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이야기가 있는 도시를 만들어 지역 자산의 가치를 높여나가겠다”고 말했다.

출처:강원도민일보 홍성배기자

'족보이야기 > 옛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0) 2011.12.14
회갑이란  (0) 2011.09.20
양자도 親父 종중 구성원   (0) 2011.04.15
강릉의 성씨 두번째  (0) 2011.03.02
강릉주변의 성씨  (0) 2011.03.02

 
고법 “부계혈족 중심 관습법 시대에 안맞아”
양자도 친아버지가 속한 종중의 구성원으로 볼 수 있다는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
이는 양자가 친부와 친족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만큼 재산을 상속받을 수는 있지만 종중의 구성원이 될 수는 없다는 기존 판례를 뒤집은 것이다.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앞으로 양자나 그의 후손들도 종중 구성원으로서 문중의 제사를 주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법 민사17부(곽종훈 부장판사)는 경주최씨 충재공파 만령화수회가 최모씨 등 4명을 상대로 낸 종중회원확인 청구 소송에서 원심대로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7일 밝혔다.
재판부는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나 그 후손 역시 ‘태어난 가문의 선조와 성과 본을 같이하는 후손’인 이상 친아버지가 속한 중종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며 “양자로 입적하면 친아버지 종중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습법은 정당성과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판시했다.
또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 이념이 변해 기존 부계혈족 중심의 관습법은 현재의 가족제도와 부합하지 않는다”며 “피고의 선조가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친아버지 종중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습법은 더이상 효력을 지닐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어 “최씨의 7대 선조가 족보상 다른 사람의 양자로 들어갔다고 기재된 시점 이후에도 최씨와 최씨의 선조는 여전히 기존 종중의 행사에 참석하며 종원으로 참석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주최씨 충재공파 족보 등에 따르면 최씨의 7대 선조는 1700년대 후반 해당 종파 소속이 아닌 15촌 친척의 양자로 들어갔다.이후에도 최씨 등은 자신들 명의로 종중 땅을 계속 관리해 왔는데 충재공파 종중은 종중원이 아닌데도 문중의 재산문제 등에 개입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소송을 냈다.
앞서 1심은 “최씨의 선조가 양자로 들어갔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원고패소 판결을 하면서도 최씨의 선조가 양자로 들어갔을 경우 종중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출처:연합뉴스 
 

'족보이야기 > 옛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갑이란  (0) 2011.09.20
무월랑·연화부인 이야기  (0) 2011.09.06
강릉의 성씨 두번째  (0) 2011.03.02
강릉주변의 성씨  (0) 2011.03.02
친족계촌법 설명입니다.  (0) 2011.01.20


‘관동팔경’의 절경과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으로 사랑받는 ‘관동’ 혹은 ‘관동 지방’은 대관령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중·동부, 강원도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고려 성종 때 전국을 10도로 나누면서 오늘의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관내도(關內道)라고 불렀고, 강원도 지역은 관내도의 동편에 있다고 해서 관동이라고 했다.

한편, 태백산맥으로 갈리는 동과 서는 영동 지방과 영서 지방으로 나뉘어 불린다.

태백산백은 북미의 로키 산맥, 남미의 안데스 산맥처럼 그 지역의 가장 주요한 분수계(分水界)를 이루는 척량산맥(脊梁山脈)의 전형적인 예이다.

예부터 동해안의 명승지인 간성 청간정, 강릉 경포대, 고성 삼일포, 삼척 죽서루, 양양 낙산사, 울진 망양정, 통천 총석정, 평해 월송정으로 이루어진 관동팔경이 말해주듯 자연 경관이 수려해 유유자적하는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영동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문(文)의 기운이 성했으며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와 허균, 허난설헌 같은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반면, 영서 지방은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협을 끼고 철원, 춘천, 홍성, 횡성, 원주, 평창, 영월 등이 산간 지역에 흩어져 있다.

영동 지방에는 낙향한 명문 대가의 양반들이 둥지를 틀고 그 자손들이 번성해 내려왔다.

이 지방 대성(大姓) 중 하나인 강릉 김씨의 시조는 통일신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5대손인 김주원이다.

 

김춘추는 신라 개국 시조 김알지의 21세손이다.

사록에 의하면 김주원이 시중(侍中, 신라의 최고 관직) 겸 병부령(兵部令, 군권 총책임자)의 벼슬에 있을 때 선덕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문무 백관이 숙의 끝에 그를 왕위에 오르도록 추대했다.

 

그때 갑자기 내린 큰 비로 알천(경주 부근의 하천)의 물이 불어나 입궐을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즉위를 포기했다.

거듭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가 은거했는데, 조정은 그의 겸양과 충정에 감복해 명주군 왕으로 봉하였으며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어 새로이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 내려오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후손 중에 여럿이 벼슬자리에 나갔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가문에 우뚝 선 인물은 생육신의 하나였던 매월당 김시습이다.

 

그는 시조 김주원의 22세손으로, 세 살 때 이미 시를 지었고 다섯 살에는 <중용>과 <대학>을 통달해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세조 1년, 나이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해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방랑길에 올랐다.

세조 4년에 한양에 들렀던 그는 효령대군의 권고를 받아들여 마음을 바꿔 세조의 불경 언해 사업을 돕게 되었다.

그 후 <금오신화>와 <매월당집> <십현요해> 등의 명저를 남겼다.

 

강릉 김씨의 집성촌으로는 삼척시와 강릉시 일원, 철원군 민통선 인근, 충남 당진읍, 경기도 동두천읍, 장단군, 전북 익산군이 있다.

 

 

또 다른 대성인 강릉 최씨는 본관은 같으면서도 세 줄기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고려 때 경흥부원군에 봉해졌던 충무공 최필달의 계통이고, 둘째는 고려 태조 왕건의 부마인 최흔봉의 계통이며, 셋째는 고려 충숙왕의 부마인 최문한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강릉 최씨의 시조는 왕건을 도와 통일 고려의 창업에 공을 세운 최필달이다.

그는 이 공으로 정승에 오르고 경흥(강릉의 별칭)부원군에 봉해졌다.

경주 최씨 상계세보에 따르면 최필달은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의 후손인 최승로의 후손이다.

 

따라서 강릉 최씨는 고려 초엽에 경주 최씨로부터 분적한 것이 된다.

조선조 때 문과 급제자 숫자는 37명. 최씨 가운데서 전주·해주·경주 최씨 다음으로 많다.

이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은 최필달의 16세손인 최치운으로서 세종조의 명신이다.

태종 17년 문과에 급제해 공·형·이조 참판, 집현전 직제학을 제수했다.

다섯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며 외교적 업적을 쌓아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사람을 알아보는 선견지명이 대단했다.

 

매월당 김시습이 태어난 지 8개월이 되었을 때 우연히 아이를 보고 장차 큰 일을 할 인물이라며 직접 지어준 이름이 ‘시습(時習)’이었다.

최흔봉을 시조로 하는 일가는 강릉시 모산 평장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이다.

 

강릉 지역에서는 예부터 ‘살아서는 모산이나 학산 지역이 좋고, 죽어서는 성산이 좋다’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모산은 산수가 뛰어난 곳이다.

최흔경은 고려 태조의 옥경대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부마가 되었다.

 

최흔봉의 12세손 최입지가 고려 말 공을 세워 강릉군에 봉해진 이후 중시조로 모셔졌다.

최흔봉을 시조로 하는 강릉 최씨에는 희경공파, 대사간파, 예성군공파, 전서공파가 있다.

충숙왕의 딸 선덕공주와 혼인한 최문한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공격을 받자 강릉으로 도피해 마상리에 터를 잡았다.

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깨달은 그는 그대로 강릉에 정착해 강릉 최씨의 또 다른 시조가 되었다.

 

그는 한때 정선군 남면 거칠현돈(居七賢洞)에서 이색, 길재 등 여말의 6현과 함께 <정선아리랑>의 원곡인 <도원가곡>을 지었다.

<도원가곡>은 최문한의 후손인 최찬제가 목판 탁본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후일 정선문화원이 <정선아리랑>의 원본임을 밝혀냈다.

 

이 노래를 요즈음의 말로 풀이하면 ‘벙어리 읖조리는 심정을 누가 알리요. 배고픔은 떳떳한 일, 절의를 잊지 말고 천지 만고를 이겨내자’라는 뜻이다. 

 

강릉·삼척 지역에 뿌리를 둔 안동 권씨의 세력도 만만치 않다.

워낙 역사가 오래된 권문세도 가문답게 각계에서 많은 인물이 활약하고 있다.

권씨 집안에서는 오래전부터 여러 문중마다 항렬이 달라 세수(世數)를 알아보기가 상당히 힘들었었는데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일찍이 고종 계묘년(1903년)에 대종회를 열어 새로운 항렬 자를 고안해냈다.

 

이것이 서수(序數) ‘일(一), 이(二), 삼(三), 사(四)…’ 에 맞춘 ‘병(丙)-중(重)-태(泰)-영(寧)-오(五)-혁(赫)-순(純)’ 의 순서이다.

이 돌림자가 들어간 이름만 보면 위아래를 쉽게 구별할 수가 있다고 한다.

 

동해나 삼척 사람들의 성격은 경상북도 쪽과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말투에서도 끝을 약간 말아올리는 억양이 같아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구별이 어려운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울진이 강원도에 속했던 시절이 있었다.

다소간 보수적이고 고집이 세다는 측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만하다.

아무래도 서울 출입이 상대적으로 잦은 강릉 사람들이나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많이 섞여 사는 속초나 양양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출처: 시사저널 이춘삼 편집위원 2010년 03월 17일 (수)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583

'족보이야기 > 옛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월랑·연화부인 이야기  (0) 2011.09.06
양자도 親父 종중 구성원   (0) 2011.04.15
강릉주변의 성씨  (0) 2011.03.02
친족계촌법 설명입니다.  (0) 2011.01.20
육십갑자[六十甲子]  (0) 2011.01.07

 

 

명절때 우리집안 조상을의 성묘를 다니면서,과연 내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존재일까~

또한 비석들에 보이는 많은 할머님들의 성씨를 보면서, 많은 할아버지,할머님이 어떻게 만나, 우리들까지 존재하게 되었을까?

흔히들, 일이 잘안풀리면, 팔자소관이라고 하는데, 그럼, 기질이나, 품성은, 어쩔수 없이 변할수가 없기에,

그 근본적인 문제에 호기심이 생긴다.시간이 되는대로,자료를 수집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강릉부의 성과 과거에 속현이었던 연곡과 우계의 성은 변화가 없으나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경우는 신증 조항이 설정되어 추가로 성씨가 기재되어 있다.


특기할 일은 과거 향리성으로서 속성이었던 정선전씨의 경우『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강릉지방 성씨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편찬될 당시까지만 하여도 크게 변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서(輿地圖書)』가 편찬되었던 18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에 안동권씨, 영월신씨, 초계정씨· 영일정씨, 여흥민씨, 평해황씨, 제주고씨, 삼척심씨, 간성이씨· 영해이씨, 신천강씨 등을 비롯한 새로운 많은 성씨들이 등장하였다.


이들 신증성씨들의 입향조와 입향 시기, 그리고 입향 사유를 보면, 입향 사유는 이주, 피난, 친척의 강릉부사 재임시 동행, 처가나 외향 등임을 알 수 있다. 입향 시기는 대체로 고려 말부터 17세기까지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증성씨조에 등재될 수 있었던 연유는 입향 후 과거진출을 통해 출사하였거나 이를 토대로 지역 내 토성 또는 세력 가문과의 혼인관계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릉지방의 성씨분포에 있어서 조선 전기의 경우는 토성과 속성 중심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토성, 속성과 더불어 새로이 입향하는 성씨들이 다수 등장함으로써 강릉지방에 거주하는 성씨들이 다양해졌다.


1920년 말에 조사·보고된 『강릉지방 생활상태조사보고』에 의하면, 주요 성씨는 강릉최씨, 강릉김씨, 삼척심씨, 안동권씨, 창령조씨, 전주이씨, 영해이씨, 연일정씨, 초계정씨, 영월신씨, 강릉박씨 등이었다.


[현황]
이후 성씨와 관련된 조사는 1975년 간행된 『임영(강릉·명주)지(臨瀛(江陵·溟洲)誌)』에 소개되어 있다.


입향시조와 본관은 다음과 같다.
강이식(姜以式) 진주강씨, 고용현(高用賢) 제주고씨, 김주원(金周元) 강릉김씨, 김완제(金完濟) 경주김씨, 김기수(金璣洙) 광산김씨, 김극감(金克鑑) 선산김씨, 김수간(金守諫)·김현창(金顯昌)·김만식(金萬植) 김해김씨, 김휘봉(金輝鳳)·김수익(金守翊) 김녕김씨, 김구년(金龜年) 삼척김씨, 김기(金沂) 안동김씨, 권송(權悚)·권적(權迪) 안동권씨, 남장익(南章益) 영양남씨, 문필영(文弼榮) 남평문씨, 민우중(閔友仲) 여흥민씨, 박계립(朴啓立)·박지봉(朴芝鳳) 밀양박씨, 박치격(朴致格) 함양박씨, 박순(朴純) 강릉박씨, 박사서(朴師恕) 반남박씨, 배유성(裵維成) 흥해배씨, 백진화(白珍華) 수원백씨, 선순하(宣舜河) 보성선씨, 설치헌(薛致憲) 순창설씨, 손종복(孫宗復) 경주손씨, 송양원(宋養源) 은진송씨, 신세린(辛世麟)·신성규(辛聖揆) 영산신씨, 신주(辛柱)·신경철(辛慶鐵) 영월신씨, 심동노(沈東老) 삼척심씨, 신복량(沈福良) 청송심씨, 안려(安慮) 순흥안씨, 엄현(嚴絢) 영월엄씨, 염현일(廉顯一) 파주염씨, 류득재(柳得載) 문화류씨, 유동양(柳東陽) 고흥유씨, 유창(劉敞) 강릉유씨, 윤승종(尹承宗) 파평윤씨, 이지순(李至純)·이계렴(李啓濂)·이도존(李道存)·이양하(李良夏) 전주이씨, 이장밀(李長密)·이을년(李乙年) 영해이씨, 이종손(李宗孫)·이종제(李宗悌) 성주이씨, 이방진(李邦鎭)·이국범(李國范) 전의이씨, 이석진(李碩珍) 안성이씨, 이세혁(李世赫) 경주이씨, 이서(李楈) 한산이씨, 임석현(林碩賢)·임기호(林基鎬) 평택임씨, 임성재(任聖宰) 풍천임씨, 왕예(王乂) 강릉왕씨, 장긍일(張兢一) 인동장씨, 전충효(全忠孝)·전인권(全仁權) 정선전씨, 정란(鄭鸞) 영일정씨, 정기평(鄭基平) 초계정씨, 정열도(丁說燾) 나주정씨, 조림(趙琳) 풍양조씨, 조윤풍(曺允豊)·조철(曺哲) 창령조씨, 지병렴(池炳濂) 충주지씨, 최필달(崔必達)·최문한(崔文漢)·최흔봉(崔欣奉) 강릉최씨, 최준옹(崔俊邕) 동주최씨, 한세영(韓世永)·한규석(韓奎錫) 청주한씨, 함신(咸信) 강릉함씨, 홍대기(洪大棋) 남양홍씨, 황정(黃珽)·황전(黃瑑)·황탁(黃琢) 평해황씨 등이며, 이외에도 진주하씨, 광주탁씨, 삭령최씨, 원주변씨, 장기배씨, 달성서씨, 이천서씨, 경주석씨, 평해손씨, 여산송씨, 제주양씨(梁氏), 남원양씨(梁氏), 청주양씨(楊氏), 함종어씨, 함양여씨, 성주여씨, 해주오씨, 동복오씨, 단양우씨, 기계유씨(兪氏), 해평윤씨, 덕수이씨, 공주이씨, 우계이씨, 청주이씨, 평창이씨, 원주원씨, 울진장씨, 안동장씨, 경주정씨, 한양조씨, 삼척진씨(陳氏), 연안차씨, 평강채씨, 경주최씨, 해주최씨 등의 성씨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임영(강릉·명주)지(臨瀛(江陵·溟洲)誌)』(임영지증보발간위원회, 1975)
• 『임영문화(臨瀛文化)』제2집(강릉문화원, 1978)
• 『임영문화(臨瀛文化)』제3집(강릉문화원, 1979)
• 이성무(李成茂), 『조선초기 양반연구』(일조각, 1993)
• 『강릉시사(江陵市史)』(강릉문화원, 1996)
• 이수건, 「토성연구(其一)」(『동양문화(東洋文化)』16집, 영남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1975)
• 정두희, 「조선초기 지리지의 편찬」(『역사학보(歷史學報)』69집, 역사학회, 1976)
• 임호민, 「조선후기 강릉지방 재지사족의 향촌활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4)
 

[출처]강릉향토문화


 
 

'족보이야기 > 옛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자도 親父 종중 구성원   (0) 2011.04.15
강릉의 성씨 두번째  (0) 2011.03.02
친족계촌법 설명입니다.  (0) 2011.01.20
육십갑자[六十甲子]  (0) 2011.01.07
명주군왕릉[김주원]  (0) 2011.01.06

 참고자료입니다.

'족보이야기 > 옛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릉의 성씨 두번째  (0) 2011.03.02
강릉주변의 성씨  (0) 2011.03.02
육십갑자[六十甲子]  (0) 2011.01.07
명주군왕릉[김주원]  (0) 2011.01.06
쇄운동 강릉 김씨 재실  (0) 2010.11.08

아마도,옛묘소의 비석을 이해할려면,최소한 육십갑자는 기본적으로 알아야한다.
예를들어,몇일전 KBS역사스폐셜에서 본, 최충헌시대를 본다면 정모 무진년이라는 어휘가 나오면,
대충 연대를 추측할수 있다.고려시대 중기로 볼수 있다.

우선 육신갑자의 어휘를 이해한다면 [민속] 천간(天干)의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와 지지(地支)의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를
순차로 배합하여 예순 가지로 늘어놓은 것.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신미, 임신, 계유, 갑술, 을해, 병자, 정축, 무인, 기묘, 경진, 신사, 임오,
계미, 갑신, 을유, 병술, 정해, 무자, 기축, 경인, 신묘, 임진, 계사, 갑오, 을미, 병신, 정유,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인, 계묘, 갑진, 을사, 병오, 정미, 무신, 기유, 경술, 신해, 임자, 계축, 갑인, 을묘, 병진, 정사, 무오, 기미, 경신,
신유, 임술, 계해이다.

위사항은 참고해야 비석의 연대를 파악할수 있다.

'족보이야기 > 옛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릉주변의 성씨  (0) 2011.03.02
친족계촌법 설명입니다.  (0) 2011.01.20
명주군왕릉[김주원]  (0) 2011.01.06
쇄운동 강릉 김씨 재실  (0) 2010.11.08
계자(系子)와 양자(養子)란?  (0) 2010.10.06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5대손이며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金周元)
김주원의 집안은 여러차례 상대등가 시중을 지낸바 있으며(신라하대 혜공왕과 선덕왕 때에 시중과 상대등의 반열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신라 중앙조정의 권력의 중심권에서 활약하였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위치는 적어도 태종무열왕계의 좌장의 위상을 시사하며, 그의 왕위승계의 좌절은 그간에 200여년을 이어온 무열왕계의 왕위계승이 단절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
그의 부친인 유정은 명주에 벼슬을 받아와서 이지방 토호의 딸 박연화와 결혼하여 주원을 낳았다.
선덕왕(宣德王)이 후계자 없이 죽자 그는 왕위계승자로 유력하였으나 조카인 상대등(上大等)인 김경신(金敬信) 이 왕위에 오르자
주원은 자진해서 그가 연고권을 가지고 있던 강릉으로 물러났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주원을 택하여 왕위에 오르려 하려했으나, 주원이 마침내린 큰 비로 강을 건너지 못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이에 신하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하여 원성왕이 즉위하게 되었다고 한다.
789년 원성왕은 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하고 명주,익령(翼嶺),양양,삼척(三陟),울진(蔚珍) ,근을어(斤乙於),평해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후 주원의 아들 헌창과 손자 법문이 중앙정계에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모두 실패하였다.

 

자손이 이에 따라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삼았다.

출처:(두타산의 역사-문헌자료편(김우철)

------------------------------------------------------

 

무열왕계 김주원 강릉 정착 정치·지방사적 의미 커

그는 신라 하대에 경주로부터 강릉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이곳 강릉에서 생활하였고 생을 마쳤다.

그의 후손들은 강릉에 세거하였다.

물론 족척 모두가 이곳에서 세거한 것은 아니다.

자손들 중에는 출사하여 중앙으로 옮겨 살았으며, 또한 향리에서 생활기반을 마련하고 가계를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말여초(신라말 고려초)에 이르러 본관이 제도화되는 시기에 그는 강릉김씨의 낙향시조로 추존되었다고 이해된다.
이렇듯 강릉지방에서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로서 부각되어 있다.
이러한 시조인식은 조선중기 이래로 종법과 족보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종회와 문중이 결성되면서 보편적 사유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종법인식의 추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른바 `명주군왕릉'이 주목된다.
즉 종회와 문중이 번성하면서 시조숭배의식이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563년 강릉부사 김첨경이 후손으로서 묘소를 수축하였다는 기록에서 이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1942년에 건립되는 `명주군왕고도기적비'와 1960년에 건립되는 `신도비'는 이러한 시조숭배의식과 그 기반으로서 문중과 종회가 번성했던 지방사회의 사회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더욱이 그간에 연례적으로 지내온 `능제'에서 지방사회의 수장으로서 수령의 역할은 적어도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양상으로서 주목된다.

즉 강릉에서 세거해 온 재지세력과 왕권을 대행하는 수령의 역학관계를 담보하는 기제로서 능제의 사회적 의미가 주목된다고 하겠다.
또 그 치제의례와 제수마련을 위한 절목도 이러한 사회적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이러한 지방사적 의미와 맞물려 있을 것으로 보이는 김주원의 행적에 대한 인식은 강릉지방에서 매우 단선적이다.
즉, 천재지변에 따라 왕권을 선양하였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인식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며, 여기에 종회와 문중적 성향이 담지되면서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은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될 필요가 있으며, 이로서 그 인물됨과 아울러 그것과 맞물린 지방사회의 변화상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단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적어도 그는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강릉으로 퇴거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로 정치사적 의미를 갖거니와 아울러 이로부터 당시 강릉지방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단초가 마련될 것이기에 지방사적 시각에서 매우 주목될 수 있다.
그리고 김주원의 퇴거와 그 직계후손들의 활약상 즉 시중에 올랐던 김종기, 상대등에 올랐던 김정여, 김양 등의 활약상은 지방사적 시각에서 그 내재적 변화상과 맞물린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강릉지방의 내재적 사회상은 강원도 일원의 여타 세거세력과 유대성을 주목함할 때 훨씬 역동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주목할 때, 적어도 김주원에 대한 이해는 종회와 문중적 인식과 아울러 지방사적을 인식으로 분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동일상에 대한 양면성일 뿐 별개일 것 일 수 없다.
다만 문중적 인식의 한계를 벗어날 필요는 제기될 수 있으며, 또한 지방사회의 변화라는 시각에서 그 인물을 파악하려는 시각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로부터 김주원의 진솔한 삶과 그 역사적 의미가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강원일보 이규대(李揆大) 강릉대 사학과 교수


 

'족보이야기 > 옛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족계촌법 설명입니다.  (0) 2011.01.20
육십갑자[六十甲子]  (0) 2011.01.07
쇄운동 강릉 김씨 재실  (0) 2010.11.08
계자(系子)와 양자(養子)란?  (0) 2010.10.06
통정대부란..  (0) 2010.09.28

두타산성 보존가치 높은 건조물
문화재청 조사 결과 … 동해시내 고택 등 14곳도 보존대책 시급 
두타산성을 비롯한 동해시내 성곽과 재실 누각 정자 서원 사찰 고택 등 14개소가 문화재적 보존 가치가 높은 건조물로 평가됐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8월부터 도와 경기도 제주도 등지를 대상으로 벌여온 비지정 건조물 문화재 조사 결과를 22일 이 같이 공개했다.
도내 건조물 조사에는 김도경 박경립 유재춘 임상규 등 강원대 교수와 오영식 강원관광대 교수, 최영철 경동대 교수, 정재국 관동대 교수, 한재수 한라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이들 조사진에 따르면 삼화동 두타산의 두타산성은 내성 흔적이 완전하게 남아있는 등 문화재적 가치가 커 지방문화재로 조기 지정, 완벽 보존되야 할 것으로 비춰졌다.
이와 함께 동해 지역의 건조물 중 재실 6개소와 정자 누각 등 4개소 서원 1개소 사찰 1개소 고택 1개소 등도 전통 건조물로서의 보존 가치가 큰 것으로 분석됐다.
이처럼 보존 대책이 세워져야 할 건조물은 쇄운동 강릉 김씨 재실과 강릉 최씨 재실 삼척 김씨 재실 구미동 만경대 쇄운동 용산서원 용정동 감추사 등이다.
출처:강원일보 장성일기자

이글을 올린것 난사회자료라서 올리기보다,좀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향토사관련자료를 모아볼려고 합니다.

다들 잘지내시죠?

직장인이라 생각을정리해서 글을 올리기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족보이야기 > 옛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십갑자[六十甲子]  (0) 2011.01.07
명주군왕릉[김주원]  (0) 2011.01.06
계자(系子)와 양자(養子)란?  (0) 2010.10.06
통정대부란..  (0) 2010.09.28
한식 [寒食]의 유래  (0) 2010.04.1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