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라 평생을 살아 온 ‘진짜 강릉사람’이 강릉 거리에 켜켜이 쌓인 옛 이야기를 풀어내는 역사문화 해설서 2권을 냈다.
박삼균(69) 영동인문학연구소 대표가 펴낸 ‘강릉 고샅길 사용 설명서’다. 
저자는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퇴직 후 골목투어 프로그램을 만들고 가이드 역할을 해았다. 
그가 강릉 거리 곳곳에 배어 있는 이야기들을 씨줄 날줄을 엮듯이 기록하고 해설한 강릉 이해 지침서다. 
강릉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1부-원도심지역 및 월화거리’ 편을 낸 데 이어 올해 ‘2부 구정면 성산면 편’을 내놓았다.
1부에서는 읍성과 관아 이야기, 역사 속 월화정 이야기 등 강릉 도심 명소와 문화유산에 대한 해설부터 용강동과 서부시장, 동부시장과 아파트 이야기 등 근·현대 강릉 거리의 변천 과정에 이르기까지 강릉 시가지가 품고 있는 모든 이야기 보따리가 낱낱이 풀어 헤쳐진다.

올해 펴낸 2부에서는 구정면과 성산면 각 마을의 역사와 명소, 생성 과정, 생활 문화가 마치 박물관 해설서를 대하듯 시선을 사로잡는다.

구정면 어단리 편에서 필자는 “어단(於丹)이라고 쓰지만, 그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의 표기이고, 그전에는 어단(御壇)이라고 썼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야기와 기록에 의하면, 고려·조선 교체 초기에 강릉의 문사들이 고려 우왕의 위패를 모신 어단을 쌓아 놓고 충절을 지키며 조선 조정에서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겠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그후 조선 왕조가 자리잡으면서 어단은 해체되고, 다만 그들의 선비정신을 가상히 여겨 추방하자 그들이 언별리 깊은 골로 들어가 단경(壇京)이라고 부르며 충의를 지켰다는 얘기가 잘 알려져 있다”는 풀이가 더해진다.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저자와 동행, 숨어 있던 얘기를 들으며 강릉 여행의 흥취를 배가할 수 있다. 
저자는 “내가 겪고 경험한 과거사도 조만간 역사 속에서 매몰될 것이 분명하니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억의 파편이라도 남겨두자는 결심”이라며 “앞으로 강릉시 해변지역을 비롯 주문진 등 나머지 읍·면 지역의 고샅길 이야기도 완성해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 황선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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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현대화 권고안 발표(종합)"
치킨·피자 제사상에? "고인 최애음식도 가능"·"부모 제사 합쳐서 지내도 무방"
"제사 오후 6시부터 지낼 수 있어"…'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 전통제례 보존 및 현대화 권고안' 공개
전통제례 보존 및 현대화 권고안 기제사상
 "제사로 인해 불화가 생긴다면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제사음식 준비도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준비해야 좋다.

부모님의 기일이 다르더라도 합해서 지내도 좋다.

지방을 쓰기 어렵다면 사진을 사용하면 된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위원장 최영갑)는 2일 오전 10시 국회의사당 국회소통관에서 이같은 '전통제례 보존 및 현대화 권고안'을 발표했다.

이번 발표는 일반 가정이 각자의 형편에 맞게 제사를 지내던 방식을 대부분 수용한 내용이다.
권고안의 진설을 살펴보면 기제(조상의 사망일에 지내는 제사)의 경우 밥과 국, 술과 과일 3종 등을 포함, 간소화했다.

묘제(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는 술과 떡, 간장, 포, 적, 과일이 진설되고, 과일의 경우 한 접시에 여러 과일을 같이 올렸다. 또한 가정의 문화, 지역의 특성, 제사의 형식, 형편에 따라 달리 지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영갑 위원장은 "제사의 핵심은 사랑과 공경으로 정성을 다함에 있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는 가족이 모여 안부를 묻고 화합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며 "제사상은 간단한 반상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더 올리거나 생일상처럼 차려도 좋다"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제사 시간은 오후 6시부터 지낼 수 있으며 제사음식은 고인이 평상시에 좋아하는 음식을 올려도 무방하다"며 "제사의 주재자도 성별을 따지지 않고 가장 가까운 연장자가 주재할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이번 전통제례 보존 및 현대화 권고안은 최근 설문조사 결과 등을 반영한 결과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6명이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앞으로 제사를 지속할 의향이 있는 사람은 4명 남짓인 것으로 조사됐다.
'제례 문화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5.9%가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반면에 제사를 지낼 계획이 있다는 답변은 44.1%로 나타났다.
이같은 결과는 최근 조사기관 리서치뷰에 의뢰,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결과에서 드러났다.
이번 조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는 이유로는

△간소화하거나 가족 모임 같은 형태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 41.2%

△시대의 변화로 더는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가 27.8%

△종교적 이유나 신념이 13.7%순이었다.

 

제사를 계속하려는 이들은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 42.4%

△가족들과의 교류를 위해서 23.4%

△부모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 15.9%

△전통 유지 10.0% 등의 이유를 꼽았다.

제사를 지낼 때 가장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제수 음식의 간소화 25.0% 

△형식의 간소화 19.9% 

△남녀 공동 참여17.7%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제사 17.2% 

△제사 시간 변경 5.3% 등이 뒤를 이었다.

출처:"(서울=뉴스1) 2023. 11. 2.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인간이 무덤을 만든 역사는 약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사피엔스의 역사와 함께하는 셈이다.

무덤을 썼다는 것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내세가 있다고 믿는 셈이니 종교와 제사의 기원도 된다.

멀쩡한 무덤을 다시 파헤치는 파묘의 풍습도 적어도 약 1만2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거대한 석조 기념물로 유명하여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튀르키예 괴베클리에서는 제단에 걸었던 해골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그 위에는 화려한 색칠을 하기도 했는데, 제사에서 영정 사진을 올려놓듯이 해서 조상을 기억했다는 뜻이다.

괴베클리 이후에 발달한 차탈회위크의 신석기시대 마을 사람들은 집 안 마루 밑에 무덤을 만들던 풍습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 이전에 만들었던 무덤을 건드리면 급하게 덮어버리거나 따로 꺼내서 제단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렇게 파묘를 하는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고고학과 인류학에서는 전문 용어로 ‘이차장(second burial)’이라고 한다.

한번 묻은 무덤을 다시 파헤쳐서 인골을 수습하여 화장하고 골호(뼈를 담는 항아리)에 담아서 따로 묻는 풍습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그러한 증거는 고인돌과 독무덤(옹관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의 경우 그 밑에 만든 무덤의 크기로 이차장의 흔적을 짐작한다.

무덤의 길이가 30cm 정도도 안 되는 작은 것들이 종종 발견된다.

이는 어딘가에서 무덤을 만들었다가 후에 파묘하고 다시 꺼내어 그 뼈를 모아서 넣어둔 것이다.

또한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한 독무덤도 같은 원리이다. 이렇듯 파묘라는 풍습은 사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오랜 전통이다.

아스테카문명에서는 무덤에서 꺼낸 해골을 보석과 황금으로 화려하게 치장해 숭배하기도 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성인 유골 파내 숭배한 중세 서양

인골 자체를 숭배하는 풍습은 중세 서양이나 중남미로도 이어졌다. 

특히 해골 숭배 사상이 특별히 발달한 아스테카문명에서는 해골에 화려한 보석과 황금을 붙여서 아름답기까지 한 예술품을 만들었다. 서양 중세 시대는 더욱 극적이다.

서기 9세기에 기독교를 보급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은 우상을 믿던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서 성인의 유골에 믿음의 서약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각 교회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성인의 유골’이라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훔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성인이 갑자기 늘어날 리 없으니 나중에는 공동묘지에서 엉뚱한 유골을 파서 성인으로 둔갑시켰다. 

지금 같은 유전자 검사가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해골의 숭배로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진 경우가 있으니, 바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는 828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코 성인(마가복음의 저자)의 유골을 훔쳐온 것을 기점으로 크게 흥성하여, 수많은 교회 건물과 광장이 지어졌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산마르코 광장도 바로 마르코 성인의 유골을 기념하여 지어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성인의 유골이 세계적인 도시를 탄생시킨 격이다.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주로 해골에 집착하는 반면에 한국은 땅에 집착한다.

조상의 유해 자체는 터부시하고 그 대신에 좋은 곳에 무덤을 만들어서 시신이 곱게 자연으로 돌아가면 후손들이 발복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골보다는 그들의 유택(幽宅)을 중시하는 풍수 사상이 발달하는 배경에는 한국만의 독특한 지리 지형의 조건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과 러시아 극동 지역은 산성이 매우 강한 토양인지라 매장을 하면 인골은 빠르게 풍화한다.

삼국시대 고분의 경우도 수백 개를 파도 제대로 된 인골은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풍수 사상은 한국이라는 풍토에서 독특하게 발달해 온 역사를 가진 셈이다.


다른 사람 묫자리 가로채기까지
무덤과 인골에 대한 믿음은 심지어 다른 사람의 묫자리를 가로채거나 다른 무덤을 함께 넣는 풍습으로도 이어진다.

유명인이나 귀족의 무덤을 재단장할 때 슬쩍 자기의 조상 인골로 바꿔치기하거나 자기 가족의 사주를 넣어서 자손이 흥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첩장’이라고도 불리는 이런 풍습도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어서 고고학에서는 ‘추가장’ 또는 ‘배장’이라는 전문 용어가 있다.

예컨대, 약 2500년 전 알타이 초원에서 살던 족장들이 남긴 쿠르간(대형 고분)의 근처에서는 예외 없이 작은 무덤들이 발견된다.

스키타이문화가 사라지고 1000년 가까이가 지난 직후 소규모로 쪼개져서 살던 튀르크(돌궐) 계통의 주민들이 만든 것이다.

자기들이 거대한 무덤을 만들 능력이 없으니 큰 고분의 영험한 능력에 기대어서 자신들의 무덤을 끼워 넣은 것이다.

면에 높은 권력을 지닌 왕들은 다른 사람의 무덤을 빼앗기도 한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죽은 이집트의 투탕카멘 왕이 그러하다.

왕권이 약했던 투탕카멘은 자기의 묫자리도 제대로 못 만들고 죽었다.

그 바람에 다른 귀족이 잡아놓고 준비했던 무덤에 대신 들어가기도 했다.
‘배장’이라는 풍습도 있는데, 이것은 왕이나 주군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그 부관들을 주변에 함께 묻는 것을 말한다.

흉노의 왕인 선우의 대형 무덤에는 주변에 수십 개의 배장묘가 함께 발견된다.

죽어서도 주군을 지키라는 바람인 것이다.

파묘, 이장… 죽음 체화하는 과정
무덤에서 꺼내 온 유물에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한 전통은 5000년 전 홍산 문화의 옥기에서도 볼 수 있다.

홍산 문화의 옥기는 5000년 전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옥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홍산 문화의 옥기는 그보다 2500년 후인 중국 춘추시대의 산시성 량다이춘(梁带村)이라는 곳에서 발굴된 춘추시대 ‘예국’이라는 나라의 귀족 부인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어쩌다 수천 년이 지난 후에 직선거리로 1000km나 떨어진 곳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녀의 몸 주변에는 홍산 문화는 물론이고 양쯔강 유역과 상나라에서 가져온 수많은 옥기도 함께 묻혀 있었다.

아마 이 부인은 점사를 치던 사람으로 옛 무덤에서 발견된 옥기에 신령한 기운이 있다고 생각해서 모아서 치장한 것 같다. 당시에도 옛 무덤을 골라서 도굴하여 옥기를 꺼내는 풍습이 있었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무덤을 만들게 되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죽음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죽음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면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이 삶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담아 무덤을 만들고, 먼저 간 이들을 기억하는 축제인 제사를 지내며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바로 인간의 죽음을 매장과 제사라는 과정을 통해 받아들이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체화시키는 과정이 무덤이다.

우리가 때만 되면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고 또 파묘를 해서 이장을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무덤의 발굴이 고대인들의 삶에 접근하는 1차 자료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러시아 화가 플라빈스키는 중앙아시아의 버려진 이슬람 묘지를 거닐면서 “공동묘지의 언덕 위에서 영생을 갈구하던 영혼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무덤을 만들고 다시 파묘를 하는 그 죽음을 대하는 과정의 본질은 결국 삶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출처: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몇일전 신문을 읽다 재미있는 글이 있어, 스크랩해본다.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신분제가 공고히 유지되려면 귀족의 수는 늘 적게 유지돼야 한다. 
노동하지 않는 귀족이, 생산에 종사하는 평민보다 수가 많아지면 체제 유지가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분제는 사라졌다. 
조선 500년간 유지됐던 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공식 폐지됐다. 
그럼에도 국민 모두는 양반이 되고 싶었고, 이 때문에 족보를 사고 파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조선 초 인구의 약 7%였던 양반이 조선 후기엔 약 70%까지 늘어났다. 
덕분에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도 신분제 개념이 지워지게 됐다.
역사를 답습해 현대 한국에서도 기득권으로 분류되는 직업 또는 직능이 대두될 때마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대응으로 ‘증원’이 늘 거론된다. 

기득권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그 희소성이 퇴색된다는 것이 학습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새로운 ‘지배계층’의 출현을 막는 것이라기 보다는, 문턱을 낮춰 더 많은 시민이 의료 서비스, 법률 서비스 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탄탄히 깔고 있을 때 대중적 지지를 받는다.
2024년은 의사의 해다. 
정부는 지난 20일 2000명에서 단 한 명도 줄이지 않고 의대 증원에 쐐기를 박았다. 
한 달을 넘게 끌어온 의-정 갈등이 9부능선을 넘어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날 교육부의 공문을 받은 각 대학은 늘어난 정원을 반영해 수시모집과 정시모집 비율 및 전형방법을 결정한다.
게다가 증원이 서울 지역에는 한 명도 없고, 전부 수도권과 지방국립대에만 배정됐다. 
파업을 주도했던 수도권 빅5 전공의와 사직을 결의한 서울권 의대 교수들의 집단행동 동력이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는 기존 의료계가 겪어보지 않은 유형의 충격이다. 
그동안 의협 지도부뿐만 아니라 수련병원의 전공의들을 비롯해 의대생들도 집단 휴학으로 정부에 맞설 수 있는 배경에 대해 많은 의료계 인사들은 “(의사들이)한번도 져본 적 없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의대 증원을 찬성해온 국민들 다수는 2000명을 꽉 채운 이번 확대 정원 발표가 ‘의사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패하는 첫 선례’로 이어질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환자들을 내팽개치고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들은 비판 여론에 아랑곳없이 ‘병원 그만두고 쿠팡 알바 하는 중’이라고 우스개소리를 하거나, ‘판·검사는 수학 포기한 바보들’, ‘제가 있고 환자가 있다’는 등의 비아냥대는 언사를 이어갔다. 
병원에 남은 전공의들과 수업을 계속 받는 의대생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추후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도 일반 시민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박명하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조직강화위원장은 “보조 수사관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껌을 뱉어라’고 하는 등 부당하게 압박하고 강압 수사를 했다”며 수사관 기피 신청서를 냈다.
의사, 의대생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이 광경에 ‘천룡인(모든 법 위에 군림하는 귀족) 납셨다’며 비판했다. 
의사들이 자기 직업 외의 사람들을 돌아서게 만든 바람에 정부의 속전속결 의대 증원은 여론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금의 의대 정원 증원 사태가 있기 전, 변호사·판사·검사가 속한 법조계가 이 단계를 먼저 거쳤다. 
2008년에 도입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은 25개 대학에 설치돼 다음해 2000명의 입학생을 받았다. 
2012년 첫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법무부는 1회 변호사시험 합격률을 ‘입학정원 2000명 대비 75%’로 잡았다. 
1500명의 로스쿨 변호사가 신규 유입된다고 알려지자 201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41기 연수생 약 1000명에 더해 법률시장이 ‘공급과잉’ 상태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법무부가 당시 ‘로스쿨 학생 중에서 원장이 추천하는 우수생을 우선적으로 검사로 임용하겠다’고 방침을 내놓자 사법연수생들은 입소식 참석 거부와 성명서 발표라는 사상 초유의 ‘집단행동’에 나섰다. 

연수원 출신 선배 변호사들도 힘을 실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일컬어 ‘로변’이라며 연수원 출신 변호사와 급을 나누는 행태가 지속됐다. 
또, 변호사 숫자를 늘려봤자 서울 쏠림만 심화될 것이라는 비관도 제기됐다.
하지만 1기 졸업생 배출 이후 11년이 흐른 2023년 기준, 지방 변호사 수도 전체 변호사 증가에 비례해 늘어났다. 
현재 의대 증원 국면에서도 비수도권 의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결국 다시 수도권으로 모여, 의료 서비스의 수도권 쏠림 현상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란 비슷한 지적이 나오고 있는 바, 법조계 선례가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변호사가 상대적으로 흔해지면서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법률전문가인 변호사들을 고용할 수 있게 됐다. 
경찰을 비롯해 공무원 조직에 변호사들이 특채로 임용되고 있고, 일반 사기업은 사내 변호사를 뽑아 법무팀을 구성한다. 
언론사에도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기자들이 유입됐다.
또, 변호사들이 과거 사법시험만 존재하던 때처럼 모두 엄청난 연봉을 벌어들이진 못하지만 여전히 일반 직장인에 비하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변호사시험 1회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일반 회사에 다니다 변호사가 되고 10년 가까이 일을 하다보니 왜 그렇게 전문직 진입장벽을 높이려고 했는 지 알겠다”며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현재도 변호사 벌이는 일반 직장인에 비하면 훨씬 높다. 
의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의사도 그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수입이 많이 줄어들 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오히려 정부가 기피과(필수과)에 혜택을 주겠다고 공언한 만큼 해당 과 의사들은 더 조건이 좋아질 수 있다.
정부는 21일 오후 처우 개선 토론회를 열어 전공의 달래기에도 나선다. 
이미 의대 증원 계획 백지화가 물 건너간 가운데 정부는 연속 근무 시간 단축 등 환경 개선에 집중해 전공의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달부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들에게 매달 100만원씩 수련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분만, 응급 등 다른 필수의료 과목 전공의들까지 지원할 수 있도록 대상 범위를 조속히 확대할 계획이다.
아울러 올해 상반기에는 전공의 연속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80시간인 일주일 최대 근무시간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한다. 
하반기에는 수련환경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도 하고, 수련환경평가위원회에 전공의의 참여를 늘린다. 토론회에는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 외에 임인석 중앙대 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임 교수가 복지부 장관 직속 기구인 전공의 수련환경평가위원회의 기관평가위원장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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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_ 납치도공 신화 바로보기 ①

    지난 7월29일 자신의 가마 작업실을 방문한 답사팀에 작업 중인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15대손 심수관씨. 노형석 기자
    16세기 말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자기 장인들은 역경을 딛고 현지 백자 생산을 이끌어낸 근세기 한·일 문화교류 공로자들로 평가된다.
  • 한일수교 50주년을 앞두고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 특히 1598년 전라도 남원에서 규슈로 끌려갔다는 설이 전해지는 도공 심당길 15대손으로, 규슈 남단 가고시마에서 특산 도자기 ‘사쓰마야키’ 생산가마를 운영하며 가업을 잇고있는 장인 심수관(64·본명 오사코 가즈데루)씨의 행보가 주목된다.
  • 그는 2019년 주가고시마한국명예총영사로 임명됐고 명예남원시민 인증도 받는등 문화외교의 가교를 자임하며 활동중이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대해 학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 심수관 가문을 비롯한 납치 도공과 후손들의 역사적 뿌리, 활동 내력, 작품의 의미 등과 관련해 객관적 사실들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있을뿐 아니라 상당수 내용들이 과장되거나 가공됐다는 의문까지 제기되기 때문이다
  • . ‘한겨레’는 도자사학계의 권위자인 방병선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팀과 지난 7~8월 일본 규슈 일대의 조선 도공 관련 유적과 유물들을 답사했다.
  • 이를 토대로 납치 도공 신화에 대한 논란과 진실을 다룬 칼럼을 2회에 걸쳐 싣는다..

    가고시마현 미야마에 있는 조선도공 심당길의 15대손 심수관씨의 가마와 전시관. 지난 7월29일 답사단이 방문했을 때 찍었다.
    “심수관 선생 선조들은 조선에서 옹기를 만들던 장인이었을까요? 백자를 만들었던 장인이었을까요?”

    “일본에 온 저의 선조 1대 장인(심당길)은 도자기 굽던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자기나 옹기 어느 쪽도 안 만들었던 것 같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 나왔다.
  • 지난 7월29일 일본 규슈 가고시마현 미야마시에 있는 도예가 심수관씨의 가마 작업장 회의실에서 열린 심씨와의 대담 자리는 방병선 교수 답사팀원들에게 당혹스러운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 그렇다면 심씨의 선조 심당길은 도공으로 끌려온 게 아니라는 말인가? 심씨는 말을 이었다.


    “옹기나 도자기를 만든 사람은 성도 없는 천민이었죠. 선조 심당길은 성과 이름이 있었고 찬이라는 어릴 적 이름도 있었다고 해요. 400년 전 조선에서는 성을 갖는 사람이 일부였을 텐데요.
  • 당시 가고시마를 지배하던 시마즈 가문의 군이 부산에서 잡아서 데려온 포로들을 긴카이, 즉 김해(金海)라고 불렀어요. 사람 이름 대신 부산 인근 김해 지명으로 불렀는데 나중에 그게 그들 성이 됐어요.
  • 우리 선조는 초대 도공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난 생각해요. 야키모노(도자기)는 여기 와서 하게 된 것 같아요. 도공이 어떻게 어렸을 때 이름을 갖고 있겠어요.”

    그의 발언은 일본 내 조선 납치 도공의 본적과 현지 도착 경위, 작업 활동 성격에 대해 양국의 학계와 언론계에서 좀 더 면밀하고 심층적인 사실 찾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 방병선 교수는 “수년 전만 해도 심씨는 자신의 선조들 뿌리와 족보 등에 대해 물으면 모르니 한국에서 알아봐달라는 대답을 꺼내곤 했다.
  • 그의 발언이 달라졌다”고 했다.

    15대 후손 심수관씨는 현재 일본에서 독특한 뚫음무늬인 투각 기법과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정교한 인물과 동물 등의 조형물 도자상으로 건재를 과시하며 가고시마를 대표하는 도자기 업체를 운영 중이다.
  • 지난 7월 대담자리에서 선조인 조선 도공의 혼을 이어받아 생명이 약동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모국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 지난해와 올해 본관이라고 밝힌 경북 청송과 선조 심당길이 피납됐다는 전북 남원, 조상묘가 있다는 경기 김포 등지를 방문해 기념관 건립 등의 선양 사업을 논의했다.
  • 국립중앙박물관도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그를 초청해 한일수교50주년 특별전 추진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 2일엔 국악인들이 가고시마현 공연장에서 심씨를 초청한 가운데 심수관 찬가를 열창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최근 그의 행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조상의 뿌리를 찾았다고 알려진 대목이다.
  •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장에 초대받아 갔다가 청송 심씨 종친들을 만나 김포에 선조 심당길의 부친 심우인과 조부 심수의 묘소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해 7월 예복을 차려입고 무덤 앞에 가서 제사를 지내며 후손임을 고한 것이다.

    피납도공의 후예임을 역설해온 심씨가 가문의 본관이 청송이라고 밝힌 것과 선조들이 남원 등 조선에서 활동한 행적에 대해 언급해온 내용들은 가문의 구전과 도공 심당길이 납치된 조선의 본래 거처를 남원으로 지칭한 유명작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랴’ 외에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 임진왜란 당시 가고시마의 지배세력인 시마즈번의 군사들이 전라도 순천과 남원 등지로 출병해 80여명의 도공들을 연행했다는 기록이 있어 심당길이 끌려간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인다.
  • 그러나 본관이 청송이고, 남원에서 선조들이 활동했으며, 김포에 조상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선시대나 일본 에도시대의 객관적인 세부 기록과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 후반 유럽에 수출돼 선풍을 일으킨 12대 장인 심수관의 걸작 대화병. 전면에 금박채색을 하고 일본의 전형적인 자연풍경과 전통복식의 인물상을 화병 표면에 여백이 거의 없게 빽빽하게 채워넣은 것이 특징이다. 가고시마 역사자료관(레이메이칸) 소장품.
    단적인 사례가 족보 문제다.
  • 청송 심씨 문중은 수년 간격으로 족보를 재간행하고 있는데, 2000년에 펴낸 ‘경진보’ 족보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심당길이 2017년 나온 족보인 ‘정유보’에 의금부도사 등을 지낸 심우인(1549~1611)의 아들 찬의 초창기 이름으로 돌연 등장한다.
  • 정유보에서는 심찬의 초기 자(이름)가 당길이라면서, 일본으로 피랍된 정황을 세세히 기술했다.
  • 무관인 건신도위에 재직할 당시 왜란이 일어나 일본에 납치됐고 가고시마에 정착해 사스마야키를 창설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더해 15대손 심수관까지 이어지는 심당길 후손들의 명단과 주요 활동이력까지 모두 족보의 계보에 편입시켰다.
  • 앞서 지난 2013년 15대손 심씨가 집필한 ‘심수관가 역대 수장고’ 설명서를 보면 원조인 1대 심당길이 청송 심가 12대손 심찬으로 왜군의 2차 출병(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싸우다 끌려갔고, 포로가 된 것을 수치로 여겨 평생 아명인 당길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고 기술해놓았다. ‘정유보’는 사실상 이 내용을 토대로 족보 내용을 대대적으로 고친 것에 가깝다. 심씨가 지난 7월 방 교수팀과 한 대담을 통해 자신의 가문이 원래 도공 집안이 아니라고 말한 데는 그의 집필본 내용에 따라 6년 전 바뀐 청송 심씨의 족보가 근거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심수관 도자 가문의 명성을 전세계에 알리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 브랜드로 성장시킨 12대 장인 심수관(1835~1906). 그의 업적이 단연 독보적이어서 이후 13~15대로 이어지는 후대 가문의 장인들은 모두 그의 이름만을 쓰게 되었다.

    심수관 도자 가문의 명성을 전세계에 알리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 브랜드로 성장시킨 12대 장인 심수관(1835~1906). 그의 업적이 단연 독보적이어서 이후 13~15대로 이어지는 후대 가문의 장인들은 모두 그의 이름만을 쓰게 되


노형석입력 2023. 12. 11. 08:05수정 2023. 12. 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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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독서실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뜻은 이렇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이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규모는 지금 도서관 전체 부지 면적 1만1000여 평 절반인 5672평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는 애매한 말로 설명하느니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박제순에 대해서 할 말이 우물물만큼 깊고 차가우니까. 박제순 돌덩이만 아니다. 정독도서관에는 눈여겨볼 만한 표석과 역사적 흔적이 숱하다.

지금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책을 접하려는 시민으로 붐비는데, 100년 전까지 이 도서관 터에는 숨 막히는 역사적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박제순과 식민 시대까지 도서관 터 땅 팔자로 훑어보는 격변 근대사.


정독도서관 본관 뒤편에 있는 박제순 우물돌.

안내문은 ‘박제순’의 ‘박’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하다.
어느 여자의 청원서와 김옥균
‘저는 예전에 한성 북부 홍현(紅峴)에 거주하다가 갑신년(1884)에 국사범으로 바다 바깥 귀신이 된 전 참판 김옥균의 처이온데, 온 가족은 어육(魚肉)의 화를 당하고 재산은 몽땅 적몰당하는 변을 만났나이다.’ 1909년 1월 29일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아내 유씨가 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청원서를 올린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제 망부가 죄를 탕척받고 관작을 회복했으나 살 곳이 전무하오니 북부 홍현에 있는 관립고등학교가 제 집터이온즉 미망인 심정을 헤아리시어 처분하기를 천만절축하나이다.’(각사등록 근대편, 청원서2, ‘김옥균 처의 청원서’, 1909년 1월 29일)
1884년 12월 4일(이하 양력)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48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破家瀦澤),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부관참시이자 사후 능지처참을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에 갑오개혁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1894년 음12월 27일 ‘고종실록’)
김옥균 아내 유씨는 바로 이 칙령에 근거해 나라가 가져간 재산을 돌려달라고 대한제국 총리대신에게 청원서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적시한 옛 집터가 홍현(紅峴)이었고, 1909년 당시 그 ‘붉은 고개’에 관립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그 관립고등학교가 훗날 경기고등학교로 이어졌고, 경기고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학교 터는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정독도서관 잔디밭에는 김옥균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김옥균은 고개 아래 가회동 박규수 집에서 동료들과 모여 개화 이론을 배웠다.

박규수는 북학파 태두 연암 박지원 손자다.

함께 공부했던 홍영식, 서재필이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다.

정변 실패 후 홍영식은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아버지인 전 영의정 홍순목은 집에서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다. 피칠갑이 된 채 방치됐던 집은 훗날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인수해 병원을 차렸다.

알렌은 정변 때 죽을 뻔한 왕비 민씨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준 의사였다.

서재필은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가족은 누구는 자살했고 누구는 살해됐고 누구는 노비가 됐다가 죽었다.
정독도서관 동쪽 잔디밭에 서 있는 김옥균 집터 표석(왼쪽). 흙이 붉어서 ‘홍현(紅峴)’이라 불렸던 도서관 언덕에 김옥균이 살았다.

1884년 함께 홍현에 살던 서재필, 고개 아래 가회동에 살던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정변 주인공들은 갑신정변 실패와 함께 죽거나 망명했다.

이후 김옥균 집터는 폐허가 됐고 대한제국 관립학교로 변했다.

1918년 북쪽 언덕에 있던 을사오적 박제순 집터 또한 학교 부지로 편입됐다.

지금은 경기고를 거쳐 도서관이 됐다. 

오른쪽 사진은 그 박제순 집터 쪽에서 본 도서관 전경. 사진 왼쪽이 김옥균 집터 방향이다.
땅이 잊어버린 혁명가 서재필
서재필은 김옥균 옆집에 살았다. 그런데 서재필 흔적은 도서관 구내에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재혼 후 낳은 딸 뮤리얼 제이슨은 1950년대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1956년 4월 12일 대법원은 경기고 부지 가운데 3443평을 서재필 소유로 반환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경기90년사’(경기고등학교 동창회, 1990)에 따르면 ‘정부는 예산 문제로 (반환이나) 대금 지불을 미뤘고’ 결국 경기고는 1972년 강남 이전을 결정했다.(‘경기90년사’, p55)


후배 서재필과 선배 김옥균은 그렇게 북촌 좁은 골짜기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살면서 근대화와 대(對)중국 독립 명분을 쌓았다. 그러니 정독도서관 잔디밭에 서재필 표석 또한 있어야 김옥균 표석이 완성된다.


1900년 대한제국 최초 관립중학교가 정독도서관 터에 있었음을 알리는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뒤편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한 경기고등학교 표석이다./박종인 기자
관립학교의 설립과 박제순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갖춘 실업인 양성을 목표로 관립 ‘중학교 관제’ 칙령을 발표했다.(1899년 4월 4일 ‘고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10월 현 정독도서관 자리에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1880년대 이미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사립학교들이 설립됐지만 제국 학교는 한참 늦었고, 교과 내용 또한 1900년 3월 ‘중학교규칙’에 규정된 전문 과목은 빠져 있었다.(신편한국사 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교육제도’, 국사편찬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졌다.

 관립 한성고등학교로 운영되던 학교는 1911년 총독부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초대 교장은 홋카이도 교육자 오카모토 스케(岡元輔)였다.

학생이 늘어나면서 학교 부지 확장이 이슈가 된 1918년 2월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학교를 방문했다. 

방문 2년 전 박제순이 죽었다. 총독부가 만든 관제 성균관 ‘경학원’ 대제학으로 있다가 죽었다. 

경성 용산역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1000여 인파가 몰렸다. 자작 작위는 아들 박부양이 계승했다. 

손자 박승유는 이에 반발해 일본군에 자원했다가 탈출해 광복군 활동을 하며 해방을 맞았다.(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승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박제순 집은 지금으로 치면 정독도서관 잔디밭 가운데에서 본관 뒤편 언덕 너머까지였다.

그런데 박제순은 한일병합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은 귀족이 아닌가.

그래서 교장 오카모토도 그 생전에는 “학교가 좁아서…토지를…좀…” 따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하세가와가 학교를 찾았을 때 집은 폐허였다.

그때 총독부 학무국장 세키야 데이사부로(關屋貞三郞)가 “저 집터를 쓰면 된다”고 총독에게 제안했다.

그리 되었다. 이후 학생들이 고지대를 깎아 저지대를 메우는 작업을 했고, 1919년 현재 규모 부지가 완성됐다.(이상 ‘경기90년사’, p120)
그 흔적이 앞에서 말한 우물돌 돌덩이다.

1990년에 발간한 ‘경기90년사’에는 이 돌을 1970년에 발견했고 정체는 박제순 집 우물돌이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명의로 세워놓은 ‘역사적 의미’ 운운하는 안내판은 대단히 비겁하다. 있는 그대로 안내하면 되는 것이다.

김옥균 시호 받던 날
나라 잘 만들겠다고 일어섰다가 그 나라가 살해한 혁명가 김옥균은 집을 빼앗기고 집안은 박살났다. 

아내 유씨 청원은 거부됐다. 대신 이듬해인 1910년 6월 29일 통감부 꼭두각시 융희제 순종은 아관파천(1896) 직후 노변 척살당하고 관직삭탈된 김홍집, 어윤중과 함께 김옥균을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라 명했다.(1910년 6월 29일 ‘순종실록’) 전광석화처럼 부관참시와 능지처참을 당하고 또 9개월 뒤 전광석화처럼 복권된 지 16년 만이었다. 한 달이 지난 1910년 7월 29일 관립한성고등학교 옛 김옥균 집터에서 황제가 내린 시호 교지를 받는 ‘연시례(延諡禮)’ 의식이 열렸다.

 시호는 ‘忠達(충달)’이었다.(김윤식, ‘속음청사’14(한국사료총서 11집), 1910년 7월 27일) 또 한 달 뒤 나라가 사라졌다.

맑은 가을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는가. 가을비 궂게 내리는 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그 흔적들 모두가 역사다.

 출처: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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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동해 바닷가에 향나무를 묻다

지난 1999년 삼척시 근덕면 맹방 바닷가에서 오래 묵은 향나무(침향목) 몇 토막이 발견돼 세간의 주목을 끈 일이 있었다.
바닷가의 하천변 모래늪에서 예사롭지 않은 굵은 향나무 토막이 발견되다니. 

도대체 이 향나무는 어떤 연유로 맹방 바닷가에 묻히게 된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지만,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매향(埋香) 의례를 살펴보면 그 연유를 다소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바닷물과 민물(하천수)이 만나는 합수 지점의 좋은 곳을 골라 향(香)나무류를 묻는 ‘매향 의례’를 많이 행했다.
매향의 목적은 1차적으로는 품질 좋은 향을 얻기 위해서다. 
향나무는 바닷가에서 천년을 묵으면 향을 태우거나 약재로도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침향(沈香)’이 된다. 
물론 바닷가에 인위적으로 묻은 이 침향은 현대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동남아의 자연산(産) 수지(樹脂) 침향과는 다른 것이다.
두번째는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을 극복하려는 민초들의 염원이 매향 의례에 깃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고려시대는 초기에는 여진족 해구(海寇)들이 들끓고, 중·후기에는 몽골의 무시무시한 침략 전쟁에다 왜구들의 노략질까지 더해져 바닷가 해안지역은 불안이 일상이 된 시대였다.
가족이나 일가 친척이 여진족에게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로 끌려간 집도 있었을 것이고, 왜구들의 살육과 약탈로 같은 날에 동시에 집집마다 제삿밥을 올리며 통곡하는 마을도 많았을 것이다.
불안하고 피폐한 생활 환경이 좋은 향으로 안전과 발복을 기원하는 매향 의례를 낳은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강릉원주대 장정룡 교수는 “매향 의례는 미륵정토처럼 좋은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발원의 의미에다 후손들에게 좋은 향을 제공하겠다는 포용적 세계관이 담겨있다”고 진단했다.
지금까지 대규모 매향을 했다는 비(碑)가 발견된 곳은 강원도 고성군 삼일포 매향비와 평안남도 정주 침향동, 전남 영암과 해남, 충남 태안과 당진 등 여러곳이다. 
동해안 고성 삼일포 매향비(1309년)는 국내에서 발견된 매향비 가운데는 시대가 가장 앞선 것이다.
기록이나 지명을 통해서도 매향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항교 전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장(문학박사)은 1999년 발표한 ‘고성 삼일포 매향비와 침향’ 연구논문(전국향토문화연구회 대상 수상 논문)에서 “세종장헌대왕실록에 나오는 기록 등을 토대로 살펴 볼 때 1002년∼1434년까지 432년간 수십 곳에 수천조(條)의 향나무를 묻은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고성 삼일포 매향비 탁본 일부.
정 전 관장은 “강릉 주문진읍에 향호(香湖)리 라는 마을이 있는데, 천년 묵은 향나무가 홍수에 떠내려와 호수에 잠겼다고 하여 침향호라고 불리고, 황해도 장연에는 침향곶이라는 지명도 있다”고 덧붙였다.
매향비 가운데 시대가 가장 빠른 동해안 고성 삼일포 매향비의 경우는 1309년(고려 충선왕 원년) 당시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를 비롯 영동지역 9개 군현(郡縣)의 수령들이 하층민과 함께 매향의식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일제강점기까지 현지에 존재하다가 이후 행방이 묘연해 현재는 조각난 비석의 탁본 기록만 전하는 삼일포 매향비 내용은 요약하자면 “신분이나 지위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착한 일을 하는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미륵보살 앞에 맹세하고 기원하면서 삼가 향나무 1500조를 각 포구에 묻고 미륵보살이 하생하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묻은 향나무는 강릉 정동촌 물가 310조, 울진현 두정 200조, 삼척 맹방촌 물가 150조, 동산현 문사정 200조, 흡곡현 단말리 210조 등 지금은 북녘땅인 통천∼현재 경북 울진에 이르기까지 9개 고을 바닷가에 100∼310조씩이었다.

▲ 삼척 ‘척주지’ 매향비조.
1999년 바닷가에서 향나무 토막이 발견된 삼척 맹방 역시 150조의 향나무가 묻힌 것을 삼일포 매향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맹방은 매향을 한 곳 이라는 것을 뜻하는 매향방(埋香芳)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니 매향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강릉 정동진 또한 유서 깊은 매향터이다. 
지난 2000년 강릉원주대 매향유적조사단의 조사 결과 정동진 2리 여서낭당 앞 도로는 예전에 개울이었던 것으로 확인돼 현재 물이 흐르는 정동천과 함께 하천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실시된 유력한 매향터로 꼽히기도 했다.

 


▲ 지난 1999년 침향(沈香)목이 발견된 삼척시 근덕면 맹방 마읍천 하구의 현재 모습.
매향지는 주변에서 향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 이라는 공통점도 있는데, 삼척과 울진의 경우 매향지 인근이 수백년 자단향(紫檀香) 자생지로 유명했고, 강릉 정동진에도 여서낭당 뒤편 속칭 호물재산에 수백년생 향나무 자생 군락지가 분포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려인들이 동해안 바닷가에 묻은 향나무는 지금 쯤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 이라는 침향이 되어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매향 의례를 올리며 기원한 모두가 만족하는 살기 좋은 세상은 언제 쯤 구현될까. 그 옛날 매향의례를 살펴보자니 오늘날 정치 현실과 함께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진다.
출처 : 최동열의 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강원도민일보 최동열 dychoi@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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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최대 철기시대 유적지 동해시 백두대간서 발견

문화재적 가치 높아 철기시대 연구 중요한 유적·구 될 듯
▲ 강원도내 최대 철기시대 집단거주 유적지가 있는 강원 동해시 백두대간 상월산~두타산 일대에서 고대시대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쇠부리 터’가 처음으로 여러 곳 발견돼 학계에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강원도내 최대 철기시대 집단거주 유적지가 있는 강원 동해시 백두대간 상월산 일대에서 고대시대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쇠부리 터’가 처음으로 여러 곳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쇠부리 터 발견으로 원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를 중심으로 왕성했던 동해지역의 철기문화 연구와 고대 제철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그동안 역사 자료 기록으로는 남아 있으나 현장(유적·구)을 발견하지 못해 아쉬웠던 철광산 고대 제철현장에 대한 의문이 해소될 것으로 보여 학계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강원도내 최대 철기시대 집단거주 유적지가 있는 강원 동해시 백두대간 상월산~두타산 일대에서 고대시대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쇠부리 터’가 처음으로 여러 곳 발견돼 학계에 큰 관심을 끌고 있다.

28일 동해시고대제철연구소(소장 최형준)에 따르면 동해시에 위치한 상월산~연칠선령~두타산을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 일대에서 여러 기의 쇠부리 터(고대 제철소=1차 제련소)를 발견, 현장을 보존해 왔다.

동해시고대제철연구소는 고대시대 제철유적 조사·연구를 위해 지난 10여년간 제철 유적·유구를 찾기 위한 노력과 함께 옛 문헌을 통한 자료조사를 병행해 오던 중 최근 이 곳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원삼국시대 철 생산을 위한 고로터(쇠부리 터)라는 확신이 들어 공개하게 됐다.

▲ 강원도내 최대 철기시대 집단거주 유적지가 있는 강원 동해시 백두대간 상월산~두타산 일대에서 고대시대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쇠부리 터’가 처음으로 여러 곳 발견돼 학계에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각종 사료들에 따르면 백두대간 상월산에서 두타산 사이 해발 900여m 지역은 원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지점으로 격전을 치르던 전쟁터였다.
이 일대에서 철광석을 달궈 철을 뽑아내는 1차 제련 공정에 해당하는 ‘쇠부리 터’가 최소 4개 이상 발견됐다.

반지름 100~120㎝ 크기의 둥근 형태를 한 이 터 안에는 진흙으로 만든 노(爐)의 흔적과 선철 부산물들이, 주변에는 철을 제련할 때 생긴 슬래그 덩어리가 많이 널려 있다.

고로터 근처에는 또 노 시설과 철 제련시 나오는 부산물을 폐기하는 ‘수혈유구’로 추정되는 웅덩이도 여럿 발견되고 있다.

▲ 강원도내 최대 철기시대 집단거주 유적지가 있는 강원 동해시 백두대간 상월산~두타산 일대에서 고대시대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쇠부리 터’가 처음으로 여러 곳 발견돼 학계에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이들 쇠부리 터는 주로 물이 흐르는 계곡 옆의 평지에 있지만, 대부분 절벽을 끼고 있어 외부에서 관측이 잘 되지 않고 주위에는 황토가 많은 지역에 위치해 있다.

더욱이 이 일대에서 시대를 단정하긴 어렵지만 철기시대로 추정되는 철로 만든 말 편자, 칼, 칼을 갈 수 있는 휴대용 숯돌 등 유물들이 다수 발견돼 이 쇠부리 터가 원삼국시대의 것이라는걸 뒷받침하고 있다.

동해시는 지난 2011년 송정동 374-1 등 41만여㎡ 구역을 철기시대 집단 취락지로 보고, 문화재 발굴조사를 실시해 대·소형 주거지와 소형유구 등 유적을 발견한 데 이어 쇠삽날·쇠화살촉·은제장신구 등 철기류 유물들도 대거 출토되면서 강원도기념물로 관리되고 있다.

▲ 강원도내 최대 철기시대 집단거주 유적지가 있는 강원 동해시 백두대간 상월산~두타산 일대에서 고대시대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쇠부리 터’가 처음으로 여러 곳 발견돼 학계에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철기 유적·유물들을 뒷받침할 철기 생산지와 철을 1차 생산하는 고로터, 2차 가공하는 대장간 등에 대한 관계 기관들의 무관심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발견된 쇠부리 터는 역사문헌에 의하면 제철유적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클 것으로 보여 문화재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관심과 함께 발굴조사·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강원도내 최대 철기시대 집단거주 유적지가 있는 강원 동해시 백두대간 상월산~두타산 일대에서 고대시대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쇠부리 터’가 처음으로 여러 곳 발견돼 학계에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최형준 동해시고대제철연구소장은 “송정동이 옛날부터 철기문화가 왕성했던 지역이라 철기구를 만들기 위한 쇠가 어디서 나왔는지 항상 의문을 품어오다 역사서 등 여러 문헌들의 기록을 보고 찾아나서 이제야 그 장소를 발견하게 된 것 같다”며 “고대의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이제 문화재 관련 기관과 학계에서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실증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 전인수 기자 2022. 11. 28.

[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김홍도가 반한 비경 글 읽는 소리 귓가에

 

경포호 주변의 정자 강릉의 대표적 문화유산

◇추수를 막 끝낸 듯 호해정 주변에 볏단이 쌓여 있다. 경포호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이곳은 매립돼 현대아파트, 진안상가 등이 들어섰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호해정(湖海亭)은 1788년 당시 경포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은 호수가 매립돼 현대아파트, 진안상가, 경포대초교 등 상가와 민가들이 들어섰다.

100년 전만 해도 이곳은 경포호와 연결된 또 다른 석호였다.

단원의 호해정 그림은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정자 앞엔 배가 정박해 있고 호수 안 바위엔 백로들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멀리 바다 방향으로는 흰 모래밭과 오리바위가 있다. 경포대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호해정은 경포호의 또 다른 비경으로 조선 최고의 화원의 눈을 사로잡아 그림으로 남겨질 정도였다.

호해정은 원래 이름은 태허정이다.

조선 명종 때 장호라는 사람이 그의 호를 따 정자를 지어 그의 사위 김몽호에게 주었다.

1750년(영조 26) 이 초가가 불에 타 버리자, 1754년(영조 30) 신정복이 강릉시 죽헌동에 있던 자기 집 별당인 안포당을 헐어 이곳에 옮겨 짓고 '호해정'이라 불렀다.

이곳은 김몽호의 영정과 삼연 김창흡, 옥산 이우의 시문이 있으며, 민우수 외 3명의 기문이 있다.

현판은 자하 신위가 썼다.

별당을 헐어 옮겨 지은 정자인 이 건물은 경포호수 동북쪽 깊숙한 산기슭에 자리잡아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경관을 엿보게 한다. 정면 2간, 측면 2간 규모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호해정은 춘천의 서면 박사마을 시작과 관련된 인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년)과 밀접한 관련이 깊다.

학문이 높은 삼연은 겸재 정선을 후원하는 역할을 했던 명사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1718년(숙종 44) 1년간 거처하면서 강릉지역 선비들에게 학문과 시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조용하고 호젓한 분위기가 글 읽기엔 안성맞춤이다.

정자 정면에는 초서로 쓴 호해정 현판과 측면에 해서체로 쓴 호해정 현판이 있다.

정자 입구엔 은행나무가 도열해 손님을 맞고 있으며 정자 바로 앞에는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다.

정자 앞의 왼쪽나무는 수령이 많아 보인다.

정자 뒤편은 단원의 그림처럼 소나무들이 정자를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호수는 사라졌다.

호수는 육지로 바뀌고 아파트와 건물들이 들어섰다.

밭으로 변한 호수 중간에는 트랙터가 엔진 소리를 내며 밭갈이가 한창이다.

진안상가가 올해 마이삭과 하이선 등 연이은 태풍으로 침수됐다. 해마다 비가 오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과거 습지 안에 건축된 진안상가와 경포대초교는 단골로 방송 뉴스 화면에 초대된다.

유입 인구가 늘어나면서 1968년 경포대초교가 개교한 후 1983년 진안상가가 준공됐으며 1998년 경포 현대아파트도 건축돼 11개동 400여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스카이베이, 라카이샌드파인 등 대형 건물과 주택, 펜션 등 숙박시설이 들어서는 중이다.

 

금란정은 조선 후기 선비인 김형진이 지은 집으로, 경포호가 바라보이는 경포대 북쪽 시루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매화를 심어 학과 더불어 노닐던 곳이라 하여 매학정(梅鶴亭)이라 이름 지어졌고 그 뒤 주인이 바뀌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이름을 금란정이라 고쳐 불렀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금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옆면에는 ‘경중별업(鏡中別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금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오른쪽으로 다락처럼 한층 높게 지은 마루(누마루)가 특징이다.

현판 글씨는 광무 6년(1902년) 권동수가 섰다고 전해진다.

정자 옆 산책로엔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방문객들을 위로하며 서 있다.

옛 사진 속엔 금란정 앞엔 논이 보이고 비포장 흙길이 경포호 주변을 돌고 있다.

옛 선조들의 발길이 남아 있을 듯한 흙길이 넘어 강문이 보인다. 소나무들이 간격을 두고 서 있다.

강릉 경포호의 정자들은 나무들과 함께 있어 아름다움을 배가 시킨다.

조선 최고의 화원인 단원 김홍도와 복헌 김응환이 이곳을 찾아 붓을 들어 우리고장의 빼어난 광경을 담았다.

옛 사진은 삼연의 글 읽는 소리와 단원의 붓질 소리를 듣게 하는 마술을 펼친다.

출처:강원일보 22.09.06 김남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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