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혼자 한가할때 강릉김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곤 한다.

만기형님에 비해선 미약하지만 ,자료를 공유하고 정보의 홍수속에 내가 원하는 자료를 찾아본다는것은 . 수집하는 즐거움이 있다.우연히 부산에 살고 있는 강릉김가의 흔적이 인터넷의 자료가 납아 있어,스크랩을 해본다.

글을 쓰신 김강식이라는 분에게 고마움을 남긴다.이글은 그분의 글을 인용해본다.

 

01.부산의 자연지리적 환경

 

[정의]

부산 지역에서 특정한 성씨가 모여서 대대로 세거한 지역.

[개설]

세거지는 집성촌, 동족 부락, 동족 촌락과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

집성촌은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의미이며, 특정 성씨가 마을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지역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특정 성씨가 마을의 이름이 되는 경우도 있다.

동족 부락(同族部落), 동족 촌락 역시 집성촌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마을 구성원이 친족이라는 의미를 더 부각하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세거지 역시 집성촌에서 출발하였지만, ‘집성(集姓)’이라는 의미보다 적은 수의 가호라도 세대를 계승하면서 거주해 온 마을, 오래된 거주지라는 공간적 측면을 더 강조한 말이다.

이는 19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급격한 도시화, 해방과 귀환 동포, 6·25 전쟁과 피난민, 산업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전근대 도시 형태를 점차 탈피한 부산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온 마을이 같은 성을 가진 일가친척 관계의 촌락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부산광역시 내 기장군, 강서구, 금정구 일대에 집성촌으로 알려진 마을이 존속하기는 하지만 다른 성씨를 가진 이주민이 증가하고, 분가·이사·개방 등으로 특정 성씨가 마을 전체를 대표하던 외형은 사라졌다.

중구, 서구, 동구, 부산진구 등에서는 처음부터 집성촌이 없었거나, 있었다고 해도 거의 사라졌다. 

이러한 지역에 이주민, 피란민 등이 거주하면서 그들의 삶터로 일구고 있기 때문에 몇백 년의 세거는 아니더라도 4~5대에 걸쳐 거주를 이어 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는 부산 지역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며, 이들 역시 부산을 구성하는 구성원이므로 집성촌이 아닌 세거지란 의미로 포괄하고자 하였다.

 

[변천]

조선 시대 동래부는 크게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읍치(邑治)인 동래읍성, 수군 기지인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좌수영성], 부산진성(釜山鎭城), 다대진성(多大鎭城)이다.

이러한 성은 행정,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중심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거주지도 대부분 성 주변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1740(영조 16) 당시의 행정 구역과 거주지를 보면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한 읍내면[동래구, 금정구], 읍성 동쪽의 동면[동래구, 해운대구, 금정구], 읍성 서남쪽 좌수영성 주변의 남촌면[수영구, 남구], 읍성 남쪽 부산진성 주변의 동평면[부산진구, 동구], 낙동강 위쪽과 아래쪽 마을을 합친 사천면[사상구와 사하구, 중구], 읍성 서쪽의 서면[동래구, 연제구, 부산진구, 북구], 읍성 북쪽의 북면[현 금정구]으로 되어 있다.

 

당시 동래부에 속하지 않았던 기장군과 강서구를 제외하면, 부산의 주거지는 위 지명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 중구, 서구, 영도구는 18세기 중엽 당시에는 사람이 모여 산 큰 마을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은 근대의 개항과 산업화, 6·25 전쟁, 도시 개발 등으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일제 강점기 중엽까지 존속하던 세거지는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조선의 성()[1934]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성 동래군에는 오늘날 중구, 서구, 동구, 동래구, 연제구, 사하구, 수영구, 영도구, 금정구의 집성촌은 보이지 않는다. 강서구 지역은 김해군 편에 나타나 있다.

 

전근대의 세거지는 산업화와 도시 개발 전에는 큰 변화가 없었음을 감안할 때 부산의 세거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동래의 세거 성씨와 우거 성씨가 사는 곳을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동래군지(東萊郡誌)[1937] 성씨 조에 나타나 있는 세거 성씨와 우거 성씨는 입향조, 주요 자손 등을 정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강서구는 아직 부산광역시에 편입되기 전이므로 강서구의 성씨는 조사되지 않았다. 

또한 중구, 서구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확대되면서 형성된 구()이므로 전통적으로 세거하는 성씨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부산진구, 동래구, 남구, 해운대구, 금정구, 사상구, 기장군 일대에 아직 세거 성씨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것을 알 수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1970년대 부산의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면서 세거지는 더욱 감소되었다.

1971년과 1976년 부산의 동족 부락을 조사한 글에는 12개의 부락만 소개되어 있다. 

전수 조사가 어려운 점을 감안하더라도 해당 동의 인구가 증가하는 반면, 동족 부락에 해당하는 가호 수는 동일하거나 감소하고 있다.

12개의 부락 가운데도 3곳은 내부적으로 동족 의식, 혈연 의식이 희박해져서 지역 사회 리더로서의 힘을 읽어 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서구 역시 녹산 공단으로 대표되는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전통적인 자연 마을은 이주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렇듯 부산 지역은 광역시로 형성되어 가는 동안 산업화와 근대화의 제일선에 있었기 때문에 행정 구역의 분화 및 편입이 많고, 6·25 전쟁에 이은 도시 개발 등으로 거주지의 변화가 많았다.

 

[현황]

그렇다면 2014년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중구는 조선 후기에 사람이 사는 큰 마을은 거의 없고, 오늘날 용두산 공원 주변으로 일본인 마을 왜관(倭館)이 있었다. 

또한 근대 이후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자리해서 수백 년을 내려오는 전통적인 의미의 세거지는 없다. 

그러나 귀환 동포, 6·25 전쟁 피난민 등이 자리 잡았던 중구에는 3대 이상 세거하는 주민이 증가하고 있다.

서구는 중구와 인접한 대신동, 부용동, 부민동, 아미동은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중구와 세거지 유형이 거의 같다. 

동구는 부산진성이 있었던 지역이므로 오래전부터 세거하던 사람이 많았으나 개항 이후 이주민이 급격히 증가하고, 일본인의 세력 확대 등으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전통 자연 마을 구조는 사라졌다.

영도구는 조선 시대 이래 목장이 있었기 때문에 목장을 관리하거나, 어업에 종사하는 극소수의 주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큰 마을은 형성하지 못하였다. 

영도구 역시 근대 개항 이후 개발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6·25 전쟁 때 피란민들이 많이 정착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극히 드물지만 100년 이상 세거를 하는 가호가 있다. 

부산진구는 서면 일대 개발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세거지가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조사된 바 있는 여러 세거지와 세거 성씨들이, 세거 가호가 줄어들었지만 외형을 유지한 채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동래구는 조선 시대에는 읍치가 있었던 곳인 만큼 세거 성씨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1976년 조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수안동과 온천동에서 특정 성씨 세거지를 확인할 수 있다.

1995년 동래구에서 분구된 연제구는 거제동에서 몇 개 성씨 세거지만 발견될 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남구는 개성 왕씨(開城王氏)의 세거지로 유명한 용호동을 포함하여 다수의 세거지를 찾아볼 수 있는 지역이다. 

임진왜란 전에 이거한 성씨를 비롯하여 600년 이상 세거하고 있는 특정 성씨들이 남구 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하며 살고 있다. 

남구 역시 타성 이주민이 증가하고, 세거 성씨들의 분가, 이주가 늘어나 명맥을 유지하는 세거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1995년 남구에서 분구된 수영구는 좌수영성이 있었던 곳이며, 수영 야류·좌수영 어방놀이의 계승 등으로 전통의 맥을 이어 나가는 문중이 있다. 이들 문중으로 형성된 몇 개의 세거지가 남아 있다.

 

북구는 화명동, 구포동, 만덕동이 주된 세거지다. 금정산, 넓은 평야와 강, 계곡을 끼고 있으면서도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큰 문중들이 자리 잡았고, 그 때문에 세거 성씨도 다양하다. 

그러나 대규모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세거지 모습이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해운대구는 현재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는 번화한 해운대의 이면 지역에 세거지가 발달하였다. 

여러 기록에서 빠지지 않는 석대동 세거지를 비롯하여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 문화재 제1호인 삼절사를 중심으로 한 반송동, 반여동, 재송동, 송정동 지역에는 여러 성씨 재실이 현존한다. 

좌동·중동·우동 지역에도 세거하던 성씨들이 있었으나 1970년 이후 해운대 개발이 급격히 이루어져 세거하는 가호가 크게 줄어들었다.

 

사하구는 낙동강 하구의 넓은 삼각주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던 곳이다. 

더욱이 조선 시대 다대진성이 있는 지역이여서 성 주변으로 큰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세거한 마을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이후 입향한 성씨들이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금정구는 조선 시대 동래읍성의 북면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역이 넓고, 동래군지에서 보이듯 우거 성씨가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현재 금정구 13개 법정동 중 금성동, 남산동, 청룡동, 노포동, 두구동, 선동, 오륜동, 회동동, 금사동, 서동 등에는 적은 가호지만 세거를 하는 성씨들이 존속하고 있다. 구서동, 장전동, 부곡동 지역에 공공기관 및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섬에 따라 세거 주민이 많이 이주한 상태다.

 

강서구는 일부 지역이 1978년 부산직할시 북구에 편입되고, 1989년 현재의 강서구 지역이 강서출장소에서 구()로 승격되었다. 

오랜 기간 김해군에 속하여 대도시로부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부산 지역 가운데 세거 성씨가 가장 많아 있는 지역 중 하나였다. 

현재 가락동, 녹산동, 강동동, 대저동, 명지동, 가덕도동에 세거 성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강서구 역시 김해 공항과 부산 신항 개발, 해안가 매립, 대규모 공단 입주 등으로 이주되고 사라지는 마을이 많다.

사상구는 임진왜란 이후에 입향한 성씨가 대부분이며, 1601년 동계(洞契)를 결성했던 기록이 있어 세거지의 특성을 알려 준다. 사상구의 세거지는 일제 강점기 조사, 1970년대 조사 때 빠지지 않고 소개되었다. 학장동, 주례동, 괘법동 등은 현재까지 특정 성씨들의 세거지로 존속되고 있다.

 

기장군은 1995년 부산광역시에 편입된 곳이다. 

동해를 끼고 있지만 장안, 정관, 철마 등 내륙 지역도 넓어 세거지가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조선의 성 동래군 편에는 45개의 집성촌이 소개되었는데, 이 가운데 집성촌 21개가 기장군에 소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소개된 세거지는 지금도 거의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02.부산에 터를 잡은 강릉김씨

(01)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명칭 유래]

노포(老圃)란 오래된 채전(菜田)[채소밭]을 뜻하며, 노포동은 농사를 잘 짓는 마을이란 말이다.

다른 유래로는 노포동 뒤쪽 당산이 쥐가 채소밭에 먹이를 구하러 내려오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늙을 노채전 포를 쓴 것이라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노포동 강릉 김씨 세거지(老圃洞江陵金氏世居地)는 조선 초부터 금정구 선동(仙洞)에 정착하여 살아온 동래부(東萊府)의 대표적인 유력 성씨였던 강릉 김씨 충순공(忠順公) 산저파(山底派)가 임진왜란 이후에 옮겨 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다. 입향조는 알 수 없다.

금정구 노포동에는 노포 마을, 녹동(鹿洞) 마을, 대룡(大龍) 마을, 작장(鵲掌) 마을 등 4개 마을이 있다.

1904년 편찬된 경상남도 동래부 가호안(慶尙南道東萊府家戶案)에는 노포 마을에 양씨·김씨·정씨·박씨·최씨·강씨·문씨 등 34가구가 있었으며, 작장 마을에는 김씨와 이씨가 10가구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 환경]

서쪽에는 금정산지의 계명봉(鷄鳴峰)[602m]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계명봉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청룡동과의 경계를 이룬다.

계명봉은 수영강, 온천천과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소하천의 분수계를 이룬다.

북쪽에는 양산과 교통로 기능을 하는 지경 고개[조선 시대에는 사배현으로 부름]가 있으며, 이곳으로 경부 고속 도로가 지난다. 서쪽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수영강과 합류하는 유역에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현황]

호수(戶數)의 증감을 보여 오다가, 2013년 현재 약 3가구가 살고 있다.

 

(02)금정구 남산동

[명칭 유래]

남산동(南山洞)이란 지명은 이곳의 남산(南山)[165m]에서 비롯되었다.

남산은 금정산 동쪽 기슭 아래에 솟은 구릉성 산지이다.

지명은 이곳에 범어사의 사전(寺田)을 소작하는 농민들이 많았는데, 범어사에서 보면 이 지역이 남쪽 산등성이에 해당하므로 남산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다른 유래로는 지세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집을 지으면 모두 남향으로 지었다 하여 남산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남산동 강릉 김씨 세거지(南山洞江陵金氏世居地)는 조선 초부터 금정구 선동(仙洞)에 정착하여 살아온 동래부(東萊府)의 대표적인 유력 성씨였던 강릉 김씨 충순공(忠順公) 산저파(山底派)가 임진왜란 이후에 옮겨 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다.

입향조는 알 수 없으며, 1904년 편찬된 경상남도 동래부 가호안(慶尙南道東萊府家戶案)에 남산 마을에는 김씨·송씨·최씨·한씨 등 42가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 환경]

서쪽으로는 금정산지의 원효봉과 의상봉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산록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가잿골을 지나 온천천으로 흘러든다.

온천천 양쪽 기슭의 완만한 비탈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현황]

호수(戶數)의 증감을 보여 오다가, 2013년 현재 3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03) 금정구 선동

[개설]

조선 전기 동래부(東萊府)의 대표적인 유력 성씨였던 강릉 김씨(江陵金氏) 충순공(忠順公) 동래파가 조선 문종(文宗) 이후 금정구 선동으로 옮겨 와 선동 강릉 김씨 세거지를 이루었다.

이후 충순공 산저파(山底派)와 여고파(余古派) 등으로 분파되었다.

 

[명칭 유래]

선동(仙洞)이라는 지명은 지역에 선돌이 있어 유래되었다는 설과 오륜대와 인접하여 신선이 노닐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선리라 불렀다.

 

[유래 및 변천]

임진왜란 이전 입향조인 북계 김선(金璿)이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선동 강릉 김씨 문중의 유명 인물로는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활약하고 소산(蘇山) 전투를 벌여 공을 세운 김정서(金廷瑞)가 있다.

이곳에는 김정서의 묘소도 있다.

 

[자연 환경]

선동 동쪽은 기장군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자리하고, 서쪽으로 계명봉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있다.

이들 두 산줄기 사이로 수영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중앙부는 회동 수원지의 상류 구역에 해당된다.

 

[현황]

60여 전까지 금정구 선동에는 강릉 김씨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2013년 현재는 한 집도 살고 있지 않다. 다만 문중 재실(齋室)인 상현사만 남아 있다.

 

02. 부산진구

[개설]

부산진구 일대는 삼한 시대에 거칠산국이었고, 757(신라 경덕왕 16) 동래군 동평현에 속하였다가 1021(현종 12) 양주 동평현이 되었다.

이후 1519(중종 14) 동래현에 귀속되었다.

1547(명종 2) 동래현이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914년 동래군 서면에 소속되었다가 193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51년 부산진출장소가 설치되어 독립적인 행정 구역이 되었다.

1979년 양정동, 개금동, 부암동이 29개 동으로 분동되었고, 1998년 행정동이 통합되어 25개 동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지리적으로 백양산과 황령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대부분 지역이 평지이다.

성지곡을 비롯한 당감천과 부전천, 전포천 등의 하천이 발달하여 농경지로서도 적합하여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면서 사람이 살기에 용이한 지역이었다.

[특징]

부신진구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다양한 성씨가 세거를 이루어 살아왔다.

조선의 성()에는 초읍동의 밀양 손씨(密陽孫氏) 35가구, 당감동의 파평 윤씨(坡平尹氏) 30여 가구, 당감동의 여양 진씨(驪陽陳氏) 20여 가구, 가야동의 달성 서씨(達成徐氏) 22가구, 부전동의 강릉 김씨(江陵金氏) 30여 가구, 부전동의 김해 김씨(金海金氏) 35가구, 전포동의 김녕 김씨(金寧金氏) 30여 가구, 양정동의 청도 김씨(淸道金氏) 26가구, 가야동의 영양 천씨(潁陽千氏) 10여 가구 등이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개금동에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분성 배씨(盆城裵氏), 은진 송씨(恩津宋氏) 등이 세거하였는데, 옛 안동네에는 은진 송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한다.

당감동에는 여양 진씨, 김해 김씨 달성 서씨, 파평 윤씨(坡平尹氏), 영월 신씨(寧越辛氏), 나주 정씨(羅州丁氏) 등이 살았는데, 본동에는 좌수영 수사 후손인 신씨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성안 마을에는 여양 진씨 집성촌도 있었다.

범전동에는 김씨, 이씨, 박씨, 문씨, 정씨 등 여러 성씨가 혼재하여 거주하였으며 부암동에는 양씨(梁氏), 황씨(黃氏), 정씨(鄭氏), 문씨(文氏), 박씨(朴氏) 들이 살았고 부전동에는 강릉 김씨 38가구, 김해 김씨 35가구가 살았다고 하니 상당히 큰 마을이었던 것 같다.

양정동에도 경주 이씨(慶州李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은진 송씨 등이 살았는데 제일 큰 문중이 청도 김씨로 26가구가 살았다고 하며, 지금은 60여 가구가 모여 산다.

연지동에는 김씨, 장씨, 양씨, 박씨, 문씨 등이 살았고, 초읍동에는 여러 성씨가 혼합한 중에 원당골에 밀양 손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이들을 초읍 손씨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대부분 병자호란, 정묘호란, 세조 대의 사육신 사건 맟 유배 등으로 한양을 떠나 경상남도나 동래로 이거하고, 이후 부산진으로 옮겨 세거지를 형성하게 된 경우들이다.

예를 들어 달성 서씨는 입향조가 직무에 대해 고언하였다가 동래로 유배된 후 그 후손이 계속 부산진에 거주한 경우고, 파평 윤씨는 정묘호란 이후, 강릉 김씨는 병자호란 이후 울산 온양에서 이거하였으며, 김녕 김씨는 사육신 사건으로 이거한 후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현황]

부산진구는 1970년대 이후 도시 개발로 세거지가 허물어져 갔다.

특히 이 지역은 부산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개발과 함께 전통적인 모습이 사라지는 속도도 빨랐다.

1971년과 1976년의 세거지 변화를 그리고 있는 동족 부락-부산시 동족 부락의 변모[조갑제, 신동아 1976 10월호]에 보면 이 지역의 세거지 변모 형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양정동의 청도 김씨는 1971 57가구, 1976 6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또 초읍동의 밀양 손씨는 각각 33가구, 38가구가 있었다.

이들 성씨들이 그때까지 세거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광복 이후 신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문중 내의 전통과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밀양 손씨의 손정줄[부전동 삼성병원 건립자]은 개화 바람이 불 때 서당 공부 대신 명륜소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사립동명고등보통학교를 거쳐 32세에 서면 면장이 되었다.

이후 밀양 손씨 외 다른 집안에서도 앞 다투어 손정줄의 행로를 따라갔고, 많은 유명 인사를 배출하면서 세거지를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를 지나 개발 속도가 빨라지면서 세거지를 지키는 가문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가야동의 달성 서씨 70여 가구, 당감동의 파평 윤씨 10여 가구 등이다.

 

(1)부산진구 부전동

[명칭 유래]

부전동은 본래 부현리라 불렀다.

부현리는 현 부산진구 당감동 입구 부암 고개에 있던 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있던 바위가 마치 가마솥을 거꾸로 엎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가마 고개라 하였고, 이를 한자화한 지명이 부현이라는 것이다.

부전의 ()’ 자는 비교적 논밭이 많은 평지에 붙여진 명칭으로, 부현 고개 아래가 평지[인근에 전포동(田浦洞)과 범전동(凡田洞)이 있음]라서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형성 및 변천]

강릉 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주원의 22세 김윤신(金潤身)[호 괴당(槐堂)]이 괴당공 옥가파(玉街派) 파조이다.

이후 돈령 참봉 김세달(金世達)예빈시 직장 김광언(金光彦)증공조 참의 김임(金銋)첨지중추 김몽상(金夢祥)-김귀남(金貴南)으로 이어 졌다.

김귀남은 41녀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 김정진(金貞震)이 결혼하고 김지봉(金之奉)을 낳았을 무렵 마침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난을 피하려고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조선 효종 때 울산 온양에 정착하였다.

김지봉의 아들 김일소(金日蘇)는 동지중추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원실(金元實)이 밀양으로 옮겨 갔다.

김원실의 아들 김수익(金壽翼), 김수익의 아들 김학재(金學載)에 이르러 울산으로 돌아갔다.

이후 김학재김병인(金秉仁)김연복(金演福김연영(金演榮)으로 이어졌다.

김연복의 둘째 아들 김주경(金注卿)이 생업을 위해 기장으로 이거하면서 동래 입향조가 되었는데, 그때가 철종 초인 1850년대이다.

김주경이 동래로 내려온 이후로는 족보에서 누락되어 그 후대를 알 수 없으나, 기장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아들 대에 해안 통을 따라 이거하여 부전동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부전동에 정착한 첫 입향조는 분명하지 않으나 1904년 발간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총 12가구 중 김씨가 8가구로, 여기에 기록된 호주 김내종(金來宗), 김차종(金且宗) 두 형제의 아버지가 연대로 보아 부전동에 처음 정착한 입향조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까지 살고 있는 후손을 찾을 수 없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자연 환경]

부전동이 속한 지역은 대부분 평지이다.

성지곡 일대에서 발원한 부전천이 남쪽으로 흘러 동천으로 유입하며, 과거 광무교가 있었다.

현재는 부전동을 지나는 유로는 대부분 복개되어 복개로라는 명칭으로만 그 흔적을 알게 한다.

 

[현황]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성()에는 부전동에 강릉 김씨 30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2013년 현재는 강릉 김씨 가구를 찾을 수 없다.

 

 

 

출처: 김강식

 

[정의]조선 후기 『만력 무술안(萬曆戊戌案)』 작성을 주도한 동래 출신의 향반(鄕班).
[가계]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백취(栢翠). 아버지는 진사 김희우(金希雨)이다.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동래 입향조는 김시습(金時習)의 사촌인 김검(金儉)으로, 동래 선동에 정착하였다.
[활동 사항]
김정서(金廷瑞)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동래성 전투를 비롯하여 곽재우(郭再祐)가 이끄는 화왕산성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다대포 첨사를 지냈다. 

이후 동래 최초의 향안(鄕案)인 『만력 무술안』 작성을 주도하여 이름을 올렸다. 

향안은 지역 양반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로, 여기에 등재되어야 공식 활동 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으로서 향원(鄕員)[양반으로 구성된 향촌 자치 기구인 유향소의 일원]의 인정을 받아야만 향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김정서와 함께 『만력 무술안』에 등재된 향반은 송의인(宋依仁), 김우정(金禹鼎), 김사위(金士偉), 박희근(朴希根) 등 5명으로, 모두 동래의 이름난 원향(原鄕) 가문 출신이다.

조선 후기 동래 향반을 대표했던 가문은 강릉 김씨 외에 여산 송씨(礪山宋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경주 김씨(慶州金氏), 죽산 박씨(竹山朴氏), 동래 정씨(東萊鄭氏) 등이다.

[상훈과 추모]
김정서는 충렬사[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에 임진란 24공신의 수위(首位)로 배향되어 있다. 

1924년 경상도 유림의 요청으로 김정서의 묘역 아래에 상현단(上賢壇)[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68]을 세워 김정서와 김검(金儉)의 아들인 북계(北溪) 김선(金璿)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상현단은 수영(水營) 숙사청으로 사용되던 건물 일부를 옮겨 와 지은 것으로, 해마다 4월 초에 동래 유림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출처:집필자 손숙경

현시대 왕릉 제례의 주체는 누구인가?
경주시민 대다수는 경주김씨 종친회에서 지낼것으로 생각하기 쉽상이다.
하지만 경주김씨인 나로서는 아쉽지만, 강릉김씨(江陵金氏) 종친회에서 제례를 지낸다.

역사적 고증을 하면 복잡하다.
박ㆍ석.김 순서로 왕위를 계승하다가 김알지의 후손 7대손 미추왕(262~284)이 최초로 김씨로 왕이된후 세월이 지나 내물왕(356~402)이후 김씨에 의한 왕위독점이 계속된다.
그후 태종무열왕 김춘추(603~661)가 등극한후 문무왕, 신문왕으로 직계 후손으로 왕통을 이어간다.
그 뒤로 성덕대왕신종을 만든 혜공왕대(758~780)까지 내려간다.
이 기간을 무열왕계 시대로 신라 중대(中代)로 구분된다.
즉 신라는 이제 왕위를 계승할 부류가 범내물왕계와 무열왕계 두 부류로 분류되어 하대에는 왕위쟁탈전을 벌인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첫째 아들 문무왕 김법민, 둘째아들 김인문의 자손은 혜공왕(758~780)대에 오면 영향력을 잃고, 세번째 아들 김문왕(文王)의 5대 후손 김주원(周元)세력만 남았다. 

785년 범내물왕계 선덕왕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왕위서열 첫번째는 이찬 시중벼슬을 지낸 김주원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서라벌 북천(北川)의 강물이 불어 왕궁 즉위식에 들어오지 못하자 이것은 하늘의 뜻으로 여겨 신하들은 재빨리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했다.그러나 이것 또한 역사의 승자가만든 꾸며낸 이야기로 생각된다
경쟁자 김경신(훗날 원성왕)의 쿠데타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주원은 강릉으로 거주지를 옮긴다ㆍ
이것이 명주군왕(溟主君王) 강릉김씨의 시조이다ㆍ
이런연휴로 강릉김씨는 태종무열왕 셋째아들 김문왕의 적통 후손임을 내세워 매년 제를 올린다.
강릉김씨 종친회 행사때 마다 관광버스 10여대가 추향대제에 참석한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행사 진행은 1시간 가량 조선왕조 유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신라시대에도 이와같이 지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제례가 끝난후 김내성교수외 삼국유사 연구반 회원들은
초헌관 제주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20210923태종무열왕릉 추향대제에서
출처:달빛청암  신라시인과 함께하는 경주 답사.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성씨를 통해 혈통의 공동체에 속해 평생을 살아간다.

강원도 영동지역의 성씨를 통해, 서로 얾겨진 강원도내 혈통의 공동체에 살아가는 가족들. 한여인이자 할머님의 성씨를 찾아보고자 한다. 

 

강릉 박씨
강릉 박씨(江陵 朴氏)는 강원도 강릉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강릉 박씨(江陵朴氏)의 시조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제5대 파사이사금의 5세손으로 대아찬(大阿湌)을 지냈다.
강릉 박씨(江陵朴氏)의 기세조 박순(朴純)은 신라 파사이사금의 35세손으로 1174년(고려 명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보문각시어(寶文閣侍御),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좌승선(左承宣) · 한림학사(翰林學士) · 중추원사(中樞院事) · 남경유수(南京留守)를 지낸 뒤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또 상장군(上將軍)을 겸하면서 상장군(上將軍) 석린(石隣)의 모반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보정정국공신(保定靖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과 검교태부(檢校太傅)에 특제되었다. 신종 때는 좌복야(左僕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어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후에 강릉(江陵)으로 내려가 여생을 마쳤다.


삼척박씨[三陟朴氏] 경남함양 시조묘
삼척(三陟)은 강원도 삼척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진한의 실직국(悉直國)이 있던 지역이다. 
102년(신라 파사왕 23) 신라에 합병되어 만약(滿若) 또는 파리(波利)로 불렸다. 
505년(지증왕 6)에 실직주(悉直州)라 하였고, 639년(진덕여왕 8) 진주(眞珠)로 고쳤다가 757년(경덕왕 16)에는 삼척군으로 개칭하여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 江陵) 관하에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척주(陟州)라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삼척현으로 강등되어 동계(東界)에 속하였다가 1377년(우왕 3)에 다시 삼척군으로 승격되었다. 
1393년(태조 2) 삼척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어 조선시대 동안 명맥이 이어졌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강릉부 삼척군이 되었고, 1896년 강원도 삼척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말곡면이 부내면으로 폐합되었다가 1917년 부내면이 삼척면으로 개칭되었다. 
1980년에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되어 동해시로, 1981년 장성읍과 황지읍이 통합되어 태백시로 각각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986년에는 삼척읍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995년 삼척군이 삼척시에 통합되었다.
삼척박씨(三陟朴氏) 시조 박원경(朴元慶)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세째 아들인 박언신(朴彦信)의 후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가는 왕을 호종(扈從)했고, 또한 군사를 모아 개경(開京)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호종이등공신(扈從二等攻臣)에 책록되었다. 
그 후 1365년(공민왕 14)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다시 상서(尙書)에 오르고 삼척부원군(三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고려가 망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은거하여 후진양성에 진력,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삼척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출처:wiki 


 

박종화 UNIST 교수 "한국인은 단일민족 아니다" 주장..일부에선 "데이터 부족, 혼혈 과정 명쾌하지 않다" 반론 제기

태초에 '게놈'이 있었다. 

게놈은 유전자와 염색체의 합성어로 생명체 세포에 담긴 유전정보 전체를 말한다. 

게놈 해석은 유골이나 화석에서 DNA 파편을 찾아 해독한 뒤 유전적 특징을 밝히고, 인류 기원의 잃어버린 '빈 공간'을 찾아내는 새 영역이다. 

게놈은 인류 역사를 고스란히 기록한 자서전과 같지만, 인류 기원의 수수께끼를 푸는 완벽한 증거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 

국내에서도 게놈 해석과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으로 한국인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논란도 만만치 않다.

한국인의 조상은 누구인가. 

박종화 UNIST(울산과학기술원) 교수는 "한국인은 혼합민족이지 단일민족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게놈연구재단 등과 공동으로 전 세계 158명의 현대인과 115명의 고대인 게놈을 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국제학술지 '게놈생물학 및 진화' 2020년 5월호에 발표했다. 

현재의 한국인은 지난 4만 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이동해 온 남중국 및 동남아시아 인구집단이 복잡하게 뒤섞여 형성됐다는 것이다. 


박종화 UNIST(울산과학기술원) 교수가 표준 게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UNIST 제공

"한국인, 남중국과 동남아 인구 뒤섞여 형성"
박 교수팀은 "현대 한국인 게놈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악마문동굴'에서 발굴된 8000년 전 북아시아 신석기인과 3500년 전 철기시대에 지금의 캄보디아에 살았던 '밧콤노우인'의 게놈을 융합한 결과와 가장 비슷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르면 북아시아에는 이미 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한 북아시아인이 퍼져 살고 있었고, 악마문동굴 신석기인도 그중 하나다.

이후 약 5000~4000년 전 신기술로 무장한 중국 남부의 새로운 고대 인류집단(후남방계)이 베트남과 티베트, 북중국, 한반도 등 방향으로 팽창하며 이들과 만나 혼혈이 됐다.

이들이 확산해 한반도 쪽으로 유입된 것이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덴마크 코펜하겐대학이 지난해 6월 '네이처'에 실은 논문은 한국인 형성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유라시아 전반의 인구 이동 경로가 박 교수팀 주장과 차이가 났다. 

코펜하겐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악마문동굴에는 약 3만 년 전 유라시아 수렵채집인이 건너왔고, 이후 2만 년 전에 동아시아인이 들어와 '고대시베리아인'이라는 인류집단을 형성했다. 

이들 중 일부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이후 1만 년 전 다시 동아시아인이 들어와 '신시베리아인'을 형성했고, 현재 시베리아 지역 인류 다수가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은 지난 5월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와 정충원 서울대 교수팀의 '셀' 논문으로도 보다 자세히 확인됐다.
일부 유전학자들은 박 교수팀의 연구 논문엔 이 같은 최신 연구 결과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데이터 수에 있어서도 아쉬움이 지적됐다.

이번 연구는 드넓은 아시아 전역에서 수만 년 사이에 일어난 인구집단의 이동을 115개 고대인 데이터로 분석했다.

국내 한 유전학자는 "제한된 양의 게놈 분석으로 인류 대이동을 밝히는 건 무리가 따른다"고 말했다.

또 "여러 인구집단이 시대별로 어떻게 혼합됐는지 구체적 과정을 밝힌 부분(계통수)도 정교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박 교수는 "추가 데이터를 확보해 더 정교화하는 과정을 진행 중"이라며 "선남방계(북아시아 지역)의 후손이 아시아 전반에 큰 변화 없이 퍼져 살다 약 5000~4000년 전 남중국에서 시작된 새 기술을 지닌 인류의 팽창으로 격변을 맞았고, 한국인 역시 이 과정에서 형성됐다는 '큰 그림'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 먼지가 쌓이듯 DNA에도 변이가 일정한 속도로 축적된다.

'분자시계'는 그 축적량을 측정해 등장 시간을 역으로 추정하는 기술이다.

1987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하나의 가설이 나왔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대)의 알란 윌슨은 세계 각지 147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모든 인류는 한 어머니와 한 아버지의 후손이고,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발생한 후손들이 세계 각지로 이주해 모든 인류의 부모가 됐다고 발표했다.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는 "미토콘드리아 DNA의 다양성은 중요한 정보가 있지만, 다양성 돌연변이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분자시계 접근법이 맞는지는 논란이 있다"며 "돌연변이 발생 시점이 집단이나 종의 발생 시점은 아니다"고 말했다.

러시아 극동 지방의 악마문동굴에서 발견된 머리뼈 ⓒUNIST 제공
최근 학계서 한국인 기원 추적 연구 잇따라  

이런 논란 속에서도 윌슨의 '미토콘드리아 이브' 이론 이후 국내에서는 한국인의 기원을 추적하는 연구가 잇따랐다. 

방민규 박사는 '생물인류학 자료로 본 한국인 기원문제에 대한 연구(2019년)' 논문을 통해 한국인의 남방계(중국 남부인) 유전자 비중은 40% 이상이라고 밝혔다. 

유전학자인 이홍규의 저서 《한국인의 기원》(2010년)에 따르면, 모계 혈통을 추적하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한국인의 남방계 유전자 비중은 60%다. 

김욱 단국대 생물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몽골인보다 중국 한족 및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 특징을 보였다"고 2004년 발표한 바 있다. 

같은 해 김종일 한림의대 교수는 "한국인은 몽골인과 연관성이 높고 중국인과는 차이가 있다"는 상반된 연구 결과를 내놨다. 

종합해 보면 이들의 연구 결과는 제각각이고, 앞서 박종화 UNIST 교수팀의 논문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과 게놈 해석으로 한국인의 기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이런 진실공방에 불을 지핀 건 지난해 10월29일 '네이처'에 실린 호주 가반의학연구소와 한국 기초과학연구원(IBS)의 논문이다.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으로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의 기원 시점과 발상지를 20만 년 전 남아프리카로 지목하면서다. 고인류학자와 유전학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이견이 나왔다. 

집단유전학자인 정충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와 차이가 있어 게놈을 해독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현생인류를 다루는 연구는 매우 까다롭다"고 말했다. 영국의 고인류학자 크리스 스트링거 런던 자연사박물관 교수는 "우리(현생인류)는 아프리카 다양한 곳의 선조로부터 영향을 받은 뒤섞인 존재(amalgam)"라며 "유전자의 일부만으로 이렇게 조각난 인류 기원의 복잡함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게놈 안에서 인류라는 종이 생겨났다. 생명체 기록의 비밀을 담고 있는 게놈의 암호가 하나둘 해독되면서 한국인의 기원도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다만 광범위한 게놈 해석과 데이터 축적이 숙제로 남아 있다. 한동안 진실공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종화 교수는 "한국인의 기원은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아시아 인류집단과 밀접하게 엉켜 있는 일종의 친족체로 봐야 한다"며 "게놈을 해석하면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슈 · 흥미로운 과학 뉴스

출처:(시사저널=박치현 영남본부 기자) 
박치현 영남본부 기자 입력 2020.09.10. 

경문대왕님(景文大王主), 문의황후님(文懿皇后主), 대랑님(大娘主)이 석등을 세웠다’.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의 개선사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통일신라시대 석등(보물 제111호 개선사석등)이 서있다.

 

높이가 약 3.5m나 되는 석등의 8각 기둥에는 해서체로 쓴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 미뤄볼 때 석등건립연대는 868(경문왕 8)이 분명하고, 명문은 891(진성여왕 5)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경문왕과 부인인 문의황후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대랑은 누구일까.

왕와 왕후와 같은 반열에 있었다면 대단한 신분일 터이고, 여자 ()’자를 써서 대랑이라 했다면 여성이 확실하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까지는 대랑’(대낭)이 경문왕의 장녀인 진성여왕(재위 887~897)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즉 일본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일본어로 딸은 무스메(むすめ·)’이며, 대랑(大娘·おおいらつめ)은 귀인의 맏딸을 공경하여 부르는 말”(<잡고>·1934)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석등 명문에 등장하는 대랑은 경문왕의 맏딸인 진성여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국내 연구자들은 대랑을 일본어식으로 해석한 아유카이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다.

 

전남 담양 개선사지 석등. 안내판에 대랑진성여왕이라고 표기해놓았다.

 

진성여왕이냐 경문왕의 두번째 부인이냐

그런데 최근 개선사 석등기에 등장하는 대랑이 진성여왕이 아니라 경문왕의 두번째 부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신라사 전공인 김창겸 김천대 교수는 신라사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신라사학보> 49호에 발표한 논문 신라 개선사 석등의 건립과 대랑주의 정체에서 대랑=경문왕의 차비(次妃)’임을 논증했다.

김창겸 교수는 우선 ()’을 일본어로 딸, 무스메(むすめ)’로 읽은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예부터 신라시대의 은 왕과 왕족, 귀족의 부인이나 어머니를 지칭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추왕(262~283)의 부인(왕비)은 광명랑(光明娘)이고, 명랑법사의 어머니는 법승랑이다.

“642(선덕여왕 11) 김춘추(태종무열왕·654~661)의 딸인 고타소랑이 남편(품석)을 따라 죽었다”(<삼국사기>)는 기록도 있다.

이 왕비이거나 왕족인 성인 부인이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경문왕에게 자식이 진성여왕만 있는게 아니었다.

태자 정(헌강왕·875~886)과 둘째 황(정강왕·886~887) 등 진성여왕의 오빠가 둘이나 있다.

그렇다면 왜 개선사 석등을 건립하는데 태자를 비롯한 오빠 둘을 제치고 셋째인 만(·진성여왕)의 이름만 넣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또 석등기를 쓴 891년이면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지 5년이나 지났을 때였다.

재위 중인 임금(진성여왕)이 왜 굳이 석등기를 쓰면서 대랑이라 표기했을까.

재위중인 임금이라면 마땅히 금상(今上)’이나 진성여왕의 생전 이름(·)을 따서 만왕(曼王)’이라고 해야 옳다.

비근한 예가 있다.

863(경문왕 3) 경문왕이 건립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출토 사리함기에는 국왕(國王)’금상으로, 871(경문왕 11) 중수한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에는 금상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개선사 석등기에 등장하는 대랑은 당시 재위중이던 진성여왕이 아니라 경문대왕의 두번째 부인, 차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게 김창겸 교수의 견해다.

 

863년 경문왕이 건립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출토 사리함기에는 국왕(國王)’금상(今上)’으로, 870년 경문왕이 세운 보림사 북탑지에는 자신의 다른 이름인 의왕(疑王)’으로, 역시 경문왕이 871년 중수한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에는 금상(今上)’으로 표기했다.

만약 개선사 석등을 당시 재위중인 진성여왕이 조성했다면 대랑이 아니라 금상, 혹은 국왕, 혹은 만왕(진성여왕의 본 이름) 등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863년 경문왕이 건립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출토 사리함기에는 국왕(國王)’금상(今上)’으로, 870년 경문왕이 세운 보림사 북탑지에는 자신의 다른 이름인 의왕(疑王)’으로, 역시 경문왕이 871년 중수한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에는 금상(今上)’으로 표기했다.

만약 개선사 석등을 당시 재위중인 진성여왕이 조성했다면 대랑이 아니라 금상, 혹은 국왕, 혹은 만왕(진성여왕의 본 이름) 등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8609월의 사위 겸 후계자 청문회

그렇다면 경문왕과 정부인 문의황후, 그리고 두번째 부인인 차비의 사연을 더듬어보자.

860(헌안왕 4) 9월 경주 안압지 서쪽 임해전에서 자못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 귀족과 대소신료 전체를 모은 헌안왕이 국선(화랑 중 우두머리)응렴을 두고 사위이자 후계자 청문회를 치르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응렴이 15, <삼국유사>18살에 국선(화랑)이 된 20살 청년이라고 다르게 기술했다.

 

그대는 나라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지? 그래 만나본 사람 중 배울만한 사람을 만났더냐”(헌안왕)

 

. 신은 세사람을 보았는데 자못 착한 행실이 있었사옵나이다.”(응렴)

 

그래. 세사람이나? 어디 한번 말해보라.”(헌안왕)

 

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의 자제였는데 다른 사람과 사귀면서 자기를 먼저 내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늘 남의 아래에 자리했습니다.”(응렴)

 

그래 다른 두사람은?”(헌안왕)

 

또 한사람은 부잣집 자제였는데, 사치 하지 않고 늘 삼베옷만 입으면서도 스스로 즐거워했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권세로 사람을 억누르는 일이 없었습니다.”(응렴)

 

그러자 헌안왕은 부인(왕후)에게 귓속말로 칭찬했다.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저런(응렴) 청년이 없었습니다.”

 

헌안왕은 내게 올해 20, 19살짜리 두 딸이 있다.

그대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고 합격점을 내렸다.

응렴은 감사의 절을 올린 뒤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알렸다.

응렴의 집에서 긴급 가족 회의가 열렸다.

맏공주는 매우 못났고(寒寢)’ 둘째 공주는 엄청 예쁘니(甚美)’ 둘째 공주에게 장가가는 게 좋겠다.”

706(성덕왕 5) 지은 황복사 금동사리함기에는 융기 대왕’, 844(문성왕 6) 지은 염거화상탑지에는 경응 대왕등 재위중인 왕(성덕왕과 문성왕)의 생전 이름이 등장한다

 

화랑들이 엄청 예쁜 둘째공주와 혼인 막은 이유

가족회의 결과 엄청 예쁜둘째공주를 낙점했지만 응렴은 쉽게 결정하지는 못했다.

왕실 혼사가 아닌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저하던 응렴은 흥륜사의 스님에게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언니에게 장가들면 세가지 이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삼국사기>는 이 세가지가 무엇인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삼국유사> 기록이 구체적이다.

흥륜사의 스님이란 바로 낭도의 우두머리인 범교사였다는 것이다.

즉 범교사는 응렴이 외모가 뛰어난 둘째공주로 혼처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응렴)께서 둘째공주를 마음에 두셨다면서요. 절대 안됩니다. 만약 둘째공주에게 장가 간다면 내(범교사)가 낭(응렴)의 면전에서 죽어버릴 겁니다.”

 

이런 협박이 어디 있는가.

둘째 공주를 택하면 내가 당신 앞에서 죽을 것이라니. 아마도 범교사가 화랑도의 뜻을 모아 반드시 맏공주와 혼인해야 한다고 촉구하려고 달려온 것이리라.

화랑도는 국선 응렴이 맏공주의 남자가 되어야 후계자의 자리에 오른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결국 응렴은 범교사의 협박성 권유에 마음을 돌린 뒤 헌안왕에게 맏공주를 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헌안왕은 응렴을 사윗감으로 결정한 뒤 4개월여 만에 승하한다.

헌안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었다.

그렇다면 두 딸 중 한 사람은 선덕여왕(재위 632~647)과 진덕여왕(647~654)의 뒤를 이어 세번째 여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헌안왕은 두 딸을 외면했다.

 

861(헌안왕 5) 129일 병석에 누워 위독해진 헌안왕이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은 없고 딸만 두었다.

물론 예전에 선덕·진덕여왕이 있었지만 그것은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격이니 본받을 수 없다.

사위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삼국사기> ‘신라본기·헌안왕조’)

 

헌안왕은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준 역사상 유일한 군주가 됐다.

물론 한가지 놓쳐서는 안될 포인트가 있다.

바로 경문왕과 장인 헌안왕의 사이이다.

즉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이기도 하지만 헌안왕의 재종손(6촌 손자뻘)인 셈이다.

헌안왕의 두 딸은 경문왕의 7촌 고모가 된다.

한마디로 경문왕은 7촌 고모들과 혼인한 셈이다. 알다시피 신라왕실에서 근친결혼은 다반사였다.

 

지금부터 1160년전인 860(헌안왕 4) 사위 후보청문회가 열린 임해전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는 경주 월지와 동궁.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맏공주, 둘째공주를 모두 부인으로 얻었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범교사가 언급한 세가지란 무엇인가.

헌안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오른 경문왕(응렴)에게 범교사가 세가지를 설명한다.

맏공주를 택함으로써 장인(헌안왕)과 장모(왕비)에게 기쁨을 주었고, 총애도 깊어졌으니 그것이 첫번째이고, 덕분에 왕위에 올랐으니 그것이 두번째이며, 왕위에 올라서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작은 딸마저 부인으로 맞았으니 이것이 세번째 이로움 아니겠습니까.”(<삼국사기> <삼국유사>)

 

경문왕의 입이 귀에 걸렸다. 경문왕은 범교사에게 대덕이라는 벼슬과 황금 130냥을 하사했다.

 

<삼국사기>는 실제로 경문왕이 (재위 3년 만인) 863년 왕비(정부인)의 동생을 둘째부인, 즉 차비(次妃)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언니인 정부인(왕비)는 당나라의 정식책봉으로 문의왕후가 되었다(866).

 

하지만 동생인 경문왕의 둘째부인은 아무런 책봉도 받지못해 역사서에 그저 차비로만 기록됐다.

 

이외에도 경문왕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유독 많다.

임금의 침전에 늘 뱀이 몰려 들었는데, 경문왕은 언제나 (뱀처럼) 혀를 내밀며 잤다”(<삼국유사>)는 뱀 설화가 전한다.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어져서 그 비밀을 혼자 알고 있던 복두장(임금의 관모를 만드는 장인)이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쳤다”(<삼국유사>)당나귀귀 설화의 주인공도 경문왕이다.

 

이렇듯 두 공주를 둘러싼 경문왕의 혼인과 즉위 과정, 그리고 그를 둘러싼 갖가지 이적(異蹟) 등은 어찌 보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스토리라 할 수 있다.

또한 경문왕이 엄청 예쁜둘째 공주를 잊지못해 결국 두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지만 정부인을 내치거나 홀대하지 않았다.

정부인과의 사이에 21녀를 낳았고, 그 셋 모두 임금(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이 되었으니 말이다.

 

신라 원성왕 이후의 왕실계보도. 근친혼인이 다반사였던 신라에서는 하대에 들어 김씨 간 치열한 왕권다툼이 벌어졌다.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이기도 하지만 헌안왕의 제종손(6촌 손자뻘)이다.

헌안왕의 두 딸은 경문왕의 7촌 고모가 된다.

한마디로 경문왕은 7촌 고모들과 혼인한 셈이다.

 

임해전 청문회의 이면

 

그러나 반전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8609월 임해전에서 열린 사위 면접 및 후계자 지명 청문회가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최치원(857~?)이 지었다는 숭복사비문에 수상한 내용이 담겨있다.

왕이 승하한 뒤 왕위 각축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까마귀처럼 모이는 무리는 있었다. 그러나 어짊와 유순함, 어른스러움, 인자로움 덕분에 백성들이 추대했으니.”

 

역사에서 백성이나 국인(國人)에 의해 추대됐다는 기록은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을 가리킨다.

즉 헌안왕이 죽자 피비린내 나는 왕권다툼은 벌이지 않았지만 뭔가 정치세력간 대립은 존재했고, 결국 백성들이 경문왕을 추대했다는 것이다.

8609월의 임해전 청문회도 그렇고, 4개월 뒤 헌안왕 사후의 상황도 그렇고 경문왕의 후계자 결정과 왕위등극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뜻이다.

 

1160년전 사위면접시험이 벌어졌던 임해전의 현재모습. 이 시험에서 합격한 경문왕은 화랑들에 의해 엄청 예쁜둘째 공주 대신 맏공주를 배필로 맞이해야 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김씨끼리 죽고죽인 왕위쟁탈전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실 신라, 특히 하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복잡함에 포기하고픈 생각이 절로 든다.

부계, 모계, 비계가 모두 근친혼으로 맺어졌고, 게다가 형제간, 사촌간, 혹은 소수의 진골귀족이 뒤엉켜 죽고 죽이는 왕권다툼을 벌였으니 말이다.

촌수를 가늠하기도, 누가 누구의 편인지, 적인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36대 혜공왕(765~780)이 살해되고 선덕왕(780~785)이 즉위할 때부터 46대 문성왕(839~857)까지 60여 년 동안 무려 11명의 왕이 교체됐다.

그 중심에 원성왕(785~798)이 있었다.

원성왕(김경신)은 경쟁자인 무열왕계의 김주원(생몰년 미상)을 몰아내고 즉위했다.

이로써 원성왕계 왕통이 성립됐다. 이쯤에서 왕실 계보도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원성왕의 장남인 김인겸(?~791)의 후손들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

그들이 인겸계인 소성왕(39·799~800)-애장왕(40·800~809)-헌덕왕(41·809~826)-흥덕왕(42·826~836)이다.

 

하지만 흥덕왕이 후사없이 승하하면서 혼란이 생긴다.

원성왕의 셋째인 김예영(생몰년 미상)의 둘째 아들인 김균정과, 손자인 김계륭이 각축을 벌인다.

김계륭은 김예영의 첫째아들인 김헌정(생몰년 미상)의 아들이다.

삼촌(김균정)과 조카(김계륭)가 왕권다툼을 벌인 것이다.

같은 예영계에서 균정계헌정계’(김계륭)로 분화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조카 김계륭이 승리를 거뒀다.

김계륭은 신라의 43대 희강왕(836~838)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희강왕은 3년을 버티지 못한다.

흥덕왕 이후 왕권에서 밀려난 원성왕의 첫째 아들 김인겸의 손자인 김명(44대 민애왕·838~839)에게 피살된다.

왕위는 잠시 인겸계로 넘어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전에 조카인 희강왕(김계륭)에게 피살된 삼촌(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이 청해진 대사 장보고(?~846)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김명)을 죽인다.

이로써 이른바 균정파인 김우징은 왕위(신무왕·재위 839)에 오른다.

하지만 신무왕은 1년을 버티지 못했고, 그 아들인 문성왕(45·재위 839~857)이 뒤를 잇는다.

문성왕은 죽기 전에 숙부인 의정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 유언에 따라 등극한 이가 문성왕의 숙부이자 경문왕의 장인인 헌안왕(45·재위 857~861)이다.

 

그러니까 원성왕 이후 왕실계보를 정리하면 이렇다.

원성왕의 첫째인 인겸계’(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로 이어가다가 셋째인 예영계에서 분화된 헌정계’(희강왕)를 거쳐 잠깐 인겸계’(민애왕)로 복귀했다.

그런 뒤 다시 예영계가운데 균정계’(신무왕·문성왕·헌안왕)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경문왕은 누구인가.

헌정계인 희강왕의 손자였다.

그렇다면 희강왕에게 피살된 김균정의 후손인 헌안왕으로서는 경문왕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헌안왕은 경문왕을 사위로 맞이하고, 그 사위에게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문성왕 시대부터 모색되었던 인겸계와 예영계, 그리고 예영계 내에서도 다시 골육상쟁을 벌인 헌정계와 균정계 사이의 화합을 완성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는가.

8609월의 임해전 청문회와 8611월의 헌안왕 유언 기록은 장편 사극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을만큼 흥미진진하다.

 

 

황룡사터.

경문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871년에는 황룡사9층목탑을 개조했고, 월상루까지 중수했다.

신라는 경문왕과 헌강왕 시절인 20여년간 반짝했다는 평도 받는다.|

 

경문왕을 향한 두개의 시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경문왕의 치적과 관련해서는 호불호의 평가가 있는 것 같다.

경문왕은 문한(문서 문장 작성관리)과 근시(近侍·승정원 사관 등 임금 보좌 기구) 등을 확장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했다는 평을 받는다. 혼란했던 신라 하대가 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 등 경문왕의 세 자녀로 이어졌다.

경문왕과 헌강왕 재위기간(20여년)이 신라의 소강기(小康期)’였다는 평도 있다.

880(헌강왕 6) 경문왕의 아들인 헌강왕이 월상루에 올라 경주 시내를 바라보며 이렇게 자화자찬했다지 않은가.

 

백성들이 초가가 아닌 기와집을 짓고 나무 대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게 사실이냐.”

 

그러자 대신들은 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진 것은 모두 전하 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삼국사기>경주~동해까지 집과 담장이 죽 이어졌으며 초가가 하나도 없었고, 풍악과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평가도 있다.

헌안왕의 사위로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범원성왕계의 단합을 위해 불사를 일으킨다.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를 중창하고(861) 동화사 비로암에 민애왕(인겸계)의 원탑을 건립했다.

(863)867년에는 자신의 청문회가 열린 임해전을 중수했고, 870년에는 장인인 헌안왕을 위해 보림사 쌍탑을 건립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을 개조했고, 월상루까지 중수했다.

담양 개선사 석등도 8682월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토목공사는 백성들을 피곤하게 했다.

이를 빌미로 반대세력들의 모반 또한 이어졌다.

 

이찬 윤흥 형제(866), 김현·김예 형제(868), 근종(874)의 모반사건이 줄을 이었다.

근종 모반 사건 때는 대궐까지 침범할 정도로 위기일발이었다.

신라는 경문왕이 승하한 뒤(875) 60년 만에 멸망했다.

경문왕과 헌강왕 시대 경주 시내에 울려퍼진 풍악소리는 신라 천년 사직의 종말을 예고하는 조짐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개선사 석등에 새겨진 대랑명문을 공부하다보니 그 복잡한 신라 하대의 왕실계보도와 멸망요인까지 더듬어보았다.

괜한 오지랖일 터이니 읽기 힘든 독자 여러분은 8609월의 임해전 청문회 정도까지만 흥미있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참고자료>

김창겸, ‘신라 개석사석등의 건립과 대낭주의 정체’, <신라사학보> 49, 신라사학회, 2020

김창겸, <신라 하대 국왕과 정치사>, 온샘, 2018

조범환, ‘신라 하대 경문왕의 불교정책’, <신라문화> 16,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99

장일규, ‘응렴의 결혼과 그 정치적 의미’, <신라사학보> 22, 신라사학회, 2011

국립중앙박물관, <문자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2011

국립경주박물관, <문자로 본 신라-신라인의 기록과 필적>, 2002

<출처>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정의] 강릉에 거주하며 본관이 영일(迎日)인 성씨.

[연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영일정씨의 원조는 신라육촌(新羅六村의 하나인 자산진지부(觜山珍支部) 촌장인 지백호(知伯虎)이다. 

지백호는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신라 건국에 공을 세운 인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진지부(珍支部)가 본피부(本彼府)로 개칭되면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지백호의 원손인 정의경(鄭宜卿)은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내다가 영일현백(迎日縣伯)에 임명되어 후손들이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입향경위]
강릉 지역 영일정씨들은 대체로 포은 정몽주의 8세손 정두형(鄭斗亨)의 후손들이다
정두형은 154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옥당(翰林玉堂)을 거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지내다가 

1570년 특별히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다. 
강릉인근 삼척에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선조는 그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어머니 봉양할 수 있도록 특별히 강릉부사에 제수하였다. 
강릉부사로 부임한 이듬해에 아버지 상을 당하자 사직하고 정착하게 되었다.

[세거현황]
정두형은 5형제를 두었는데, 정붕(鄭鵬), 정봉(鄭鳳), 정학(鄭鶴) 3형제는 삼척에 정착하였고, 

셋째 정곤(鄭鵾)은 옥계면, 

다섯째 정란(鄭鸞)은 구정면 학산리에 세거하였다. 
또 정두형의 백형(伯兄) 정규형(鄭奎亨)의 후손 정준방(鄭俊邦)이 학산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태백 작은할머니


출처: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호민

[정의]

강원도 강릉에 입향한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하는 홍씨(洪氏).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하맹방리에 형성된 남양홍씨 세거지./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개설]

고려시대 춘천교수를 지낸 홍준(洪濬)이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하맹방리에 당우를 짓고 우거를 하면서 형성된 남양홍씨 세거지이다.

 

[연원]

1.남양홍씨의 시조는 홍은열(洪殷悅)이고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일대에 입강한 시조는 홍대기(洪大棋),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산북리 일대의 입강시조는 홍충양(洪忠陽)이다.

 

2.남양홍씨는 동성동본이나 조상을 달리하는 두 계보, 즉 당홍과 토홍으로 나뉜다.

당홍은 당태종이 문화사절단으로 파견한 팔학사 가운데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를 선시조로 하는 귀화파를 이른다.

당홍의 시조는 고구려 제27대 왕인 영류왕(榮留王) 때 당()나라에서 귀화한 학사(學士) 홍천하(洪天河)의 후예 홍은열(洪殷悅)이다.

남양홍씨삼척 입향조이며 교수공파 시조이기도 한 홍준은 바로 이 당홍계이다.

그는 1388(우왕 14) 조선의 태조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치적 격변을 피하여 삼척 지역으로 은거하였는데, 교수당(敎授堂)은 그의 거소였다.

그러나 시조 홍천하 이후의 세계(世系)가 확실치 않아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낸 홍은열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홍은열의 원래 이름은 홍유(洪儒)였다.

남양 홍씨 중에서 강원도 춘천과 삼척, 강릉지역으로 낙향한 계파는 귀화파인 당홍계입니다.

강원도 낙향 파조는 남양군파 첨의를 거쳐 삼사(三司;3)를 역임하고 삼중대광(1)에 올라 남양군에 봉해진 홍자주자(洪澍) 어른이시지요.

홍주 공은 슬하에 네 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흥()은 풍채가 좋기로 소문났던 어른으로 강원도 관찰사와 호조참판을 지냈고,

둘째 은()은 삼사 좌윤,

셋째 징()은 판밀직사, 한성부사, 대제학(2) 등을 역임하고 광정대부로 당산군(唐山君)에 봉해졌고,

막내 빈()은 판사를 지냈다고 기록에 전합니다.”

 

삼척, 강릉으로 낙향한 할아버지는 교수공계입니다.

낙향조의 부친 상자직자 어른은 14세손 홍징의 후손인데 평안도 출신들을 홀대한다고 불만을 품고 반란을 주도했던 홍경래의 후손이 되기도하다.

 

-남양홍씨의 시조는 홍은열(洪殷悅)이고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일대에 입강한 시조는 홍대기(洪大棋),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산북리 일대의 입강시조는 홍충양(洪忠陽)이다.

 

[입향 경위]

-고려시대 춘천교수를 지낸 홍준(洪濬)이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하맹방리에 정착하면서 남양홍씨 교수공파가 입향하였다. 교수당은 남양홍씨 교수공파 종택이다.

-홍충양은 강릉김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생원공 홍인국(洪仁國), 홍인업(洪仁業), 홍인선(洪仁善) 등이다. 이 세 아들이 외가인 강릉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현황]

삼척의 남양홍씨 교수공파 종가가 자리한 맹방리는 맹방(孟芳)’ 혹은 매향방(埋香坊)’에서 상고하는데, 고려시대인 1309(충선왕 원년) 용화회주 미륵의 하강을 기원하기 위해 향목(香木) 250주를 맹방정(孟芳汀)에 파묻었다는 기록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맹방리는 조선 후기 철종 연간에 상· 하맹방리로 분리되었고, 195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분화되기 이전까지 강릉김씨·평택임씨·강릉최씨·삼척김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이주해 오기도 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집성촌 자료에 따르면, 당시 상·하맹방리에는 남양홍씨 각각 17호와 39호가 살고 있었으며, 삼척김씨 19, 강릉김씨 23호가 같은 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남양홍씨 교수공파 종가는 이 마을을 비롯하여 북평[현 동해시 효가동]과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리 등에 산재한 소종친회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고 있다. 특히 입향조 교수공의 음력 10월 초하루 전사[時祭]에는 인근에 사는 종중원들이 모인다.


[묘역]
홍대기의 묘소는 세거지인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에 있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산북리에는 홍인국(洪仁國), 홍인업(洪仁業), 홍인선(洪仁善)의 묘제를 위한 전청이 있다

 

 

[관련 유적]

맹방리에 있는 해운정(海雲亭)1769(영조 45)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당시 홍계하의 강도소(講道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해운정은 근세 들어 남양 홍씨 문중에서 중건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출처: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임종헌의 세상사는 이야기, 강원도민일보

[정의]
김위옹을 시조로 하고 김복석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울진군의 세거 성씨.

[연원]
삼척김씨의 시조인 김위옹은 신라 경순왕의 막내아들인 김추의 아들로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으로 좌승상에 이르렀고 실직군왕에 봉해졌다. 

실직은 삼척의 옛 지명이다. 

삼척김씨는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비롯한 고관을 다수 배출하였고, 고려가 멸망하자 문하시중이었던 김인궤는 공양왕의 복위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입향경위]
1519년(중종 14)에 울진에 정착한 사헌부감찰 김복석이 가장 먼저 입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45년(명종 원년)에 김의명은 을사사화를 피하여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에 입향하였다. 

선조 때 고원훈도를 지낸 김건은 임진왜란 이후에 논공행상의 부당함에 관직을 버리고 울진에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효행이 알려진 가선대부 김동철은 조선 숙종 때인 1680년에 강원도 삼척시에서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입향하였다.

[현황]
삼척김씨들은 주로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부구리·평해읍 월송리를 비롯하여 근남면·온정면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동해안을 따라 울진군의 북쪽과 남쪽에 고루 분포하고 있지만, 입향조들이 주로 북쪽에 정착함으로써 후손들도 울진군 북면 일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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