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 덕진동 전북대학교와 덕진체련공원 사이에 제사 때를 빼고는 늘 닫혀 있는 문이 있다. 
문 너머 공간 이름은 조경단(肇慶壇)이다.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또 있다. 

옛 전주부성 남문 이름은 풍남문(豐南門)이고 서문 이름은 패서문(沛西門)이다. 

풍(豐)과 패(沛)는 한나라 유방이 군사를 일으킨 강소성 패군 풍현을 가리킨다. 즉 제왕의 땅이라는 말이다.
이쯤이면 조경단이 무엇이고 풍남문과 패서문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리라.

조선 왕실에 전주는 풍패지향(豊沛之鄕), 새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이라는 말이다.

조경단은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李翰)을 기리는 제단이다. 

그리고 강원도 삼척에는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 무덤, 준경묘(濬慶墓)가 있다. 518년 이어진 조선 왕실은 건국 507년 뒤인 1899년에야 이들을 찾아내 단과 묘를 만들었다. 

전주에서 시작해 두만강 건너 알동(斡東)까지 이어진 전주 이씨 왕실 흥망사 이야기다.

전주 이씨 시조 묘 조경단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 위치를 찾지 못해 대신 만든 제단, '조경단'.


전주를 떠난 전주 이씨들
성품이 호방하여 천하를 경략할 뜻을 가진 전주 호족 이안사는 때마침 전주에 파견된 산성별감과 관기(官妓)를 두고 다투었다. 이에 이안사는 화를 피해 수하 식솔 170여 호와 함께 강릉도 삼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그 산성별감이 하필이면 강릉도 안렴사로 부임하자 다시 화를 피해 바다를 건너 북쪽 덕원, 곧 함흥 땅으로 옮겼다. (1253년 그 관료가 순찰사로 삼척에 온다는 말에 '앉아 죽느니' 하며 의주로, 함흥으로, 원나라 땅으로 이주했다. 이후 후손들은 다루가치라는 원나라 세습 관리로 살며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웠다.)

이안사는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다.

 

함흥은 그때 몽골 땅이었다.(‘태조실록’ 총서)
삼척을 떠나기 전 이안사 부친 이양무가 죽었다. 
삼척 지역 설화에 따르면 묏자리를 찾는 이안사에게 한 승려가 “소 백 마리를 잡아서 개토제를 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면 5대 뒤 임금이 난다”고 했다. 

가난한 이안사는 일백 백[百] 대신 흰 백[白]을 써서 흰 소를 제물로 삼고 황금 대신 누런 귀릿짚으로 관을 삼아 장사를 치렀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선원계보 17세 양무) ‘백우금관(百牛金棺)’ 신화다. 

예언대로 이안사 5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금의환향한 다루가치들
이성계(5대)와 이방원(6대)까지 이들을 세종은 ‘용비어천가’에서 해동육룡(海東六龍)이라 불렀다. 

(훗날 용비어천가 가사 '육룡이 나라샤'는 목조로 추증된 이안사부터 태종 이방원까지 여섯 왕을 칭송하는 말이다.)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과 이자춘(환조)과 이성계(태조)와 이방원(태종)이다. 

'그 육룡이 바로 이곳 삼척에서 잉태됐다'고 조선 왕실은 규정했다. 왕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더없이 중요한 곳이었다. 

1254년 이안사는 두만강 건너 지금 러시아 땅인 알동(斡東)으로 옮겨 원나라 지역 관리가 되었다. 

그 손자 이춘은 몽골명이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였고 그 아들 이자춘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다. 

이들은 몽골 지역 수장인 다루가치로 넓은 영역을 통치했다.(‘태조실록’ 총서)


그러다 이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흑룡과 싸우던 백룡을 도와주니 백룡이 ‘큰 경사가 자손에게 있으리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아들 이자춘이 고려에 귀순해 공민왕 휘하에서 몽골을 격퇴하고, 영흥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가 이성계다.

이성계 또한 왜구 격퇴에 무공을 세우고 드디어 새 나라를 세웠다. 

백우금관 설화가 실현된 것이며 고조 이안사 때 쫓기듯 떠난 고향으로 찬란하게 복귀한 것이다. 

그러니 삼척과 고향 전주가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대한제국 시대인 1899년 고종 명에 의해 세운 조경단 비석. '대한 조경단'이라고 적혀 있다. 대한의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제왕의 땅, 풍패지향

 

전주는 전주 이씨 왕실의 고향이었다. 

태종 때 조선왕조는 전주에 어용전(御容殿)을 건립했다. 

세종 때 경기전(慶基殿)으로 개칭된 어용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전까지 제왕의 땅, 풍패지향은 함흥과 함길도(함경도) 일대였다. 

함길도 관찰사 정갑손은 “본도(本道)는 우리 조정의 풍패”라 했고(1443년 4월 7일 ‘세종실록’) 선조 때에도 “(함길도는) 풍패의 땅이므로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1605년 5월 29일 ‘선조실록’)
삼척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왕실에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제후 조상묘는 4대까지 제사를 지내는 유교 예법에 따라 이성계 5대조인 이양무는 예법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

(이욱, ‘조선시대 왕실 원조의 무덤 찾기’, 종교연구 60집, 한국종교학회, 2010)

1580년 강원도 감사 정철이 “천하 명당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고 보고하며 정비를 요청했지만 묵살됐다.
왜란과 호란 두 전란이 끝나고 양반 사회가 안정되던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족보 제작과 시조묘 찾기 열풍이 불었다.

고조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사대봉사(四代奉祀)’ 한계를 뛰어넘어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묘제(墓祭)를 통해 가문을 결속하려 한 것이다.(이욱, 앞 논문)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려면 묘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시조 묘가 있는 전주가 풍패지향으로 부각됐고, 백우금관 건국설화를 품은 삼척이 성지(聖地)로 부각됐다.

 


강원도 삼척에 있는 준경묘.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무덤이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졌다.
현상수배 준경묘

이안사가 삼척을 떠난 지 139년이 흘렀으니 무덤 위치는 잊힌 지 오래였다. 삼척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1640년 인조 때는 풍기 사람 박지영이 “묘를 꿈에서 찾았다”며 몽서(夢書)를 올렸고, 이듬해 최명길은 “가끔 꿈이 들어맞기도 한다”며 조사를 요구했다.(1640년 7월 15일, 1641년 5월 3일 ‘인조실록’) 인조는 사람을 보내 지형을 조사하고 땅을 파봤으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인조는 관련자들에게 상을 줘 제보를 권장했다.(1649년 3월 24일 ‘인조실록’)

‘찾는 사람에게 백금(百金)과 판윤 벼슬을 준다’는 말에 제보가 봇물처럼 터졌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자 허망(虛妄)한 말을 한 혐의로 벌을 받곤 했다.(1704년 1월 12일 ‘숙종실록’) 대신 이양무와 그 아내 이씨 묘로 추정되는 분묘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하는 선에서 세월이 갔다.

진정한 제왕의 땅, 전주
1767년 영조 43년 전주성이 대화재로 불탔다. 

그러자 전라관찰사 홍낙인은 남문과 서문을 재건하고 이름을 각각 풍남문과 패서문이라 이름 붙였다. 진정한 제왕의 성이 된 것이다.

1771년 영조 47년 전주 경기전 북쪽에 조경묘(肇慶廟)가 건립됐다. 

그해 10월 7일 영조는 시조 이한 사당 건립을 전격 지시했다. “내가 여든이 되어 거의 13세 할아버지 얼굴을 뵙게 될 판인데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1771년 10월 7일 ‘영조실록’) 그달 21일 터 닦이 공사가 완료되고 11월 24일 사당이 완공됐다.

왕족인 전주 이씨들 상소가 이어진 데다 영조 본인 또한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시조 이한의 묘역을 전혀 찾을 수 없는 탓에 사당만 지었다. 

완공 사흘 뒤 특별 과거를 실시했는데, 급제자 가운데 전주 이씨와 (시조모인) 경주 김씨가 없었다. 

그러자 다음 날 두 성씨만 대상으로 또 시험을 치러 4명을 급제시켰다. 

전주는 조선 창업자 태조의 본향에서 조선 창업의 땅으로 격상됐다.(이동희 ‘조선왕실의 시조사당 조경묘 창건과 그 역사적 의미’, 국가 문화재 승격을 위한 조경단·조경묘 학술대회 자료, 전주역사박물관, 2020)

고종이 해결한 준경묘와 조경단
한참 세월이 흐른 1898년 10월 24일 의정부 찬정 이종건이 시조묘를 모시지 못해 원통하다고 상소를 했다. 

고종이 답했다. “일반 백성도 조상을 모시는데 하물며 황제 집안인데 못하겠는가.”(1898년 양력 10월 24일 ‘고종실록’) 1899년 1월 25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전주 건지산에 제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고 명했다. 

동시에 삼척에 있는 이양무 부부묘를 준경묘와 영경묘로 이름하고 이를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물증이 없어서 500년을 미루던 대역사가 한번에 해결된 것이다.
조선 왕실은 건국 이래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묘와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영조 때 시조 이한을 기리는 사당 조경묘를 전주에 짓고 고종 때 시조 묘역에 제단을 지어 조경단이라 명명했다.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묘는 찾는 데 실패해 의묘를 세웠다.

가운데 네모난 공간이 조경단, 오른쪽은 비각, 언덕 위에 시조 이한의 의묘가 보인다.

그리고 삼척에서 이성계 5대조 이양무 묘를 찾아 '준경묘'라 명명했다. 
조선 왕실은 건국 이래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묘와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영조 때 시조 이한을 기리는 사당 조경묘를 전주에 짓고 고종 때 시조 묘역에 제단을 지어 조경단이라 명명했다.

어울리지 않았던 ‘경사의 시작’
‘매천야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고종이 시조 묘를 알리기 위해 거창한 역사를 시작했는데, 너무 거창하여 원성이 행인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함경도에서 온 지관 주씨가 몰래 참서를 묻어놓았다가 발굴하였다. 

참서에는 “황제를 칭한 뒤 300년 동안 국조가 이어진다”고 돼 있었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였다. 

서울에서 감독관이 내려왔고 전북에서는 관찰사 이완용이 주관했다.’(황현, ‘매천야록’ 3권 1899년① 3.’조경단 신축', 국사편찬위)
고종은 자기 금고인 내탕고에서 5000원을 공사비로 하사했다.(1899년 양력 1월 25일 ‘고종실록’) 턱없이 부족했다.

탁지부에서는 1만원을 예비비로 추가 요청했다.(각사등록 근대편 각부청의서존안11, ‘영건청 소관 조경단 건축비 지출 청의’ 1899년 6월 20일, 국사편찬위) 이래저래 조경단 공식 공사비는 3만8058원57전이었다.(각부청의서존안14, ‘조경단 건축비 증액 지출 건’ 1900년 4월 28일) 대한제국 정부는 모자라는 공사비 보충을 위해 ‘김창석, 정귀조 등을 감독으로 임명해 비용을 지불하게 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전주의 거부(巨富)였다.’(황현, 위 책)
참 허망한 것이, 그러고 6년 뒤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또 5년 뒤 나라가 사라졌다.

뿌리는 찾았는데 그 뿌리에서 움터 창대하였던 그 나라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주에 가면, 웅지(雄志)로 세운 나라가 어떤 경로로 어떤 흥망을 겪었는지 한번 볼 일이다.
출처: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 기자  2020.12.09

성인이 된 후 어머니의 성씨와 본관을 따라 성(姓)을 변경한 아들도 어머니 종중(宗中)의 구성원 자격이 인정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종중은 “모계혈족의 자손은 종중 구성원이 될 수 없다”며 구성원 인정을 거부했지만 1· 2심에 이어 대법원까지 ‘종중의 일원임을 인정해 달라’는 아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이모씨(34·남)가 ‘용인 이씨’ 종중을 상대로 제기한 종원(宗員) 지위 확인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3일 밝혔다.

출생신고 당시 아버지의 성·본을 따른 ‘안동 김씨’였던 이씨는 2013년 어머니를 따라 자신의 성·본을 ‘용인 이씨’로 변경했다. 
그리고 2년 뒤 어머니 일가 쪽 ‘용인 이씨’ 종중에 구성원 자격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종중은 이를 거부했다. 

모계혈족의 자손을 종중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에 A씨는 종중을 상대로 소송을 내 1· 2· 3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법원은 “헌법상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 원칙에 따라 변화돼 온 법의 개정취지를 적극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부계혈족사회의 전통이 내려온 한국에서 과거 민법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것을 허락했다.

제사는 남성 혈족의 전유물이나 다름 없었고, 여성은 친아버지의 제사까지도 참여하기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여성이 종중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관습법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05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이를 뒤집었다.

“성별만을 이유로 종중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거나 차단하는 것은 가족 내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돼 온 법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성도 종중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종중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된 여성의 자손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예전에는 어머니 성을 따르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2005년 민법 개정으로 모친의 성·본을 선택해 따를 수 있게 되면서 종중 구성원 인정 여부가 사회적 쟁점이 된 것이다.

더구나 이번 사건의 원고 이씨는 출생 당시엔 ‘안동 김씨’ 문중이었지만 이후 ‘용인 이씨’로 바꾼 경우이다.
‘용인 이씨’ 종중 측은 재판에서 “종중은 본질적으로 부계혈족을 전제로 하는 단체”라며 “일가의 성과 본을 따른다는 이유로 여성 종중 구성원의 자녀를 종중에 받아들이거나 종중 변경을 허가하게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 일가 중 재산이 더 많은 쪽의 성과 본을 선택하는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성과 본의 변경은 법원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허가되고, 제도 남용 우려를 이유로 종중 구성원 범위를 판단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민법은 1990년 부계혈족과 모계혈족을 차별하지 않고 친족의 범위를 규정하도록 개정됐고, 2005년엔 양성평등이라는 헌법이념에 따라 시대 변화에 맞지 않는 호주제를 폐지했다”면서 “이런 개정 취지를 볼 때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른 후손의 종원 자격을,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른 후손과 달리 판단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출처:경향신문 2022.06.15 박용필 기자 그래픽:이아름 기자

우연히 찾게된 사이트인데, 옛자료를 관리하는곳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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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oksa.aks.ac.kr/jsp/ur/List.jsp?ur10no=tsu_0434&ur20no=Q_0434_1_F_035

이 글은 <서유록>에 나타난 노정과 글의 구성, 당시 새롭게 접하는 서구나 일본의 문물에 대한 태도, 자기재현 양상을 분석하여 강릉 김씨 부인의 문명의식과 여성의식을 살펴본 것이다.

<서유록>은 강릉 김씨 부인이 1913년 강릉에서 서울로 여행한 기록으로, <경성유록>이라는 책에 <황성신문> 기사를 번역한 것과 함께 묶여 전한다.

강릉 김씨 부인은 서울 여행을 통해 일본 군대, 일본 사람들의 장사, 일본 사람들의 주택 등을 보고 분개하는 한편, 놀라워하며 문명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릉 김씨 부인은 문명개화를 위해 여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논리와 어조는 당당하고 적극적이다.

<서유록>은 향촌 출신의 여성이 서울 여행에서의 문명 체험을 통해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가족의 일원에서 여자계의 한 여성,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강릉 김씨 부인의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와 인식은 전통적인 의식에 갇혀 있는 것으로 재현되던 구여성의 타자화된 이미지를 벗어난 새로운 구여성상을 재현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출처: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제35권 / 2017 김경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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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세기 초-기원후 3세기경 동안 약 1,000년간 흉노와 오손, 선비·오환(鮮卑·烏桓) 등 투르계와 몽골계 부족들로부터 기마전투기술을 습득하고 세형동검(細型銅劍)으로 무장한 남시베리아-북만주 기원 한국인의 선조 예맥계(濊貊係)와 숙신계(말갈계)가 한반도 중남부로 남하, 그곳에 살던 청동기, 벼농사 중심 일본인의 선조 야요이인(彌生人)을 정복했다.

 

야요이인 일부는 동화되고 나머지 수만~수십만명은 수백년간에 걸쳐 일본열도로 이주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한 야요이인은 토착 조몽인(繩文人)을 정복, 통합해 1세기까지는 남부 큐슈와 오키나와, 7세기까지는 도쿄 지역까지 야요이화했다.

# 위만조선의 멸망 그후
러시아 출신 미국 언어·문헌학자 보빈(Alexander Vovin)에 의하면 기원전 7세기 초-기원후 3세기경 흉노와 선비·오환 등 유목민족들로부터 기마전투기술을 습득하고 선진 세형동검으로 무장한 남시베리아-북만주 기원 한국인 선조가 한반도 중남부로 남하, 그곳에 살던 일본인 선조 야요이인을 정복, 동화시켰다고 한다.

'총·균·쇠(Guns, Germs, and Steel)'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도 보빈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다이아몬드는 한국인과 일본인 DNA 검사 결과를 인용해 보빈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기원전 3세기 초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의 (고)조선 침공

△기원전 2세기 초 위만조선 성립과 준왕(準王) 세력의 남하

△기원전 2세기말 위만조선이 멸망한 것도 랴오허다링허 유역에 거주하던 맥계인(貊係人) 등이 한반도 방면으로 대거 남하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인 선조는 경기도와 강원(춘천, 원주) 일부→충청→전라→경북→경남 순서로 한반도 중남부의 야요이인을 정복, 동화시켰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특정 시점 한반도 서남부 마한(馬韓)과 한반도 동남부 진·변한(辰·弁韓) 언어가 서로 다르다 했던 것은 이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이 때문에 고대 일본어 야요이어의 흔적은 평야지대 백제보다는 산악지대로 북방 기마군단에 좀 더 장기간 버틸 수 있었던 지리적으로 폐쇄적인 신라(경북)나 가야(경남) 지역에 더 많이 남아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일본어와 유사하게 들리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모'(고대 일본어로 어머니를 의미, 전북 남원)

△'토라'(고대 일본어로 호랑이를 의미, 상주 모동·모서)

△'투라미티'(고대 일본어로 앞+도로, 경주 인근) 등의 지명과 '지지(더럽다는 뜻)', '우에(上)' 등의 표현이 여전히 한국어(사투리)에 남아 있다.

신라 경덕왕 재위기(742~765년) 한자음으로 바꾸기 이전 지명에는 고대 일본어(야요이어)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야요이인 일부는 한국인 선조에 의해 정복, 동화되고, 나머지 수만~수십만명은 수백년간에 걸쳐 차례로 일본열도로 이주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한 야요이인들은 1세기까지는 남부 큐슈와 오키나와, 7세기까지는 도쿄 근처까지 야요이화했다.

야요이문화가 토착 조몽문화(繩文文化)를 대체해 나갔다.

#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한편 조예의 위(魏)와 손권의 오(吳)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던 고구려는 사마의가 지휘한 4만 위군(魏軍)에 의해 랴오둥 공손씨의 연(燕)이 멸망당한 4년 뒤인 242년, 위나라 땅이 된 랴오둥 요충지 서안평을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했다. 고구려의 선공에 자극받은 위나라 관구검
( 丘儉)은 선비·오환족이 포함된 2만 연합군을 이끌고 244년과 245년 잇달아 고구려를 침공했다.

서전(緖戰)에서 승리하여 위나라 연합군을 얕잡아 보게 된 고구려 동천왕은 5,000기를 직접 지휘해 방진(方陣)을 친 연합군을 공격했으나 병력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위나라 연합군은 동천왕 부대를 구원하러 온 재상 명림어수의 대군까지 섬멸했다.

위나라군은 기세를 타고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점령했으며,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두만강 유역 북옥저(北沃沮)로 도망한 동천왕을 추격했다.

관구검은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복속돼 있던 동해안의 동예도 공격게 했다.

백제 고이왕은 낙랑이 동예를 공격하는 틈을 타 낙랑을 습격했다.

동천왕은 246년 밀우·뉴유의 기책(奇策)으로 겨우 왕기의 위군(魏軍)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에 따르면 위나라 연합군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낙랑을 통해 퇴각했다(遂自浪而退)' 한다.

위군이 침공로를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먼 남쪽 길을 돌아 퇴각했다는 뜻이 된다.

고구려를 멸망시킬 생각을 가진 위나라가 고구려 서남쪽 낙랑군을 고구려 공격을 위한 발진(發進) 기지로 이용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고구려의 중심지 랴오닝성 동남부(환도성)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서쪽 랴오허 유역뿐만 아니라 남쪽 대동강 유역에서도 발진해 협공을 가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유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38년 사마의의 랴오둥 공손씨 연(燕)나라 공략과 244년, 245년 2차례에 걸친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은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큐슈와 혼슈를 포함한 일본 열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열도에서도 정치체제가 태동했다.

히미코(卑彌呼) 여왕의 야마타이국은 사마의가 랴오둥을 침공한 238년, 유주(幽州)의 속군(屬郡) 대방(황해도로 추정)에 사신을 파견했다.

북큐슈 야마타이를 중심으로 야마토국(大倭國)이 발전해 나갔다(야마토국의 중심이 혼슈섬 기나이라는 설도 있다).

# 한반도 최후의 야요이인
보빈에 의하면, 남부시베리아-북만주로부터 남하한 한반도인(백제인, 가야인) 일부가 2~3세기경 일본 열도로 재이주해 신공(진구) 황후, 응신(오진) 천황 등의 선조가 됐다 한다.

그에 의하면 '진구'(2~3세기)나 '오진'(3~4세기)은 고대 일본어(야요이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라 한다.

한반도 출신 2차 도래인들은 북큐슈나 혼슈섬 기나이(畿內) 일대에 이미 정착해 있던 야요이인을 제압하고 일본 열도 지도층이 됐을 것이나 11세기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인이 나중에 영국화 됐듯이 소수였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화 됐을 것이라 한다.

보빈에 의하면 금관가야인은(대가야인도) 한반도 내 최후의 야요이어 사용자들이었을 것이라 한다.

400년 광개토대왕 재위기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왜(倭)로 표현된 야요이어 세력이 한반도에서 거의 소멸됐을 것으로 본다.

광개토대왕은 396년 백제 아화왕(阿華王)의 항복을 받았으며, 400년 신라의 간청을 받아들여 5만 대군을 파병, 백제가 부추긴 금관가야와 왜 연합세력의 경주 점령을 해소한 다음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고구려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은

△충주 고구려비 기록

△경주에서 출토된 광개토왕 청동호우

△문경·영주·의성·울산 등에서 발견된 고구려계 적석총 등의 사례에서 증명된다.

# 백제문화 영향 받은 고대 일본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백제와 신라, 금관가야 등 한반도 남부세력이 약해지자 낙동강 중류 고령 중심의 대가야(반파국)와 함께 왜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 졌다.

고구려는 모용선비 잔여세력인 북연(北燕)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404년 황해도(대방 지역)까지 쳐들어 온 왜와 백제 세력을 몰아냈다.

담양, 영광, 함평, 나주, 광주(光州), 영암, 해남을 포함한 전라도 일대에는 4~6세기경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왜식묘제(倭式墓制)로 '앞부분은 각지고 뒷부분은 둥근' 형태의 왕릉급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이 대거 존재한다.

나주 반남면 일대에는 백제 왕릉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옹관고분들도 다수 보인다.

5~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나주 다시면 영동리 대형 고분에서 발굴된 인골 DNA는 조사 결과 북큐슈의 현대 일본인 DNA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5-6세기경 영산강 유역은 백제가 아니라 야요이인들이 건너가 정착한 북큐슈 왜 세력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가 중국 남조(南朝)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해류 흐름으로 보아 선단(船團) 중간 기착지로 영산강 유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대 일본은 백제(구다라)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고대 일본 귀족들이 백제 귀족성(貴族姓) 진모, 귀실, 흑치, 사택(사타), 고이, 재증과 같이 2음절로 가문 명칭(姓)을 정할 정도였다.

상당 기간 왜세력(倭勢力)의 지배를 받던 영산강 유역은 백제 동성왕(재위 479~501년)과 무령왕(재위 501~523년) 시기 백제에 완전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나주 다시면 복암리 고분 출토 금동신발에서 6세기 초 백제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중국서 고구려 영류왕 후손 고연복의 묘지명 확인
영류왕 세자 고환권의 증손 추정
세도가 노비, 황궁 내시된 기구한 인생
지난해 중국 학술지에 묘지명 관련 논문 나와
안정준 교수가 최근 입수, 요약해 공개
당 현종 정변 도운 환관 고력사 양자로 들여
말년엔 최고 환관 자리 올라 영화 누리다 사망
최근 중국 학자들의 논문을 통해 국내 학계에 처음 존재가 알려진 고구려 왕족 출신 고연복의 묘지명.
그의 증조부가 고구려 영류왕의 왕세자인 고환권임을 일러주는 내용이 드러나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렇게 기구한 삶이 다시 있을까.
고구려 왕세자의 증손자는 668년 나라가 망하자 8살 나이에 당나라에 끌려갔다.
한 권세가 집안의 노비로 전락해 종살이를 했다.
그 뒤 거세를 당하고 당 황궁에 들어가 내시(환관)로 일해야 했다.
황궁에서 처신을 잘한 덕분에 말년엔 환관 최고 직위에 올랐다.
유년시절 이산과 노비의 삶을 겪다 내시의 우두머리가 되어 눈을 감은 옛 고구려 왕족. 그의 이름은 고연복(高延福, 661?~723)이다.
당의 환관 고연복이 7세기초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려 27대 임금 영류왕(재위 618~642년)의 왕세자 고환권(高桓權)의 증손자였음을 일러주는 옛 기록이 국내 학계에 나왔다.
안정준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11일 한국고대사학회 누리집 자료실에 ‘새로 발견된 고구려 유민 고연복 묘지명(墓志銘: 망자의 행적을 비석이나 돌판에 적은 글)’이란 글을 올렸다.
고연복의 파란만장한 삶의 일단을 담은 무덤 기록을 소개한 내용이었다.
지난해 중국 학자 왕롄룽(王連龍)과 충쑤페이(叢思飛)가 현지 학술지 <중국서법·서학>(2019년 10월호)에 기고한 관련 논문을 입수해 요약, 해설한 것이다.
안 교수가 소개한 중국학자들 논문에 따르면, ‘고연복 묘지명’의 원제는 ‘대당고중대부수내시상주국발해고부군묘지명(大唐故中大夫守內侍上柱國渤海高府君墓志銘)’이다.
청나라 건륭 53년인 1788년 중국 서안 백록원(白鹿原)에서 발견돼 이후 몇 차례 옮겨졌다가 현재 장쑤성 화이안(淮安)시 추저우구(楚州区)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논문엔 묘지명 전체 글자들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과 함께 판독문이 붙어있다.
고연복은 고종, 무측천, 중종, 현종 황제를 받들었던 당나라의 최고위급 환관이었다.
왕족 이융기가 정변을 일으켜 당 현종으로 즉위할 때 거사를 도왔고 애첩 양귀비를 소개한 총신으로 유명해진 환관 고력사가 그의 양아들이었다.
아들 고력사의 도움으로 고연복은 현종 즉위 뒤 환관 중 가장 높은 직위인 내시성 장관 자리에 올랐다.
묘지명에서 우선 주목되는 대목은 고연복의 집안 내력이다.
지문을 보면, 무덤주인의 이름은 복(福)이고, 자(字)는 연복(延福), 출신은 발해인(渤海人)으로 표기되었다.
발해는 발해군(勃海郡)의 다른 이름으로, 허베이성(河北省) 창저우(滄州)시 남동쪽에 있던 한나라 이래의 군 이름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멸망 뒤 끌려온 보장왕의 손자 고진(高震)과 증손인 고씨부인(高氏夫人)의 묘지명에도 각각 ‘발해인’으로 출신지를 표기한 전례가 있다.
따라서 같은 왕족의 후손을 표방한 고연복이 자기 가문을 발해군에서 기원한 것으로 적은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게 안 교수의 해석이다. 오래전 발견돼 국내 학계에도 알려진 고연복의 비석문 ‘당고고내시비(唐故高內侍碑)’ 기록에도 고구려 정벌 뒤 나라 잃은 왕의 족속으로서 환관 직을 맡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런 묘지명과 비문 내용을 종합하면 고연복은 본래 고구려 왕실 출신으로서, 멸망 뒤 당에 들어와 환관이 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문을 쓴 두 중국학자인 왕롄룽과 충쑤페이는 고연복 묘지명에 증조부로 기록된, ‘권(權)’이란 이름을 지닌 인물을 주목했다.
고씨 성을 붙여 고권(高權)이란 선조는 바로 영류왕의 세자인 고환권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고환권은 640년 2월 당에 사신으로 가서 태종을 접견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전한다.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 100여 명을 몰살시키며 정권을 빼앗은 뒤 고환권의 행적은 일체 알려진 것이 없다.
왕과 함께 제거됐다는 설들이 나오기도 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보장왕을 즉위시키면서 영류왕 일가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이와 달리 고연복 묘지명은 영류왕 후손 일족이 당에서 명맥을 이어나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색다른 역사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영류왕 23년(640) 봄 2월조에는 “세자인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위로하고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환권은 사신의 임무를 띠고 갔기에 성년 나이였을 것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고연복은 개원(開元) 11년인 723년 63살로 숨졌다고 나온다.
거슬러 계산해보면, 당 고종 때인 현경(顯慶) 6년(661)에 그가 태어난 것이 된다.
나이를 고려할 때, 고환권이 대략 고연복의 증조부라고 봐도 어색하지 않다는 게 논문에 나온 중국 학자들 견해다.
당시 당으로 넘어간 백제·고구려계 인물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당나라 습속에 맞게 두 글자에서 한 글자(單字)로 바꾼 경우들이 묘지명 등에 흔하게 보인다는 점도 선조인 고환권의 이름을 ‘권’으로 줄여 표현했을 것이란 추론의 근거가 된다.
안 교수는 “사서에 나오는 ‘환권(桓權)’과 묘지명에 나오는 ‘권(權)’ 을 동일 인물로 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더 필요하지만, 영류왕 조카 보장왕을 왕위에 올린 연개소문이 영류왕 일족들을 모두 제거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왕세자 고환권의 후손일 개연성이 크다”고 했다.
고연복이 당에 끌려간 시점에 대해서도 논문을 쓴 중국 학자들은 668년 9월 21일 당의 동도행군총관이던 장군 이적(李勣)이 평양성을 함락시킨 뒤 보장왕과 그의 아들 복남(福男), 덕남(德男)과 대신 등 20만여 명을 당에 끌고 간 기록을 일종의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8살 왕족 고연복 또한 다수의 고구려 지배층이 끌려간 행렬에 포함되었을 것이란 추정이었다.
고연복이 끌려간 뒤 환관이 되기까지의 행적은 당나라 사서인 <구당서>의 ‘고력사’ 전에 나온다.
양부인 고연복이 입궁 전 측천무후의 조카 무삼사(武三思) 집안에서 노비로 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에 끌려간 고구려 주민들이 노비가 된 사례는 기록상 적지 않았다.
왕족 고연복이 어떤 이유로 노비가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무삼사는 고연복을 부리다가 황궁에 바쳐 거세시키고 환관으로 만들었다.
고연복은 고종부터 현종 대까지 여러 황제를 받들었다.
하지만, 무삼사가 그를 입궁시켜 환관으로 만든 사실은 후대의 묘지명에 기록되지 않았다.
무삼사는 측천무후가 물러난 뒤 황제 후계 문제를 놓고 암투를 벌이다 살해됐다.
동조세력이던 위황후, 안락공주 일파도 훗날 현종이 된 이융기의 정변 때 처형됐다.
이런 변고들로 그들의 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뒤 묘지석이 새겨졌으므로 무삼사의 행적은 당연히 넣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중국 학자들은 추정했다.
고연복은 말년 환관의 최고 자리에 올라 유복하게 삶을 마쳤다.
해서체에 행서의 기운이 섞인 듯한 그의 묘지명 글씨가 당대 묘지명들 가운데서도 최고 수준의 유려한 글씨체를 보여준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안 교수는 “고연복은 출세한 환관이자 고력사의 부친으로 황실에서 세도를 누린 듯하다.
논고를 쓴 중국학자들의 추정대로 세련되고 엄정한 묘지명 글씨는 현종과 고력사가 장례에 상당히 신경을 쓴 결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고연복의 집안 가계에 양아들 고력사 외에 다른 구성원들의 존재가 새로이 드러났다는 내용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는 당나라 불자 고연귀(高延貴)가 8세기 발원해 조성했다고 새겨진 장안 보경사 여래삼존불 부조상들이 여러 점 소장돼 전시 중이다.
왕롄룽과 충쑤페이는 이 불상 명문에서 고연귀가 발해인 출신으로 독실한 불자였다고 기록한 부분을 논의의 단서로 삼았다.
환관 고연복과 출신지 본관(本貫)이 일치하며, 동시기 사람이란 점에서 둘이 형제 관계였을 것이란 파격적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동아시아불교미술사의 걸작인 장안 보경사 삼존불이 고구려 유민의 발원에서 비롯했다는 새 가설이 나온 셈이다.
안 교수는 ‘고연복 묘지명’의 세부 판독과 검토 내용을 올여름 발간할 <목간과 문자> 24호에 소개할 예정이다.
•출처:한겨례 2020-04-12   글 노형석 기자안정준 교수 제공 



1895년 의병 활동[ 一八九五年義兵活動 ]

01.분야 :역사/근현대 

02.유형: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03.지역 :강원도 삼척시 

04.시대 :근대/개항기 

05.출처 :디지털삼척문화대전-1895년 의병 활동 

06.정의:조선 후기 관동 의병의 삼척 전투.

07:개설:1896년 4월 삼척에서 벌어진 관동 의병과 관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08.역사적 배경:일제의 침략에 따른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발생하였다.

09.경과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뒤따른 제도의 변혁과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민족 사상과 국권 수호의 구국 이념을 강령으로 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하자 삼척에서도 창의장(倡義將) 김헌경[1851~1910], 서기 김달호(金達鎬) 등 유림 중심으로 항일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원산 공략을 위한 병력을 모으기 위하여 삼척까지 온 관동구군도창의군이 원산 공략에 실패한 후 삼척까지 후퇴하여 삼척 의진(義陣)[의병부대]과 힘을 합쳐 관동 의병의 마지막 대전투인 삼척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10.결과

연합 의진은 삼척읍성과 갈야산(葛夜山)[178m] 일대에 진을 치고 곧 닥쳐올 경군(京軍)[조선시대 중앙군]과의 싸움에 대비하였다.

전투에 앞서 민용호(閔龍鎬)[1869~1922]는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몇 번이고 싸우지 말 것을 호소했지만 끝내 듣지 않아 결국 일대 혈전을 치르게 되었다.

관동 의병은 3개 지역으로 나누어 진을 쳤다.

읍(邑) 뒤의 삼봉산[갈야산, 그 서쪽의 높은 봉과 북쪽의 봉, 3개 봉을 이름]에는 민용호를 비롯하여 최중봉(崔中奉), 강우서(姜禹瑞), 이영찬(李永燦)[?~1896], 전치운(全致雲), 신무섭(申懋燮)[?~1896] 등의 본진이 호를 파고 매복해 있었다.

읍성에는 선봉장 김도현(金道鉉)[1852~1914]과 민동식(閔東植), 한중보(韓重輔) 부대가 잠복해 있었다. 죽서루(竹西樓) 동쪽[남산]에는 김헌경, 김달호, 주명승(朱明昇)의 삼척 의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침내 관군이 시내로 쳐들어오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니 마침내 삼척 대전이 시작되었다.

1896년 4월 19일 묘시[오전 5~7시]에 시작되어 신시[오후 3~5시]까지 이어진 대 혈전이었다.

알개방재[謁介岩, 갈야산과 그 북쪽 산봉 사이]는 피차간 사상자가 많아 피바다가 되었고, 읍성 안은 불바다가 되었다.

탄알이 떨어진 의병들이 오십천으로 후퇴하자 이 기회를 놓칠세라 경군들이 성 안으로 들어와 불을 질러 불꽃이 온 하늘을 찌를 듯이 타올랐다.

민용호는 따르는 군졸들과 함께 오십천을 따라 황지령(黃池嶺)[통리재]을 넘어 정선으로 가고, 영양 의병장 김도현도 따르는 군졸들과 함께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갔다.

삼척 창의장 김헌경과 서기 김달호는 붙잡혀서 관군에게 문초를 받은 후 왕의 조칙에 의해 풀려 나왔지만 관군은 북평으로 가서 김헌경의 집을 불태웠다.

삼척의 대전은 승패가 없었다.

모두의 패전으로 끝났다.

200명의 관군도 50명이 살아서 강릉으로 돌아갔다.

의병도 통의장(統義將) 김건필(金乾弼)을 비롯하여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삼척 전투에 참전한 영양 의병장 김도현의 자서전인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 가운데에서 삼척 전투에 관해 기록한 부분만 소개한다.

“중군 최중봉은 뒷산에 진을 치고 민 대장은 본읍 군대와 함께 남쪽 산에 진을 치고 나는 민동식, 한중보와 함께 성 안에 진을 쳤다.

웅덩이를 파고 군사를 매복하고 있으려니 조금 후에 저쪽 군대들이 먼저 대포를 쏘아 포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고, 탄환은 우박과 같이 쏟아진다. 나는 성을 돌보면서 격려하노라니 맨 앞 진이 약철(藥鐵)[화약과 철환]이 다 떨어졌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제일 날쌘 포정 5명을 데리고 남쪽 산으로 가서 약철을 지고 도로 뒷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진중에서 한 사람이 큰소리로 ‘약철을 빨리 가져 오너라’ 한다. 적군들이 이 말을 듣고 승세하여 연달아 포를 쏘니 진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또 앞 진은 이미 흩어져 달아났고, 산성에 매복한 복병도 역시 놀라 달아났다.

남쪽으로 돌아오니 군사가 겨우 50명밖에 되지 않았다.

길에서 장참모(張參謨), 박진사(朴進士)와 포정(砲丁) 몇 명을 만나 함께 평릉(平陵)[평릉도 찰방이 있는 근덕 교가]으로 지났으나 민 대장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11.의의와 평가

삼척 의병은 관동 의병의 원산 공략에도 참여하였고, 관동 의병의 대규모 전투로서는 마지막 전투라 할 수 있는 삼척 전투를 이끌었다.

비록 삼척 전투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나 일제라는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구국 항일 운동이었다는 역사 의의가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1895년 의병 활동 [一八九五年義兵活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역사적 배경

향전(鄕戰)은 기존에 향촌을 지배해 오던 재지사족(在地士族)[조선시대 향촌사회에 머물러 있던 지식계층]과 사회·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흥 세력 간에 향권 장악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립을 말한다. 신 유림 측에서는 유림(儒林) 명단에 함께 올려서 차별이 없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구 유림 측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데서 서로 간 분쟁이 발생하였다.

경과

1903년(고종 40) 삼척 향교에서 김헌경[1851~1910]·최세현(崔世顯)·심진하(沈鎭河)·정창화(鄭昌和)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구 유림 계통과 김동호(金東鎬)·장석홍(張錫鴻)·김현구(金顯球)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 유림 계통 사이에 신·구유 분당(新舊儒 分黨)의 시비인 이른바 향전이 발생하였다.

삼척 지역의 신·구 유림 분쟁은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1906년(고종 43) 7월에는 군수 정운석(鄭雲晳)이 신·구유 향전을 조정하려다 파직되었다. 1907년(고종 44) 정월에는 군수 안기환(安玘煥)이 뇌물을 받고 구유(舊儒)는 유림(儒林)이라 하여 명단에 올리고 신유(新儒)들은 사림(士林)이라 하여 명단에 함께 올렸다가 7월에 파면되었다. 이때 최신현(崔信顯)은 최태만(崔泰萬)을 시켜 역대의 임사록(任士錄)을 죽서루 남쪽에서 태워 없애도록 하였다. 또 1908년 11월 군수 박래영(朴來榮)이 신구유 명단을 함께 올려 등록한 이른바 유사통록(儒士通錄)이 죄에 저촉되었다면서 피죄(被罪)[죄를 입음]되자 유림들이 간사한 범죄자를 잡겠다며 소동을 일으켰으며, 이에 박래영은 도망을 갔다. 그 후 김헌경의 조정으로 분쟁은 일시 잠잠해 지는 듯하다가 김헌경이 터무니없는 일로 고소를 당해서 1910년(순종 3) 5월 5일 서울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향리에서 유사 2명과 당군 4명을 보내 시신을 모셔 온 뒤 크게 장사를 지냈다. 그 후 1910년 한일병탄이라는 국난을 당한 후 신·구유 분쟁은 흐지부지되었다.

결과

1910년 한일병탄 후 신·구유 분쟁은 흐지부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구유 향전 [新舊儒鄕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코모스, ‘등재 권고’…다음달 최종 결정
성리학 전파 기여한 ‘보편적 가치’ 인정


병산서원. <한겨레> 자료사진
도산서원·병산서원 등 조선 시대 성리학의 배움터였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확실시된다.

문화재청은 10일 유네스코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가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을 등재 권고했다고 밝혔다.

이코모스는 여러 나라가 등재 신청한 유산을 조사한 뒤 등재 권고, 보류, 반려, 등재 불가 네가지 권고안을 내리는데 등재 권고를 받으면 이변이 없는 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한국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해달라고 신청한 ‘한국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 건립한 최초의 사액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 도동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9곳이다.
조선 중기 이후 전국 곳곳에 세워진 사설교육기관인 서원은 성리학을 교육·연구하는 한편 유학의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지방의 도서관 또는 서적출판소의 역할도 담당했고 사림 결집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통상 서원은 앞쪽엔 강당과 기숙사를 갖춘 교육 공간을 배치하고 뒤쪽엔 선현을 봉안·제향하는 제사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서원의 건축 틀거리는 보편적인 형태를 지니지만 자연 지형과 경관, 건물을 설계한 이의 의도에 따라 각기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은 한국의 서원이 조선 시대 성리학이 사회 전반에 보편화됐다는 증거이자 성리학의 지역적 전파에 이바지한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코모스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으로부터 이집트의 피라미드, 호주의 산호초, 남미의 바로크 성당 등 자연· 문화유산이 모든 인류에게 속하는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면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

한국은 지난 2016년에도 서원을 등재 신청했다가 서술의 재작성, 비교연구의 보완, 유산으로서의 논리 강화 필요성 등을 이유로 등재 반려를 받아 신청을 자진 철회한 바 있다.

다만, 이코모스는 추가적 이행과제로 세계유산 등재 이후 9개 서원에 대한 통합적 보존 관리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서원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다음달 30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리는 제 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한국은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를 시작으로 창덕궁, 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조선왕릉, 하회·양동마을, 남한산성, 백제역사 유적지구, 통도사·부석사 등 사찰 7곳 등 13가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출처:2019-05-14 이주현 기자

hani.co.kr/arti/culture


어릴적 할머니집에 가는 길에 빈 관사(사택)가 생각나는군...
    

동해시 발한 사택촌 등 15곳은 등록문화재 가능성 검토
도시재생사업 연계 거주시설·문화공간 등 활용 예정

동해지역에 문화재급 근대건축문화유산이 15곳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동해시에 따르면 한국문화유산연구센터가 용역을 발주해 발한 관사촌, 동해역 일원, 북평동 옛 장터, 삼화시장 인근의 적산가옥과 근대 건축물을 조사한 결과 동해시에 보존할 만한 근대건축문화유산이 72곳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발한 사택촌, 송정 관사촌, 향로동 숙사촌, 북평시장 일대 근대 건축물, 발한동 사거리 일대 근대 건축물 북평성당 묵호성당 용산정비소 등 15곳은 근대문화유산 지정 등 문화재관리체계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시는 적산가옥 목록화 조사를 통해 건축물 현황, 건립 시기, 건물 구조, 건축 양식, 보존 상태 등을 확인하고 `동해시 적산가옥 목록화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를 통해 건축물 가치와 등록문화재 지정 가능성을 검토하고, 체계적인 보존 관리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또 도시재생사업에 발맞춰 적산가옥을 거주 시설이나 창작문화공간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방침이다.

적산가옥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사람들이 지은 건축물을 말한다.

김대종 시 전통문화담당은“72곳의 근대건축물을 미래 세대가 누려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식하고 그 가치를 보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출처:2019-5-7 (화) 박영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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