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조선 후기 『만력 무술안(萬曆戊戌案)』 작성을 주도한 동래 출신의 향반(鄕班).
[가계]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백취(栢翠). 아버지는 진사 김희우(金希雨)이다.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동래 입향조는 김시습(金時習)의 사촌인 김검(金儉)으로, 동래 선동에 정착하였다.
[활동 사항]
김정서(金廷瑞)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동래성 전투를 비롯하여 곽재우(郭再祐)가 이끄는 화왕산성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다대포 첨사를 지냈다. 

이후 동래 최초의 향안(鄕案)인 『만력 무술안』 작성을 주도하여 이름을 올렸다. 

향안은 지역 양반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로, 여기에 등재되어야 공식 활동 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으로서 향원(鄕員)[양반으로 구성된 향촌 자치 기구인 유향소의 일원]의 인정을 받아야만 향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김정서와 함께 『만력 무술안』에 등재된 향반은 송의인(宋依仁), 김우정(金禹鼎), 김사위(金士偉), 박희근(朴希根) 등 5명으로, 모두 동래의 이름난 원향(原鄕) 가문 출신이다.

조선 후기 동래 향반을 대표했던 가문은 강릉 김씨 외에 여산 송씨(礪山宋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경주 김씨(慶州金氏), 죽산 박씨(竹山朴氏), 동래 정씨(東萊鄭氏) 등이다.

[상훈과 추모]
김정서는 충렬사[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에 임진란 24공신의 수위(首位)로 배향되어 있다. 

1924년 경상도 유림의 요청으로 김정서의 묘역 아래에 상현단(上賢壇)[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68]을 세워 김정서와 김검(金儉)의 아들인 북계(北溪) 김선(金璿)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상현단은 수영(水營) 숙사청으로 사용되던 건물 일부를 옮겨 와 지은 것으로, 해마다 4월 초에 동래 유림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출처:집필자 손숙경

현시대 왕릉 제례의 주체는 누구인가?
경주시민 대다수는 경주김씨 종친회에서 지낼것으로 생각하기 쉽상이다.
하지만 경주김씨인 나로서는 아쉽지만, 강릉김씨(江陵金氏) 종친회에서 제례를 지낸다.

역사적 고증을 하면 복잡하다.
박ㆍ석.김 순서로 왕위를 계승하다가 김알지의 후손 7대손 미추왕(262~284)이 최초로 김씨로 왕이된후 세월이 지나 내물왕(356~402)이후 김씨에 의한 왕위독점이 계속된다.
그후 태종무열왕 김춘추(603~661)가 등극한후 문무왕, 신문왕으로 직계 후손으로 왕통을 이어간다.
그 뒤로 성덕대왕신종을 만든 혜공왕대(758~780)까지 내려간다.
이 기간을 무열왕계 시대로 신라 중대(中代)로 구분된다.
즉 신라는 이제 왕위를 계승할 부류가 범내물왕계와 무열왕계 두 부류로 분류되어 하대에는 왕위쟁탈전을 벌인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첫째 아들 문무왕 김법민, 둘째아들 김인문의 자손은 혜공왕(758~780)대에 오면 영향력을 잃고, 세번째 아들 김문왕(文王)의 5대 후손 김주원(周元)세력만 남았다. 

785년 범내물왕계 선덕왕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왕위서열 첫번째는 이찬 시중벼슬을 지낸 김주원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서라벌 북천(北川)의 강물이 불어 왕궁 즉위식에 들어오지 못하자 이것은 하늘의 뜻으로 여겨 신하들은 재빨리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했다.그러나 이것 또한 역사의 승자가만든 꾸며낸 이야기로 생각된다
경쟁자 김경신(훗날 원성왕)의 쿠데타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주원은 강릉으로 거주지를 옮긴다ㆍ
이것이 명주군왕(溟主君王) 강릉김씨의 시조이다ㆍ
이런연휴로 강릉김씨는 태종무열왕 셋째아들 김문왕의 적통 후손임을 내세워 매년 제를 올린다.
강릉김씨 종친회 행사때 마다 관광버스 10여대가 추향대제에 참석한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행사 진행은 1시간 가량 조선왕조 유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신라시대에도 이와같이 지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제례가 끝난후 김내성교수외 삼국유사 연구반 회원들은
초헌관 제주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20210923태종무열왕릉 추향대제에서
출처:달빛청암  신라시인과 함께하는 경주 답사.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성씨를 통해 혈통의 공동체에 속해 평생을 살아간다.

강원도 영동지역의 성씨를 통해, 서로 얾겨진 강원도내 혈통의 공동체에 살아가는 가족들. 한여인이자 할머님의 성씨를 찾아보고자 한다. 

 

강릉 박씨
강릉 박씨(江陵 朴氏)는 강원도 강릉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강릉 박씨(江陵朴氏)의 시조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제5대 파사이사금의 5세손으로 대아찬(大阿湌)을 지냈다.
강릉 박씨(江陵朴氏)의 기세조 박순(朴純)은 신라 파사이사금의 35세손으로 1174년(고려 명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보문각시어(寶文閣侍御),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좌승선(左承宣) · 한림학사(翰林學士) · 중추원사(中樞院事) · 남경유수(南京留守)를 지낸 뒤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또 상장군(上將軍)을 겸하면서 상장군(上將軍) 석린(石隣)의 모반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보정정국공신(保定靖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과 검교태부(檢校太傅)에 특제되었다. 신종 때는 좌복야(左僕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어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후에 강릉(江陵)으로 내려가 여생을 마쳤다.


삼척박씨[三陟朴氏] 경남함양 시조묘
삼척(三陟)은 강원도 삼척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진한의 실직국(悉直國)이 있던 지역이다. 
102년(신라 파사왕 23) 신라에 합병되어 만약(滿若) 또는 파리(波利)로 불렸다. 
505년(지증왕 6)에 실직주(悉直州)라 하였고, 639년(진덕여왕 8) 진주(眞珠)로 고쳤다가 757년(경덕왕 16)에는 삼척군으로 개칭하여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 江陵) 관하에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척주(陟州)라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삼척현으로 강등되어 동계(東界)에 속하였다가 1377년(우왕 3)에 다시 삼척군으로 승격되었다. 
1393년(태조 2) 삼척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어 조선시대 동안 명맥이 이어졌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강릉부 삼척군이 되었고, 1896년 강원도 삼척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말곡면이 부내면으로 폐합되었다가 1917년 부내면이 삼척면으로 개칭되었다. 
1980년에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되어 동해시로, 1981년 장성읍과 황지읍이 통합되어 태백시로 각각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986년에는 삼척읍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995년 삼척군이 삼척시에 통합되었다.
삼척박씨(三陟朴氏) 시조 박원경(朴元慶)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세째 아들인 박언신(朴彦信)의 후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가는 왕을 호종(扈從)했고, 또한 군사를 모아 개경(開京)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호종이등공신(扈從二等攻臣)에 책록되었다. 
그 후 1365년(공민왕 14)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다시 상서(尙書)에 오르고 삼척부원군(三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고려가 망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은거하여 후진양성에 진력,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삼척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출처:wiki 


 

박종화 UNIST 교수 "한국인은 단일민족 아니다" 주장..일부에선 "데이터 부족, 혼혈 과정 명쾌하지 않다" 반론 제기

태초에 '게놈'이 있었다. 

게놈은 유전자와 염색체의 합성어로 생명체 세포에 담긴 유전정보 전체를 말한다. 

게놈 해석은 유골이나 화석에서 DNA 파편을 찾아 해독한 뒤 유전적 특징을 밝히고, 인류 기원의 잃어버린 '빈 공간'을 찾아내는 새 영역이다. 

게놈은 인류 역사를 고스란히 기록한 자서전과 같지만, 인류 기원의 수수께끼를 푸는 완벽한 증거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 

국내에서도 게놈 해석과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으로 한국인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논란도 만만치 않다.

한국인의 조상은 누구인가. 

박종화 UNIST(울산과학기술원) 교수는 "한국인은 혼합민족이지 단일민족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게놈연구재단 등과 공동으로 전 세계 158명의 현대인과 115명의 고대인 게놈을 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국제학술지 '게놈생물학 및 진화' 2020년 5월호에 발표했다. 

현재의 한국인은 지난 4만 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이동해 온 남중국 및 동남아시아 인구집단이 복잡하게 뒤섞여 형성됐다는 것이다. 


박종화 UNIST(울산과학기술원) 교수가 표준 게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UNIST 제공

"한국인, 남중국과 동남아 인구 뒤섞여 형성"
박 교수팀은 "현대 한국인 게놈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악마문동굴'에서 발굴된 8000년 전 북아시아 신석기인과 3500년 전 철기시대에 지금의 캄보디아에 살았던 '밧콤노우인'의 게놈을 융합한 결과와 가장 비슷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르면 북아시아에는 이미 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한 북아시아인이 퍼져 살고 있었고, 악마문동굴 신석기인도 그중 하나다.

이후 약 5000~4000년 전 신기술로 무장한 중국 남부의 새로운 고대 인류집단(후남방계)이 베트남과 티베트, 북중국, 한반도 등 방향으로 팽창하며 이들과 만나 혼혈이 됐다.

이들이 확산해 한반도 쪽으로 유입된 것이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덴마크 코펜하겐대학이 지난해 6월 '네이처'에 실은 논문은 한국인 형성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유라시아 전반의 인구 이동 경로가 박 교수팀 주장과 차이가 났다. 

코펜하겐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악마문동굴에는 약 3만 년 전 유라시아 수렵채집인이 건너왔고, 이후 2만 년 전에 동아시아인이 들어와 '고대시베리아인'이라는 인류집단을 형성했다. 

이들 중 일부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이후 1만 년 전 다시 동아시아인이 들어와 '신시베리아인'을 형성했고, 현재 시베리아 지역 인류 다수가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은 지난 5월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와 정충원 서울대 교수팀의 '셀' 논문으로도 보다 자세히 확인됐다.
일부 유전학자들은 박 교수팀의 연구 논문엔 이 같은 최신 연구 결과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데이터 수에 있어서도 아쉬움이 지적됐다.

이번 연구는 드넓은 아시아 전역에서 수만 년 사이에 일어난 인구집단의 이동을 115개 고대인 데이터로 분석했다.

국내 한 유전학자는 "제한된 양의 게놈 분석으로 인류 대이동을 밝히는 건 무리가 따른다"고 말했다.

또 "여러 인구집단이 시대별로 어떻게 혼합됐는지 구체적 과정을 밝힌 부분(계통수)도 정교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박 교수는 "추가 데이터를 확보해 더 정교화하는 과정을 진행 중"이라며 "선남방계(북아시아 지역)의 후손이 아시아 전반에 큰 변화 없이 퍼져 살다 약 5000~4000년 전 남중국에서 시작된 새 기술을 지닌 인류의 팽창으로 격변을 맞았고, 한국인 역시 이 과정에서 형성됐다는 '큰 그림'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 먼지가 쌓이듯 DNA에도 변이가 일정한 속도로 축적된다.

'분자시계'는 그 축적량을 측정해 등장 시간을 역으로 추정하는 기술이다.

1987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하나의 가설이 나왔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대)의 알란 윌슨은 세계 각지 147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모든 인류는 한 어머니와 한 아버지의 후손이고,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발생한 후손들이 세계 각지로 이주해 모든 인류의 부모가 됐다고 발표했다.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는 "미토콘드리아 DNA의 다양성은 중요한 정보가 있지만, 다양성 돌연변이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분자시계 접근법이 맞는지는 논란이 있다"며 "돌연변이 발생 시점이 집단이나 종의 발생 시점은 아니다"고 말했다.

러시아 극동 지방의 악마문동굴에서 발견된 머리뼈 ⓒUNIST 제공
최근 학계서 한국인 기원 추적 연구 잇따라  

이런 논란 속에서도 윌슨의 '미토콘드리아 이브' 이론 이후 국내에서는 한국인의 기원을 추적하는 연구가 잇따랐다. 

방민규 박사는 '생물인류학 자료로 본 한국인 기원문제에 대한 연구(2019년)' 논문을 통해 한국인의 남방계(중국 남부인) 유전자 비중은 40% 이상이라고 밝혔다. 

유전학자인 이홍규의 저서 《한국인의 기원》(2010년)에 따르면, 모계 혈통을 추적하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한국인의 남방계 유전자 비중은 60%다. 

김욱 단국대 생물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몽골인보다 중국 한족 및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 특징을 보였다"고 2004년 발표한 바 있다. 

같은 해 김종일 한림의대 교수는 "한국인은 몽골인과 연관성이 높고 중국인과는 차이가 있다"는 상반된 연구 결과를 내놨다. 

종합해 보면 이들의 연구 결과는 제각각이고, 앞서 박종화 UNIST 교수팀의 논문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과 게놈 해석으로 한국인의 기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이런 진실공방에 불을 지핀 건 지난해 10월29일 '네이처'에 실린 호주 가반의학연구소와 한국 기초과학연구원(IBS)의 논문이다.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으로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의 기원 시점과 발상지를 20만 년 전 남아프리카로 지목하면서다. 고인류학자와 유전학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이견이 나왔다. 

집단유전학자인 정충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와 차이가 있어 게놈을 해독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현생인류를 다루는 연구는 매우 까다롭다"고 말했다. 영국의 고인류학자 크리스 스트링거 런던 자연사박물관 교수는 "우리(현생인류)는 아프리카 다양한 곳의 선조로부터 영향을 받은 뒤섞인 존재(amalgam)"라며 "유전자의 일부만으로 이렇게 조각난 인류 기원의 복잡함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게놈 안에서 인류라는 종이 생겨났다. 생명체 기록의 비밀을 담고 있는 게놈의 암호가 하나둘 해독되면서 한국인의 기원도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다만 광범위한 게놈 해석과 데이터 축적이 숙제로 남아 있다. 한동안 진실공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종화 교수는 "한국인의 기원은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아시아 인류집단과 밀접하게 엉켜 있는 일종의 친족체로 봐야 한다"며 "게놈을 해석하면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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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시사저널=박치현 영남본부 기자) 
박치현 영남본부 기자 입력 2020.09.10. 

감모재
강릉명륜서원묘정비
금란반월회계회도
모선재

[정의]
강릉 12향현, 조선시대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충· 효· 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를 일컫는다.

이들은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개설]
-강릉을 빛낸 열두 명의 선비들

강릉시 율곡로 2920-16[교동 238-3번지]에 있는 향현사(鄕賢祠)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사당이다. 
창건 당시의 건물은 1867년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중건하려 하였으나 1868년 비사액서원(非賜額書院)의 철폐령으로 중건 시도가 중단되었다. 
1921년 향현의 후손들에 의해 강릉향교 서쪽에 중건되었으며, 1995년 황영조기념체육관 건립으로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이곳은 강릉이 낳은 수많은 인물 가운데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인물들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제향(祭享)을 올리는 곳으로, 열두 명의 선현을 모시고 있다. 


각각 학문으로, 덕성으로 당대를 빛냈던 분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이 만약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삶을 살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그 이름이 빛났을까. 
그런 목적도 의도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학문과 인품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살았기에, 세월이 훌쩍 흐른 어느 날 향현사를 찾는 오늘의 객들에게 말없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향현사를 찾아 강릉을 빛낸 열두 명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위인으로 위패에 남아 있는 그들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던 그 인물들의 삶을 더듬어보고자 함이다.

[배경]
향현사의 12현은 처음부터 모두 이곳에서 배향된 것은 아니다. 
1645년(인조 23) 당시 부사이던 강백년(姜栢年)과 전직 관리 이상혐(李尙馦)[牧使], 김충민(金忠愍)[直長] 등이 주장하여 사당을 신축했는데 그때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 삼가(三可) 박수량(朴遂良), 사휴(四休) 박공달(朴公達),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 도경(蹈景) 최운우(崔雲遇)의 6현의 위패가 이곳에 모셔졌다.


그 뒤 1802년(순조 2) 춘헌(春軒) 최수(崔洙)가, 1808년(순조 8)에는 눌재(訥齋) 이성무(李成茂), 괴당(槐堂) 김윤신(金潤身), 농헌(聾軒) 박억추(朴億秋),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 보진재(葆眞齋) 김담(金譚)이 추가로 배향되어 오늘에 이른다.

 

배향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생존연대가 1390년에서 1605년 사이로, 조선 초기 결성된 입신출사를 위한 강릉 지방 유생들의 결사체 ‘금란반월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최응현은 금란반월회의 스승이고, 최수와 김윤신은 계원이었으며, 최치운과 최수성은 최응현의 직계 존비속이다. 

김열과 김담은 금란반월회 회원 김지(金遲)의 손자이며, 최운우는 회원 최자점(崔自霑)의 증손이 된다. 

박공달은 회원 박시문(朴始文)의 조카이고, 박수량과 박억추는 박시문의 재종손·재증손이 된다.

여말선초 이래로 지방의 중소지주층은 꾸준히 확대되어왔다. 

규모와 역량이 커진 이들 계층에게는 상호간의 유대관계가 필요했고,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금란계다. 

16세기 이후 학연을 매개체로 한 인간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이로 미뤄보면 금란반월회는 당시 강릉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향현 배향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2향현의 면면을 보면 군자에서 효자· 철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강릉이 낳은 수많은 인물 중에서 이 열두 명을 선정했던 데에는 그 나름의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지역의 당대 거성(巨姓)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향현으로 배향하려는 노력도 엄청났을 것이다.

향현이 추배(追配)된 시기였던 18세기는 족보 편찬이 일반화된 때였으니 말이다.

12향현의 대부분이 강릉의 거성 출신으로 네 차례에 걸쳐 추행되었지만 그때마다 다른 거성들의 큰 반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향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정표정책에 따라 효행이 빼어난 인물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강릉향현사지(江陵鄕賢祠誌)』에는 이들 12향현의 행적과 인물, 관련 유적이 실려 전한다.


[내용]
-괴당 김윤신-
자는 덕수(德叟), 호는 괴당(槐堂)이다. 

아버지는 사정(司正) 김여명(金汝明)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 평의(評議) 김지(金遲)의 딸이다.
성품이 덕성이 높고 학문을 좋아하여 사서삼경을 베껴 써서 항상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늘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데 힘썼다.
1468년(세조 14)에 생원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인 1469년 2월 강릉 사람 선략장군 남윤문과 함께 글을 지어 강릉부 사람 전윤(全崙)에게 주어 상소하였다. 


승려 학열의 비행을 비판한 내용이었는데, 당시 학열은 보시를 빌미로 재산을 축적하면서 민간에 많은 폐단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윤신은 학열의 이 같은 비행을 시정해 줄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1476년(성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사록(司祿), 전적(典籍), 주부(主簿), 경상도사(慶尙都事)를 거쳐 전중감찰(殿中監察)이 되었다. 
이후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임금은 “내가 듣기로 경은 부친의 5년 장병(長病)에 한 번도 옷을 벗지 아니하고 간호하였으니 어찌 대효(大孝)가 아니며, 경이 나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였으니, 어찌 충성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금성현령(金城縣令)에 임명하여 부모를 봉양케 하였다. 

 

그 후 내직(內職)으로 사헌부 장령, 집의, 의정부사인을 거쳤으며, 외직으로는 파주와 원주 목사(종3품)를 지냈다.
김윤신은 성품이 공명정대하여 가는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큰 고을의 벼슬을 여러 차례 지냈으나 집에는 가재도구 하나 없어 세상 사람들이 선생의 청백을 칭찬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올 때 부사가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로 영접하였다. 
젊었을 때는 금란반월회원이었으며, 만년에는 향좌수로서 향령(鄕令)을 지어 문풍교화에 힘썼다. 

관련 유적으로 저동에 묘소, 신도비, 숭덕재(崇德齋)가 있다.

-임경당 김열-
자는 열지(說之), 호는 임경당(臨鏡堂)이다.

아버지는 진사 김광헌(金光軒)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현감 최세번(崔世蕃)의 딸이다. 
아버지 김광헌은 1519년(중종 14) 진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를 겪고 난 후 벼슬의 뜻을 버렸다. 
김열이 과거에 나아가지 않은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김열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오직 글 읽기에만 힘썼다. 

아무리 춥고 더워도 의관을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열의 어머니는 백세를 살았는데 뜻이 곧고 마음은 온화하였다. 

어머니가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법도를 지키고 종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였다. 
선생은 세 아우와 함께 어머니의 뜻을 받들기 위해 성심을 다하였다.
김열은 아우들이 열심히 학문을 하지 않으면 타일러서, 모두가 자기 지위를 확고하게 세워 사회에 나가 출세하도록 하였다. 
성장하여서는 손수 이들의 혼사를 도맡아 처리하였고, 모두 1리 안팎에 모여 살도록 하여 아침 저녁 만나볼 수 있게 하였다. 

술이나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함께 모여 나누었고, 아우가 궁핍하면 형제들이 서로 보태어 도와주었다.
평생 공부에만 힘쓴 그는 『시경』· 『서경』· 『주역』· 『춘추』 등 고전의 해석문을 지어 자손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해석이 손으로 집는 듯 명료하였다.

중종 때 선생의 효성을 기려 효렴과(孝廉科)로 평강훈도에 임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만년에 경포호수 북쪽에 임경당(臨鏡堂)을 짓고 “모든 선현의 글들을 책상과 궤에 가득히 채워 때로는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탐구하고 때로는 강호의 정취에도 젖어본다”라는 제자(題字)를 써 걸었다.

이처럼 영화(英華)에는 전혀 뜻이 없었으니, 그 때 사람들은 ‘김처사(金處士)’라 불렀다.


김열의 집 앞에는 선친이 손수 심은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있었는데, 그는 아우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기르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도의지우(道義之友)로 사귀던 이이에게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선친께서 손수 심으신 것인데 우리 형제 모두가 이 집에서 저 소나무를 울타리로 삼고 지내고 있네.

그래서 이 소나무들을 볼 때마다 선친을 생각하곤 한다네.

이러한 소나무를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아 도끼나 낫으로 베고 잘라 후손들에게까지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고 없어질까 늘 두려운 마음뿐이라네.

그대가 이를 보호할 수 있는 교훈될 만한 말을 몇 마디 써주면 집안 사당 벽에 걸어 놓고 자손들로 하여금 늘 이를 보게 하여 가슴 깊이 새기게끔 하겠네.” 하니, 이이가 「호송설(護松說)」을 지어 주었다.

김열은 사화를 예측하고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고관에게 ‘송어시(松魚詩)’를 주어 화를 면하게 하였다고 한다. 

달관(達官) 한 사람이 강릉에서 벼슬하다 영전하게 되었을 때, 그는 비단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송어 배에 넣어 그 사람에게 보냈다. 

그 시에는 “은비늘 번뜩이며 기력이 왕성하니 벼슬길 확 트여 높은 곳 오르겠네. 아깝도다! 나아갈 줄은 알았지 물러날 줄 모르니, 넓고 넓은 이 세상 잃을까 염려되네.”라고 써 있었다. 

이 글을 본 달관은 병을 칭하고 벼슬을 사양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사화가 일어났고 그 홀로 화를 면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김열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김열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오봉리에 묘소가 있고, 금산리에 임경당과 상임경당이 있으며 이곳에 시판도 전한다.

-보진재 김담-
자는 담지(譚之), 호는 보진재다.

아버지는 낭장(郞將) 김광복(金光輻)이고, 어머니는 삼척심씨 군수(郡守) 심희전(沈希佺)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초시에 뽑혔으나 중국의 골상가(骨相家)가 김담의 관상을 보고 “골상은 귀하게 되겠으나 오래 살기 힘들겠다.”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 ‘내가 일찍 죽으면 부모는 누가 봉양하겠느냐’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부모 봉양에만 힘썼다.

부친이 병이 났을 때는 똥을 맛보기도 하였고, 아침저녁으로 북두칠성에게 자신의 목숨으로 부친의 수명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슬퍼함이 이를 데 없었고 제상에 술잔을 올리면 산 사람이 마시는 것처럼 술잔이 저절로 말랐다고 한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때는 죽만 먹었고, 하도 울어 눈에서 피가 나와 눈이 멀었다.
김담의 눈이 안 보이게 되자 아들 김경황(金景滉)과 김경시(金景時)가 성심을 다하여 효도했고, 그 지극한 효성으로 눈이 보이게 되었다 한다.

인종, 명종의 국상 때에는 3년간 고기반찬을 들지 않았으며, 친척이나 친구의 상에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부사가 여러 번 김담의 충효를 관찰사에게 추천하여 조정에서 여러 번 상직(賞職)이 내렸으나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받지 않았다.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김담을 여러 번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이때 진부면과 대화현에 가뭄과 황충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양사언이 다시 간청하여 김담은 진부면에서 2년, 대화현에서 3년간 판관(判官)의 일을 섭행하였다.

그로부터 황충이 날아들지 않고 창고의 곡식이 넘치니, 양부사가 “하늘이 효자를 먼저 알고 도왔다.”고 하였다.
김담의 나이 70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그 애통해함이 이전의 부친상과 같았다.

그 후 그는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다.

선조 임금이 정려를 내렸으며, 아들 김경황과 김경시, 손자 김한이 모두 효도로써 정려하니 사람들이 ‘3세 4효(三世四孝)’의 가문이라 칭하였다.

삼세사효지려의 효자각이 강릉시 입암동에 있으며, 장현동에 묘소와 숭모재(崇慕齋), 기적비가 있고, 노암동에 보진재(葆眞齋)가 있다.

-농헌 박억추-
자는 덕수, 호는 농헌(聾軒)이다.

아버지는 박수량의 조카 선무랑(宣務郞) 박구량(朴久良)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최신로(崔信老)의 딸이다.
박수량의 문하에서 학문과 도의를 익혀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효성 또한 출천하였다.

부친이 7년 동안 병을 앓았는데 박억추는 들오리가 병에 좋다는 말을 듣고 이를 잡으려 하였다.

추운 겨울이라 하천이 꽁꽁 얼어붙어 그물을 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한 쌍의 오리가 우물가에 내려앉았다.

박억추가 마음속으로 오리가 잡히기를 기도하면서 돌을 던졌는데, 한 돌에 두 마리 오리가 맞아 떨어졌다.

그것을 아버지께 드렸더니 병이 씻은 듯 나았다.

그가 오리를 잡았던 ‘차돌백이’ 우물이 강릉시 노암동에 있었다.

그 후 부친이 또 병에 걸렸을 때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잠시 소생케 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다하여 상제를 치렀다. 그 효성이 마침내 나라에 알려져 복호(復戶)되고 정려를 받았다.

1563년(명종 18)에 효렴과(孝廉科)에 천거되어 사옹원 참봉이 되었다. 

1566년(명종 21)에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옮겼다가 영평군수(永平郡守)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내다 1580년(선조 13)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 

3개 군현을 역임하면서 청검(淸儉)과 효제(孝悌)로써 민속을 순화하는 데 힘썼다.

관련 유적으로 박월동에 박억추효자각이 있고, 묘소는 운정동에 있었으나 2001년 성산면 관음리 납골종묘로 옮겼으며, 노암동에 효성과 관련된 타압정(打鴨亭)이 근래에 조성되었다.

-도경 최운우-
자는 시중(時中), 호는 학구(鶴衢) 또는 향호(香湖)이며, 만년에는 도경(稻景)이라 하였다.

문한공(文漢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최호(崔浩)고, 어머니는 진주강씨(晋州姜氏) 참봉 강준지(姜俊智)의 딸이다.

12향현 중 연배가 가장 아래다.
성품이 너그럽고 순후하여 마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한다.

1552년(명종 7) 생원에 급제하였고,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는 못했다.

김광진(金光軫)에게서 수학하였고, 1554년(명종 9)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물었으며, 이이와는 24세 때부터 교류하며 도의지교로 사귀었다.

당대의 유학자인 성혼·정탁·정유일·양사언 등과도 교류하면서 학식을 쌓았다.
36세 때인 1567년(명종 22) 이이가 보낸 글에서 나타나듯이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근본으로 하는 실학으로서의 성리학에 깊이 심취했으며, 이이와 학문을 함께 논했다.

선생은 대화(大和)와 평창의 합병에 대해서도 이이와 서신을 주고받는 등 민생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시무(時務)에 관해서도 깊은 논의를 한 것으로 보아 선생의 학문적 깊이를 평가할 수 있다.

사람들이 최운우의 학문과 인물을 평해서 ‘성리학에 힘썼고, 품행은 정몽주’라고 했다.

후일 송시열도 묘표(墓表)를 지어 그의 높은 뜻을 추모하기도 했다.

최운우는 향리에 있으면서 1556년(명종 11)에 칠봉(七峯) 함헌(咸軒)과 함께 오봉서원 건립에 앞장서는 등 풍속교화와 문풍 진작에 남다른 노력을 보였다. 

1600년(선조 33)에 「연곡향약」을 시행하게 되는데, 최운우는 강릉부 전체를 관장하는 도약정(都約正)으로 향약을 운영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연곡향약」은 이이의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어, 풍속교화에 대한 서로의 뜻이 통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연곡향약」 시행은 기묘사류들이 성리학 보급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여씨향약」 보급에 힘쓴 일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운우는 『향호집(香湖集)』을 남겼으며, 관련 유적으로 주문진 향호리에 묘소가 있고, 양양군 현남면 원포리에 화상암(和尙岩)과 향호변 향호정터에 유훈이 살아 있다.

이 열두 선비가 배향된 향현사에서는 해마다 제례를 올린다. 

열두 선비들은 강릉을 관향으로 하는 거성(巨姓), 즉 최씨, 김씨, 박씨와 영해이씨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각 성씨별로 따로 제례를 올린다.

 또 강릉유도회가 주관하여 매년 음력 9월 중정일(中丁日)에 12향현 추모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12향현과 관련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1721년(경종 1)에 최하중(崔夏重)·최이옥(崔以沃)·김원진(金元璡) 등이 당시 유림의 총의를 모아 먼저 배향된 7현의 사적(事蹟)과 세계도(世系圖)를 편수하였다. 

그 후 1915년 김윤신의 후손이 12현의 행장을 만들었으며, 이어 1930년 가을 제향에서 유림과 후손들이 12향현의 행록을 간행하기로 결의하고 각 후손에게서 행장과 자료를 수습하여 한 권으로 편집하여 1931년 『강릉향현행록(江陵鄕賢行錄)』을 간행하였는데 사실 이것이 『강릉향현행록(江陵鄕賢行錄)』의 초간본이며 원본인 셈이다.

1976년 강릉향현12선생기념사업회가 『향현사지(鄕賢祠誌)』로서 『강릉명륜서원지(江陵明倫書院誌)』를 편찬하였으며, 2005년 4월 앞서 발간되었던 『강릉향현행록(江陵鄕賢行錄)』과 『강릉명륜서원지』에 이은 속편으로 『신속강릉향현사지(新續江陵鄕賢祠誌)』가 편찬 발간되었다.

열두 명 옛 선비들의 삶과 자취를 살펴보았는데, 기록으로만 볼 때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일생을 꼿꼿하게 걸어간 선비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옛 사람들의 삶이라고 해서 어찌 시련이 없고 유혹이 없었을까. 

다만 삶의 순간순간에서 그들은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었고, 그 결과가 오늘과 같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강릉 출신 김 작가 고향예찬
최근 방영중 ‘미스터션샤인’
강릉 송정해변 배경 촬영
‘태양의후예’‘도깨비’ 촬영지
 현재에도 관광지로 인기몰이
TV인기드라마작가의 계보를 잇고 있는 강릉출신 김은숙(사진) 작가가 최근 인기리 방영되고 있는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비롯한 역대 작품 곳곳에 숨겨둔 ‘고향예찬론’이 또하나의 재미를 선사하며 화제가 되고 있다.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 시크릿가든(2010),신사의 품격(2012),상속자들(2013),태양의 후예(2016),도깨비(2016)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대박행진을 이어나가고 있다.

제작비 400억원을 들인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도 지난 7일 첫 방송 이후 동시간대 지상파방송을 제치고 시청률 1위를 기록,‘믿고보는 김은숙 드라마’임을 재확인시켰다.

TV드라마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김은숙 드라마의 공통점은 그의 고향 강원도와 강릉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시크릿가든’의 주인공 김주원(현빈 역)은 ‘강릉김씨 시조’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신사의 품격’에서는 교사역을 맡은 서이수(김하늘)의 직전 근무학교를 김 작가의 모교인 강일여고로 연출했고,속초설악야구장과 양양 광진해변을 드라마 배경으로 촬영했다.

드라마 도깨비 주인공 김신(공유),지은탁(김고은)의 첫 만남 장소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강릉 주문진 방사제는 전국민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19개국에 동시 방송되는 ‘미스터 션샤인’은 강릉 강문과 송정해변을 배경으로 촬영됐고 추가로 선교장 등 강릉의 고풍스러운 명소를 물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 ‘태양의 후예’-옛 한보탄광에 세운 세트
김 작가의 드라마는 또 ‘상속자들’에서 동해 묵호 등대오름길 벽화마을을 차은상(박신혜 역)이 엄마와 함께 떠나온 등대마을의 배경으로 등장시켰고 한류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쌍두마차였던 유시진(송중기)·강모연(송혜교)의 해외파병지 세트장은 태백 통리 옛 한보탄광에 제작돼 현재까지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 ‘도깨비’-주문진 방사제
배윤경(48·강릉)씨는 “지역출신인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보면 고향 강릉과 강원도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고 말했다.

한편 김은숙 작가는 강릉 옥천초,동명중,강일여고를 거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17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 등을 수상했다. 박창현

출처: 박창현 2018년 07월 19일 목요일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http://www.kado.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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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전주 전라감영에서 전라도 1000년 기념식
 고려 현종이 1018년 행정구역 개편하면서 설치
 왕조·체제 부침에도 10세기 동안 그대로 유지



전주 한옥마을 부근의 풍남문 전북도청 제공


전라도 1000년 기념 상징

고려는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을 받았다.

거란은 군병 40만을 보내 강동 6주를 요구했다.

현종은 개경까지 빼앗길 처지에 놓이자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쪽 전주와 나주의 백성은 국난을 당한 현종을 따뜻하게 보듬었다.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현종은 달포 만에 돌아갔지만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남쪽 백성들을 잊지 않았다.

현종은 1018년 북쪽 방어를 강화할 목적으로 행정구역을 ‘5도양계’ 체제로 개편하면서 두 고을의 앞글자를 합친 ‘전라도(全羅道)’란 이름을 만들어 감사를 표시했다. 광역도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전라도의 시작이었다.
이후 전라도는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 분연히 떨쳐일어났고, 민초들의 고통이 깊어갈 때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혁에 앞장섰다.

의병 활동, 동학농민전쟁, 학생독립운동, 5·18민중항쟁 등 저항과 개혁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졌고, 정여립, 김덕령, 윤두서, 기대승, 전봉준, 박준채, 윤상원, 이한열 같은 ‘시대의 아이콘’들을 꾸준히 배출했다.


나주 옛 시가지의 동점문 나주시청 제공

전라도라는 행정구역이 탄생한 지 올해로 1000년을 맞았다.

광주시와 전남도, 전북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3년 전부터 상징물 제작과 ‘방문의 해’ 운영 등 30개 사업을 준비해왔다.

사업 중에는 전라 감영, 나주목 관아, 광주 희경루 등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계획도 포함됐다.

전북도는 오는 18일 전라 감영 일대에서 ‘천년의 자긍심, 새로운 천년을 향한 웅비’라는 주제로 전라도 1000년 기념식을 펼친다.

17일 밤에는 전주의 옛 도심인 풍남문에서 1000년 타종식과 조통달 소리삼대 공연 등으로 전야제를 펼친다.
광주시와 전남도는 올해 초부터 기념 사업을 펼쳐왔다.

광주시는 지난 1월1일 금남로 5·18민주광장에서 타종으로 정도 1000년을 개막했다.

전남도는 지난 4월 장흥 정남진에 1000년 가로수길을 조성했다.
김현주 전남도 광역행정팀장은 “전라도는 10세기 동안 이름과 영역을 변함없이 유지해왔다.

경상도 704년, 충청도 662년, 강원도 623년, 평안도 605년, 경기도 604년, 황해도 601년, 함경도 509년, 제주도 72년에 견줘 전통이 유구하기 때문에 정체성과 자부심, 연대감이 매우 강하다.

정도 1000년을 환황해시대의 주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다.
출처:한겨례신문 안관옥 박임근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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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지명 ‘전라도’ 대신 ‘호남’ 선호하는 연원 흥미롭죠”

‘전라도의 탄생-생활의 터전’ 펴낸 김덕진 광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고려때 1018년 지명…‘호남’은 13세기 ‘시’에 등장
 귀화인마을 향화촌·철제갑옷·여순사건 금지곡…
“전라도 사람들이 어떤 터전 위에서 생활해왔는가를 행정구역의 위계에 따라 크게 도·군현, 면리로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최근 <전라도의 탄생1-생활의 터전>(도서출판 선인)을 펴낸 김덕진(58) 광주교대 교수(사회과교육과)는 20일 “각 자치단체별로 편찬한 지역사를 넘어 전라도역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전라도의 등장 이후 지방제도 개편 과정에서 전라도의 위상이 꼼꼼하게 정리돼 있다.
도의 행정을 총괄한 전주감영과 육군 지휘를 총괄한 강진병영, 세계 최초의 특수선 ‘거북선’을 건조한 좌수영 등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또 전라도 군현의 정비과정, 면과 마을에 대한 변천사도 들어 있다.
‘전라도’를 연구해온 김 교수는 “이제는 ‘전라도 통사’ 편찬을 서둘러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전라도의 별호인 ‘호남’의 연원을 추적한 내용이 흥미롭다.

전라도는 고려 때인 1018년 탄생했다.

호남이란 말은 고려 중기 13세기 강진 만덕산 백련사를 이끌던 승려 ‘천인’이 지은 시에 처음 등장했지만, 고려말~조선초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공식 지명인 전라도는 행정적인 느낌이 들지만, 호남이라는 별호는 토속적이고 지역적인 색채가 더 강했다”고 말했다.

전라도 사람들은 감정이나 문화를 말할 때 호남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관리 임명장 등 문서엔 전라도라고 적혀 있지만, 세금 징수·군인 징발 등엔 호남이라는 명칭을 선호했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항일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장들도 ‘호남’을 더 많이 썼다.


김덕진 교수가 쓴 <전라도의 탄생1-생활의 터전>의 표지.
“전라도는 바다를 통해 중·일과 교류하며 해양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 교수는 “전라도 사람들은 바람과 물길만 맞으면 어디든지 내 맘대로 배를 몰고 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과 기질이 강했다”고 말했다.

그러한 문화적 다양성의 터전은 “선종을 받아들여 골품제사회를 무너뜨리며 호족사회를 열고, 절의사상을 주창하며 척신정치를 청산하고 사림정치를 열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봉건사회를 타파하고, 5·18민중항쟁으로 민주사회를 구현하는”것으로 역사에서 증명됐다.
고려 말 최고의 수군 장수인 나주 출신 ‘정지’(1347~1391) 장군의 갑옷에 얽힌 역사도 흥미롭다.

그의 갑옷은 철편 주위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철편과 철편을 고리로 연결시켜 만든 철의(보물 제336호)였다.

상반신을 화살과 창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군 창설을 주도하고 쓰시마 정벌을 제안한 정지 장군은 광주로 내려와 세상을 마쳤다.

광주 사람 ‘김덕령’은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뒤 정지의 갑옷을 입고 고인의 무덤 앞에서 제를 올렸다. 광주 사람 ‘유평’도 병자호란 때 정지 장군의 철의를 구해입고 의병을 일 으켰다. 김 교수는 “정지 장군 철의는 광주 사람들에게 국란극복의 신화가 됐다”고 말했다.


나주 출신 정지(1347~1391) 장군의 철제 갑옷.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갈무리
전라도에 이방인 마을이 생기게 된 것은 정치적 망명이나 전쟁 등의 이유 때문이다.

외국인이 귀화해 집단으로 사는 마을을 향화촌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명량대첩에서 패전한 왜군 일부가 귀국하지 않고 해남에 정착해 20세기 초까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영암군 곤일면과 곤이면에도 향화촌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파병됐던 명나라 진린 장군의 손자도 명나라가 망하자 망명해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에 정착했다.

전북 정읍과 전남 영광에도 명나라 사람들이 이주해 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회적 충격을 노래로 달랬던 전라도의 문화도 소개하고 있다.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던 여순사건 이듬해 나온 ‘여수 야화’는 가사 내용 때문에 지역 사람들이 애창했던 노래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9월 이 노래에 철퇴를 내려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이 됐다. 광주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 이후인 1982년 4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충격을 달랬다. 이 노래도 한 때 제창이 금지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지역민들이 애창한 노래가 금지곡이 된 곳도 전라도가 유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출처:한겨례신문2018-12-25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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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길 답사팀 8일간 도보 이동/ 탐방로 개설 기초자료 활용 방침

조선시대 정선군수 부임 당시 한양(서울)에서 정선까지 걸었던 옛길이 127년만에 아리랑 명소길로 부활한다.
정선군 아리랑길 답사팀은 19일 오후 정선군청 앞에서 출정식을 갖고 서울 경복궁까지 총거리 260㎞를 차량 이동 없이 도보로 이동할 계획이다.
이들은 정선군청 문화관광과 직원 4명으로 구성됐으며 오는 26일까지 총 8일간의 대장정에 들어간다.
이번 탐방길은 지난 1887년 당시 한양~정선을 오고다녔던 여덟번의 기록을 담은 오횡묵 정선군수의 정무일기 ‘정선총쇄록’을 토대로 답사에 나서게 된다.
답사팀은 ‘정선총쇄록’의 기록에 근거, 정선 가리왕산에서 벽파령을 넘어 평창군을 거쳐 횡성 새말, 원주 강원감영, 충주, 경기 양평 등 10개시군에 달하는 옛길을 따라 여정을 떠나게 된다.
특히 답사기간 숙박도 오횡묵 전 군수가 유숙한 곳을 찾아 묵을 계획이어서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현재 평창에서 원주길은 옛길을 따라 개설된 국도와 인근 마을도로, 지방도로를 지나며 주요 지점에 길 표식을 남겨 서울~정선간 아리랑 순례길 탐방로 개설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방침이다.
아리랑길 답사팀 박종만 정선군 관광진흥담당은 “이번 답사는 조선시대 정선아리랑이 흘러간 흔적이나 옛모습, 옛길을 찾아 새로운 아리랑 명소길을 복원하기 위한 첫 작업”이라며 “향후 정선 아우라지에서 한강을 따라 서울 마포에 이르는 수상 아리랑로드를 추가 답사해 아리랑 가사와 접목된 산길, 물길의 흔적을 조명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출처: 정선/박창현 chpark@kado.net <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승인 2014.06.20 

예전에 외가쪽 친척분이(상래형집안玉街派 機張宅) TV에 나오셨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그분또한 저희김씨 집안이라서... 단어가 생각이 안나다가 자료를 찾다보니, 이 자료였더군요.^^

 -‘계(契)’를 아십니까 - 강릉 지역의 전통적인 계문화


강릉에서도 예부터 친족이나 지역 주민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결사체인 계(契)가 발달하였다.


그렇다면 독특한 공동체 문화와 시대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강릉 지역의 역사적인 계문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계는 사교계, 족계, 동계 등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기준에 따라 강릉 지역의 여러 가지 계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강릉 지역의 사교계로는 지역적 연고와 동년배라는 기반 위에 설립된 죽장회, 지역적 연고와 동년배라는 기반 외에도 학문적 수학을 목적으로 결성된 금란반월회 등이 있다.
동계로는 강릉시 옥천동 김씨 동족촌락에 전해지는 대동계(大洞契), 강릉시 운정동 동민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대동계(지역의 일반적인 일을 다루었다면 모임) 등이 있다.
족계로는 문중 단위의 문계 또는 문회가 있으며, 여러 성씨가 연합한 임영족회와 같은 족계도 강릉 지역에서 설립된 바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강릉 지역 출신으로서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해서 선현에 봉사하는 의미로 후손들이 결성한 계련당(桂蓮堂)의 모선계(慕先契)가 있으며, 지역 원로들의 공동체의식의 발로인 오성정계(五星亭契) 등도 있다.

이밖에,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상호부조를 하기 위해 만드는 동갑계도 강릉 지역에서는 매우 성행한다.
학연을 중심으로 해서 결성되는 계도 상당히 성행하고 있다.
1920년대 후반에 조사된 강릉지역의 사회단체 및 계 등에 대한 현황표를 보면 이런 상황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강릉에서는 공익 목적과 사적인 목적을 위한 다양한 결사 조직들이 유지되고 있다.
공익 목적의 모임으로는 지역 기관장의 모임인 수요회, 경포회, 마을 공동의 이익과 안녕을 위한 동계 등을 들 수 있다.
한편으로 사적인 목적의 결사체로는 족계, 동창계, 갑계, 상포계 등을 들 수 있으며, 최근에는 동일한 취미를 향유하는 사람들끼리 결성되는 동호회 성격의 모임도 많이 운영되고 있다.
 
먼저 지역 사회의 양반들이 형성한 사족계가 있다.
조선시대 향촌사회 재지사족들이 결성한 계가 사족계(士族契)다.
사족계는 사족 간의 결속을 도모하면서 자신들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결사체다.


강릉 지방에서는 조선 초에 이미 죽장회(竹杖會),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등이 결성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약국계(藥局契), 주춘계(住春契), 문생계(門生契), 모선계(慕先契), 취영계(聚瀛契) 등 많은 사족계가 결성되었다.
이밖에도 많은 사족계가 결성되었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대부분의 사족계는 조선,전기보다는 후기에 조직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조선시대 사족계는 추구하는 목적과 관련하여 성문화된 규칙을 마련함으로써 합리적인 운영을 도모하였다.
계원들에게서 일정하게 재물을 거둬서 일정한 기금을 공유하였으며, 공유된 기금은 장리(長利)활동을 통해 증식하기도 했다.
연중 수차례의 집회를 열어 계원들 간의 결속과 친목을 도모하였으며, 집회를 통해 계칙의 운영과 개정을 논의하고 제정하면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갖가지 사업을 도모하였다.
사족계는 사족 즉 향촌 사회의 양반들이 구성원인 자의적인 조직이었으며, 근본적으로 신분적 질서를 요구함으로써 그 운영은 매우 폐쇄적이었다는 특성이 있다.
이런 특성은 사족계가 비록 성리학적 이념을 추구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차적으로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영속시키려는 욕구에서 기인한다.
사족계는 사족 자신들의 이해와 입지를 구축하는 기제로 작용하면서, 향촌 사회에서 보편적인 계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사족계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져갔다.
향촌사회의 신분질서가 동요되고 이로 말미암아 향촌사회의 역학관계가 변모되면서 사족계의 조직과 운영은 점점 훨씬 폐쇄적이고 경직될 수밖에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사족계는 한시적으로 존립할 운명에 처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족계는 ‘상하합계(上下合契)’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향촌사회의 변모된 역학구도에 조응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그랬다 해도 사족계가 자신들이 추구하였던 신분질서의 정립과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성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상하합계’ 형태가 향촌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려는 명분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족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편 덕분에 사족계는 조선말까지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족계와 달리 족계는 친족 사이에서 형성되는 계조직이다.
혈통이 같은 친족 사이에서 종문(宗門)이라는 일종의 족계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친족에게 신분상의 변동이나 사건이 생겼다면 그 사건의 속성이나 대외적인 의의를 불문하고 정신적·물질적으로 상호부조하면서 이의 해결에 노력하는 것이다.
족계는 처음 형성된 후 자손 몇 십대에 이르는 현재에도 가족 제도의 좋은 풍습을 이어가면서 유지되고 있다.


강릉 지역에 전해지는 족계로는 각 문중 단위로 운영되는 문중계, 문회(門會), 종친계 등이 있으며, 친족관계에 있는 여러 성씨가 함께 결성하는 족계도 있다.
최근에는 강릉 지역에서 종친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성씨가 연합하여 결성한 모임도 있다.
강릉지방에서의 족계의 출현은 16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16세기 중반 경에 결성되기 시작하여 17,8세기에 일반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족계는 부계혈연 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며, 부계의 조선봉사(祖先奉祀)를 원초적인 목적으로 한다.
또 족계는 족보의 간행 등을 통해 족척 간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족계의 한 사례를 들어 보이는 의미에서, 17세기에 결성된 임영족회를 소개해 본다.
임영족회는 강원관찰사 여우길(呂佑吉)[호는 춘호(春湖)]이 관동 지방을 순행하면서 강릉에 들렀을 때, 관찰사가 강릉 지방의 재지사족과 동원(同源)이라 하여 마련된 족회다.


강릉 지방의 재지사족들은 오랜 동안 세거하면서 각 성씨 간에 내·외족(內·外族)을 이루고 있었다.
임영족회가 성립된 계기는 여우길 관찰사와 집현전제학, 이조참판을 지낸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장자인 최진현(崔進賢)이 모두 고령(高靈)박씨 박진언(朴眞言)의 외외손(外外孫)이 된다는 인연이었다.


특히 최씨 외에 일부 토성과 다른 성씨들이 임영족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최치운 가계와 계속해서 통혼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임영족회는 1615년(광해군 7) 이래로 1670년(현종 11), 1678년(숙종 4), 1679년(숙종 5), 1722(경종 2년)으로 이어지면서 100여 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670년(현종 11)의 경우는 강릉부사 여민제가 1669년(년) 9월 13일 부임한 이후 1670년(경술) 6월 7일에 부사 주재로 연회가 베풀어졌고, 동년 8월 21일에는 이에 대한 답례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동년 10월 5일에는 벌례회(罰禮會)가 개최되었다.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서문에 따르면 1615년(광해군 7) 여우길이 강원 관찰사로 부임하여 각 지역을 순행하면서 강릉에 왔을 때 강릉지역 사인 100여 명은 여우길과 동원(同源)이라 하여 관찰사를 뵙기를 갈망하였다.


하지만 공관에서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혼잡을 초래하는 일이기에 불가하다고 여겨 공관 밖에서 따로 관찰사와 54명이 만나 ‘선세돈목지풍(先世敦睦之風)’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임을 만드는 것이 선현의 뜻을 이어받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여 이에 관찰사가 승낙하여 족회가 결성되었다 한다.
족회첩은 현종 11년(1670)모임 때 작성되었다.


이때의 모임은 강릉현감으로 부임한 여민제(呂閔齊)가 종조부 여우길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당시 강릉부사 정경세가 작성한 족회 기록이 전하는 것을 확인하고 광해군 7년(1615) 참여한 최부를 비롯한 그들의 자손과 외손들을 청해서 이뤄졌다.

이들은 의운루(倚雲樓)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시를 즐기며 모임을 가졌으며 이후 사족들이 초청한 답례 성격의 족회도 개최되었다
임영족회는 ‘돈목지풍’을 강조하는 족회를 통해 향촌사회에 기여하려는 명분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수령 또는 관찰사와 지역출신 출사자들과의 긴밀한 유대관계 속에서 족회가 개최되었다는 점을 볼 때 이 모임이 향촌 사회 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임란 직후인 광해군 7년(1615)부터 족회가 개최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 후 강릉 지역 향촌사회를 추스르기 위해 사족과 지방관의 상호 협조관계와 친족의식이 필요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족계와 족계가 양반 사회에서 이뤄진 계라면, 대동계는 촌락을 단위로 형성되는 결사체다.


“맹자가 이르기를 ‘향전(鄕田)에서 정(井)을 함께하는 여덟 가구의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오면서 서로 우애를 기키고 망볼 때 서로 도우며, 질병이 있을 때에 서로 붙들어주고 잡아주면서 도우면 백성들이 친목(親睦)한다(鄕田同井 出入相友 守望相助 疾病相扶持 則百姓 親睦)’는 뜻은 사(社)를 세워서 의리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며,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친목하고 이후에 강신수계(講信修契)함은 대개 그 뜻의 영향이다”라 하였다.
이런 취지와 같이, 강릉 지방에서도 마을마다 각각 계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는데 이를 대동계라 한다.


대동계는 계약(契約)이 있어서 선배에게 강명(講明)하고 예법을 취함에 있어서 충신과 친목으로 한다.


풍속의 진작을 근본으로 삼아 백성을 공경하였으니, 그 화합함을 이웃 고을에서 아름답다고 칭송했다.
대동계는 마을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하여 마을마다 결성된다.
상계와 하계로 구분하여 결성되는데 상계는 재지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고, 하계는 하민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다.
계의 목적은 동민의 결속과 공동체적 질서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특히 조세 부담이 마을 단위인 공동납 형태로 운영되고 있던 조선 후기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동계의 역할은 매우 컸다.
16세기에 결성된 동계는 주로 사족 중심의 상계가 주도하였다.
반면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상하합계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것은 토호의 무절제한 하민 수탈에 대항해 하민들의 저항의식의 성장에서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민들은 상하합계에 참여하면서 동계 재원을 공평하게 운영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공동납 형태로 운영되는 조세납부에 대해 납세액의 조정과 부담량에 대한 형평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마을에서의 활동영역을 확대해나갔다.


1929년 강릉시 옥천동 강릉김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던 대동계 서문을 보자.
“강릉 성동(城東)에는 세 개의 큰 가문이 살았는데 대개 안동권씨, 명주최씨, 강릉김씨이다.


3 성이 이곳에 세거한 후 자손들이 자못 번성하였는데, 왕일소(王逸少)의 난정첩(蘭亭帖)에 이르기를 거역지향산의 조직은 아름답지 아니함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명승지를 유람하며 어찌 만약 이 계가 풍속을 돈독히 하여 예와 겸양을 일으키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만약 하계(下契)에 읍인(邑人), 역민(驛民)들이 왕왕 가입함으로써 첩 끝에 연령과 성명을 기록하고 뽕나무와 가래나무로 서로 도우며 애사와 경사 때 빠짐없이 도왔다.
매번 수계(修契) 시에는 강회(講會)를 열고 사람들로 하여금 술과 안주 등을 준비하여 마시거나 혹은 월대산에 오르거나 혹은 팔송정을 순유하는데 계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해학을 즐기며 이 계를 파한다.


그것이 계를 창시한 뜻이니 아름답고 성대하지 않는가?”
한편 조산리(助山里) 대동계는 19세기 초반 경에 시행되었는데 일명 고봉고청계(高峰告淸契)라고도 한다.


즉 고봉고청계란 고봉(高峰)에 치제(致祭)하는 풍속을 존속하기 위해 조직된 계이다.
19세기 초 행제 편제상 조산리는 운정(雲亭), 선교(船橋), 난곡(蘭谷), 혜재(蕙齋), 증봉(甑峰), 면천(勉川), 대전(大田), 두호미(豆呼味), 조산(助山) 등 9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청계는 9개의 자연촌락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산리 대동계라 부르기도 한다.
이 대동계는 고청제사를 봉행하기 위한 제 비용을 각 동 단위로 분담하였고, 수합된 계의 재원에 대한 식리(殖利) 또한 동 단위로 운영되었다.
이에 각 동마다 1명씩의 유사를 선정하여 이를 관리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계수는 고청제사의 제반 사항을 주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청제사는 마을의 안녕을 신에게 기원하는 의미로 이해된다.
제사를 통해서 촌락 구성원간의 일체감과 공동체의식을 함양한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동계는 마을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중심이 되는 한편 사신(祀神) 활동을 통해서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결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

 

마지막으로 거론할 계는 그 설립 의미가 현대의 ‘기부문화’에 가깝다.


1744년 옥계면 산계리에 사는 김관자(金貫子) 등 18명이 주관하여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금옥계(金玉契)다.
이들은 산간벽지에서 화전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주민들이 거듭되는 흉년과 고율의 세금으로 인하여 아주 빈곤한 지경에 다다르자 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기금을 희사하고 납세를 면해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계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계를 조직하고 상부상조하였으며 근검절약의 미풍양속을 권장하면서 주민의 재생을 도모하였다.


이후 1796년 마을 사람들은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종선비각(種善碑閣)을 건립하고 매년 4월 8일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상에서 강릉 지역의 역사적인 계조직을 몇 가지 살펴보았다.


친목을 목적으로 한 계도 있지만 계조직에 숨은 명분과 목적이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계가 지금처럼 ‘돈’을 중심에 둔 조직으로 자리 잡기 이전 우리 역사에는 이처럼 풍부하고 다양한 계조직이 있었다.
오늘날의 동호회와 비슷한 계조직이 있었고, 수많은 정치성 사조직과도 비슷한 계조직이 있었다.
우리가 계라고 알고 있는 것이 계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특색 있는 계칙-

 

1. 강릉시 옥천동대동계칙

一. 좌목의 기록순서는 계첩의 예에 따고 동리(洞里)는 거주지, 이름은 연령순에 따라 기록하며 이것을 준행하며 함부로 바꾸지 말 것
一. 각 마을에서 새로 가입하고자 하면 1냥을 내며, 입계가 승인되면 5전을 더 낸다.
一. 유사는 1년마다 교체하는데 남·북촌 사람으로 교체하며, 대동계에서 3명을 선발하며 두 사람으로 하여금 유사를 행하도록 하고 계원 중에서 60세 이상자는 거론하지 않는다.
一. 매달 강신(講信)은 20일로 정하여 실시하고 모두 모여 즐기며 불참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一. 춘추에 두 번 토성 및 월대산, 팔송정에서 만약 소나무를 훼손하거나 잡목을 채취하는 행위가 적발되면 죄를 물어 징벌한다.
一. 계원이 작고하면 상포 1필, 부지(敷紙) 1속, 죽(粥) 대신 조(租) 5두를 허급한다.
一. 계원 중에 만약 이사를 가면 본전을 출급한다.

 

2. 모선계규약
제일조 본계의 명칭은 모선계라 함
제이조 본계의 계원은 사마소의 사손으로 함
제삼조 본계의 집합장소는 강릉사마소내로 함
제4조 본계의 목적은 계원 선세들에 의해 전해지던 강릉사마소 계련당과 이에 부속된 토지, 임야를 영구보존하고 사기(士氣)를 진흥케 하며 권업 및 식산을 장려함
제오조 본계의 기본재산은 사마소의 재산과 입계금으로 함
제육조 본계의 신입계원은 입계금 1원으로 하되 단 재산이 많은 경우 이 제한을 두지 않음
제칠조 본계의 정기총회는 매년 10월 21일로 정함
제팔조 본계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계장 1인, 유사 3인
제구조 본계의 계장은 계원 중 연장자로 하고 유사는 계회일 계원 결의에 의하여 계장이 이를 지명함
제십조 계장은 계무를 총괄 감독함
제십일조 유사는 계장의 명에 의하여 서무 및 회계에 종사함
제십이조 계장 및 유사의 임기는 다음과 같음

계장은 무기한 함

유사는 1년으로 함

제십삼조 유사는 매년 총회시 계중 회계 및 수지를 계중에 보고할 일

제십사조 계원 중 사망자가 있을 때에는 상호간 위문하며 계중에서 종이와 초를 부조하고 그 계원의 사손으로 하여금 승입케 할 일, 단 승입계원은 입계금 일원으로 함

제십오조 계원은 사기를 진흥시키기 위하여 성공 가능한 자기 자질(子侄)을 권학하여 명유달사(名儒達士)에 이르게 하여 타의 모범이 되게 할 일

제십육조 본 계원은 실업과 또는 부업을 힘써 행할 것

제십칠조 전항 제15·16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인정될 때에는 이를 포상할 일

제십팔조 본 규약은 본계 창설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3. 오성정계규칙

一. 기본재산 백미 이두씩 매년 10월 22일 일제히 수합함

一. 매년 4월 9일, 9월 9일 오성정에서 정기총회 개최

一. 정기 회합일 계원 유고시 자제 대행 할 일, 만약 연유 없이 불참할 경우 다음 모임 일에 불참한 모든 사람을 면책할 일

一. 정기일 비용은 십원을 초과하지 않을 것

一. 정기총회 때 원금은 보름 단위로 세 번 나누어 식리할 일

一. 원금과 식리는 계원이 타인에게 식리하지 말 것

一. 계중 사람의 보증을 허락하지 말 것

一. 현금을 아직 대부하지 않을 경우 유력자가 보관할 일

一. 계원 중 혹 이사 가는 사람은 있으면 친족이 대행함

一. 만약 이사 가면 그 첫 달에 서신을 왕래할 일

一. 계원 중 혹 사망자가 있으면 계에서 미 6승, 포 1필과 더불어 백지 1권, 양초 1갑을 부의함

一. 계원들은 종이와 초로 부조할 일, 양례 시 만사 1장, 백미 1두씩을 부조함

一. 양례시(襄禮時) 계에서 삼실과, 대구포 1미, 제문 1건을 지어 해당유사가 직접 거행할 일(과포 대금은 일원 정도)

一. 양례 때 계원 중 유고가 있을 경우 그 자제가 대행함

一. 3년 후 장자 또는 장손이 승계하며 1번 회차(會次)할 일

一. 정자가 만약 훼손되면 계원 모두가 협력하여 수리하고 영구히 유지할 것

一. 직실(直室)은 매년 세금과 제초 등을 부담할 것

一. 해당 유사와 직이(直伊)는 종종 정자를 살피고 수리할 것

一. 장부는 해당 유사가 서로 인수인계할 것

[참고문헌]
 
• 이규대, 「강릉지역 계의 변천에 관한 시론」(『우리문화』창간호, 우리문화연구회, 1994)
• 이규대, 「조선후기 영동지방의 향촌지배 구조에 관한 연구」(중앙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1)
• 방동인, 『영동지방향토사연구자료총서』Ⅰ(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1989)
• 임호민, 「조선후기 강릉지방 재지사족의 향촌활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4)
• 임호민 역, 『국역 강릉생활상태조사』(강릉문화원)
• 「임영관족회첩발」(『우복집(愚伏集)』권 15)
• 『계의 이론과 운영사례』(내무부, 1986)
• 최호·임호민 역, 『국역동호승람(國譯東湖勝覽)』
• 『임영지(臨瀛志)』(임영지증보발간위원회, 1975)
•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강릉문화원, 1997)
• 『임영(강릉·명주)지(臨瀛(江陵·溟洲)誌)』
• 『운정동지』 
 
 
출처:한국학 중앙연구원 共同體文化의 實體인 契文化의 推移 임호민 저/사진"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참고: http://gangneu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302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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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2  집안모임으로 금란정에 다녀왔습니다. 무릉계곡에서 금란정이 있습니다.

#현재의 금란정.

동해 무릉계곡에 가보면 금란정이 있다.

대한제국 광무7년(1903년)당대 삼척지방 유림재생들은 향교 명륜당에 모여 현학을 강마하고 동양 예의를 존숭하며

봄과 가을의 음상을 즐겨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향교가 폐강되었고 이를 분개한 유생들이 울분을 달래기 위해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고 그 뜻을 기념하기 위해 정각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그 후 당시 계원들은 선배 계원들의 뜻을 받들어 다시 정자를 건립하기로 하고 1947년 북평동 단봉 석경등에 금란정을 건립하였다.

현재의 금란정은 1958년 무릉계곡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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