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라 평생을 살아 온 ‘진짜 강릉사람’이 강릉 거리에 켜켜이 쌓인 옛 이야기를 풀어내는 역사문화 해설서 2권을 냈다.
박삼균(69) 영동인문학연구소 대표가 펴낸 ‘강릉 고샅길 사용 설명서’다. 
저자는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퇴직 후 골목투어 프로그램을 만들고 가이드 역할을 해았다. 
그가 강릉 거리 곳곳에 배어 있는 이야기들을 씨줄 날줄을 엮듯이 기록하고 해설한 강릉 이해 지침서다. 
강릉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1부-원도심지역 및 월화거리’ 편을 낸 데 이어 올해 ‘2부 구정면 성산면 편’을 내놓았다.
1부에서는 읍성과 관아 이야기, 역사 속 월화정 이야기 등 강릉 도심 명소와 문화유산에 대한 해설부터 용강동과 서부시장, 동부시장과 아파트 이야기 등 근·현대 강릉 거리의 변천 과정에 이르기까지 강릉 시가지가 품고 있는 모든 이야기 보따리가 낱낱이 풀어 헤쳐진다.

올해 펴낸 2부에서는 구정면과 성산면 각 마을의 역사와 명소, 생성 과정, 생활 문화가 마치 박물관 해설서를 대하듯 시선을 사로잡는다.

구정면 어단리 편에서 필자는 “어단(於丹)이라고 쓰지만, 그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의 표기이고, 그전에는 어단(御壇)이라고 썼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야기와 기록에 의하면, 고려·조선 교체 초기에 강릉의 문사들이 고려 우왕의 위패를 모신 어단을 쌓아 놓고 충절을 지키며 조선 조정에서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겠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그후 조선 왕조가 자리잡으면서 어단은 해체되고, 다만 그들의 선비정신을 가상히 여겨 추방하자 그들이 언별리 깊은 골로 들어가 단경(壇京)이라고 부르며 충의를 지켰다는 얘기가 잘 알려져 있다”는 풀이가 더해진다.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저자와 동행, 숨어 있던 얘기를 들으며 강릉 여행의 흥취를 배가할 수 있다. 
저자는 “내가 겪고 경험한 과거사도 조만간 역사 속에서 매몰될 것이 분명하니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억의 파편이라도 남겨두자는 결심”이라며 “앞으로 강릉시 해변지역을 비롯 주문진 등 나머지 읍·면 지역의 고샅길 이야기도 완성해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 황선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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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 신문을 읽다 재미있는 글이 있어, 스크랩해본다.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신분제가 공고히 유지되려면 귀족의 수는 늘 적게 유지돼야 한다. 
노동하지 않는 귀족이, 생산에 종사하는 평민보다 수가 많아지면 체제 유지가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분제는 사라졌다. 
조선 500년간 유지됐던 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공식 폐지됐다. 
그럼에도 국민 모두는 양반이 되고 싶었고, 이 때문에 족보를 사고 파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조선 초 인구의 약 7%였던 양반이 조선 후기엔 약 70%까지 늘어났다. 
덕분에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도 신분제 개념이 지워지게 됐다.
역사를 답습해 현대 한국에서도 기득권으로 분류되는 직업 또는 직능이 대두될 때마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대응으로 ‘증원’이 늘 거론된다. 

기득권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그 희소성이 퇴색된다는 것이 학습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새로운 ‘지배계층’의 출현을 막는 것이라기 보다는, 문턱을 낮춰 더 많은 시민이 의료 서비스, 법률 서비스 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탄탄히 깔고 있을 때 대중적 지지를 받는다.
2024년은 의사의 해다. 
정부는 지난 20일 2000명에서 단 한 명도 줄이지 않고 의대 증원에 쐐기를 박았다. 
한 달을 넘게 끌어온 의-정 갈등이 9부능선을 넘어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날 교육부의 공문을 받은 각 대학은 늘어난 정원을 반영해 수시모집과 정시모집 비율 및 전형방법을 결정한다.
게다가 증원이 서울 지역에는 한 명도 없고, 전부 수도권과 지방국립대에만 배정됐다. 
파업을 주도했던 수도권 빅5 전공의와 사직을 결의한 서울권 의대 교수들의 집단행동 동력이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는 기존 의료계가 겪어보지 않은 유형의 충격이다. 
그동안 의협 지도부뿐만 아니라 수련병원의 전공의들을 비롯해 의대생들도 집단 휴학으로 정부에 맞설 수 있는 배경에 대해 많은 의료계 인사들은 “(의사들이)한번도 져본 적 없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의대 증원을 찬성해온 국민들 다수는 2000명을 꽉 채운 이번 확대 정원 발표가 ‘의사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패하는 첫 선례’로 이어질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환자들을 내팽개치고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들은 비판 여론에 아랑곳없이 ‘병원 그만두고 쿠팡 알바 하는 중’이라고 우스개소리를 하거나, ‘판·검사는 수학 포기한 바보들’, ‘제가 있고 환자가 있다’는 등의 비아냥대는 언사를 이어갔다. 
병원에 남은 전공의들과 수업을 계속 받는 의대생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추후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도 일반 시민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박명하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조직강화위원장은 “보조 수사관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껌을 뱉어라’고 하는 등 부당하게 압박하고 강압 수사를 했다”며 수사관 기피 신청서를 냈다.
의사, 의대생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이 광경에 ‘천룡인(모든 법 위에 군림하는 귀족) 납셨다’며 비판했다. 
의사들이 자기 직업 외의 사람들을 돌아서게 만든 바람에 정부의 속전속결 의대 증원은 여론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금의 의대 정원 증원 사태가 있기 전, 변호사·판사·검사가 속한 법조계가 이 단계를 먼저 거쳤다. 
2008년에 도입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은 25개 대학에 설치돼 다음해 2000명의 입학생을 받았다. 
2012년 첫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법무부는 1회 변호사시험 합격률을 ‘입학정원 2000명 대비 75%’로 잡았다. 
1500명의 로스쿨 변호사가 신규 유입된다고 알려지자 201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41기 연수생 약 1000명에 더해 법률시장이 ‘공급과잉’ 상태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법무부가 당시 ‘로스쿨 학생 중에서 원장이 추천하는 우수생을 우선적으로 검사로 임용하겠다’고 방침을 내놓자 사법연수생들은 입소식 참석 거부와 성명서 발표라는 사상 초유의 ‘집단행동’에 나섰다. 

연수원 출신 선배 변호사들도 힘을 실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일컬어 ‘로변’이라며 연수원 출신 변호사와 급을 나누는 행태가 지속됐다. 
또, 변호사 숫자를 늘려봤자 서울 쏠림만 심화될 것이라는 비관도 제기됐다.
하지만 1기 졸업생 배출 이후 11년이 흐른 2023년 기준, 지방 변호사 수도 전체 변호사 증가에 비례해 늘어났다. 
현재 의대 증원 국면에서도 비수도권 의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결국 다시 수도권으로 모여, 의료 서비스의 수도권 쏠림 현상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란 비슷한 지적이 나오고 있는 바, 법조계 선례가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변호사가 상대적으로 흔해지면서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법률전문가인 변호사들을 고용할 수 있게 됐다. 
경찰을 비롯해 공무원 조직에 변호사들이 특채로 임용되고 있고, 일반 사기업은 사내 변호사를 뽑아 법무팀을 구성한다. 
언론사에도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기자들이 유입됐다.
또, 변호사들이 과거 사법시험만 존재하던 때처럼 모두 엄청난 연봉을 벌어들이진 못하지만 여전히 일반 직장인에 비하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변호사시험 1회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일반 회사에 다니다 변호사가 되고 10년 가까이 일을 하다보니 왜 그렇게 전문직 진입장벽을 높이려고 했는 지 알겠다”며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현재도 변호사 벌이는 일반 직장인에 비하면 훨씬 높다. 
의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의사도 그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수입이 많이 줄어들 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오히려 정부가 기피과(필수과)에 혜택을 주겠다고 공언한 만큼 해당 과 의사들은 더 조건이 좋아질 수 있다.
정부는 21일 오후 처우 개선 토론회를 열어 전공의 달래기에도 나선다. 
이미 의대 증원 계획 백지화가 물 건너간 가운데 정부는 연속 근무 시간 단축 등 환경 개선에 집중해 전공의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달부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들에게 매달 100만원씩 수련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분만, 응급 등 다른 필수의료 과목 전공의들까지 지원할 수 있도록 대상 범위를 조속히 확대할 계획이다.
아울러 올해 상반기에는 전공의 연속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80시간인 일주일 최대 근무시간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한다. 
하반기에는 수련환경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도 하고, 수련환경평가위원회에 전공의의 참여를 늘린다. 토론회에는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 외에 임인석 중앙대 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임 교수가 복지부 장관 직속 기구인 전공의 수련환경평가위원회의 기관평가위원장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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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독서실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뜻은 이렇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이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규모는 지금 도서관 전체 부지 면적 1만1000여 평 절반인 5672평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는 애매한 말로 설명하느니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박제순에 대해서 할 말이 우물물만큼 깊고 차가우니까. 박제순 돌덩이만 아니다. 정독도서관에는 눈여겨볼 만한 표석과 역사적 흔적이 숱하다.

지금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책을 접하려는 시민으로 붐비는데, 100년 전까지 이 도서관 터에는 숨 막히는 역사적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박제순과 식민 시대까지 도서관 터 땅 팔자로 훑어보는 격변 근대사.


정독도서관 본관 뒤편에 있는 박제순 우물돌.

안내문은 ‘박제순’의 ‘박’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하다.
어느 여자의 청원서와 김옥균
‘저는 예전에 한성 북부 홍현(紅峴)에 거주하다가 갑신년(1884)에 국사범으로 바다 바깥 귀신이 된 전 참판 김옥균의 처이온데, 온 가족은 어육(魚肉)의 화를 당하고 재산은 몽땅 적몰당하는 변을 만났나이다.’ 1909년 1월 29일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아내 유씨가 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청원서를 올린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제 망부가 죄를 탕척받고 관작을 회복했으나 살 곳이 전무하오니 북부 홍현에 있는 관립고등학교가 제 집터이온즉 미망인 심정을 헤아리시어 처분하기를 천만절축하나이다.’(각사등록 근대편, 청원서2, ‘김옥균 처의 청원서’, 1909년 1월 29일)
1884년 12월 4일(이하 양력)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48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破家瀦澤),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부관참시이자 사후 능지처참을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에 갑오개혁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1894년 음12월 27일 ‘고종실록’)
김옥균 아내 유씨는 바로 이 칙령에 근거해 나라가 가져간 재산을 돌려달라고 대한제국 총리대신에게 청원서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적시한 옛 집터가 홍현(紅峴)이었고, 1909년 당시 그 ‘붉은 고개’에 관립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그 관립고등학교가 훗날 경기고등학교로 이어졌고, 경기고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학교 터는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정독도서관 잔디밭에는 김옥균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김옥균은 고개 아래 가회동 박규수 집에서 동료들과 모여 개화 이론을 배웠다.

박규수는 북학파 태두 연암 박지원 손자다.

함께 공부했던 홍영식, 서재필이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다.

정변 실패 후 홍영식은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아버지인 전 영의정 홍순목은 집에서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다. 피칠갑이 된 채 방치됐던 집은 훗날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인수해 병원을 차렸다.

알렌은 정변 때 죽을 뻔한 왕비 민씨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준 의사였다.

서재필은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가족은 누구는 자살했고 누구는 살해됐고 누구는 노비가 됐다가 죽었다.
정독도서관 동쪽 잔디밭에 서 있는 김옥균 집터 표석(왼쪽). 흙이 붉어서 ‘홍현(紅峴)’이라 불렸던 도서관 언덕에 김옥균이 살았다.

1884년 함께 홍현에 살던 서재필, 고개 아래 가회동에 살던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정변 주인공들은 갑신정변 실패와 함께 죽거나 망명했다.

이후 김옥균 집터는 폐허가 됐고 대한제국 관립학교로 변했다.

1918년 북쪽 언덕에 있던 을사오적 박제순 집터 또한 학교 부지로 편입됐다.

지금은 경기고를 거쳐 도서관이 됐다. 

오른쪽 사진은 그 박제순 집터 쪽에서 본 도서관 전경. 사진 왼쪽이 김옥균 집터 방향이다.
땅이 잊어버린 혁명가 서재필
서재필은 김옥균 옆집에 살았다. 그런데 서재필 흔적은 도서관 구내에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재혼 후 낳은 딸 뮤리얼 제이슨은 1950년대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1956년 4월 12일 대법원은 경기고 부지 가운데 3443평을 서재필 소유로 반환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경기90년사’(경기고등학교 동창회, 1990)에 따르면 ‘정부는 예산 문제로 (반환이나) 대금 지불을 미뤘고’ 결국 경기고는 1972년 강남 이전을 결정했다.(‘경기90년사’, p55)


후배 서재필과 선배 김옥균은 그렇게 북촌 좁은 골짜기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살면서 근대화와 대(對)중국 독립 명분을 쌓았다. 그러니 정독도서관 잔디밭에 서재필 표석 또한 있어야 김옥균 표석이 완성된다.


1900년 대한제국 최초 관립중학교가 정독도서관 터에 있었음을 알리는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뒤편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한 경기고등학교 표석이다./박종인 기자
관립학교의 설립과 박제순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갖춘 실업인 양성을 목표로 관립 ‘중학교 관제’ 칙령을 발표했다.(1899년 4월 4일 ‘고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10월 현 정독도서관 자리에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1880년대 이미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사립학교들이 설립됐지만 제국 학교는 한참 늦었고, 교과 내용 또한 1900년 3월 ‘중학교규칙’에 규정된 전문 과목은 빠져 있었다.(신편한국사 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교육제도’, 국사편찬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졌다.

 관립 한성고등학교로 운영되던 학교는 1911년 총독부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초대 교장은 홋카이도 교육자 오카모토 스케(岡元輔)였다.

학생이 늘어나면서 학교 부지 확장이 이슈가 된 1918년 2월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학교를 방문했다. 

방문 2년 전 박제순이 죽었다. 총독부가 만든 관제 성균관 ‘경학원’ 대제학으로 있다가 죽었다. 

경성 용산역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1000여 인파가 몰렸다. 자작 작위는 아들 박부양이 계승했다. 

손자 박승유는 이에 반발해 일본군에 자원했다가 탈출해 광복군 활동을 하며 해방을 맞았다.(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승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박제순 집은 지금으로 치면 정독도서관 잔디밭 가운데에서 본관 뒤편 언덕 너머까지였다.

그런데 박제순은 한일병합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은 귀족이 아닌가.

그래서 교장 오카모토도 그 생전에는 “학교가 좁아서…토지를…좀…” 따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하세가와가 학교를 찾았을 때 집은 폐허였다.

그때 총독부 학무국장 세키야 데이사부로(關屋貞三郞)가 “저 집터를 쓰면 된다”고 총독에게 제안했다.

그리 되었다. 이후 학생들이 고지대를 깎아 저지대를 메우는 작업을 했고, 1919년 현재 규모 부지가 완성됐다.(이상 ‘경기90년사’, p120)
그 흔적이 앞에서 말한 우물돌 돌덩이다.

1990년에 발간한 ‘경기90년사’에는 이 돌을 1970년에 발견했고 정체는 박제순 집 우물돌이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명의로 세워놓은 ‘역사적 의미’ 운운하는 안내판은 대단히 비겁하다. 있는 그대로 안내하면 되는 것이다.

김옥균 시호 받던 날
나라 잘 만들겠다고 일어섰다가 그 나라가 살해한 혁명가 김옥균은 집을 빼앗기고 집안은 박살났다. 

아내 유씨 청원은 거부됐다. 대신 이듬해인 1910년 6월 29일 통감부 꼭두각시 융희제 순종은 아관파천(1896) 직후 노변 척살당하고 관직삭탈된 김홍집, 어윤중과 함께 김옥균을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라 명했다.(1910년 6월 29일 ‘순종실록’) 전광석화처럼 부관참시와 능지처참을 당하고 또 9개월 뒤 전광석화처럼 복권된 지 16년 만이었다. 한 달이 지난 1910년 7월 29일 관립한성고등학교 옛 김옥균 집터에서 황제가 내린 시호 교지를 받는 ‘연시례(延諡禮)’ 의식이 열렸다.

 시호는 ‘忠達(충달)’이었다.(김윤식, ‘속음청사’14(한국사료총서 11집), 1910년 7월 27일) 또 한 달 뒤 나라가 사라졌다.

맑은 가을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는가. 가을비 궂게 내리는 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그 흔적들 모두가 역사다.

 출처: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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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동해 바닷가에 향나무를 묻다

지난 1999년 삼척시 근덕면 맹방 바닷가에서 오래 묵은 향나무(침향목) 몇 토막이 발견돼 세간의 주목을 끈 일이 있었다.
바닷가의 하천변 모래늪에서 예사롭지 않은 굵은 향나무 토막이 발견되다니. 

도대체 이 향나무는 어떤 연유로 맹방 바닷가에 묻히게 된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지만,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매향(埋香) 의례를 살펴보면 그 연유를 다소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바닷물과 민물(하천수)이 만나는 합수 지점의 좋은 곳을 골라 향(香)나무류를 묻는 ‘매향 의례’를 많이 행했다.
매향의 목적은 1차적으로는 품질 좋은 향을 얻기 위해서다. 
향나무는 바닷가에서 천년을 묵으면 향을 태우거나 약재로도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침향(沈香)’이 된다. 
물론 바닷가에 인위적으로 묻은 이 침향은 현대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동남아의 자연산(産) 수지(樹脂) 침향과는 다른 것이다.
두번째는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을 극복하려는 민초들의 염원이 매향 의례에 깃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고려시대는 초기에는 여진족 해구(海寇)들이 들끓고, 중·후기에는 몽골의 무시무시한 침략 전쟁에다 왜구들의 노략질까지 더해져 바닷가 해안지역은 불안이 일상이 된 시대였다.
가족이나 일가 친척이 여진족에게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로 끌려간 집도 있었을 것이고, 왜구들의 살육과 약탈로 같은 날에 동시에 집집마다 제삿밥을 올리며 통곡하는 마을도 많았을 것이다.
불안하고 피폐한 생활 환경이 좋은 향으로 안전과 발복을 기원하는 매향 의례를 낳은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강릉원주대 장정룡 교수는 “매향 의례는 미륵정토처럼 좋은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발원의 의미에다 후손들에게 좋은 향을 제공하겠다는 포용적 세계관이 담겨있다”고 진단했다.
지금까지 대규모 매향을 했다는 비(碑)가 발견된 곳은 강원도 고성군 삼일포 매향비와 평안남도 정주 침향동, 전남 영암과 해남, 충남 태안과 당진 등 여러곳이다. 
동해안 고성 삼일포 매향비(1309년)는 국내에서 발견된 매향비 가운데는 시대가 가장 앞선 것이다.
기록이나 지명을 통해서도 매향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항교 전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장(문학박사)은 1999년 발표한 ‘고성 삼일포 매향비와 침향’ 연구논문(전국향토문화연구회 대상 수상 논문)에서 “세종장헌대왕실록에 나오는 기록 등을 토대로 살펴 볼 때 1002년∼1434년까지 432년간 수십 곳에 수천조(條)의 향나무를 묻은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고성 삼일포 매향비 탁본 일부.
정 전 관장은 “강릉 주문진읍에 향호(香湖)리 라는 마을이 있는데, 천년 묵은 향나무가 홍수에 떠내려와 호수에 잠겼다고 하여 침향호라고 불리고, 황해도 장연에는 침향곶이라는 지명도 있다”고 덧붙였다.
매향비 가운데 시대가 가장 빠른 동해안 고성 삼일포 매향비의 경우는 1309년(고려 충선왕 원년) 당시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를 비롯 영동지역 9개 군현(郡縣)의 수령들이 하층민과 함께 매향의식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일제강점기까지 현지에 존재하다가 이후 행방이 묘연해 현재는 조각난 비석의 탁본 기록만 전하는 삼일포 매향비 내용은 요약하자면 “신분이나 지위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착한 일을 하는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미륵보살 앞에 맹세하고 기원하면서 삼가 향나무 1500조를 각 포구에 묻고 미륵보살이 하생하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묻은 향나무는 강릉 정동촌 물가 310조, 울진현 두정 200조, 삼척 맹방촌 물가 150조, 동산현 문사정 200조, 흡곡현 단말리 210조 등 지금은 북녘땅인 통천∼현재 경북 울진에 이르기까지 9개 고을 바닷가에 100∼310조씩이었다.

▲ 삼척 ‘척주지’ 매향비조.
1999년 바닷가에서 향나무 토막이 발견된 삼척 맹방 역시 150조의 향나무가 묻힌 것을 삼일포 매향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맹방은 매향을 한 곳 이라는 것을 뜻하는 매향방(埋香芳)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니 매향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강릉 정동진 또한 유서 깊은 매향터이다. 
지난 2000년 강릉원주대 매향유적조사단의 조사 결과 정동진 2리 여서낭당 앞 도로는 예전에 개울이었던 것으로 확인돼 현재 물이 흐르는 정동천과 함께 하천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실시된 유력한 매향터로 꼽히기도 했다.

 


▲ 지난 1999년 침향(沈香)목이 발견된 삼척시 근덕면 맹방 마읍천 하구의 현재 모습.
매향지는 주변에서 향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 이라는 공통점도 있는데, 삼척과 울진의 경우 매향지 인근이 수백년 자단향(紫檀香) 자생지로 유명했고, 강릉 정동진에도 여서낭당 뒤편 속칭 호물재산에 수백년생 향나무 자생 군락지가 분포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려인들이 동해안 바닷가에 묻은 향나무는 지금 쯤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 이라는 침향이 되어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매향 의례를 올리며 기원한 모두가 만족하는 살기 좋은 세상은 언제 쯤 구현될까. 그 옛날 매향의례를 살펴보자니 오늘날 정치 현실과 함께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진다.
출처 : 최동열의 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강원도민일보 최동열 dychoi@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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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김홍도가 반한 비경 글 읽는 소리 귓가에

 

경포호 주변의 정자 강릉의 대표적 문화유산

◇추수를 막 끝낸 듯 호해정 주변에 볏단이 쌓여 있다. 경포호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이곳은 매립돼 현대아파트, 진안상가 등이 들어섰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호해정(湖海亭)은 1788년 당시 경포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은 호수가 매립돼 현대아파트, 진안상가, 경포대초교 등 상가와 민가들이 들어섰다.

100년 전만 해도 이곳은 경포호와 연결된 또 다른 석호였다.

단원의 호해정 그림은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정자 앞엔 배가 정박해 있고 호수 안 바위엔 백로들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멀리 바다 방향으로는 흰 모래밭과 오리바위가 있다. 경포대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호해정은 경포호의 또 다른 비경으로 조선 최고의 화원의 눈을 사로잡아 그림으로 남겨질 정도였다.

호해정은 원래 이름은 태허정이다.

조선 명종 때 장호라는 사람이 그의 호를 따 정자를 지어 그의 사위 김몽호에게 주었다.

1750년(영조 26) 이 초가가 불에 타 버리자, 1754년(영조 30) 신정복이 강릉시 죽헌동에 있던 자기 집 별당인 안포당을 헐어 이곳에 옮겨 짓고 '호해정'이라 불렀다.

이곳은 김몽호의 영정과 삼연 김창흡, 옥산 이우의 시문이 있으며, 민우수 외 3명의 기문이 있다.

현판은 자하 신위가 썼다.

별당을 헐어 옮겨 지은 정자인 이 건물은 경포호수 동북쪽 깊숙한 산기슭에 자리잡아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경관을 엿보게 한다. 정면 2간, 측면 2간 규모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호해정은 춘천의 서면 박사마을 시작과 관련된 인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년)과 밀접한 관련이 깊다.

학문이 높은 삼연은 겸재 정선을 후원하는 역할을 했던 명사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1718년(숙종 44) 1년간 거처하면서 강릉지역 선비들에게 학문과 시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조용하고 호젓한 분위기가 글 읽기엔 안성맞춤이다.

정자 정면에는 초서로 쓴 호해정 현판과 측면에 해서체로 쓴 호해정 현판이 있다.

정자 입구엔 은행나무가 도열해 손님을 맞고 있으며 정자 바로 앞에는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다.

정자 앞의 왼쪽나무는 수령이 많아 보인다.

정자 뒤편은 단원의 그림처럼 소나무들이 정자를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호수는 사라졌다.

호수는 육지로 바뀌고 아파트와 건물들이 들어섰다.

밭으로 변한 호수 중간에는 트랙터가 엔진 소리를 내며 밭갈이가 한창이다.

진안상가가 올해 마이삭과 하이선 등 연이은 태풍으로 침수됐다. 해마다 비가 오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과거 습지 안에 건축된 진안상가와 경포대초교는 단골로 방송 뉴스 화면에 초대된다.

유입 인구가 늘어나면서 1968년 경포대초교가 개교한 후 1983년 진안상가가 준공됐으며 1998년 경포 현대아파트도 건축돼 11개동 400여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스카이베이, 라카이샌드파인 등 대형 건물과 주택, 펜션 등 숙박시설이 들어서는 중이다.

 

금란정은 조선 후기 선비인 김형진이 지은 집으로, 경포호가 바라보이는 경포대 북쪽 시루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매화를 심어 학과 더불어 노닐던 곳이라 하여 매학정(梅鶴亭)이라 이름 지어졌고 그 뒤 주인이 바뀌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이름을 금란정이라 고쳐 불렀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금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옆면에는 ‘경중별업(鏡中別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금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오른쪽으로 다락처럼 한층 높게 지은 마루(누마루)가 특징이다.

현판 글씨는 광무 6년(1902년) 권동수가 섰다고 전해진다.

정자 옆 산책로엔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방문객들을 위로하며 서 있다.

옛 사진 속엔 금란정 앞엔 논이 보이고 비포장 흙길이 경포호 주변을 돌고 있다.

옛 선조들의 발길이 남아 있을 듯한 흙길이 넘어 강문이 보인다. 소나무들이 간격을 두고 서 있다.

강릉 경포호의 정자들은 나무들과 함께 있어 아름다움을 배가 시킨다.

조선 최고의 화원인 단원 김홍도와 복헌 김응환이 이곳을 찾아 붓을 들어 우리고장의 빼어난 광경을 담았다.

옛 사진은 삼연의 글 읽는 소리와 단원의 붓질 소리를 듣게 하는 마술을 펼친다.

출처:강원일보 22.09.06 김남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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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전 안 부쳐도 된다…성균관이 선언했다

성균관의례위, 간소화 결정
“경제부담·가족갈등 줄어들길”
성균관이 5일 추석 차례상 간소화 표준안을 제시하면서 시연한 상차림. 성균관 제공
추석 연휴를 앞두고 유교 전통문화의 본산인 성균관이 유독 만들기 수고로운 전을 차례상에 올리지 말고, 음식 가짓수도 최대 9개면 족하다는 내용을 담은 ‘차례상 표준안’을 제시했다.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발표한 차례상 표준안을 보면, 추석 차례상의 기본 음식은 송편, 나물, 구이(적), 김치, 과일, 술 등 6가지이며, 여기에 육류, 생선, 떡을 추가할 수 있고, 상차림은 가족들이 서로 합의해 결정할 수 있다.성균관이 차례상에 전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한 근거는, 조선시대 예학사상가인 사계 김장생이 쓴 <사계전서> 제41권 ‘의례문해’에서 ‘기름진 음식을 써서 제사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한 기록에 따른 것이다.성균관 쪽은 “예의 근본정신을 다룬 유학 경전 <예기>의 ‘악기’에 따르면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한다’(大禮必簡)고 한다”며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음식의 가짓수에 있지 않으니 많이 차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밝혔다.
성균관이 5일 제시한 추석 차례상 간소화 표준안. 성균관 제공

또 그동안 차례상을 바르게 차리는 예법처럼 여겨왔던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와 ‘조율이시’(대추·밤·배·감)는 예법 관련 옛 문헌에는 없는 표현으로, 상을 차릴 때 음식을 편하게 놓으면 된다고 설명했다.

조상의 위치나 관계 등을 적은 지방 말고 조상의 사진을 두고 제사를 지내도 되며, 차례와 성묘의 선후는 가족이 의논해서 정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성균관유도회총본부회장인 최영갑 의례정립위원회 위원장은 “차례는 조상을 사모하는 후손들의 정성이 담긴 의식인데 이로 인해 고통받거나 가족 사이에 불화가 초래된다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라며 “이번 추석 차례상 표준안이 경제적 부담은 물론 남녀·세대 갈등을 해결하고 실질적인 차례를 지내는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성균관은 표준안 제정에 앞서 지난 7월28~31일 20살 이상 일반 국민 1천명과 유림 7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에서 일반 국민(40.7%)과 유림 관계자(41.8%) 모두 차례를 지낼 때 가장 개선돼야 할 점으로 ‘차례상 간소화’를 들었다. 차례 지낼 때 적당한 음식 가짓수로는 국민 49.8%가 5~10개, 24.7%가 11~15개를 꼽았다. 유림은 35.0%가 11~15개, 26.6%가 5~10개를 꼽았다. 현재 몇대 조상까지 차례를 지내냐는 질문에는 국민과 유림 모두 조부모(2대 봉사)라는 답이 각각 32.7%, 39.8%로 가장 많았다. 적당한 차례 비용으로는 국민은 10만원대(37.1%), 유림은 20만원대(41.0%)를 가장 많이 꼽았다.
출처: 한겨례 2022.09.05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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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가야인의 유전체(게놈)를 분석한 결과 현대 한국인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등 여러 지역 인류의 유전적 연속성이 단절된 것과 달리 한국인은 고대인의 유전체를 이어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삼국시대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한 시기였던 것이다.
울산과학기술원(UNIT) 바이오메디컬공학과의 박종화 교수 연구진은 22일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삼국시대 한반도인의 게놈(유전체)을 최초로 분석한 결과 고대 한국인에는 큰 틀에서 최소 2개의 유전자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게놈 정보를 활용한 몽타주를 예측한 결과 삼국시대 한반도인은 외모 상 현대 한국인과 상당히 닮았던 것으로 추정됐다.
연구진은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이 확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시대 고대인의 게놈을 최초로 분석해 빅 데이터를 마련한 연구”라며 “한국인의 기원과 단일화 과정을 면밀히 살필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고대 한반도의 두 유전자 그룹 확인
이번 연구는 UNIST 게놈센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서울대학교, 게놈연구재단, 오스트리아 빈대학, ㈜클리노믹스가 공동으로 수행했다.
연구진은 가야에 해당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유하리 패총 두 곳에서 출토돼 박물관에 보관 중인 서기 300~500년 유골을 분석했다. 

고대인 22명에서 나온 뼈와 치아 시료 27개에서 유전정보가 담긴 DNA를 추출해 해독했다. 

그 중 8명에 해당하는 고품질 게놈 정보를 확인했다.

연구 분석에 사용된 유골은 서기 300~500년 가야지역의 무덤 주인과 순장자들 것이다.

연구팀은 모두 22명의 고대인에서 나온 27개의 뼈와 치아샘플로부터 디엔에이(DNA)를 추출했다.

이의 염기서열정보를 게놈 해독기로 읽어 이 가운데 8명을 추렸다.

7명은 대성동 고분 유골이며 나머지 1명은 유하리 패총에서 발굴된 5살 안팎의 여자 어린이 유골이다.

연구팀은 이들의 고품질 게놈 데이터를 다양한 생물정보학 프로그램으로 추가로 정밀 분석했다.

이들 사이에 혈연관계는 없는 것으로 판명됐고, 무덤 주인과 순장자 사이의 눈에 띄는 유전적 계층도 찾아지지 않았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현대 한국인(빨간색 박스 옆 두번째 띠)은 조몬계 유전자(녹색)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데 비해 현대 일본인(빨간색 박스 옆 세번째 띠)에는 조몬계 유전자가 남아 있다. 

가야인(빨간색 박스)들에는 조몬계가 들어 있는데, 특히 오른쪽 두개 띠(AKG-10203, 10207)의 경우 상대적으로 조몬계 더 큰 것으로 나타난다. 

연구팀이 기원전 8000년∼3000년까지의 연해주, 요서, 요동, 한반도, 일본에서 출토된 초기 신석기시대 (기원전 8000년~기원전 1500년) 한국인~삼국시대 다른 지역의 고대인들과도 비교한 결과, 8명 가운데 6명은 현대 한국인, 고훈시대 일본인, 신석기시대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고훈(고분)시대[古墳時代, 서기 3~7세기]는 일본의 시대 구분으로 서기 250년~538년 시기를 가리킨다.
나머지 2명의 게놈은 큰 틀에선 한국계이지만 현대 일본인과 선사시대 [조몬시대(縄文時代, 기원전 1만년~기원전 300년)]조몬계 일본인과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조몬계 일본인은 조몬시대(기원전 1만4000년~기원전 300년)에 일본 열도에 살고 있던 선사시대 원주민을 말한다.
박종화 교수는 “이들 2명이 현대 일본인과 가깝다는 의미라기보다 과거 한반도 인구집단의 다양성이 지금보다 더 컸다는 것을 뜻한다. 큰 틀에서 최소 2개의 유전자 정보 제공 그룹이 있었음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고대 동아시아에는 여러 계통의 인구집단이 존재했는데, 일본의 경우 열도로 고립돼 조몬계 유전자가 남아 있는 반면 현대 한국인에는 조몬계가 사라졌다.
연구팀은 외형 관련 160개의 유전자마커를 분석해 삼국시대 가야인이 현대 한국인의 외형적 특성을 지녔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박종화 교수는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인의 유전적 연속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했다.

연구팀은 삼국시대인들도 동아시아인의 특징인 건조한 귀지와 몸 냄새가 적은 유전자를 갖고 있었고, 대부분 굵은 직모와 갈색 눈,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예측됐다.
연구팀은 게놈 정보를 활용해 인공지능으로 몽타주를 그렸는데, 삼국시대인들이 현대 한국인과 많이 닮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한반도에서 수천 년간 형질적으로도 큰 변화가 없었음을 뜻한다”고 밝혔다.





유전정보에 기반해 인공지능이 복원한 삼국시대 한국인 8명의 몽타주./UNIST

 

◇인공지능으로 가야인 몽타주 만들어
연구진은 DNA에서 외형을 결정짓는 유전자 부위 160개를 골라 인공지능으로 가야인의 얼굴을 복원했다.

가야인은 갈색 눈과 검고 굵은 직모를 가져 현대 한국인과 비슷한 외형을 보였다.

또 동아시아인의 특징인 건조한 귀지와 몸 냄새가 적은 유전자도 확인했다.
박종화 UNIST 교수는 “현재까지 나온 고대 한국인의 게놈은 주로 남동지역에 분포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며 “현대와 고대 한국인의 이동과 혼합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을 표현하려면 한반도 내륙, 다양한 시기의 고대 게놈을 추가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삼국시대 한반도 인구집단의 다양성이 지금보다 더 컸고, 큰 틀에서 최소 2개의 유전자 집단이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게 보면 대륙에서 확장된 유전자 집단과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다가 한반도 남부 섬과 일본에만 남은 유전자 집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대륙에서 벼농사로 인구가 급증한 집단과 달리 조몬인은 수렵이나 조 농사를 하다가 티벳 고원이나 동남아시아, 한반도 섬지역과 일본에 고립됐다”며 “삼국시대 가야인에도 이런 조몬인의 흔적이 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2022.06.22한겨레신문 이근영 기자 /조선일보 참조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6060617001

 

 

[이기환의 Hi-story] “오징어게임은 가라! 오백나한 납신다!”…호주도 열광한 ‘볼매’ 얼굴

‘오징어게임은 비켜라-한국의 다음 주자는 나한이다.’(시드니모닝헤럴드) 지난해 12월부터 호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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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박물관에 보았던 기억의 나한상 전시가 요즘 호주에서도 인기가 많다네요..

이 전시보면서, 빛과 그림자 연출을 잘했다던 생각이 나던데..

 

 

기존내용

법당을 빠져나오는데 옆에 딸린 작은 방의 문 틈새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방 안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 심장이 멎을 듯했다.

높이가 1.2m에 이르는 석조비로자나불상(石造毘盧遮那佛像)이 목에 금이 간 채 덩그러니 놓여있던 것.

마당에 있던 1m 높이의 대좌는 이 불상을 받치는 기둥이었다.

법당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대좌는 1977년 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됐으나 목이 잘린 불상은 뒷방으로 밀려난 신세였다.
1997년 전주국립박물관의 8년차 큐레이터였던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59)은 전북 임실군의 한 법당 뒷방에 방치된 불상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1년간 조사한 결과 9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이 확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열린 제1회 동원학술대회에서 불상의 존재를 알렸다.

그 덕에 해당 불상은 2003년 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소외된 유물에 빛을 밝혀주는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던 풋풋한 큐레이터는 어느덧 퇴임을 앞둔 박물관장이 됐다.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7일 만난 그는 “지난해 해당 불상을 다시 찾아가보니 이제야 대좌에 올라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큐레이터 되길 참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최 관장은 1990년부터 박물관 큐레이터로 지낸 경험을 담은 에세이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주류성)를 3일 펴냈다.
국립전주박물관, 춘천박물관, 중앙박물관을 거치며 굵직한 특별전을 기획한 그는 유물의 진가를 드러내는 법을 고민해왔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구기획부장을 지내며 그가 기획한 ‘영월 창령사 오백나한 특별전’이 대표적. 득도한 500명의 성자 나한(羅漢)을 형상화한 오백나한상은 역사만으로 특별했다.

강원도 영월 깊은 산속에서 2001년 농부가 처음 발견했다.

이후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년에 걸쳐 나한상 317점을 발굴했다. 상당수는 머리가 없거나 머리만 남은 채였다.
“화강암으로 만든 거칠고 소박한 나한상에 어떤 힘이 있기에…. 500년간 땅속에 묻혔지만 결국 빛을 봤어요.

유물이 가진 힘에 대해 고민했죠.”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은 부처의 말씀이었다.

미술작가와 협업해 전시장에 스피커 740개를 탑처럼 쌓아올려 사이사이 나한상을 설치했다.

스피커에서는 물소리와 함께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속세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고요 속에서 자신 안의 소리를 성찰하라는 의도였다.

전시가 끝난 2020년 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큐레이터가 그를 찾아왔다.

“뉴욕에서도 오백나한을 전시하고 싶다”는 것. 목이 잘린 채 땅속에 묻혀있던 나한상은 2023년 뉴욕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
퇴임을 앞둔 최 관장에게는 아버지를 따라 큐레이터를 꿈꾸는 큰딸이 있다.

퇴임사를 쓰듯 책을 썼다는 그는 “32년간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한 내가 같은 길을 가려는 이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하나”라며 이렇게 말했다.
“단 한 점의 유물이라도 다르게 보자는 거예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바닥과 모서리를 보세요. 유물에 새로운 가치를 찾아 비춰주면 역사 한 장이 더해져요. 큐레이터는 유한한 직업이지만 이 발견은 유물의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겁니다.”
출처:2022.03.08 동아일보  이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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