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취미라 한다면, 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니기라고 해야 하나?
어릴때부터, 성묘하러 자주 문중 산에 다니다보니, 묘소의 비석의 글씨의 글씨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었다.
신문을 자주 읽으면서 역사자료들을 스크랩을 하다가, 한달전쯤,조선 양사언 초서 글씨 강릉서 발견"성산면 ‘이시춘 묘비’
라는 글을 접하게되다
문득 무릉계곡의 암각서가 생각이 나서, 이렇게 몇자 적어볼려고 합니다.
어릴때부터 자주가게되면서 무릉계곡을 갈때 암각서를 자주 보게되었는데, 계속 의구심이 생기다보다보니,
시간날때마다 강원도역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찰나에 봉래 양사언의 유적이 있다고 하다보니, 문득 무릉계곡이 떠올라 이렇게 글을 끄적거려본다.
아래내용은 자료를 수집한 내용중 참고가 될만한 것을 옮겨 적어 보았다.
[그림1]암각서 앞에 있는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본다. 내용중 봉래 양사언이 썼다고 전해지는 무릉반석 암각서..[2012년 촬영]
한달전에 강원도민일보에 양사언의 초서가 발견되었다고 신문에 기고되었다.
"조선 양사언 초서 글씨 강릉서 발견"성산면 ‘이시춘 묘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면서 탁월한 서예·문장가인 봉래 양사언(1517년∼1584년)의 초서 글씨를 새긴 묘비가 강릉에서 새롭게 발견돼 주목을 끌고 있다.홍순석 강남대 교수(한국한문학전공)와 강양희·임병목 서각가,김윤환 탁본연구가, 이신성(간성이씨 후손) 씨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최근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내구산 기슭에 있는‘이시춘 묘비’를 현장 조사, 묘비의 글씨가 강릉부사를 역임한 양사언의 친필 서체 임을 확인했다고 5일 밝혔다.
묘비의 주인공인 이시춘은 선교랑(宣敎郞) 갑산교수(甲山敎授)를 지낸 인물로,묘비의 음기(陰記)에는 “79세에 병으로 졸하여 부사(양사언)이 장려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묘비는 높이 90㎝,가로 50㎝ 규모 비신에 4.5×5㎝ 크기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출처:© 강원도민일보 최동열 2015.10.06
양사언이란 인물은?
양사언:1517년(중종 12)∼1584년(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濠)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고 전한다
양사언 선생은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라고 합니다.
선생은 늘 봉래(蓬萊)사용하였고 많은 문인들은 창해(滄海)라고 말하였지요.
많은 작품 속에서 보며 창해(滄海)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곤 합니다. .
선생은 비록 태어난 곳은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新北面) 기지리(機池里)에서 출생하였지만 지금도(高城郡)에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고
특히 청간정(淸澗亭)이나 능파대(凌波臺)이며 선생이 이곳에서 머무르는 곳에 필적이 많이 남아있다.
양사언 선생은 40년이라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유난히 고성군(高城郡)을 사랑하였던 모양입니다.
선생의 後妻 마저도 간성이씨 배후자로 택하였고,선생의 아들인 양만고(1574~1654)號가 감호(鑑湖) 강릉 태어났다.
양사언 선생은 관동에 이주하여 거처한 곳은 구선봉 아래 감호 곁이었다.
여기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당호(堂號)도 감호(鑑湖)라 하였다. 아울러 집 뒤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風流)를 벗삼아 소요하였다.
동해시청 관광안내 소개자료:
무릉계곡 내의 금란정 약간 위쪽 아래인 무릉반석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글씨로 전해지는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이라는 초서(草書) 12자의 석현과 함께 각 시대의 명인들의 필적들이 현자되어 있고 부근에는 금란계원명이 함께 새겨져 있다.
[옛이야기-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참조]
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석각은 무릉계곡의 신비한 경치를 노래한 내용으로 양사헌의 글씨로 추정되고 있다.
그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라고 쓴 7자의 옥호를 옥대라고 볼 수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1963년 최만희(崔晩熙)가 쓴 [진주지(眞珠誌)]에 '우리나라 선조 때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12자를 석각하니 필세(筆勢)가 날아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용이 폭포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과 다툴만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양사언의 글씨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나 다른 견해로는 이조원(李肇源)(1758~1832)의 호가 옥호(玉壺)이므로 그가 쓴 글씨라고 하나 신빙성이 적다.
또 다른 견해로는 1750년에 삼척부사로 와서 2년 동안 있었던 옥호자 정하언(玉壺子 鄭夏彦)이 쓴 글씨라는 견해가 있다.
정하언은 어제 편제(御製 扁額)와 창경궁 편액(扁額)을 썼을 정도로 글씨가 뛰어났다.
'옥호거사서신미'라는 7자에서 신미년은 정하언 부사가 재임기간인 1751년과 일치하고 있다.
아울러 양사언의 글씨로 추정하는 사람들은 그가 초서의 대가로 정평이 났었고 인근 강릉부사로 왔던 때가 신미년(1571년)이며, 또 그가 바로 전임 부사인 정두형의 상(喪)을 조문하기 위해 무릉계에 인접한 비천동을 다녀갔다는 기록, 그리고 삼척지방의 구전(口傳)이나 최만희가 쓴 책자 등에도 양사언의 글씨라고 기재된 점으로 보아 양사언의 글씨로 보고 있다.
그림2]두타산성[2012년 난사회 모임때 촬영]
그림3]두타산 이정표[2012년난사회 모임때 촬영 촬영]
여행을 좋아하는 나도, 매번 동해 무릉계곡을 가게되면 이렇게 좋은 산을 본 적이 없는듯하다.
특히나,가을엔 잠자리와 단풍.그리고,흐르는 시냇가.....
왜 감찰공파 시조 김자현이 이곳까지 오게된 이유를 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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