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취미라 한다면, 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니기라고 해야 하나?

어릴때부터, 성묘하러 자주 문중 산에 다니다보니, 묘소의 비석의 글씨의 글씨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었다.

신문을 자주 읽으면서 역사자료들을 스크랩을 하다가, 한달전쯤,조선 양사언 초서 글씨 강릉서 발견"성산면 ‘이시춘 묘비’

라는 글을 접하게되다

문득 무릉계곡의 암각서가 생각이 나서, 이렇게 몇자 적어볼려고 합니다.

어릴때부터 자주가게되면서 무릉계곡을 갈때 암각서를 자주 보게되었는데, 계속 의구심이 생기다보다보니,

시간날때마다 강원도역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찰나에 봉래 양사언의 유적이 있다고 하다보니, 문득 무릉계곡이 떠올라 이렇게 글을 끄적거려본다.

 

아래내용은 자료를 수집한 내용중 참고가 될만한 것을 옮겨 적어 보았다.

[그림1]암각서 앞에 있는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본다. 내용중 봉래 양사언이 썼다고 전해지는 무릉반석 암각서..[2012년 촬영]

 

 

 

한달전에 강원도민일보에  양사언의  초서가 발견되었다고 신문에 기고되었다.

 

"조선 양사언 초서 글씨 강릉서 발견"성산면 ‘이시춘 묘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면서 탁월한 서예·문장가인 봉래 양사언(1517년∼1584년)의 초서 글씨를 새긴 묘비가 강릉에서 새롭게 발견돼 주목을 끌고 있다.홍순석 강남대 교수(한국한문학전공)와 강양희·임병목 서각가,김윤환 탁본연구가, 이신성(간성이씨 후손) 씨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최근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내구산 기슭에 있는‘이시춘 묘비’를 현장 조사, 묘비의 글씨가 강릉부사를 역임한 양사언의 친필 서체 임을 확인했다고 5일 밝혔다.
묘비의 주인공인 이시춘은 선교랑(宣敎郞) 갑산교수(甲山敎授)를 지낸 인물로,묘비의 음기(陰記)에는 “79세에 병으로 졸하여 부사(양사언)이 장려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묘비는 높이 90㎝,가로 50㎝ 규모 비신에 4.5×5㎝ 크기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출처:© 강원도민일보 최동열  2015.10.06  

 

양사언이란 인물은?

양사언:1517년(중종 12)∼1584년(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濠)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고 전한다
양사언 선생은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라고 합니다.
선생은 늘 봉래(蓬萊)사용하였고 많은 문인들은 창해(滄海)라고 말하였지요.
많은 작품 속에서 보며 창해(滄海)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곤 합니다. .
선생은 비록 태어난 곳은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新北面) 기지리(機池里)에서  출생하였지만 지금도(高城郡)에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고

특히 청간정(淸澗亭)이나 능파대(凌波臺)이며 선생이 이곳에서 머무르는 곳에 필적이 많이 남아있다.

 

양사언 선생은 40년이라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유난히 고성군(高城郡)을 사랑하였던 모양입니다.

선생의 後妻 마저도 간성이씨 배후자로 택하였고,선생의 아들인 양만고(1574~1654)號가 감호(鑑湖) 강릉 태어났다. 

양사언 선생은 관동에 이주하여 거처한 곳은 구선봉 아래 감호 곁이었다.

여기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당호(堂號)도 감호(鑑湖)라 하였다. 아울러 집 뒤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風流)를 벗삼아 소요하였다.

 

동해시청 관광안내 소개자료:
무릉계곡 내의 금란정 약간 위쪽 아래인 무릉반석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글씨로 전해지는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이라는 초서(草書) 12자의 석현과 함께 각 시대의 명인들의 필적들이 현자되어 있고 부근에는 금란계원명이 함께 새겨져 있다.

[옛이야기-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참조]

 

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석각은 무릉계곡의 신비한 경치를 노래한 내용으로 양사헌의 글씨로 추정되고 있다.

그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라고 쓴 7자의 옥호를 옥대라고 볼 수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1963년 최만희(崔晩熙)가 쓴 [진주지(眞珠誌)]에 '우리나라 선조 때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12자를 석각하니 필세(筆勢)가 날아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용이 폭포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과 다툴만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양사언의 글씨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나 다른 견해로는 이조원(李肇源)(1758~1832)의 호가 옥호(玉壺)이므로 그가 쓴 글씨라고 하나 신빙성이 적다.

또 다른 견해로는 1750년에 삼척부사로 와서 2년 동안 있었던 옥호자 정하언(玉壺子 鄭夏彦)이 쓴 글씨라는 견해가 있다.

정하언은 어제 편제(御製 扁額)와 창경궁 편액(扁額)을 썼을 정도로 글씨가 뛰어났다.

 '옥호거사서신미'라는 7자에서 신미년은 정하언 부사가 재임기간인 1751년과 일치하고 있다.
아울러 양사언의 글씨로 추정하는 사람들은 그가 초서의 대가로 정평이 났었고 인근 강릉부사로 왔던 때가 신미년(1571년)이며, 또 그가 바로 전임 부사인 정두형의 상(喪)을 조문하기 위해 무릉계에 인접한 비천동을 다녀갔다는 기록, 그리고 삼척지방의 구전(口傳)이나 최만희가 쓴 책자 등에도 양사언의 글씨라고 기재된 점으로 보아 양사언의 글씨로 보고 있다.
 

그림2]두타산성[2012년 난사회 모임때 촬영]

 

 

 

그림3]두타산 이정표[2012년난사회 모임때 촬영 촬영]

 

여행을 좋아하는 나도, 매번 동해 무릉계곡을 가게되면 이렇게 좋은 산을 본 적이 없는듯하다.

특히나,가을엔 잠자리와 단풍.그리고,흐르는 시냇가.....

왜 감찰공파 시조 김자현이 이곳까지 오게된 이유를 알듯하다.

 

한민족 이야기(6)

바이칼호의 몽골리언
최근의 유전과학은 우리민족의 시원(始原)이 바이칼 호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뒤 이들이 남하해 요하문명과 알타이어를 탄생시켰다.
이렇듯 유전과학의 발달은 화석에서 DNA를 추출하여 인류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면서 인류의 기원과 이동경로에 대해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공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북쪽 바이칼호로 이동하다
빙하기에 육지의 30%는 얼음으로 뒤덮혀 있었다. 오늘날에는 단지 10% 정도만 얼음으로 덮혀 있다
태초부터 지구 역사는 빙하기와 온난기를 반복하여 왔다.
지구상에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는 대규모 빙하기는 없었지만 소규모 빙하기는 수 천 년을 주기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빙하기는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빙하기가 오면 초원이 얼어붙고 생물군이 사라져 초원지대는 지금보다 수백 km나 남쪽으로 밀려 내려왔다.
반면에 온난기가 찾아오면 북반구를 뒤덮고 있던 얼음층이 북쪽으로 물러가면서 북쪽에 새로운 초원들이 생기고 생물군이 나타났다.
초원이 북상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사람들이 초원길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태고의 신비, 바이칼호
오늘날의 세계 인류는 크게 세 종족으로 나뉜다.
백인종을 포함하는 코카소이드(Caucasoid)와 황인종을 총칭하는 몽골로이드(Mongoloid) 그리고 흑인종을 총칭하는 니그로이드(Negroid)가 그것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이러한 세 종족으로 분리된 것은 호모 사피엔스 단계로 우리 민족은 몽골로이드에 속한다.
간빙기가 끝나고 빙하기가 다시 오면서 몽골리언은 바이칼호 지역에 오랜 기간 갇혀 살았다.
주변이 동토의 빙하가 되어 이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빙하기에는 바이칼호에 물이 적었고 대부분 초원이었다.
초원의 오아시스 같은 장소였다.
당시 호수의 수면은 훨씬 낮고 물고기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 뒤 빙하기가 끝나면서 물이 차 지금의 바이칼 호수가 되었다.
바이칼 호수는 여러 가지 세계 기록을 갖고 있다.
2500만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다.
그 둘레는 2,200km이며,  최대 깊이 1,742m로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가장 깊은 호수다.
수심이 깊을 뿐 아니라 물도 맑아 40미터 속까지 보인다.
330개의 강이 이곳으로 흘러드는데 밖으로 나가는 수로는 앙가라 강 하나뿐이다.
바이칼 호수는 가장 차가운 호수이다.
한 여름에도 1분 이상 발을 담글 수가 없다.
죽은 물고기가 부패하지 않을 정도다.
그 수정같이 맑은 물에는 세계에서 유일한 민물물개와 철갑상어 그리고 내장이 들여다보이는 투명 물고기 골로미양카가 산다.
오랜 고립의 역사로 바이칼호에는 동물 종이 무려 1550종이나 산다.
그 가운데 75%가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유종이다.
이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가운데 가장 높다.
이들은 세계 어느 지역의 생물과도 다르며 유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곧 이들 생물들은 2,500만년 동안 이 호수에서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화되어 온 것이다.
바이칼호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진화박물관이자 원시생명체 연구소다.
몽골로이드의 형질적 특징이 형성된 바이칼호수
궁둥이에 몽골 반점을 갖고 있는 몽골리언의 형성지가 바로 이 알타이-바이칼 지역이다.
이곳은 몽골리언이 성장하여 성인이 된 곳이다.
소나무, 자작나무, 전나무 등 땔감이 많아 빙하기에도 추위를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강풍과 추위에 적응하면서 체열 손실을 줄이기 위해 다부지고 뭉툭한 체형으로 진화했다.
찬바람을 피하려 눈은 작고 가늘게 찢어졌으며, 추위로부터 안구를 보호하기 위해 눈꺼풀에 지방이 두툼한 눈으로 바뀌었다.
또 추위에 이겨내려 두꺼운 피하지방층, 평평한 얼굴, 얇은 입술, 낮은 코 등으로 진화했다.
추위에 동상에 걸리지 않고 눈길에서 활동하는 데 필요한 특성들이다.

쐐기형 석핵
바이칼호에 현재 수면만큼 물이 올라온 게 1만2천 년 전이라 한다.
아마 당시 사람들이 거대한 홍수를 만나 바이칼호 지역을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기원전 1만4천경 바이칼호수 연안에서 등장한 동북아시아의 쐐기형 석핵이 불과 1∼2천년 사이에 티벳, 몽골, 동북시베리아, 한반도, 일본까지 급속히 확산되었다.
가벼운 나무창으로 기동력을 확보한 집단이 바이칼을 기점으로 동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칼호 주변에는 고고학적 유적들이 무수히 널려 있다.
구석기 시대로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들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3만∼5만 년 전의 고고학적 유적이 전혀 발굴되지 않는다.
반면 더 추워 사람이 살 수 없었을 것 같은 이 지역에는 유적이 많다.
더구나 이르쿠츠크 대학의 학자들은 이들의 문화가 세계 어느 곳의 문화와도 다르다고 증언하고 있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이동이 시작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기원전 7197년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국가 환국의 위치가 바로 바이칼호 주변이다.
그 뒤 빙하기가 끝나 기후가 풀리면서 자연히 이들의 이동이 시작된다.
이들이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갔다.
몽골리언의 신체적 특성은 동북아시아에서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간 체질이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보면 동북아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디언들의 중심그룹이 이동한 것이 1만4천 년 전이다.
시베리아 원주민의 신화와 습속은 우리 샤머니즘의 전통과 흡사하다.
그들의 기층문화가 우리 민족의 원시문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그들의 기원과 계통이 우리와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도 우리말과 뿌리가 같다는 게 배재대학 손성태 교수의 주장이다.
그 뒤 서쪽으로 간 몽골리안 국가들에는 핀란드, 헝가리, 터키를 비롯하여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부탄 등‘탄’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많이 있다. 그 탄이 우리나라의 ‘땅’이랑 똑같은 말이란다.
그 뒤 동이족의 중심지역도 남하하여 홍산문화 지역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곳에 사람이 정착한 것이 1만1천 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꽃핀 홍산문명은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약 2천 내지 1천년 정도 앞선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들이 조선족과 흉노족으로 나눠진다. 조선족이 건국한 나라가 고조선이다.
조선시대에 오랑캐라고 불리었던 만주 일대의 민족들이 기실 모두 한 핏줄이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조선족과 흉노족은 3000년 전에는 형제 동족이라는 내용이 있다.

몽골리언은 모두 형제 민족
역사적으로 바이칼 호수는 유라시아 유목민족들의 발원지로 그들은 모두 몽골리언의 후손들이다.
기원전 200년부터 한나라를 압박하며 북쪽 초원지대에 큰 나라를 세웠던 흉노족은 물론 중국에 북위(北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을 건설했던 선비족의 고향도 바이칼호 주변이다.
또 4세기 후반 로마를 위협했던 훈족, 6세기 후반 20년 만에 만주에서부터 서쪽 비잔틴제국의 북방지역, 남쪽으로는 힌두쿠시에 이르는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 동서남북에 걸친 대제국을 일구었던 투르크(돌궐)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8세기 중반 투르크제국을 무너뜨리고 몽골 고원을 차지한 후 약 100년 동안 지배한 위구르족, 9세기 투르크 계통 몽골족 키르기즈, 10세기 요(遼)나라를 건설하여 북송(北宋)을 압박하며 11세기까지 동방의 실질적 지배자 거란족 역시 몽골리언이다.
일찍이 12세기 초 바이칼호수 근처에서 일어나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스칸의 몽골 등 유목민족 모두가 역사적으로 바이칼호수 주변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다.
그들에게 바이칼호수는 민족의 발원지이자 성지였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유전자가 거의 같은 사람들이다.
다만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이나 중국인들이 이 민족들을 가리킬 때 사용한 한자들의 발음이 달랐을 뿐이다.
수천 년간 인류의 삶과 문명에 가장 역동적인 유목민족들의 거점 핵심지역이 바이칼 호수 지역이다.
곧 바이칼이 모든 몽골인종의 근원지였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 선생과 봉우 권태훈 선생 등이 바이칼 호수 일대를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 주목한 바 있다.
우리 한민족이 유전학적으로도 몽골리언의 원형질을 가장 잘 계승해 중국 동북 3성과 윈난성 일대 소수민족, 장족도 몽골리언들이다.
몽골, 중남미의 인디오들, 베트남도 몽골리언들이다.
중국 남부로 내려간 몽골리언은 남방계 민족과 함께 중국 문명을 만드는 주류 세력이 되었다.
동아시아인 유전자 지도  
유전적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뿌리는 크게 두 갈래다.
약 70%는 북방계, 30%는 남방계이고, 극히 일부 유럽인과 다른 그룹이 섞여있다
.
그러나 이제는 이미 이 두 계열의 사람들이 완전히 결합하여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의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난 것으로 보고 있다.
빙하기가 끝나고 요하 부근으로 남하한 몽골리언들이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남방계 사람들과 섞이면서 새로운 문명을 발달시켰다.
그 무렵 먹을 게 풍부한 발해만과 한반도 바닷가와 강가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뒤 이들이 요하 문명과 알타이 언어를 탄생시켰다.
유전자 추적에 의한 인류 이동도를 보면 한국인과 일본인, 몽골인, 티베트인, 터키인은 에스키모인, 아메리카 인디언과 유전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한 묶음이다. 이른바 알타이어족이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이들은 약 8000년 전에 나누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우랄어(핀란드어, 헝거리어)와 셈어(히브리어, 아랍어, 고대 아키드어) 역시 비슷한 연대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한반도와 인도 남부인의 유전자 지도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고대로부터 두 곳 간에 사람의 이동이 많았던 것을 뜻한다.
그만큼 양 지역간에 해상 왕래가 잦았던 증거이다.
가야 왕국으로 시집 온 인도 공주 허 황후의 이야기가 신화만은 아닌 것이다.
우리 한민족이 유전학적으로 몽골리언의 원형질을 가장 잘 계승, 발전시켰다고 한다.
인류가 가진 미토콘드리아 DNA 유전자를 활용해 당뇨병을 연구하다 이 DNA가 인류의 이동을 알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한민족의 기원을 추적한 이홍규 의학박사의 말이다.
한국인과 바이칼 호 주변에 사는 부리야트인이 혈연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사실은 모스크바유전학연구소의 자카로브 박사에 의해서도 규명되었다.

출처: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출처; 한국인의 기원, 이홍규, 우리역사연구재단)

 

평창이씨는 경주이씨나 전주이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토성土姓이다.
토착민 성씨란 삼한이전부터 이 땅에 정착해 살았는데, 그 당시에는 왕족이 아니고서는 성씨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므로 성을 가지지 않았다가 고려 중기에 성씨를 가진 가문을 말한다.
고려의 왕실조차도 왕건의 아버지가 용건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작제건이다.
즉, 성이 없었다. 왕건이가 왕이 되면서 개성왕씨를 만든 장본인이 된 것이다.

작제건 이전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기록될만한 에너지를 가지지 못한 가문이었다는 반증이다.
성이 만들어지고부터 가문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
우리나라의 성씨가 대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광종(재위:949-975)이 960년 과거를 실시하여 전국에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1055년 문종(재위:1046-1083)이 성이 없는 자에게 과거를 볼 수 없도록 조치한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평창이씨는 명종(재위:1170-1197) 때에 태사(정1품)를 지낸 이광李匡을 시조로 한다.

평창이씨는 이광에서부터 중앙에 진출하여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이광이 명종으로부터 백오군白烏君으로 봉군封君된다.

봉군이란 왕족이나 공신들에게 군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백오는 평창의 신라시대 때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봉군의 명칭은 자기 고향이 된다.
그러므로 이광은 평창출신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광의 5세손 이숙李肅의 딸이 목조비穆祖妃이다.
목조란 이성계의 고조高祖 이안사이며, 그의 부인이 평창이씨 효공왕후孝恭王后이다.
이에 이숙은 노산부원군으로 봉해졌다.

 “노산魯山은 평창의 다른 이름이다.
목조(穆祖)의 왕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어머니 정씨(鄭氏)의 무덤이 군(郡) 서산(西山) 서쪽 4리쯤에 있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명기되어 있다.
평창읍의 노산魯山 노산은 평창읍의 우측 뒷동산으로 평창천을 밀어내어 평창읍의 공간을 널직하게 만든 산이다.
목조의 국구, 노산부원군 이숙李肅의 군호가 된 지역명칭이기도 하다.
명칭이외에는 평창이씨의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시조가 살았던 유허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국구사우國舅祠宇가 있었다 하나 일제시대에 헐려서 유적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이숙과 그의 처 정씨의 묘가 평창군에 있어서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호장이 주관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서각대만 남아 전해질뿐이니, 정조는 군청 옆에 따로 한 채의 원우(院宇)를 세워 사판(祠版)을 봉안하고, 본군 호장으로 하여금 제례를 행하게 하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평창이씨는 멸족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가진다.
평창이씨 시조 이광李匡의 7세손 이천기는 위화도회군에 반대한 이원계 휘하의 장군이었다.
이원계는 이성계의 이복형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직전에 이원계를 따르는 장군들의 목은 모조리 베었다.
그 후 이원계는 고려의 충신으로 자살을 택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천기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이천기가 귀국할 때는 이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성공한 뒤라서, 자식들과 함께 장단에 숨어들어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창군으로 봉해진다.
고려의 권문세도가로, 고려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키면서도 조선의 대접을 받은 가문이 평창이씨이다.
그 당시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고려의 충신들은 자살을 택하거나 죽임을 당한 것이 비하면 엄청난 배려였다.
그 배려는 100년전의 은혜를 갚는 것이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전주로 임명되어온 지방관과의 갈등과 불화로 충돌이 일어나자 일가와 무리를 이끌고 피신하게 되었는데, 자기의 외가(삼척이씨)와 처가(평창이씨)가 있는 강원도로 이주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듯이 이주를 하게 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양식을 조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평창이씨 12대 이계의의 무덤_평창읍 주진리 평창에 있는 평창이씨의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시조의 무덤은 강원도 이천면에 있다.

이래서 무덤은 건물과 달리 타임캡슐이라 한다.
이계남과 3남 이창이 중종반정 공신이 되고, 평창이씨가문에 중흥기가 찾아온다.

 이계남은 평창이씨의 이광의 11세손으로 평원군이 되고, 이계남의 사촌동생 이계의는 이조판서에 이른다.

이계의의 21세 종손 이욱환(평창문화원장)씨가 평창을 지키고 있다.
평창이씨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천기의 현손 이계남이 중종반정 공신이 된 후 이다.
그는 이조판서가 되고 그의 아들(이창)도 공조판서가 된다.
그의 손자 이희문의 가계에서 13명의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지만, 조선 말기에 이희문의 후손인 이승훈이 천주교에 입문하여 세계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민족적 자진 귀의세례를 받았고, 귀국해서는 조선천주교회를 세우고 활약하다가 조정의 천주교 탄압으로 평창이씨에게 엄청난 시련을 가져오게 하였다.
도가적인 성향의 땅에 불교의 성지가 자리하고 있고, 천주교의 씨앗이 뿌려진 아이러니가 있는 곳이 평창이다.
평창군에는 평창, 봉평, 용평, 방림, 진부, 대화 등 평・방・부・화자가 들어간 지명은 평평하거나 부드럽다는 의미이다.
우리 시대에 각광받는 고지대의 특색을 살린다면 동계올림픽 이후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리와 생리를 확보한 평창군의 변모
명종 16년 2월. 평창군수(平昌郡守) 양사언(楊士彦)의 상소를 보면, 민호가 40호에 불과하니 고을을 없애자고 청원하고 있다.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은 지리地利가 우선이고 생리生理가 좋아야 한다고 택리지는 적고 있다.
평창은 첩첩산중이라 지리적 이점도 없고, 논밭이 적어서 농작물 생산도 풍족하지 못하니 생리도 부족한 지역이다.
군계일학이라고 사람이 많아야 그 중에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는데, 평창은 사람이 살기에도 척박한 만큼, 다산多産도 기대할 수 없고 물도 부족하고 들이 좁아서 사람이 많이 모여 살기에는 어렵다.
지리적 접근성이 용이하지 못하거나 작물의 소출이 적은 지역에 살면 그 지역의 지기의 영향으로 가구수가 줄고, 가계의 인구수도 적고,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진다.
백두대간이 가까울수록 가지가 급한 경사를 이루는 곳이 많아서 성격이 급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산중에는 고향을 떠난다는 이향사도 자주 발견되므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평창은 산이 부드럽고 능선이 잘 발달되어 있어 깊은 산중임에도 산의 기운이 순하다.

다만 불이 부족한 것이 흠이라 하겠다.
평창사람은 성장하면서 타지로 나가서 물의 기운을 보충해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이 될 것이다.
출처: 김 규 순 (서울동인학회원장, www.location‍art.co.kr풍수지리관련)

남동신 서울대 교수 '천궁설' 제기

8세기 신라 귀족 김대성이 지었다는 경주 토함산 석굴암(석불사)은 역사상 다른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이다.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재발견 이래 100년간 역사학과 미술사, 건축학, 자연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막대한 연구성과들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석굴 원형과 사상적 배경 등에 대해 다기한 학설들과 목조전실 유무나 돔 얼개 기원 등을 둘러싼 논란도 거듭되면서 석굴암 담론은 풍성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화강석으로 돔 천장에 원형당을 만든 석굴의 건축적 성격이 무엇인지, 왜 토함산 꼭대기 언저리에 터를 잡았는지 등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석굴암의 건축적 실체를 탐구해온 남동신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최근 주목할 만한 새 학설을 내놓았다.

학술지 <미술사와 시각문화> 13권에 실은 '천궁으로서의 석굴암'이란 논고와 지난달 열린 한국건축역사학회 학술대회 초청강연에서 그는 석굴암은 천상의 초월적 존재(천인)들을 위해 만든 천궁(天宮)이란 견해를 제기했다.

"천궁 왕래" 삼국유사 구절 주목
"초월적 존재 위해 만들어" 주장
샘물 위 건립·동향 설계 등 들며
"인간 위한 건축 원리와 달라"

남 교수는 '석불사에 처음 주지로 지낸 승려 표훈이 토함산 아래쪽 불국사에 머물면서 항상 천궁을 왕래했다'는 <삼국유사>의 구절에 주목했다. 이 천궁은 불교신 제석천이 머무는 천상세계인 도리천 33천에 있는 신들의 거처이며 바로 김대성이 창건한 석불사를 가리킨다는 추론이다.

<삼국유사> 기록대로 김대성이 전생의 어머니 명복을 빌기 위해 토함산 정상 동쪽에 석굴을 지은 것은, 도리천궁에서 석가모니가 생모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는 장면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석불사가 수행과 신앙 공간이기에 앞서 석가가 친히 설법하는 신의 공간을 상징했다는 게 그의 논지다.

이런 '천궁'설을 바탕에 깔고 남 교수는 석굴암의 건축적 특징을 새롭게 풀이한다.

왜 석굴이 산 정상부에서 동쪽을 보고 세워졌을까.

여느 건축물과 달리 샘물이 솟아나오는 지반 위에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왜 동해의 습기 서린 해풍이 몰려오는 험난한 산중에 단단한 화강석으로 돔형 원형당 양식을 구축했을까. 그가 보기에, 김대성은 명실상부한 천궁을 짓고자 했다.

천궁은 천신을 위한 공간이란 점에서, 입지 조건이나 구조, 재질 등에서 완벽한 창의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 사르나트의 초전법륜지 등 인도 불교 성지의 주요 사원과 자이나교 사원 등은 대개 동쪽을 바라보고 지어졌다.

남 교수는 이런 전례에서 석굴암 입지가 고대 인도사원의 동향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분석했다.

또 샘물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은 건축사적으로 인간을 위한 건축의 기본 원리에 반하지만, 신들 거처로 이해하면 납득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이나 중국 선진시대 사당인 진사(晉祠), 서울 북한산의 승가굴처럼 샘물·우물과 결합한 종교건축 사례들은 많다.

남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석굴암 본존상 뒤 십일면관음상 앞에 있다 사라진 석조제단을 샘물과 연관된 불교의례 흔적으로 꼽았다.

전체를 돌로 축조한 혁명적 발상 또한 천궁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남 교수가 보기에, 김대성은 천궁으로서 석불사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할 재료가 불타지 않고 썩지 않는 돌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종교적 신념이 있었기에 화강암 제약을 뛰어넘어 석굴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석굴암을 도리천 천궁으로 지었다면, 교리상 석굴은 토함산 최정상(745m)에 있어야 맞다.

그러나 석굴 전체를 돌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고려하면, 흙산인 토함산 꼭대기로 원하는 크기의 화강암을 제대로 조달할 수 없다.

석굴암에서 가장 큰 석재인 본존상의 경우, 3~4배에 달했을 원석 무게는 100톤이 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석재 운송 탓에 산 아래로 입지를 정하면, 천궁의 요건인 산 정상부를 포기해야 한다.

산정의 입지와 돌 조달이란 엇갈리는 조건을 함께 충족하는 최적의 장소는 어디일까.

고심 끝에 김대성이 찾아낸 터가 바로 해발 565m의 현 석굴암 자리라고 남 교수는 말한다.

출처:한겨레  2014.12.18노형석 기자

나주 정촌고분 1호 돌방무덤 출토 백제 금동신발. 현재까지 백제 금동신발로는 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하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전남 나주 정촌고분 발굴조사


가야계 토기류 무더기 출토…각종 유물 쏟아져
백제권 유물인 금동신발 완벽한 형태로 발굴
 연구소 “백제와 토착세력 정치적 관계 반영”
고대 마한의 땅이던 전라도 영산강 유역에 경상도 가야사람들이 대거 진출했다는 의미일까.
고대 백제와 마한의 세력권이었던 전라도 영산강변의 나주에서 가야계 유력자를 묻은 것으로 추정하는 초대형 고분이 확인됐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으로, 전형적인 가야계 토기류들이 무더기로 출토됐고, 용과 괴수무늬(귀면)가 가득 새겨진 정교한 금동신발과 각종 장신구, 고리칼, 말갖춤 등도 쏟아져 나와 무덤 주인의 정체를 놓고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나주 반남면 정촌고분에 대한 학술발굴조사 결과 완벽한 형태의 금동신발과 귀고리 등의 금제 장신구, 말갖춤, 화살통 장식, 돌베개(석침) 등 다수의 중요 유물들을 확인했다고 23일 발표했다.
이 고분은 국가사적으로 백제·마한의 지배세력 무덤으로 잘 알려진 나주 복암리 고분군 근처에 있다.
지난해부터 연구소 쪽에서 발굴조사 작업을 벌여 돌방, 돌덧널, 옹관 등 9기의 매장시설과 관련 유물들이 드러난 바 있다.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백제 금동신발을 출토한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1호 돌방무덤에서 출토됐으며 사진은 2호 돌방무덤 내부 출토유물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백제 금동신발을 출토한 나주 정촌고분의 1호 돌방무덤 내 북벽 인골.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백제 금동신발을 출토한 나주 정촌고분의 1호 돌방무덤 내 민무늬 고리칼과 토기류 출토 상황.


금동신발이 나온 곳은 무덤 안의 1호 돌방무덤이다.
최대 길이 485㎝, 너비 360㎝, 높이 310㎝로, 현재까지 알려진 마한·백제권의 초기 대형 돌방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내부 얼개는 돌방 바닥 부분에서 천장 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 들게 축조하고, 출입구에는 석재 문4675틀을 만들었다.
이 무덤에서 나온 금동신발은 길이 32㎝, 높이 9㎝, 너비 9.5㎝로, 발등 부분에는 용 모양의 장식이 있고 발목 부분에는 금동판으로 된 덮개가 붙어있다.
연꽃과 도깨비 모양이 신발 바닥에 투조와 선각 기법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역대 금동신발 출토품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태라는 평가가 나온다.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백제 금동신발을 출토한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1호 돌방무덤에서 출토됐으며 사진은 3호 돌방무덤 외부 전경.


금동신발은 백제권 유적에서 주로 나온다.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고창 봉덕리, 공주 수촌리, 고흥 안동 고분 등에서 부분적으로 훼손되거나 일부 장식이 손상된 채 출토된 선례가 있다.
이번에 나온 금동 신발은 용 모양 장식과 발목 덮개, 연꽃과 도깨비 문양 등의 장식이 온전히 보존된 상태다.
신발 바닥 중앙에 장식된 연꽃 문양은 8개의 꽃잎을 삼중으로 배치하고, 중앙에 꽃술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도깨비 문양은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 형상화된 몸체 등이 연꽃 문양을 중심에 두고 앞뒤로 2개가 묘사되어 있다.
연구소 쪽은 “금동 신발은 백제와 관련이 깊은 유물로, 영산강 유역에 백제가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지역 세력에게 하사품으로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며 “백제와 당시 토착세력과의 정치적 관계 등을 반영하는 유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백제 금동신발을 출토한 나주 정촌고분의 1호 돌방무덤 내 마구류 출토 상황
현재까지 드러난 백제 금동신발로는 형태가 가장 완벽한 유물을 출토한 나주 정촌고분. 봉분 하나에 9개 각종 매장 주체시설을 갖춘 '벌집형 고분'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백제 금동신발로는 형태가 가장 완벽한 유물을 출토한 나주 정촌고분. 봉분 하나에 9개 각종 매장 주체시설을 갖춘 '벌집형 고분'으로 사진은 금동신발을 출토한 1호 돌방무덤 내 주요 유물 출토 상황.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백제 금동신발을 출토한 나주 정촌고분의 1호 돌방무덤 내 입구 부분 호형 토기.

다른 출토품들도 영산강 유역권의 유물들과 양상이 달라 주목된다.
경남북 서부권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가야계통의 토기류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백제, 가야, 신라와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마구, 고리칼, 장신구들도 많다.
전북 남원 두락리, 월산리의 가야계 석곽과 경주 신라황남대총 등에서 비슷하거나 같은 유물 유형들이 확인된 바 있어, 무덤의 주인공은 가야계 인물이거나 백제, 신라, 가야와도 활발한 교류를 벌였던 유력자일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연구소 쪽은 다음달까지 돌방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법 등을 파악하기 위해 추가 발굴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출처:한겨례신문 나주/노형석 기자 2014.10.23

족도는 족보 이전의 가계기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단선적인 세계도(世系圖)에다가 본인 또는 자(子), 여(女) 또는 사위(서·壻), 내외손까지 포함한 횡적 계보까지 대상으로 포함됐다.

세계도가 본인을 기준으로 종적인 조상 세계를 계보화한 반면, 족도는 횡적인 자녀 및 내외손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족도가 족보의 초기 형태로 15∼16세기 지속적으로 제작된 것은 사문서인 동시에 국가적으로 개인의 가계와 혈통을 말해주는 공적인 신원증명서와 같은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안동권씨성화보’(1476)와 ‘문화류씨가정보’(1562) 등 조선전기 족보는 종래의 족도를 보다 종적, 횡적으로 소급하거나 확대해 계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기록상 알려진 최고의 족도는 고려 말 ‘강릉김씨족도’이나 전하지 않고 1401년 제작된 ‘해주오씨족도’가 현존 최고의 족도다. 세로 115㎝, 가로 112㎝ 크기의 장지 한 장으로 작성된 이 족도에는 해주오씨를 중심으로 장흥임씨, 경주김씨, 수원최씨, 여흥민씨, 행주기씨 등의 가계가 기록돼 있다.

이밖에 16세기 초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주이씨 독락당 소장 ‘여주이씨세계’와 ‘경주이씨족도’, ‘경주손씨족도’, 또다른 ‘안동권씨족도’

등이 전한다.

출처:문화일보 최영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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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김씨세고江陵金氏世稿 [A Record of the Kim Family in Gangneung ]

[정의]
조선시대 강릉김씨의 족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계보를 정리하여 간행한 족보.

[개설]
조선시대 족보의 유형은 크게 족도(族圖)·대동보(大同譜)·파보(派譜)의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족도는 족보의 초기 형태로 일반 족보처럼 정간(井間)을 지어 기록하지 않고 단지 계보만을 알 수 있도록 붉은 선으로 연결시켜 가계를 기록한 것이다.
대동보가 전국적으로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파보는 향촌사회에서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고 사족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편찬/발간경위]
강릉김씨의 족도는 외손이 강릉부사로 부임하면서 강릉에서 작성되어 강릉부에 보관하였다.
강릉김씨 대동보는 강릉김씨 가운데 조선중기 이후 가장 번창하였던 벌열(閥閱)가문인 이른바 백동파(柏洞派)에 의해 서울에서 간행되었다.
반면 강릉김씨 파보는 대동보가 서울에서 간행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강릉을 비롯한 지방에서 발간되었다.


[내용]
강릉김씨 대동보 가운데 1565년에 간행된 『을축보(乙丑譜)』는 조선전기 족보의 또 다른 유형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는 친손, 외손을 동등하게 기록한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나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와는 달리 철저하게 부계중심으로 족보를 작성하고 있다.

그리고 서얼을 기재하지 않음으로써 적서를 구분하여 명분을 바로 잡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항렬자(行列字)의 사용과 관련하여 강릉김씨의 경우 조선전기에는 형제간에만 사용하였고, 조선중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항렬자를 사용하고 있다.

강릉김씨는 족보를 통해 가문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신라 왕족의 후손임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가계내에서 배출한 현관(顯官)의 수를 늘리기 위해 친손뿐만 아니라 외손까지도 소주(小註)로 기록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작성된 강릉김씨 족보는 다른 성관의 족보에 비해 내용이 충실하고 계보가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훈제국은 서양사를 바꾸고 대한민국은 현대경제사의 기적을 쓰다

[질풍노도와 같이 등장한 기마군단]
흉노 왕족, 중국 거쳐 한반도에서 신라를 건국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의 후예

1.세계사와 문화사를 바꾸는 홍산문화의 대발굴
중국의 황허문명과 궤를 달리하는 북방알타이 문화권은 한반도, 만주, 몽골 및 내몽골, 신장위구르, 티벳,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 및 남러시아, 터키, 동부유럽 등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기마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다.
역사시대에 들어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서부에서는 스키타이, 흉노, 훈, 돌궐, 위구르, 토번, 서하, 셀주크·오스만튀크르 등이, 동부에서는 선비, 유연, 수-당(선비), 요(거란), 금-후금(여진·청), 원-티무르-무굴(몽골) 등의 국가가 건설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내몽골 자치구의 요령성 접경 홍산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대거 발굴되었고 최근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데, 그 유물들은 놀랍게도 BC 7000년 전까지 소급되는 고대 문명공동체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특히 1983~85년 홍산지역의 「우하량」에서 BC 3500~3000년경 초기 중앙집권국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적석총, 여신묘, 대형제단, 옥기 등 유적·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초기문명 유물들은 계급이 완전분화되고, 사회적분업이 이루어진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대발견이었다.
의문의 이 문명은 중국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그동안 중국이 자신들의 문명이나 문화라고 주장한바 없었던 지역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세계 4대 문명권보다 적어도 1000년 이상 앞서는 고대문명으로, 세계역사와 문화사를 다시 쓸 수밖에 없게 하고 있는 「홍산문화」이다.
중국 역시 자국 영토내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선 고대문명이 출현한데 대해 놀라고 있는데, 역사공정은 바로 이 토대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영토로 편입된 만주(79만㎢)와 내몽골(148만㎢), 신장위구르(166만㎢), 티벳(127만㎢)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황허 문명과 확연히 구분되는 또다른 문명 지역이며, 현재 동북·서북·서남공정 등의 이름으로 역사공정이 전개되고 있다.
한편,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인근 하가점이란 촌락에서 발굴된 「하가점하층문화」는 BC 2400~1500년 청동기 시대에 지금의 난하-요하 사이의 요서지방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 문화 역시 중국의 황허문명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명권이다.
따라서 이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는 한민족 고대국가인 배달국·고조선의 존재와 직결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한민족의 유래와 고대역사가 밝혀지는 무대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가 역사로 바뀌는 전율의 드라마가 우리 역사학자들의 혜안과 수고에 의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홍산문화 유적-유물.2. 4세기말 혜성과 같이 서양사에 등장한 「흉노-훈」과 20세기 기적의 경제사를 쓴 「한민족」
한민족의 시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현대 한국인의 조상이 수만년 전 알타이·몽골 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왔으며 현대 한민족은 신석기시대(BC 5000~1000)와 청동기시대(BC 1000~300)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했던 몽골계 민족의 후손으로 추정… 중앙아시아와 우랄 인근, 알타이지역이 한민족의 기원이 시작된 장소”(러시아 유가이 교수)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서 동방으로 나와서 …”(단재 신채호 선생)
이렇듯 한민족 시원지를 바이칼호·몽골지방 또는 파미르고원·천산지역으로 보는 것이 다수 견해다.
한국 고대문명은 한반도 북부와 시베리아·만주·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북방기마민족과 연결되며, 한민족은 흉노·선비·돌궐·거란·몽골·여진 등 북방 기마유목민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많은 연구가 있다.

한민족 기원과 관련한 주요 지형.
.최초의 스텝제국이며 기마군단의 전형인 흉노가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BC 4세기경이다.
그러나 흉노는 고대로부터 중국 역사와 같이 존재했었다.
몽골고원을 본거지로한 흉노제국은 중앙아시아와 서역 지방까지 방대한 영역을 장악한 거대국가였다.
그러나 AD 155년 선비·한나라군에 의해 멸망한 후 잔존세력들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로부터 약 2세기가 지난 후 유럽에 돌풍같이 등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해 로마인들을 공포에 빠뜨린 훈 제국은 바로 이들이 세운 국가다.

훈족은 기마전술·생활관습·문화 등에서 흉노와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흉노의 후예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흉노-훈과 우리 한민족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①학계에서는 북방 유목민 일부가 한반도 남부 신라에 정착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1990~92년 김해 대성동에서 많은 고분과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적석목곽묘·토기·투구·철제갑옷·마구·동물문양장식·오르도스형 동복 등이다.
이는 흉노·선비·부여·고구려 등 북방기마유목민족의 한반도 진출을 말해준다.
흉노의 무덤은 직사각형 구덩이에 시신을 안치하고 나무덧널을 넣은 다음 돌을 쌓아 올린 적석목곽분인데 신라무덤(천마총, 황남대총 등)도 이와 매우 흡사하다.
흉노와 신라의 친연관계는 무덤은 물론, 편두풍습과 제철기법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②고대 북방유목민들에게는 금으로 치장하는 풍습이 널리 퍼져있었고, 이는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민족의 상징이었다.
신라는 금을 세공하여 금관과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동물형 장식 등 고대 금 세공기술은 스키타이와 신라가 가장 뛰어났다.
고대 한국은 금관의 나라라고 할 만큼 우수한 기술로 금관을 제작했다.
전세계 발굴 금관의 2/3가 우리 것이다.
신라 금관을 보면 윗부분의 나무와 사슴뿔 형상, 잎새 모양 장식, 곡옥 등 북방 알타이계통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신라 금관

③가야·신라에서는 고구려·백제에는 없는 순장하는 풍속이 나타난다. 이는 흉노 등 북방민족의 전통이었다.
흉노는 다른 민족에 흡수되어 사라졌으나, 우리에게는 씨름·언어·습속·의복·풍습 등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한국어에는 북방알타이계 언어들과 연결된 다수의 어휘가 나타난다.
간(干)·각간(角干) 등 왕을 뜻하는 단어는 물론, 백제·신라·고구려의 관직명에서 많은 알타이계 어휘가 보이고 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혁거세」는 돌궐어로 통치자 즉 천자(天子)라는 뜻이라 한다.

④흉노가 신라·가야를 건국했다는 연구도 있다.
흉노에는 선우가 직접 다스리는 중심부와 동·서부지역을 다스리는 좌현왕·우현왕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고조선 등 한민족의 고대정권 구조와 유사하다.
BC 174년 흉노의 영걸 묵특 선우는 돈황 넘어 서역을 정벌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후, 우현왕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BC 121년 흉노의 우현왕(휴도왕) 사후 태자 김씨 형제(김일제, 김륜)가 중국으로 들어와 한 왕실에서 활약했고, 전한 멸망 후 세운 것이 ‘신’나라다(왕망:원래 김망이라 한다).
이들 후예가 김해와 경주 일대에 들어와 신라·가야를 형성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인이며, 김해 가야는 흉노인 김씨의 나라였다.
또한 신라로 진출한 김씨 왕국을 확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동인,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

 

⑤논란이 있지만, ‘단군세기’에 따르면 고조선 3세 단군때 삭정을 약수지방(감숙성)에 유배시켰다가 그 땅에 봉한 것이 흉노의 시조라 하며, 30대 및 37대 단군시절에는 흉노가 고조선에 조공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본래 我의 동족이었다.
… 我에서 분리된 흉노·선비·몽고…”라고 하여 흉노가 우리에게서 분리된 점을 갈파하고 있다.
현재 몽골인들은 흉노를 자신의 조상으로 생각하고 교과서에서도 몽골 최초의 고대국가가 흉노라 한다.
또 튀르크계 국가인 터키의 교과서는 튀르크의 고대국가가 흉노라 한다.
헝가리에서는 훈족의 후예가 유럽에서 건설한 나라가 헝가리이며, 헝가리인들은 훈족의 통치자 아틸라를 자신의 위대한 선조로 생각하고 있다.
모두 국경의 역사가 아닌 민족과 흐름의 눈으로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서양 역사를 뒤바꾼 흉노-훈제국, 세계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홍산문화, 현대 세계경제사의 무대에 당당히 등장한 대한민국. 그 흐름의 역사를 보다 열린 마음과 시각으로 이해해 보았으면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출처] 조선일보 2014.02.27

동아시아 최강 기병국가 고구려의 몰락은 초원제국 돌궐이 멸망했기 때문

1. 유라시아지역에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한 돌궐
흉노는 유라시아 대초원지역에서 기마유목민이 건설한 최초의 스텝제국이었으며 기마유목국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흉노는 유라시아대륙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겼으나 한나라와 쟁패하는 가운데 분열되면서 유목민 선비에 패배해 역사에서 사라졌다(151년).
선비족은 몽골고원 일대를 장악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되어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남하하여 5호16국 시대를 열게 됐다(304년).
선비의 남하로 생긴 공백을 틈타 몽골계 유연이 몽골고원을 차지하고 150년 가까이 지배했으나 또 다른 유목민 튀르크계 돌궐에 멸망당했다(330~555).
흉노의 후예로 알려진 튀르크족에서「부민(Bumin)」카간이란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돌궐을 건국(552년)했으며 나라의 정식 명칭은 Kok Turk인데, 이는‘하늘의 신성한 튀르크’란 뜻이다.


부민카간을 이은「무한(Mukhan)」카간(553-572)은 최고 전성시대를 열었는데, 돌궐비문은 그에 대해“사방에 군대를 보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을 가진 자는 무릎을 꿇게 하였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그의 장례식에는 중국, 티베트, 비잔틴, 유연, 거란, 고구려 등에서 사신이 왔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돌궐은 유라시아지역 동서·남북에 걸쳐 건설된 최초의 대제국으로 최대 영토가 1,000만㎢를 넘었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당나라와 쟁패하면서 역사의 중심에 등장했다.

그러나 돌궐은 초원제국의 분열이라는 역사상 전례를 벗어나지 못하고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돌궐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서돌궐로 분열됐다(582년).

둘로 나뉜 돌궐은 국력이 쇠잔해지면서 동돌궐은 630년, 서돌궐은 651년에 각각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50년의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당에 대해 꾸준히 독립투쟁을 전개했고, 마침내 682년「쿠틀룩」이란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거의 완전하게 돌궐을 재건하여 후돌궐시대를 열었다.

후돌궐은 720년경「빌게」카간 때 최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시기에 세워진‘오르혼비문’은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빌게카간 사후 급속히 약화된 후돌궐은 745년 위구르·당·티베트의 협공을 받아 멸망했다.
동돌궐에 속했던 유목민족은 전통을 유지했으나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화했고 이후 원의 지배하에 들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서돌궐은 초원지역에서 유목과 오아시스 농경생활을 병행하다가 압바스 왕조의 지배하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일부 세력은 터키 지역으로 계속 서진했다.

이들 서돌궐세력은 960년경 셀주크 장군의 지휘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사마르칸트로 이주했고, 1037년 토그릴이 셀주크튀르크를 건국했다(1037~1194).

서진을 계속한 셀주크튀르크 일족은 아나톨리아 지역(터키)에서 비잔틴 제국을 격파하고 룸셀주크를 건국했다(1077년).

룸셀주크 세력약화 후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오스만1세가 오스만공국을 건국(1299년)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출발이다.

 

2. 북방민족 돌궐과 통일중국의 대결

돌궐이 건국되던 시기에 중국은 5호16국 시대를 지나 남북조시대에 들어섰으며, 돌궐은 북위가 분열되는 상황에서 무력으로 북조를 압박하는 등 우월한 지위를 견지했다.

589년 중국은 수나라가「통일」하고 돌궐은 동·서로「분열」되는 큰 정세변화가 일어났다.「통일」과「분열」은 향후 양국의 역사전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키워드다.

통일 수나라는 돌궐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돌궐 분열을 더욱 조장하고 그 결과 더욱 약화된 돌궐을 압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데, 이것이 역사다.

수나라에 이은 강력한 왕조 당나라는 돌궐과 다시 대적하게 된다.
당나라는 290년간 존속한 통일 왕조로, 중국은 한나라에 이어 제2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자신을 진시황과 한무제에 비견했던 당태종 이세민(627~649)은 끊임없는 팽창정책을 추구했으며 따라서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며 숙제는 바로 고구려와 돌궐이었다.
고구려는 수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결과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한 바 있고 돌궐은 수시로 중국영역을 공략하면서 국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당태종의 집념으로 630년 동돌궐이, 651년에는 서돌궐이 당에 멸망했다.
이어 668년에는 고구려 또한 나·당 연합군에 패하고 700년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국력은 대단했다.
당은 선비계가 세운 왕조로, 당나라 사람은 남북조시대 이전의 중국 한족의 후예라기보다는 한족과 이민족이 융합한 새로운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당나라는 주변의 이(異)민족의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문화를 교류하는 등의 개방정책을 통해 융성했고 전성기에 교류한 국가가 70여 개국에 달하는 등 중국왕조의 대명사가 되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국제도시로서 문명과 교통 교류의 허브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당나라 현종은 서역장악을 위해 고구려유민의 후예 명장 고선지로 하여금 서역원정을 하게했다.
고선지는 11년간(740~751) 다섯 차례 출전했다.
747년 출병시에는 해발 4,600미터의 탄구령을 넘는 전설의 진군을 했고, 중앙아시아, 파미르, 실크로드를 관장하는 안서도호부의 책임자가 됐다.
연전연승하던 고선지장군은 751년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타쉬겐트 부근 탈라스강 유역에서 압바스·티베트·돌궐의 이슬람 연합군과 맞선 대전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했다.

고선지군대는 중국의 중앙아시아지역의 마지막 진출세력이었고, 이 전투의 패배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슬람 세력이 뿌리를 내리게 됐다.

고선지 장군은 그 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모함을 받아 죽었다.

 

3. 돌궐시대와 동아시아 최강 기병국가 고구려 역사

돌궐 건국 전 몽골고원과 내륙 아시아지역은 150년간 몽골계 유연이 지배했으며, 유연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돌궐이 유연을 멸망(552년)시키고 동진하면서 여러 유목민족과 거란을 복속시킴에 따라 고구려의 서북국경에 전운이 감돌게 됐다.
돌궐은 고구려와의 사이에 있는 거란·말갈족에 대한 정벌전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적대적 관계에 서게 된 것이다.
전성기 돌궐의 무한카간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는 말갈족과 연합하여 이를 격퇴하기도 했다.
당시 돌궐은 동로마제국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동로마 문헌에‘고구려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 매일의 신체 단련으로 투지가 높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구려의 국력과 고구려인의 기상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수나라가 건국되고, 돌궐이 동서로 분열되는 582년경 이후에는 고구려와 돌궐은 상호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강력한 수나라의 등장이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를 우호적이고 긴밀하게 바꾼 것이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반면 돌궐세력은 약화되면서 고구려는 홀로 수와 대적하게 되나 끝내 수를 격파하고 침공을 막아냈다.
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동·서돌궐을 멸망시킨 후 팽창정책을 지속했고 돌궐 없이 홀로 남은 고구려는 영류왕·연개소문 시대에 단독으로 최강의 당을 상대하다가 668년 결국 멸망했다.

강한 북방유목민족국가가 존재할 때는 중국을 견제하여 고구려가 안정될 수 있었으나 북방세력이 쇠퇴할 때는 강국 고구려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682년 돌궐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당이 다시 돌궐과 전쟁에 돌입하면서 세력의 공백기가 생겼고, 이를 이용해 고구려 후예들은 만주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여 한민족사의 남북국시대(신라+발해)를 열었다.

발해건국에 참여한 말갈은「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으로 시대별로 달리 불리웠던 우리민족의 갈래다.

중국통일 후 돌궐의 분열과 멸망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후돌궐의 부활은 고구려의 부활(발해의 건국)로 연결됐다.
이는 초강대국의 등장에 따른 인접국가의 운명과 이에 맞서는 전략에 관한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는 대목이어서, 오늘날의 동아시아 정세를 판단할 때도 참고 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고 보여 진다.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나라시대에는 고조선과 흉노의 협력을 경계했고, 수·당시대에는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을 경계했다.
이것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통일 중국왕조의 대외전략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외교정책의 기본인 것이다.

 

동아시아 최강 기병국가 고구려의 몰락은 초원제국 돌궐이 멸망했기 때문  

 

출처[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조선일보
키워드:터키교과서에 실린 돌궐의 전성기 영토 지도. 몽골국립박물관

1. 여진족의 나라「金」의 기원과 흥망

여진족은 만주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을 지칭하는데, 시대에 따라 중국 사가들은 다르게 불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나라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代에는 말갈(靺鞨), 송·명代에는 여진(女眞), 청代에는 만주족 등이었다.
고려를 부모로 모시던 여진족, 금나라 건국 후에는... 6세기말 수·당시대 이후 만주지역 주민들은 말갈로 불리웠다.
속말·백산·백돌·불열·호실·흑수·안차골 등이 큰 부족이었으며, 이중 속말·백산부족은 고구려에 복속했다가 후에 발해를 구성하고, 흑수부족은 발해북부지역에서 발해에 대항하다 발해 멸망 후 거란에 복속하여 여진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대체로 발해 멸망 후 그 지역은 여진으로, 살던 사람은 여진족이라 불리웠다.
여진은 10세기초 이후 요나라(遼: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遼의 호적에 편입된 요양 일대(요령성) 부족은 숙여진, 편입되지 않은 송화강 이북(흑룡강성) 및 두만강유역(길림성) 부족은 생여진이라 불렸다.
이 시기 200년간 여진은 역사에 눈에 띠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12세기초 만주 하얼빈 남동쪽의 생여진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고, 영걸 아골타(阿骨打)가 흑수말갈을 통합하고 1115년 금나라(金)를 건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금태조 아골타는 遼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히고 1120년 宋과 동맹을 맺은 후 만주에서 遼를 쫓아내고 북경까지 진출했다.
1125년 2대 태종때 마침내 遼를 멸망시켰다.
金은 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동맹국이었던 宋과 마찰이 일어나자 1127년 宋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여 황제를 사로잡고 宋을 강남으로 몰아냈다.
이로써 金은 만주·내몽골·화북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1153년 상경회령부에서 연경으로 천도하여 중국 중심부를 장악했다.
남쪽으로 간 宋은 이후 南宋으로 이어지면서 金의 신하국이 됐다.
12세기 말 전성기를 구가하던 金은 남송·서하·몽골 등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1234년 몽골과 남송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금나라 지도와 금태조 아골타. 금나라 지도와 금태조 아골타.2. 금나라시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흐름
金은 발해멸망(926년)후 약 90년이 지난 1115년 발해영역에서 건국해서 120년간 존속했다.
당시 중국 본토에는 宋(960~1126)·南宋(1126~1279), 만주·몽골·화북지방에는 遼(916~1125), 한반도에는 高麗(918~1392)가 세워졌다.
이 시기는 돌궐족(투르크)이 위구르에 멸망 후 서진하여 셀주크투르크를 건국했던 때다(1037~1194).

 

① 여진(金)-거란(遼)의 관계
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지역에 있던 여진은 여러부로 나뉘어졌지만 대체로 거란과 속국관계에 있어 거란의 착취와 여진의 반발이 이어졌다.
아골타는 金을 건국한 후 遼에 수교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만주각지에서 遼를 격파했다.
이때에 宋과 金은 요나라 협공을 위한 조약을 맺었다.
金은 遼를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상경·중경·서경을 함락하고 수도 연경에 입성(1122년)한 후 1125년 부패로 국력이 쇠잔한 遼를 멸망시켰다.

 

② 여진(金)-宋의 관계
宋은 거란과 대치하는 가운데에도 여진과 바다를 통해 교역을 지속했으나 여진을 큰 세력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아골타 등장 이후 강성한 金이 遼를 격파하고 만주를 장악하자 宋은 과거 거란이 차지한 연운16주를 수복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을 들고 나왔다.
金과 宋이 연합하여, 金은 長成以北의 중경을 차지하고 宋은 長成以南의 남경을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金은 대군을 동원하여 遼를 전면 공격했으나 宋은 출병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금태조는 이에 대해 대규모 배상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남진정책의 빌미를 얻게 됐다.

1125년 金은 宋을 공격했다.
宋은 나약하게 대항하다 모든 방어기회를 놓치고 1127년 왕실이 포로가 되면서 멸망했다(정강의 변).
그러나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 살아남아 남경에 도읍하여 이후 南宋으로 이어졌다.
남송시대에도 양국의 전쟁은 지속됐다.
남송은 금이 가장 두려워하는 걸출한 장군 악비를 모함 끝에 처형하는 등 국력을 낭비한 끝에 1141년 金과 화의하고 종속됐다.

 

③ 여진(金)-고려의 관계
당초 여진은 고려와 거란에 귀속하였으나 복속과 배반을 되풀이 했다.
고려와 여진은 두만강변 등 국경지대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윤관은 金 건국 이전인 1107년 천리장성을 침입하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金 건국후 遼가 멸망하고 金이 만주를 차지한 후에는 金과 고려 사이에 긴장과 마찰이 생겼으나 金은 거란을 무력 정복한 것과 달리 고려에 대해서는 회유의 방법으로 접근했다(요동사, 김한규).
金과 고려는 전형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金나라를 정벌하자는 서경천도운동을 일으키나 김부식의 관군에 진압된 이후 金과는 큰 전쟁없이 사대관계를 지속했다.


 
고려를 부모로 모시던 여진족, 금나라 건국 후에는... 

3.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한민족의 관계

고조선 이래 만주에 거주하는 다수 주민은 조선민족이었다.
부여, 고구려도 그러하며 발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나 이들 역사를 우리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발해가 멸망한 이후가 문제다.
발해 멸망후 그 지역과 사람들은 여진(족)으로 불리웠으며, 여진인들이 金을 세웠다.

그러면 金나라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1900년대 들어서까지도 金나라 역사를 우리 역사에서 다루었다.

「신단민사」(1923, 김교현)에서는 발해·遼·金·淸까지 포함해 민족사의 흐름을 밝히고 있고, 「배달민족정사」(신태윤, 1928·1945)에서도 遼史·金史·淸史를 한국사에 포함시켰다.

「민족정사」(윤치도,1968)에서는 제6장 남북조시대사의 제1절 北朝史에서 발해사·遼朝略史·淸朝略史를, 제2절 南朝史에서 고려·조선사를 다루고 있다.

「조선유기」(권덕규, 1941)·「조선사」(권덕규, 1945)및 「조선역사」(세창서관 편집부, 1945)에서는 朝鮮歷代傳受圖에서 고조선으로부터 韓(마한·진한·변한 →백제·신라·가야→신라·고려·조선), 夫餘(북부여·동부여·북옥저·동옥저→고구려·발해), 肅愼(읍루-물갈-말갈, 여진→금·청)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쓰고 있다.

여진과 한민족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목할 만할 기록이 있다.
「金史」는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라고 했다”고 썼다.
 또 금나라의 기원과 관련하여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로 고려에서 왔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고려에서’라는 표현은 다른 역사서나 신라·고구려의 구별이 잘못된 사례 등에 비추어 볼 때 신라인을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金志, 大金國志, 三朝北盟會編 등은 초기 여진 추장이 신라인이라 밝히고 있다.


고려사 등에서는 이를 김준이라 전한다.
종합하면 신라유민이며 신라종실인 권행(權幸:본명은 金幸)의 둘째아들 김함보(=김준)가 여진 완안부의 추장이 되어 주변을 통합해가다 흑수말갈까지 장악하고, 이에 발해유민이 가세하여 건국한 것이 金이다.

즉 金은 지배층인 황실은 신라계 유민의 후예며, 발해인들이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여기에 흑수말갈도 구성원이 된 국가인 것이다.

여진인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기원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으나, 고구려·발해 등 한민족국가의 구성원이었으므로 우리와는 형제민족이라 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668)후 고구려 유민이 건설(698)한 나라이고, 신라 멸망(935)후에는 신라유민들이 발해땅(926멸망)으로 다수 이주하였으며, 이들의 후예가 세운 나라가 金이다.

金은 宋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나 고려와는 대체로 큰 전쟁없이 형제국가로 지냈다.
여진은 金 건국전에는 고려를 부모나 형으로 여겼고, 金 건국후에는 스스로 형이라 칭했다.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도 많은 여진인이 귀화했고 통혼도 했는바, 이는 서로 남이 아니라는 역사적 인식의 공유 때문이지 않았을까.
여진은 만주에서 일어나 걸출한 지도자의 등장과 더불어 단기간내에 대통합국가를 건설했고, 중원까지 제압하면서 동북아의 패자가 되었다.
현대의 기적을 일구어 낸 한민족의 성장 DNA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목이 여진史라 하겠다.

출처:☞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프리미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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