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월성동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흑요석(사진) 산지(産地)가 ‘백두산’으로 조사됐다.

약 2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 백두산에서 700km나 떨어진 대구까지 물품이 이동한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구석기인들의 이동 범위가 현대인들의 상상보다 훨씬 넓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국립대구박물관은 최근 발간한 ‘대구 월성동 유적 흑요석 원산지 및 쓴 자국 분석’ 학술서에서 월성동 출토 흑요석 100점에 대한 산지 분석 결과를 소개했다.

2006년 발굴된 월성동 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와 청동기, 통일신라시대 유구 등이 한꺼번에 나왔다. 

박물관은 김종찬 전 서울대 교수(물리학)에게 ‘레이저 플라스마 질량분석(LA-ICP-MS)’을 조사 의뢰한 결과, 100점 중 97점이 ‘백두산계열 1형’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백두산에서 생성된 흑요석 유형은 총 3가지가 있는데, 국내 구석기 유적에서는 주로 1형과 2형이 발견된다.

국내 구석기 유적에서 흑요석이 발견된 곳은 약 30곳.

이 중 월성동 유적에서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가장 많은 흑요석이 출토됐다.

발견 직후 흑요석 조사가 이뤄졌지만 국가 귀속 문화재에 대해 파괴분석을 할 수 없어 산지 규명에 실패했다.

그러나 레이저를 이용해 약 50μm 지름의 미세한 손상만 가하는 첨단 분석 기법이 도입돼 산지 분석이 가능해졌다.

이와 관련해 월성동 흑요석들이 원석 형태가 아닌 반(半)가공 형태로 들어왔을 걸로 추정돼 주목된다.

원석이 갖고 있는 특유의 자연면(自然面)이 없고,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만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적 내 석기 제작지 4곳에서 흑요석 부스러기들도 발견됐다.

백두산 흑요석은 경기도 일대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이에 따라 흑요석 원석이 백두산에서 채취된 뒤 가공을 거쳐 한반도 중부지방을 통해 대구까지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후기 구석기시대 한반도 남·북부를 잇는 교역 네트워크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장용준 대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구석기인들이 사냥감을 쫓아 이동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물건을 유통시켰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라며 “이번에 영남 지역에서 최초로 흑요석 산지가 백두산으로 규명된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책에는 김경진 프랑스 페르피냥대 교수가 흑요석을 갖고 직접 용도를 실험한 결과도 수록됐다.

이에 따르면 월성동 백두산 흑요석은 주로 동물 뼈 등을 다듬는 ‘새기개’나 사냥용 ‘찌르개’로 쓰였을 걸로 추정된다.
출처:동아일보 2017-01-18 김상운 기자

무릉계곡 매표소 북측 발굴조사
시, 강원문화재 연구소에 의뢰
금당 배치 등 역사적 가치조명

동해시가 14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삼화사의 창건 비밀을 밝히기 위해 발굴 조사에 나선다.

시는 원삼화사지 일원에 매몰되어 있는 유구 성격과 삼화사의 실제 구역인 사역(寺域)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 시굴 조사한다.

시는 문화재청으로부터 발굴허가를 받아 강원문화재 연구소에 발굴을 의뢰했다.

이번 발굴조사는 1977년까지 삼화사가 위치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명 원삼화사지로 현 무릉계곡 매표소 북측(삼화동 714번지 일대)이다.

면적은 총 1만1282㎡이다.

삼화사 정밀 발굴조사는 금당과 강당,탑지 등 건물지의 배치 구조를 밝혀 신라 때부터 이어져 오던 삼화사의 유구한 역사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특히 원삼화사지와 현재 삼화사가 위치해 있는 중대사지와의 연계성,고려청자가 출토된 삼화동 고려 고분(강원도 기념물 제90호)과의 관련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시는 발굴 조사 성과품을 원삼화사지 종합정비계획 수립과 수륙사,불교의례 박물관 건립의 기초 자료로도 활용할 방침이다. 

삼화사는 전통 사찰 10호로 지난 1977년 쌍용양회가 시멘트 채광을 시작하면서 사찰이 철거되고 무릉계곡 인근에 있던 중대사(中臺寺)의 옛터에 현재의 사찰을 중창했다.

시 관계자는 “원삼화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천년 고찰 삼화사의 금당 배치 등 역사적 가치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강원도민일보 홍성배기자 2018년 05월 17일




통일신라시대 승단 조직에서 사용한 청동 승관인(僧官印)
삼척시 도계읍 흥전리사지 발굴조사 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승단 조직에서 사용한 청동 승관인(僧官印)이 확인됐다.

삼척시와 (재)불교문화재연구소가 2014년부터 삼척시 도계읍 흥전리 일대에서 ‘중요 폐사지 발굴조사사업’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올해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인장 2과가 출토됐고, 12점의 대호(大壺, 항아리)를 묻었던 장고(醬庫, 장독 보관시설)가 확인됐다.

출토된 청동인장 2과는 모두 완전한 형태이며, 이 중 하나는 청동인주함에 인장이 담긴 채 출토됐다.

보존처리 중인 청동인장은 2과 모두 정사각형(5.1㎝)으로, 윗면에 끈을 매달 수 있는 손잡이가 있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의 형태로 제작됐고, 청동인장에는 6자의 전서체(篆書體)와 기하문(幾何文)이 각각 새겨져 있다.
2과 중 한점의 인문(印文)이 ‘범웅관아지인(梵雄官衙之印)’으로 판독되며, 서체는 당나라 관인과 유사한 구첩전(九疊篆, 글자 획을 여러 번 구부려서 쓴 전서체)의 초기형태이다.

이 인장은 통일신라시대 승단에서 사용한 승관인으로 판단하고 있다.
‘범웅관아지인(梵雄官衙之印)’청동인장은 경주 황룡사지 출토품과 손잡이와 명문 서체 등에서 전체적인 형태와 크기가 매우 흡사한 데, 한국 인장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 이번 조사에서 도내에서 처음으로 장고(醬庫) 터가 확인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지 내부에 대호 12점을 정연하게 묻어 사찰음식 재료를 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형태의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는 남원 실상사를 비롯 경주 황룡사지와 성건동 유적에서도 확인됐으며, 선종사찰 고원(庫院)시설의 장고였음이 밝혀졌다.

삼척 흥전리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영동지역 불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찰로, 그동안 금당지(金堂址), 탑지(塔址) 등 주요 가람시설이 확인됐고, 특히 신라시대 왕이 임명하는 승단의 최고 통솔자인 ‘國統’(국통)이 새겨진 비조각(碑片)을 비롯 청동정병(靑銅淨甁), 금동번(金銅幡, 깃발) 등 중요 유물이 출토돼 위세높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척시는 흥전리사지의 실체와 역사적 가치를 규명, 체계적인 보존·관리·활용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연차 발굴조사 성과를 집성한 학술대회를 내년 2월 개최할 계획이며, 학술대회를 통해 도출된 조사성과와 의의, 정비 방안 등을 담아 사적지정 신청도 계획하고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5일 오후2시 도계도서관과 흥전리사지 발굴현장에서 유물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출처:2017-12-5 (화) - 황만진 기자

대책위, 국립춘천박물관 규탄
“춘천 예족 지배지로 단정 왜곡”
서명 운동·시의회 성명 채택
 박물관 “ 맥국 기록 입증 어려워”

 

춘천지역 맥국 역사와 관련된 논란이 지역사회와 학계로 확산되고 있다.

춘천문화원을 비롯한 지역사회단체로 구성된 ‘국립춘천박물관 춘천지역 정체성 말살 춘천시민 대책위원회’(위원장 류종수·이하 대책위)는 내주 중 지역사 말살을 규탄하는 서명서와 관련 내용 수정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청와대와 국회,문화체육관광부,문화재청,국사편찬위원회,강원도 등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한달여간 진행된 서명운동은 이달 현재 2만1000여명이 참여했다.

대책위는 지난해 10월 국립춘천박물관이 상설전시실 ‘강원의 역사와 문화’를 전면 개편하고 전시 도록을 제작하면서 철기시대 춘천을 포함한 영서지역 전체를 맥족과 연계됐을 가능성을 제외하고 예족의 지배지역으로 단정하여 기술한 데 대해 반발,이에 대한 공식사과와 도록 회수·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또 전시실 내 맥국 역사 관련 설명을 수정,기술할 것을 춘천박물관측에 전달했다.

대책위는 최근 성명을 통해 “영서지역 전체를 예족의 지배지역으로 단정해 기술하는 것은 맥국(맥족)과 절대적 상관성을 지닌 춘천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지역사 왜곡이며 강원도의 상징처럼 여겨오던 예맥의 오랜 정통성을 부정하는 만행”이라고 주장했다.

지난달에는 춘천시의회가 해당 성명서를 채택하며 논란은 지역사회 전반에 파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립춘천박물관은 “맥국에 관한 기록은 역사적으로 입증되기 어려우며 영서·영동 지역에 예족이 거주했다는 최근 학계의 통설을 전시에 반영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다만 지역사회단체의 의견을 반영해 이달 중 전시실 내 일부 사서에 언급된 맥국 관련 전시 설명 패널을 추가하고 도록은 2쇄 발행 시 연구자와 상의해 관련 기록 추가를 검토하고 있다.

한편 이번 논란과 관련해 국립춘천박물관이 하반기 진행 예정이던 한반도 중부지역 철기시대 문화(중도문화) 관련 특별전은 취소됐으며 학술 심포지엄만 예정대로 오는 6월 진행될 예정이다.

출처:ⓒ 강원도민일보 최유란 2018년 01월 10일 수요일  

고찰 영국사 터 출토품 중
구양순체 새김돌 1점 발견
10세기 고려초 유일본 판명
“조선시대 이전 천자문 처음”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천자문 실물로 판명된 서울 영국사터 출토 고려시대 석각 천자문 조각. 의 163·165·167구가 새겨져 있다.

2012년 출토된 유물로 현재 한성백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허, 이거 천자문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유일본이에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수화기에서 불교문화재 전문가인 고경 스님(송광사 성보박물관장)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해 11월초 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의 박찬문 팀장은 스님의 전화를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년 전부터 조사해온 서울 도봉산 기슭의 고려시대 고찰 영국사터 출토품들 가운데 정교한 글자들이 새겨진 돌덩이(석각편) 6점의 판독을 부탁했는데, 그중 한점이 1000여년 전 국내 최고의 천자문 실물로 판명됐다는 내용이었다.
10세기께 고려 초기 것으로 판명된 이 천자문 석각은 2012년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의 조사 당시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연구소 쪽이 스님 설명을 듣고 석각을 살펴보니 5~6세기 중국 양나라 문인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 250구 가운데 163구와 165구, 167구의 앞구절 일부가 새겨진 것으로 드러났다.

‘다스림은 농사로서 밑바탕을 삼는다’는 뜻의 163구 ‘治本於農’(치본어농)의 ‘治本…’ 부분과 165구 ‘남쪽 이랑에 나가 일을 한다’는 뜻의 ‘俶載南畝’(숙재남무)의 ‘俶載…’, 167구 ‘익은 곡식에 구실을 매기고 햇것을 공물로 바친다’는 뜻의 ‘稅熟貢新’(세숙공신)의 ‘稅熟…’ 부분이 반듯하고 골격 잡힌 해서 글씨체로 표기되어 있었다.

고경 스님은 “석각 글씨를 여러번 보다 천자문 뒤쪽에서 본 글귀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갖고 다니는 천자문 색인과 대조해보니 꼭 들어맞았다”며 “국내 천자문 실물은 조선시대 이전의 판본이 없어 획기적인 국가문화재급 발견”이라고 했다.
서예사가인 이완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도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까지 유행한 당나라 명필 구양순의 전형적인 서체이고, 함께 발견된 고려 석경(돌에 새긴 불경)과 서풍, 새김 방식, 재질도 같아 고려초 유물이 확실하다”며 “글귀 구성을 볼 때 1줄에 8줄씩 새긴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절에서 승려들의 한자 학습을 위해 썼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국내 학계는 주흥사의 <천자문>이 한반도 삼국에 곧장 전해졌다고 짐작해왔다.

일본사서 <일본서기>에는 3세기 백제 박사 왕인이 일본에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주흥사의 <천자문>보다 일러 다른 종류의 천자문을 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천자문 실물의 경우 널리 알려진 명필 한호의 <석봉천자문>(1583년 초간)을 비롯해 조선시대 판본들만 전해져왔고 삼국·고려시대 것들은 전무했다.

15세기 안평대군의 해서·초서본과 사육신 박팽년이 썼다는 초서본이 가장 오래된 글씨본으로 꼽혀왔는데, 후대 계속 판각돼 쓰였다.

가장 오래된 판본은 1575년 펴낸 <광주판 천자문>(일본 도쿄대 소장)이 꼽혀왔으나 이번 석각본 발견으로 천자문 실물의 역사는 500년 이상 올라가게 됐다.
연구소 쪽은 새로 판독된 천자문 석각을 지난 12일 한국목간학회 발표회에서 학계에 공개했다.

이날 자리에서 천자문 석각을 검토한 석경 연구자 조미영 박사(원광대)는 “서체를 볼 때 천자문 석각을 새긴 시기가 통일신라 때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해 학계에 새로운 논란도 예상된다.
연구소는 이와 함께 2012년 발굴 당시 천자문 석각과 같이 나온 다른 석각 3점이 <묘법연화경>을 새긴 고려시대 유일한 석경임을 밝혀냈으며, 2017년 출토품 가운데 경전과 교리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변상도’로 추정되는, 연꽃잎무늬(연판문)가 새겨진 석각 1점도 추가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에 남은 고대 석경은 구례 화엄사의 <화엄석경>과 경주 창림사터에서 나온 <법화석경>, 경주 남산 칠불암에서 나온 <금강석경>뿐인데, 모두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29295.html?_fr=mt1#csidx9ef10ebd69ad0bab10be06ff96e8e67


출처:한겨례신문 :2018-01-25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나는 몇일전 인터넷 신문을 읽으면서 공감이 가던글이 있어 스크랩을 해보았습니다.


일본인 출신으로 귀화한 인물 가운데는 사야가(沙也加·김충선)이 첫손가락으로 꼽힌다.
사야가는 1592년 4월15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 제2진의 선봉을 맡아 부산포에 상륙했다가 곧바로 부하들과 함께 귀순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모하당 문집>을 보면 단순한 항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정 전부터 “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섰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요순삼대(요순시대와 하상주 3대를 일컬음. 예의가 넘치는 태평성대를 의미함)의 유풍을 사모해서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귀화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야가는 특히 “난 힘이 없어 항복한 게 아니다”라고 애써 강조한다.

동래부사 순절도에서 보이는 왜군들.

가토 기요마사군의 선봉에 선 일본인 사야가는 부산포에 닿자마자 귀화했다고 한다.

“아직 한번도 싸우지 않았으니 어찌 (조선의) 강압에 못이겨 화(和)를 청한 것이겠느냐”면서 “예의의 나라인 조선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뿐”이라고 힘써 말했다.
“지금 귀화하려는 뜻은 분명합니다.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고, 힘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용기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조선 조정은 그런 사야가를 가상하게 여겨 자헌대부(정 2품)를 제수했다.

그러면서 김해 김씨의 성를 내리고,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내렸다.

김충선의 본관은 임금이 하사한 성이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하기도 하고, 집성촌(대구 달성군 우록리)의 이름을 따 ‘우록 김씨’라고도 한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고, 조총과 화포를 다뤘으며, 화약제조법을 전수했다.

또 이괄의 난(1624년)과 병자호란(1636년) 때도 공을 세웠다.

김충선이 임진왜란·이괄의 난(갑자년)·병자호란 등에서 모두 공을 세웠다고 해서 ‘임갑병 3난의 공신’이라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1만명에 달한 투항왜병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이가 2~3만명(일본측 자료)에서 10만~40만명(조선측 자료)에 달한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어떨까.

조선에 귀화했거나, 혹은 항복한 일본인은 사야가 즉 김충선 말고는 없었을까. 있다.

1597년(선조 30년) 5월18일 도원수 권율은 죽도와 부산의 적진에 밀파한 간첩들의 보고를 정리하여 조정에 알린 내용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왜인들의 시름이 큽니다. 항왜(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이미 1만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놓았을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근거립니다.”
이 기사를 보면 “지금 경상우병사가 거느린 항왜만 해도 1000명에 달한다”고 했다.

또 1595년(선조 28년)의 보고서를 보면 “북쪽 변방에 이주시킨 항왜의 숫자가 5000~6000명에 이른다”고 했다.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킬 때를 그린 평양성전투도. 왜군이 평양성 함구문을 통해 도망가는 모습이다.

<실록>에 등장하는 항왜(귀화 혹은 항복한 일본인)의 수는 42건에 600명에 달한다.

기록된 숫자가 이 정도니 실로 엄청난 수의 왜인이 갖가지 이유로 항복하거나 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선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심상치않은 이름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즉 사고소우, 연노고, 산여문, 요질기, 훤도목병위, 평구로, 요시지로, 조사랑, 노고여문, 사백구, 세이소…. 딱 봐도 일본인들이다.

또 김귀순(金歸順), 김향의(金向義), 이귀명(李歸命) 등은 귀순하고(귀순), 의를 좇았으며(향의), 천명에 귀의했다(귀명)는 뜻에서 조선 조정이 하사한 이름임이 분명했다.


■'처음엔 다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왜인들은 왜 투항했을까.
전쟁이 나자마자 귀화의 길을 택한 김충선 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초기에는 항왜가 없었다.
왜군이 전쟁발발(4월13일) 20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으로 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명나라가 참전함에 따라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된다.

항왜의 기록은 1593년(선조 26년) 5월22일 처음으로 등장한다.
왜적 중에 100여명이 명나라군에게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군은 항복하는 왜병들을 다 받아주고 심지어는 상급까지 내렸다.

선조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왜적에게 명나라군이 상까지 내린다니 있을 수 없다”고 무척 못마땅하게 여긴다.

1597년 12월~98년 1월 사이에 벌어진 울산성 전투. 이때 항왜 여여문은 왜인 복장으로 적진에 들어가 형세도를 그려오는 등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엇보다 항복한 왜병들이 조선땅을 가로질러 명나라로 압송될 경우 평양 서쪽의 지리를 꿰뚫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포로들 가운데 다시 일본으로 도망가는 자가 있다면 조선 지리의 허실이 다 드러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선조의 걱정이었다.
따라서 선조는 비변사에 “항복한 왜군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명나라 파병군에게 전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비변사는 “참으시라”고 제지한다.
“전하의 말씀은 맞습니다. 저 왜적들은 만세의 후라도 반드시 복수해야 할 원수이고, 저들의 살점을 베어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들은 ‘조선은 어찌 그리 속이 좁으냐’고 힐난하고 있습니다.”(<선조실록>)


■달라진 항왜 정책

무슨 말인가.

당시 중국군은 “오랑캐가 아침에 쳐들어왔다 해도 저녁에 항복하기만 하면 다 받아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군에게 아무리 말을 해봐야 속 좁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 뻔하니 전하께서는 참으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쟁을 일으킨 왜적에게 품은 적개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 발발 2년 4개월이 지난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가 내린 명령을 보면 ‘항왜 대책’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울산왜성에 포위된 왜군이 물을 길러 나오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여여문은 성밑으로 들어가 물을 긷는 이들 왜인을 유인하는 역할도 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우리 조선이 전투에서 이기지도, 용기백배하여 방어하지도 못하면서 항복·귀순하는 왜인들을 거절하고 있다. 이는 옳지않은 처사다.

항복한 왜인이 수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왜군의 군졸 한명이라도 이렇게 앉아서 얻었는데,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처음에 항복한 왜병을 요동으로 보냈던 조선 조정은 차츰 경상·함경·강원·충청·황해의 바닷가와 외딴 섬으로 보냈다.

또 시간이 흐르자 제주나 진도 등지의 수군 및 각 진에 나눠 이주시켰다.

이른바 ‘항왜’의 관리도 골치아팠음을 알리는 기사가 있다.
“1594년(선조 27년) 6월 비변사가 아뢰었다. 투항한 왜적을 경상도 내륙지방에 한 고을당 7~8인 혹은 15~16인씩 두었는데 골치아파답니다. 매우 후하게 대접해서 하루 세 끼를 먹여주는데도 왜노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뜻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칼을 들이대고, 저들끼리 싸워 서로 죽인답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투항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어….”(<선조실록>)

 

■왜 투항했을까

그렇다면 왜인들은 왜 조선조정에 투항했을까.
1594년(선조 27년) 4월17일 접대도감 이덕형의 언급이 의미심장하다.
“왜적들의 한끼 식사가 작은 종지 하나의 밥이 전부인데, 그나마 절반이 껍질째였습니다. 일은 고달프고 배가 고파 항복하려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선조실록>)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왜군이 장기주둔에 따른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1595년(선조 28년) 4월19일 비변사가 항복한 왜인인 조사랑(助四郞)과 노고여문(老古汝文) 등 11명에게 술과 안주를 먹이자 ‘항복한 이유’를 이렇게 술술 털어놓았다.
“우리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휘하에서 예속된 장졸들입니다. 여러 장수들의 진영을 오가며 감당해야 하는 수자리(전방 수비)를 괴로워하던 차에 조선이 후히 대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선조실록>)    


경남 함양 황석산성. 항왜 사백구는 황석산성 전투에 참여하여 왜군 4명을 참살했고 결국 성이 함락되자 김해부사 백사림의 가족들을 피신시켰다.



포악한 왜장의 휘하 장졸들일수록 귀순·투항자가 많았다.

즉 1597년(선조 30년) 조선은 항복한 왜인 세이소(世伊所)와 마다사지(馬多時之)를 다시 적진에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휘하 군관을 5명이나 귀순시켰다.

왜장 가운데는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포악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선조실록>을 보면 그 평가가 맞는듯 하다.
“사역이 너무 과중하고 장수의 명령이 너무도 혹독하여 그 노고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빼어 도망쳐 왔습니다. 우리(5명) 외에도 귀순하려는 자가 많습니다.

계속 유인하면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형세는 자연히 고단해질 것입니다.

이들은 특히 “요즘 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사졸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군졸이 하루에 100명에 이른다”고 알렸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즉 “1596년 7월 이순신 진영에 왜인이 5명 항복했는데, 투항이유가 ‘장수가 너무 포악했고, 그 역도 과중했기 때문(將倭性惡 役且煩重)”이라 했다.     

 

■"항왜들이 조선인보다 더 용감하다"

항복한 왜인들을 후대한 조선조정의 ‘항왜 정책’도 한몫 단단히 했다.

조선조정은 투항하는 왜적에게 첨지(정3품 무관), 동지(삼군부의 종2품) 등의 고위관직을 내렸다.
처음엔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왜병들이란 교활하여 믿을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을 먹일 식량 또한 여의치 않다”는 의견들도 많았다.

그러나 경상우병사 김응서 등은 매우 긍정적으로 항왜를 바라보았고, 무엇보다 선조 임금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단적인 예로 선조는 1595년(선조 28년) 승정원에 “왜병의 항복을 적극 유치하라”면서 “그들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줘라”는 명을 내린다.


명나라 제독 마귀의 초상.

마귀는 왜군으로 변장하여 왜군과 싸운 항왜 여여문을 죽이고 말았다.

당시 여여문은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었는데, 마귀가 왜군인줄 착각하고 여여문을 죽였다.

그러나 마귀가 공을 가로채려 했는지도 모른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항왜를 유인하는 일은 손해될 게 없다. 다방면으로 환대하고 상을 주어 투항을 유도하라. 그 중에 검술을 할 줄 알거나 병기를 잘 만들거나 하는 자를 꾀어내면 파격적인 상을 내려야 한다. 비변사에 일러라.”(<선조실록>)


심지어 선조는 “(항왜 유치를 반대한 신료들에게) 자네들 말처럼 항왜가 적과 내응하여 끌어들였느냐. 어디 말들좀 해보라”고 다그쳤다.
“자네들은 투항한 왜병들을 의심하고 그들을 대접해준다고 불평해왔다. 원래 과인이 항왜들을 많이 유치하려 했지만 자네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가. 지금 항왜들만이 충성을 제대로 바치고 있다.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죽을 힘을 다해 적병을 죽이고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운다.

이들에게는 모두 당상관(정3품 이상)의 직책을 내리고, 은(銀)을 상급으로 하사하라.”(<선조실록> 1597년 8월)    
선조는 “항왜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질타하고 있다.

 

■항왜의 으뜸은 누구?

그렇다면 선조의 말마따나 ‘제 몸 돌보지 않고 싸운 항왜들’은 과연 누구인가. 
실록(선조실록)에 등장하는 이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바로 여여문(呂汝文)일 것이다.
사실 여여문이 어떤 경로로 항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1595년(선조 28년) 6월19일 <선조실록>을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인다.
“과인이 항왜(降倭·항복한 왜인) 여여문을 각별히 후대하라고 전날에 전교하였는데 실행하는지 모르겠다.

요사이 듣건대, 이 자가 병이 났다가 차도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보통 왜인이 아니다. 대우를 후하게 하지 않아선 안 된다.”
그런데 훈련도감은 선조의 특명에 따라 “여여문은 집중치료를 통해 회복됐지만 주상의 하교대로 특별히 더 후대하겠다”고 보고했다.

심상치않은 기사임을 알 수 있다.

그저 왜적 가운데 항복한 자일뿐인데 왜 선조임금이 나서서 “후대하라”는 특명을 내린 것도 모자라 “그 자의 병에 차도가 있는지 알아보라”고까지 했을까. 훈련도감은 왜 고분고분 선조의 명을 받들어 여여문의 건강상태까지 다시 체크했을까.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초장. 포악한 성정으로 악명을 떨친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서 유독 항왜가 많았다.

 

■"저를 전쟁터로 보내주세요."

여여문이 조선에 매우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슨 역할이었을까.

<선조실록>에 여여문의 임무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즉 훈련도감이 이른바 아동대(兒童隊)를 선발하여 검술을 익히게 하고 사수를 양성하게 하는데, 그 책임자를 여여문에게 맡겼다.
“(여여문이 훈련시킨) 아동대 인원들을 어제 모아놓고 시험을 치렀는데 50여명 중 합격자가 19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음식을 상급으로 주었습니다. 여여문에게 아동대를 전적으로 맡겨….”
이뿐이 아니었다.

조선은 여여문으로부터 일본군의 진법과 전술을 전수받았다. 이것은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울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여여문이 일러준 왜군의 전법은 매우 상세했다.(<선조실록> 1596년 2월17일)
“왜군은 깃대를 진 군사는 양쪽으로 에워싸고 나아가 좌우의 복병과 함께 적의 후미를 포위합니다. 싸우면서 흩어질 때 많은 복병을 좌우에 배치하고, 조총과 창검으로 각각 하나의 부대를 삼아 숲속에 흩어져 매복하기를 마치 새와 짐승이 은복하듯 합니다.”
특히 여여문의 말대로 “쳐들어올 때는 반드시 소수의 군사로 유인하여 적이 매복한 곳에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잇따라 일어나 공격한다”는 왜군의 전법은 칠천량 해전에서 입증되었다. 이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전법이 말려 단 12척의 전선만 남긴채 사실상 전멸했던 것이다.
여여문은 전쟁터로 달려가 한목숨 바칠 각오가 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제가 현장으로 내려가서 산성을 다시 쌓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아니면 저를 요해처로 보내주십시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1597년 1월4일 <선조실록>)


■뼛속까지 조선인

여여문은 “후한 이익을 좋아하는 일본인을 유인하기는 쉽다”면서 “일본군을 꾀어 적장을 모살하도록 계획을 세우면 아마도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책을 올렸다.

과감하게도 ‘적을 이용한 적장 모살 작전’을 아뢴 것이다.

여여문은 이때 조선을 ‘우리(我) 조선’이라고 표현했다. 여여문은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한갓 계획만 세우고 의논만 많지만 실행은 적습니다. 날짜만 기다린다면….”
‘항왜’ 여여문이 ‘우리 조선’ 운운하면서 계책을 논하고, 조선군의 약점을 설파했을 때 선조 임금의 반응은 어땠을까. “부끄럽다”는 반성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시행하라. 여여문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일이 부끄럽기도 하다.”
이 뿐이 아니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년) 5월17일 여여문은 적진에 정탐꾼으로 밀파되어 왜군의 정세를 상세히 보고하는 임무를 맡는다.
즉 명나라군 총사령관(경리) 양호가 귀순왜인 여여문을 적진에 보내 초탐했다. 여여문은 머리를 깎고 왜인의 옷을 갈아입고 적진에 잠입했다. 여여문은 울산, 즉 성황당·도산·태화강 등 3곳의 적병숫자를 파악해서 손수 형세도를 그린 뒤 빠져나왔다.


항왜 여여문의 적정탐지 보고서를 극찬하고 상급을 내린 명나라 경리 양호를 위한 공덕비.|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억울한 죽음

여여문의 형세도를 본 명나라군 양호 총사령관은 크게 기뻐하면서 은 10냥을 내려주었다.

물론 여여문의 형세도 대로 작전을 짰다. 명나라군의 마귀 제독이 군사를 일으키자 여여문을 다시 적진에 침투시켰다.

여여문은 전투가 벌어지자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어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마귀 제독이 여여문을 죽이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왜적의 수급마저 다 빼앗았다.

실수였는지, 공을 가로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선조실록>은 1598년(선조 31년) 3월 27일 여여문의 죽음을 알리면서 “여여문이 베어낸 왜적의 4수급을 마귀가 빼앗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들이 많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여문 말고도 소운대(小云大)라는 항왜 역시 아군을 위해 공을 세웠고, 왜적을 여러 명 유인했다”고 기록했다.
여여문이 죽은 지 두 달이 지난 1598년(선조 31년) 5월 17일 우의정 이덕형은 항왜 여여문의 공적을 일거한 뒤 반드시 상급을 내려야 한다고는 주청을 올린다.
“여여문은 임진란 이후로 종군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처자식도 모두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가상한 일입니다. 여여문을 논상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의리 지킨 사백구

여여문만 있는게 아니었다.

1597년(선조 30년) 9월8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사백구라는 항복한 왜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공적이 눈물겹다.
즉 항왜에 지극히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선조 임금에게 사백구의 포상을 건의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다.
“금년(1597년) 3월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사백구라는 왜인이 투항했는데, 지성으로 왜병을 토벌하는 것을 보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상급을 내려야 합니다.”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자.

김응서는 항복한 왜인 사백구에게 줄 상급이 없어 일단 김해부사 백사림에게 보냈다. 마침 일본군이 경상도 함양의 황석산성을 공격했다.

이때 김해부사 백사림도 출전했는데, 사백구 또한 전장에 나섰다. 사백구의 활약은 남달랐다.

조총으로 왜병을 4명이나 쏘아죽였다.

하지만 황석산성은 함락되었고, 살이 쪄서 거동이 불편했던 백사림은 꼼짝없이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이때 사백구가 왜병 흉내를 내어 백사림 가족을 성밖으로 탈출시켰다.

사백구는 백사림을 산속에 숨겨놓고는 왜병이 점령한 산성으로 숨어들어갔다.

백사림은 사백구가 자신의 위치를 왜적에게 알려 공을 세우려는 줄 알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사백구는 의리를 지켰다.

성안으로 들어가 왜병들에게 “먹을 것 좀 달라”고 해서 쌀 한말과 간장, 무우, 옷가지 등을 구해왔다.

백사림은 사백구가 배신할 까 두려워 몸을 잠시 피해있었다.

사백구는 백사림이 보이지 않자 발을 구르고 ‘어디 갔느냐’고 불러댔다.

백사림이 겨우 몸을 드러내자 사백구는 백사림의 허리를 끌어안고 “대체 어디 갔다가 왔느냐”고 반가워했다.

백사림 가족은 사백구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사백구는 부사 백사림에게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 백사림이 밥을 다 먹은 뒤에야 수저를 들었다.
사백구와 백사림의 일화를 전하던 김응서의 한탄이 심금을 울린다.
“조선의 유식한 무리도 처자식을 구제하지 못하는데, 무식한 오랑캐 무리의 지성이 사백구와 같으니 사람으로써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백구에게 상급을 내려 위로하소서. 그리고 사백구에게 성씨를 하사하여 조선 사람으로 영원히 살도록 하소서.”(<선조실록>)


김충선(사야가)의 <모하당 문집>. 김충선은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서 살려고 귀화했다는 뜻을 밝혔다.

 

■준사, 사고여무, 요질기, 손시로, 연시로… 

여여문과 사백구 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서 한몫 단단히 한 준사(俊沙)라는 항왜도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이 배로 일본 수군을 격파할 때 장군의 배에는 안골포에서 투항한 항왜 준사가 타고 있었다.

준사는 바다에 빠진 왜군들을 내려다 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지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마다시의 목을 내다걸어 왜적의 사기를 꺾었다.

준사가 지목한 마다시는 왜장인 구루시마 마치후사(來島通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597년(선조 30년) 11월 벌어진 정진 전투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이 컸다.
전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즉 일본군 1만명이 전라도 운봉에서 경상도 함양으로 들어와 진격한다는 소식에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반격전에는 명나라군 수십명과 전 현감 이정의 군대, 그리고 항왜들이 합세했다. 아군은 이때 왜군의 포위에 말렸지만 항왜의 맹활약으로 사지를 겨우 탈출했다.

당시 권율 도원수의 장계는 이 전투에서 활약한 항왜들의 이름과 벼슬명, 공적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왜적 70명을 죽였습니다. 검첨지(정3품 무관) 사고여무는 왜적의 목을 두 급, 동지(종 2품) 요질기와 첨지 사야가(훗날 김충선)와 염지는 각 한 급씩을 베었습니다. 항왜 손시로는 탄환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며, 항왜 연시로는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왜기와 창, 칼, 조총 등을 노획했고, 우리나라 포로 100여명을 빼앗았습니다.”


사고여무, 요질기, 사야가, 염지, 손시로, 연시로 등 항왜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들에게 첨지와 동지 같은 고위직의 벼슬을 내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1597년(선조 30년) 남원성 전투에도 ‘남원 주변의 부녀자는 물론 항왜들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다.(<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9월21일 경상도 상주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던 왜병의 후미를 공격한 조선군 중에는 산록고, 사고소 등 항왜가 15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1597년(선조 30년) 2월 김응서의 가덕도 싸움과. 1598년(선조 31년) 10월 사천 싸움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상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첨지 기오비기와 동지 사기소 등은 1598년 4월 거창의 왜인 17명을 유인한 공로로 두둑한 상급을 받았다.

항왜들은 여여문이 보여줬듯 적정탐지에 결정적인 역할도 했다.

1595년(선조 28년) 항복한 조사랑과 노고여문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사들을 조선에 출병시키려 하지만 서로 미루고 심지어는 자중지란까지 일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특히 “일본군 중 대마도주가 주둔하고 있는 제포와 죽도·동래 등의 군영이 허술한 것 같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울산왜성전투. 조명연합군이 울산왜성에 주둔한 일본군을 에워쌓다.


■가토 기요마사 암살작전

항왜 가운데는 적장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계획을 구체적으로 모의한 사실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1595년(선조 28년) 2월29일 경상좌병사 고언백이 병사들과 무술을 겨루고 있을 때 항왜 주질지와 학사이가 쫓아왔다. 두사람이 은밀하게 고한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우린 본국(일본)을 등졌으니 우린 이미 조선시람입니다. 조선인으로 밥도 먹고 옷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적의 괴수(가토 기요마사)를 베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암살계획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청정(가토)은 다른 장수와 만날 때 거느리는 군사가 10여인에 불과합니다. 매번 단기필마로 와서 술을 마시고 돌아갑니다. 사냥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이때 일본인 중 내응하고 있는 자와 살해를 도모한다면 손바닥 뒤집듯 쉬울 것입니다. 사또(고언백)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고언백이 이들의 말을 믿지 않자 더욱 치밀한 계획까지 일러주었다.
“사또가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항복한 구질기의 종형(고로비)가 청정(가토)의 가장 가까운 군관으로 있습니다. 고로비 또한 조선 진영으로 귀순하려 합니다. 그 사람과 내응하면 성사될 겁니다.”
하지만 이 가토 암살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명나라와 왜와의 강화 계획이 틀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고언백은 왜군진영의 내응자인 고로비에게 “강화교섭을 위해 명나라 사신이 내려올 것이니 (가토의 암살계획은) 없었던 일로 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그러나 고로비는 “일본이 명나라와 강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크게 화를 냈다. 고언백은 혹여 고로비가 경거망동하여 가토 기요마사 암살계획을 실행할까봐 전전긍긍 했다. 화해분위기를 망칠까봐 두려워 한 것이다.(<선조실록> 1595년 3월24일) 

 

■김귀순, 김향의, 이귀명…

조선에 귀화하거나 항복한 일본인들은 전투와 정탐 외에도 기술전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선은 항왜들에게 총검을 주조하고 염초를 굽는 방법을 배웠다. 조총의 사격술과 검술도 익혔다. “항복한 왜인을 죽여봐야 무슨 이익이냐. 염초 굽는 법을 배우는 편이 낫다”는 선조의 언급(1593년)이 이를 뒷받침한다. 선조는 “왜적이라 하여 그 기술을 싫어하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적국의 기술이 곧 우리의 기술이다”라 강조했다.(1594년 7월) 이렇게 적극적인 ‘항왜 유치 정책’이 주효했던 것일까.
1597년(선조 30년) 1월 “김응서 휘화의 항왜 중 조총 기술자가 많으니 상경시켜 배우자”는 건의에 선조는 자신있게 밝힌다.
“이제 조선에도 조총을 잘 만드는 자가 많다. 상경시킬 필요가 없다.”
항왜 가운데는 김충선 뿐 아니라 김귀순, 김향의, 이귀명처럼 조선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이들도 있었다. 여여문이나 사백구 처럼 그나마 실록에 이름자를 남긴 이들은 다행이다. 그러나 1만명에 달한다는 항왜들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뒤늦게 나마 그들을 위한 진혼곡을 불러본다. (이 기사는 ‘한문종의 <조선전기 향화·수직 왜인 연구>, 국학자료원, 2001’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참고자료>
한문종, ‘임진왜란시의 항왜장 심충선과 모하당문집’, <한일관계사연구> 제24호, 한일관계사학회, 2006
         <조선전시 향화·수직 왜인 연구>, 국학자료원, 2001 
         ‘임진란 시기 항왜의 투항 배경과 역할’, <인문과학연구> 제36권 36호,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2013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항왜의 유치와 활용’, <역사와 세계> 제32권, 효원사학회, 2007
이장희, ‘임란시 투항왜병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제6권 6호, 한국사학회, 1971


출처: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2018.02.22  


[명사 70인과의 동행] ㆍ이순원 작가와 대관령 옛길·오죽헌·경포대

<은비령> <길 위에 쓴 편지> 등 오래전 출간된 이순원 작가의 책을 가슴에 품고 온 팬도 있었다.
이번 ‘동행’의 행선지는 이 작가의 고향이자 그의 문학적 보고(寶庫)인 강원도 강릉 일대였다.
대관령 옛길에서 시작해 사임당 사친시비(思親詩碑)와 오죽헌을 거쳐 경포대에서 끝나는 일정으로 짜여졌다.
버스에 오르자 이 작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오늘 여러분이 걷게 될 대관령 옛길은 우리나라 옛길의 가장 대표적인 길입니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관령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청산유수 같은 달변에 버스에 동승한 길벗들의 귀가 쫑긋했다.
학생이 교사에게 질문하듯 궁금증이 이는 즉시 문답이 오갔다.
이런 모습은 이날 프로그램이 모두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이 작가에 따르면 우리나라 옛길은 모두 사라졌다.
과거 지게를 지고 겨우 다닐 수 있던 좁은 흙길은 정비를 통해 지금은 대부분 자동차가 오갈 수 있는 넓은 포장길이 됐다.
이 작가는 “거의 유일하게 훼손 없이 보존된 길이 대관령 옛길”이라며 “이 길은 우리 선조들이 한양과 강릉을 오가던 길”이라고 설명했다.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걸었고, 율곡의 친구 송강 정철도 이 길을 걷고 ‘관동별곡’을 썼다.
김홍도는 이 길의 중턱에서 대관령의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총 길이가 14㎞인 대관령 옛길은 대관령 하행휴게소-풍해조림지국사성황당-반정-옛주막터-대관령박물관-어흘리-보광리 자동차마을로 이어진다.
이 작가가 2007년부터 3년간 강릉사람들과 함께 개척한 ‘강릉바우길’ 16개 트레킹 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옛길에 들어서니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을 만큼 길폭이 좁았다.
이 작가가 말했다.

 “여기 오면 부부 사이가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둘이 걸을 수 없으니 앞선 남편이 뒤따르는 아내가 걱정돼 자꾸 뒤를 돌아봐야 하고, 가파른 지점에선 손도 잡아줘야 하거든요.” 일행 모두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 작가는 물푸레나무 등 각종 식물들의 생태와 관리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옛길 초입에 범일국사를 모신 국사성황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무속인들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불단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과 징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고 있었다.
사당 안에선 두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서 무녀가 ‘공수’(신내림말)를 내렸다.
성황당 주변에서도 무녀 여럿이 제를 지내고 있었다.
국사성황당을 나와 오른쪽으로 접어드니 내리막 숲길이 이어졌다.
숲속은 온통 겹겹이 쌓인 갈색 낙엽밭이었다.
발밑에 전해지는 감촉은 ‘폭신폭신’했고 소리는 ‘바스락바스락’했다.
아늑하고 정겨운 감흥을 일으켰다.
참가자 중 누군가 먼저 읊고, 뒤따르는 이들이 따라 읊었다.

 “시몬, 나무 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프랑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대표 시 ‘낙엽’이다.

이 작가는 “구불구불한 이 숲길은 4계절이 다 좋다”며 “겨울엔 봅슬레이를 하듯 비료포대를 이용해 썰매를 타면서 스릴을 즐기는 젊은이도 많다”고 소개했다.
그렇게 2㎞를 걸으니 반정 전망대가 나왔다.
여기서 신사임당 사친시비를 만났다.
‘慈親鶴髮在臨瀛(늙으신 어머니를 임영(강릉 옛 이름)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홀로 외로이 서울을 향하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돌아보니 북촌(오죽헌 마을)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사친시비는 신사임당이 38세에 강릉 친정에서 머물다가 시댁으로 돌아가던 중 대관령 중턱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이 새겨진 비석이다.
이 작가는 신사임당(1504~1551)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문헌에도 사임당의 이름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아들 율곡이 쓴 어머니의 행장에도 ‘자당의 휘는 모(某)로 신공의 둘째 딸’이라고만 적었고요.
그럼에도 현대의 많은 자료에 사임당의 본명이 신인선(申仁善)으로 나와 있습니다.
정말 코미디 같은 일이죠.
1990년 출간된 어느 동화에 사임당의 어린 시절 이름을 ‘인선’이라고 쓴 게 시초였습니다.
연이어 나온 문학작품 속에서 작가들이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 결과 어느 백과사전에까지 사임당의 이름을 신인선으로 등재했습니다.
지금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TV와 한국사를 강의하는 역사학 전공자들까지도 그대로 베껴 방송하고 강의하고 있으니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작가는 “사임당을 자식교육에 성공한 어머니로 강조하면서 그가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는 사실이 의도적으로 간과돼 왔다”고 지적했다.
“사임당이 48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식 7명 가운데 학문으로 결실을 보여준 것은 율곡이 유일했습니다.
그것도 13세 때 처음 치른 진사시험 초시에서 장원을 한 것이 전부였죠.
나머지 자식들은 대과는 고사하고 소과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사임당이 그토록 뒷바라지한 남편 이원수도 소과 초시에도 오르지 못했고요.
당초 사임당은 조선 전기 최고 화가인 안견 다음가는 화가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4번의 전란을 거친 다음 100년 후 이 땅의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의도적으로 화가로서의 업적은 무시됐습니다.
율곡과 같은 대유학자를 낳은 오로지 현숙한 부인으로만 이미지 메이킹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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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행선지인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곳이다.
오죽헌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주거용 주택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물 제165호로 지정돼 있다.
온돌방과 툇마루로 이뤄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순한 일(一)자형 집으로, 본살림채는 아니고 별당 건물이다.
본채는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죽헌이라는 이름은 집 뒤뜰에 색이 검은 어른 손가락만 한 굵기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붙여졌다.

오죽헌은 원래 사임당 어머니의 외할아버지인 최응현의 집이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둘째 사위인 이사온(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에게 상속됐고, 역시 슬하에 딸밖에 없었던 이사온이 용인 이씨(신사임당의 어머니)에게 물려주었다.
이 작가는 오죽헌의 지붕과 처마, 대청, 기둥 등 건축양식에 대해 세세히 설명했다.
박정희 정부는 현충사 성역화 작업(1967년)에 이어 1975년 오죽헌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벌였다.
이때 율곡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비롯해 자경문, 율곡기념관 등이 신축됐다.

웅장해졌지만 관제 냄새가 짙다.
이날 ‘동행’에 아내와 함께 참가한 이성배씨(54)는 “어린 시절 수학여행을 왔을 때 본 모습이 아니라 가공돼 있고, 많은 건물들이 상업적이거나 또 다른 목적으로 들어서 있다. 우리 선조들의 사상이나 철학이 많이 훼손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김정숙씨도 “오죽헌 하나만 있던 시절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이런저런 건물들이 들어서고 멋을 내면서 오히려 오죽헌의 운치와 가치를 떨어뜨렸다”고 했다.
이 작가를 비롯한 여러 참가자들이 이들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행은 다소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오죽헌에서 버스로 5분 거리인 경포대로 향했다.
모래 같은 퇴적물이 만(灣)의 한쪽 입구를 막으면서 바다가 호수가 된 경포호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충숙왕 13년(1326년)에 지어졌고 조선 중종 3년에 현 위치로 이전했다. 강원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돼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호수의 풍광은 관동팔경에 속할 만큼 빼어나다.
이 작가는 일행에게 “달이 모두 몇 개인 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누군가 “다섯 개”라고 답했다. 이 작가는 “맞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 경포호수에 비친 달, 바다에 비친 달, 술잔에 비친 달, 그리고 연인의 눈에 비친 달, 경포대에선 이렇게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경포대엔 숙종이 직접 지은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해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중 하나가 문설주 윗부분에 걸린, 율곡이 10살 때 지었다고 전해지는 장편시 ‘경포대부(鏡浦臺賦)’다.

이 작가는 “율곡은 8살에 이미 화석정(경기도 파주)에서 팔세부시(八歲賦時)를 지었다”며 율곡의 천재성을 설명했다.
이날 ‘동행’은 경포대 바닷가에서 단체로 사진촬영을 하는 것으로 끝났다.
참가자들은 “이순원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역사 현장을 답사해 유익하고 감동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일행을 실은 버스는 서울로 향했다.
모두의 눈이 100만명이 모인 광화문 집회 현장을 생중계하는 버스 앞쪽의 TV에 쏠렸다.
오후 9시.

집회로 인해 출발지인 시청역으로 가지 못한 버스는 양재역에 일행을 모두 내려놓았다.
이 작가를 비롯한 몇몇이 “늦었지만 광화문에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동행’의 시작이었다.

참가자들이 12일 강원 강릉 대관령 옛길을 걷고 있다.
대부분의 좁은 흙길이 넓은 포장길로 정비된 오늘날 거의 유일하게 훼손 없이 보존된 이 옛길은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출처: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2016.11.18   

  
 






TV사극 드라마를 즐겨보는 기자는 시대 배경에 주목한다.

대본을 쓰는 작가가 어떤 왕조, 어떤 소재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려 하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최근 종영한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는 1000여 년 전인 고려 초기를 배경으로 구중궁궐의 권력다툼과 남녀간의 애정을 다루고 있는 판타지성 역사 드라마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광종(재위 949-975년)과 성종(재위 981-997년)은 고려를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 정비한 업적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성종은 태조 왕건의 유훈을 받들어 북방지역 확보에 힘을 쏟았다.

성종은 거란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서희를 내세워 외교담판으로 오히려 강동6주를 되찾는 등 상당한 치적을 쌓았다.

드라마는 조선왕조에 비해 덜 주목받던 고려시대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신선했지만, 북방 지역 진출에 관심이 많은 요즘의 우리 정서를 드라마에 녹이지 못해 시청률이 그리 높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사실 고려 성종 관련 이야기는 한국 역사학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중요하다.

'고려사'에서 전하는 성종 관련 기록에 역사 상식과 맞지 않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990년 7월에 내린 성종의 교서(敎書)다.

"태조(왕건)께서 처음 서경(西京)을 설치하고 종실의 친족을 선발해 인후지지(咽喉之地·매우 중요한 길목)를 지키게 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친히 재계하여 제사를 지내고, 오랑캐를 방어해 변방의 국경을 견고하게 했고, 웅도(雄都) 평양(平壤)에 의지하여 우리 조종의 왕업을 공고히 하려 했다.

그 후 성군들께서 왕위를 계승한 후 사직이 안정됨에 따라 때로는 전해온 관례에 따라 직접 서경에 가기도 했고 때로는 신하를 시켜 가보도록 했다. 올해 풍년이 들어 곡식이 잘 여물었으니 10월을 택해 요성(遼城)에 찾아가 선조들께서 정하신 규범을 실행하고 국가의 새로운 법력을 펴고자 한다."

실제로 성종은 이 교서를 내린 후 그해(990년) 10월 서경 즉, 서도(西都)로 행차했다.

또 서경 행차 기념으로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포상까지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설치한 서경을 '웅도 평양' '요성' '서도'라고도 부르는데 이곳들이 같은 곳이냐 하는 것이다.

왕건은 서경을 고려의 수도 개경 못지않게 중시했다.

그는 유훈으로 남긴 훈요10조에서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롭고,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마땅히 행차하여 나라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고려사’ 지리지를 참고로 한 고려의 북방 영역

학계의 일반적 정설은 고려의 서경은 지금의 북한 대동강가 평양 일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쪽 평양이 곧 요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요성은 중국 쪽에서도 중국 랴오닝(遼寧) 성 랴오양(遼陽)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곳이다.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성종은 왕건이 요양에 세운 서경을 방문했다고 봐야 한다.

이 이상한 교서를 보면서 기자는 '고려사'의 기록이 오기(誤記)이려니 하고 찜찜하게 넘어갔다. 

그러다 최근 고려사를 연구하는 윤한택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를 만나게 됐다.

윤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경제의 물적 기반인 토지 제도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 고려대 대학원으로 진학해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고려전기 사전(私田)연구'라는 박사 논문은 한국 고대 토지 문제 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 성종 관련 기록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990년 성종이 행차한 서경은 평양 웅도, 요성이라고 불린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성은 요동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고요.

성종보다 앞서 고려 광종 때인 972년에 고승 영준(英俊)이 중국에 갔다가 고려로 돌아온 것을 '요성으로 돌아왔다(鶴返遼城)'고 표현하고 있습니다(英俊碑). 이로 보면 요성, 곧 고려의 서경이 요동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강단에 서는 정통 사학자의 발언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사료를 근거로 더 충격적인 말도 했다. 

"'고려사' 열전 홍유(洪儒)편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배현경, 신숭겸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던 918년 6월 14일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삼한(三韓)이 분열한 이후 도적의 무리가 다투어 일어나니, 궁예가 어깨를 용감하게 떨치고 크게 소리치며, 드디어 초적을 토벌하고 셋으로 나누어진 요좌(遼左)의 과반을 근거로 하여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였다'고 합니다.

즉 후삼국의 주인공 중 한 축인 궁예가 근거한 곳이 요좌인데, 이곳 역시 중국 요동(遼東)지역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큽니다."

궁예가 나라를 세우고 정한 도읍지가 한반도의 철원 지역이었다는 일반적인 역사 상식과는 동떨어진 말이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요좌'가 중국 북방지역임은 확실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투쟁을 한 장석영(1851~1929년)이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를 답사한 내용을 수록한 책을 '요좌기행(遼左紀行)'이라고 명명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옛 문헌에 등장하는 방위 개념으로서의 왼 좌(左)는 동(東)쪽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요좌는 곧 요동의 이칭(異稱)이기도 하다. 

윤 교수는 이제 고려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토지사를 전공했던 그가 지금에 와서야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저는 지금까지 전정(田丁)→사전(私田)→양반전(兩班田)→가령지(家領地)로 이어지는 고려 토지제도의 구조를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가문이 영유하는 토지가 가령지라면, 국가가 영유하는 토지가 '영토(領土)'입니다.

경제사적 관점에서 고려의 토지 문제를 연구하다보니 영토 문제까지 연구하게 됐고, 고려국 영토의 범위를 추적하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윤 교수는 최근 '고려국 북계(北界) 봉강(封疆)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이런 연구 결과를 일부 발표한 바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려사는 영토적 관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간 사학계는 이처럼 중차대한 역사적 기록을 단순히 간과한 것일까.

"우리 학계가 서경을 북한 쪽 평양이라고 일찌감치 규정한 이후 이에 대한 엄밀한 고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고려가 지목한 서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지역만을 의미하지는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가 설치한 서경은 '평양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라는 이름으로 최소한 성종 14년(995년)까지는 요동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서경유수(西京留守)라는 이름으로 성종 이후 원종 11년(1270년)까지 운영됐고, 원종 이후 충선왕 즉위(1298년) 때까지는 '동령부'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평양부'라는 이름으로 운영됐습니다.

문제는 이름이 바뀌는 어느 시기부터 서경이 한반도 평양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처음으로 태조가 설치한 평양대도호부는 약 80년간 중국의 요좌 지역에 있었음은 분명해보이고요."

윤 교수는 이와 관련한 연구를 한창 진행 중에 있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윤 교수의 해석을 토대로 성종 관련 기록이 오기(誤記)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윤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조선사'를 연구 중입니다. 고려 국경을 중심으로 해서 '조선사'가 기술한 내용들만 살펴보더라도 일제 학자들이 고의적으로 누락하거나 왜곡한 사례가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우리가 광복 이후 일제의 한국 관련 연구 결과를 너무 비판 없이 수용한 것은 아닌지요."

옛 고구려 및 고려 강역이었던 랴오닝성 의무려산의 성터를 답사한 윤한택 교수.


출처:동아일보 2016.11.09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책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왕실의 제사 종류·음식 등 분석
새벽 2시쯤 시작해 아침에야 끝나…

신하들 졸거나 하품했다는 기록도

"예전에 들으니 제사를 지낼 때 여러 집사들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비스듬히 서 있는가 하면 심한 경우에는 간혹 졸고 있는 것을 남이 깨우기까지 한다고 하였다.
이번에는 일찌감치 자리에 들어 편안한 마음으로 쉴 것이며 일을 수행할 때는 정신을 가다듬어 삼가 태만하고 게을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1791년 4월 정조(正祖)가 종묘 제례에 참여하는 신하들에게 정성과 경건함을 당부하며 했던 말이다.
국가에서 드리는 제사인 제향(祭享)은 주로 밤에 드렸다.
새벽 2시쯤 시작하면 오전 7시나 9시쯤 되어서야 끝났다.
한밤에 신하들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거나 졸다가 들켜서 민망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욱(52)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장서각 연구원은 조선 왕실에서 드렸던 제사의 횟수와 종류, 제사상의 음식을 상세히 분석한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한중연 출판부)을 최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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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종묘대제로도 불린다.
정조 때 편찬된 편람(便覽)에 따르면 당시 한 해 거행하는 제사는 347건에 이르렀다.
1년 내내 제사를 드렸다는 얘기다.
왕릉에서 거행하는 횟수가 165건(47%)으로 가장 많았다.

종묘(宗廟)·사직(社稷) 등에서 거행하는 제사는 17건, 선농단·선잠단 등에서 지내는 제사는 12건이었다.
이 연구원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릉 숫자가 많지 않아서 제사 횟수도 적었지만, 왕조 역사가 길어지면서 왕릉 숫자도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제사 횟수도 증가했다"고 말했다.
종묘 제례를 거행할 때 선왕의 위(位)에 올리는 제사 음식의 가짓수는 43종에 달했다.
여기에 왕비가 있으면 13종이 늘어나 전체 56종이 됐다.
다시 장가를 들어서 계비(繼妃)가 있으면 다시 13종을 추가해 69종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선조 때는 종묘 제례를 지내면 소 한 마리를 잡았지만 숙종 때는 소 두 마리,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는 소 네 마리까지 늘었다.
종묘 제례에 쓰이는 떡을 준비하기 위해 이틀 전부터 숙수(熟手)들이 쌀을 씻고 절구에 찧고 시루에 쪄서 떡을 만들었다.
이 연구원은 "제사에서 음식은 신을 부르는 매개물이기 때문에 제사 준비의 대부분은 제물(祭物)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설날이나 한식 같은 명절에 제사를 지내면 관리들이 대거 차출됐다.
1796년 한식날 왕릉이나 궁묘(宮廟)에 파견되는 전체 제관(祭官)은 185명에 이르렀다.
차출 숫자가 커지자 제관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다.
60세 이상 나이 든 관원이나 무신(武臣)을 차출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 연구원은 "제사 횟수가 증가하면서 관리들이 제관으로 차출되는 것을 꺼렸고 제사의 권위가 떨어지는 부작용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정조는 종묘 제향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보조자를 늘리고, 제사를 집행하는 집사자(執事者)의 동선을 줄이는 개혁 조치에 착수했다.
소·돼지·양의 삶은 고기도 각기 나눠서 올리던 것을 큰 상자에 한꺼번에 담아 올리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 연구원은 "제사라는 형식을 유지하면서 신하들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점에서 조선 왕실의 제사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의식이었다"고 말했다..

출처:조선일보 2016.02.05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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