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011년, 2012년 하는 식으로 그레고리력(Gregory曆), 그러니까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부활절 조정을 위해 만들어진 서양 역법을 사용하는 우리는 이미 간지(干支)로 해를 세는 방식을 잊었지만, 올해가 임진왜란 7갑자(甲子) 되는 해다.

 

1976년, 독립 200주년을 뻑적지근하게 기념하던 미국인과는 달리, 1392년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필시 건국 200주년이 되는 1592년에 기념식을 생각하지 않았을 터이다.

기념식이 별로 없는 문화 탓이기도 했지만 3갑자, 4갑자가 더 기억할만한 시간 단위였을 것이다.

 

 

기억의 수정

올해 7갑자를 맞은 임진왜란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 연간(재위 1567~1608)에 일어났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은 바로 선조 연간에 일어난 사실과 정치활동에 대한 기록을 편찬한 것이다.

편찬은 선조 다음 임금인 광해군대에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으로부터 '철종대왕실록(哲宗大王實錄)'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의 실록 28종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다.
25대 왕인데 28종인 이유는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가 더해지고 중간에 개수된 실록이 3종 포함된 데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편찬 주체가 일제였고 사료에 비판의 여지가 많아 '조선실록'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록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기획해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대 조정에서 사관이 기록하거나 모아놓은 문서, 즉 사초(史草)를 국왕이 바뀔 때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편찬한 '문서 모음'의 성격을 띤다.


선조실록은 그 기록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 때문에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는데, 이는 조선시대 최초의 실록 수정이었고, 이후 실록이 개수(改修) 또는 수정(修正)되는 전례가 됨과 동시에, 수정 또는 개수에도 불구하고 원래 실록과 수정 실록을 모두 남기는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전통을 남겨줬다.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편찬의 시작
광해군 즉위년 9월,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는 관청인 춘추관(春秋館)에서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선왕조의 '실록'은 졸곡(卒哭·상례에서 삼우가 지난 뒤 3개월 안에 강일에 지내는 제사) 뒤에 곧바로 사국(史局)을 설치해 편찬해 내어야 하는데, 평시의 사책(史冊)이 모조리 없어져서 남은 것이 없으므로 망연해 근거할만한 것이 없으니, 지극히 민망스럽고 걱정됩니다.

그러나 막중한 일을 도저히 그만둘 수 없으니 해조(該曹·담당 관청)에 당상 낭청을 차출하도록 해, 혹은 사대부가 듣고 본 것을 수집하고 혹은 개인이 수장한 일기를 모으기도 해, 여러 방면으로 헤아리고 조절해 편리하게 거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이때 광해군은 조사(詔使), 즉 중국 사신이 지나간 뒤에 사국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이미 말한 대로 실록은 졸곡이 끝나 임금이 정무를 시작하면서 바로 편찬에 들어가는 첫 사업이라는 것이다.
둘째, 실록 편찬은 역사를 담당하는 춘추관에서 발의하고, 임금은 그 발의에 따라 전교를 내린 뒤 임시 관청이 실록청을 춘추관에 설치하면서 시작된다.
셋째, 사책(史冊)이 모조리 없어져서 걱정이니, 사료를 수집해야 한다고 했다.
임진왜란. 7년간 진행된 침략전쟁. 선조 25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피란을 떠났다.
그 무렵 무력한 조정을 비판하듯 궁성에 불이 났다.
물론 그 틈에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을 훔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먼저 불탄 곳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였다.
두 곳의 관서에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문적(文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이 대목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뒤 역대 홍문관에 간직해둔 서적, 춘추관의 각조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 즉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가 불에 탔다.
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남김없이 불탔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그런데 탔을 뿐 아니라, 태우기도 했다.
한양을 버리고 파천(播遷)하는 와중에 역사기록들도 손상됐다.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이나 승정원 주서(注書)도 도망쳤기 때문이다.
사관 조존세(趙存世)와 김선여(金善餘), 주서 임취정(任就正)과 박정현(朴鼎賢) 등이다.


이들은 좌우 사관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면서 선조의 침문(寢門)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선조가 자식처럼 대우했다.
주서는 '승정원일기'의 작성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의논하자 사관들은 몰래 도망치기로 의견을 모으고 먼저 사초책(史草冊)을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어둠을 타고 도망했다.
선조가 길에서 자주 돌아보며 사관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모두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더니, 선조는 "김선여가 탄 말이 허약하더니 걸어서 오느라 뒤처졌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도망친 자의 승승장구
그러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들이 도망한 것을 알고는 선조도 말씨와 낯빛이 참담해졌다.
같이 가던 신하들은 모두 격분하며 "뒷날 상이 환국(還國)하시면 이 무리들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라고 했다 한다.
네 사람은 각각 영남과 호남으로 가서 가족을 찾았는데 고을 관아에서 먹을 것을 얻으면서 핑계 대기를 "상이 물러가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왔다"고 했다.
그 후 이들의 이름은 사간원의 요청에 따라 사판(仕版·관원 명단)에서 삭제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선조 32년(1599)에 조존세와 김선여는 다시 대교와 검열로 복직해 사관의 직무를 맡게 된다.
따라서 "상이 도성에 돌아온 뒤 네 사람이 돌아와 모였는데, 다시 이들을 사관으로 주의(注擬·후보로 올림)하자, 상은 '어찌 도망한 자들에게 다시 사필(史筆)을 잡게 할 수 있겠는가. 백집사(百執事·일반 관원)는 가하다'고 했고, 이 때문에 모두 외직(外職 ·지방 관직)에 벼슬했다"고 쓴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조금 부정확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조존세와 김선여는 지방 관직이 아니라 다시 사관으로 복직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의주로 파천했을 때 기록한 사초를 옮겨왔지만 춘추관에 보관한 채 관리를 하지 않아 수정하려고 했을 때, 선조가 조존세와 김선여는 사초를 버리고 도망친 자들이라며 수정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이산해(李山海)의 문하였다.


김선여는 김첨경(金添慶)의 아들로 가장 문망(文望)이 있었으며, 임취정은 임국로(任國老)의 아들이고, 박정현은 박계현(朴啓賢)의 종제(從弟)이고, 조존세는 조사수(趙士秀)의 손자로서 모두 대대로 벼슬한 명문이었다.


이렇게 임무를 방기했으니 명문이란 말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김선여는 그래도 벼슬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살다가 일찍 죽었지만, 조존세·임취정 등은 광해군 때 귀척(貴戚·귀한 인척)이라는 이유로 등용돼 대관(大官)이 됐다.
또한 조존세는 영창대군이 강화로 유배될 때 호송했던 의금부 당상관이었다.
계축옥사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영창대군을 압송했다는 것은 곧 광해군의 신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냈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우는 국립대학인데, 사초를 태우고 도망친 그가 국립대학 총장을 맡았으니 그 나머지는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
임취정은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승지·대사헌을 지냈고, 당초 이이첨의 세력이었으면서도 형인 임수정(任守正)의 첩 자식이 후궁으로 들어가 소용(昭容)이 된 뒤 총애가 날로 높아지자 나중에는 이이첨의 견제세력이 됐다.

박정현은 광해군 8년 강원도 감사까지 지냈다.

자료 다 모으라
광해군 원년(1609) 7월, 춘추관에서는 임진왜란 때문에 사초가 하나도 남은 게 없다고 보고했다.
이게 첫 번째 문제였다.
일단 고(故) 지사(知事) 유희춘(柳希春), 고 참판 이정형(李廷馨)이 기록한 개인의 일기가 다행히 춘추관(春秋館)에 보관돼 있었다.
유희춘은 '미암일기(眉巖日記)'로 잘 알려진 학자관료로, 선조 때 삼경(三經·시경 서경 주역)을 언해(諺解)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마저 소략했다.
실록청에서 행장(行狀·선조의 행장으로 추정)을 지을 때 그 일기를 확인했는데 이정형의 일기는 조보(朝報·요즘의 관보)에 나온 것 가운데 일부 내용만을 기록한 것으로 15, 16년 전에 기록한 것이 단지 1권뿐이었고, 유희춘의 일기는 1년에 한두 달의 사건만 기록하고 다른 달의 사건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너무나 소략해 1만 분의 1도 고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임진년 이후의 사초를 토대로 편찬하되, 한편으로는 먼저 그 사초를 수정하고 한편으로는 여러모로 자료를 수집하기로 했다.
그래서 고 감사 배삼익(裵三益)의 집에 보관된 왜란 이전의 연도별 조보, 고 판서 이기(李·#54702;), 고 첨지(僉知) 이수준(李壽俊)의 집에 보관된 왜란 이전의 조보, 고 참의 유조인(柳祖?)의 집에 있던 임진년의 '행조일기(行朝日記·의주로 파천했을 때 조정의 일기)'를 가족에게 연락해 올려 보내라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전직 관료들이 가지고 있던 관보든 일기든 다 수집하는 셈이다.
이밖에 여염(閭閻)에 살고 있는 사대부 집에 가장일록(家藏日錄)이 있는지를 알아보아 가져오게 했다.
사관이나 겸춘추(兼春秋·사관을 겸직한 관리)를 지낸 사람은 집에 남겨둔 사초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가지고 있으면서도 즉시 내주지 않는 자에게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치죄(治罪)하게 하며, 고증할 만한 긴요한 문서에 대해서는 온 지방에 알려 사서인(士庶人)을 막론하고 스스로 바치는 자에게 특별히 상을 주도록 했다.
굳이 사초에 준하는 기록이 아니더라도 왜란 이전에 벼슬자리에 있던 사람이 각자 듣고 본 것을 평소 사관의 가장 일기처럼 기록해놓은 것이 있을 경우에는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바치게 해 취사선택할 수 있게 했다.

 

사대부의 문집 중에 비명(碑銘)·소(疏)·차(箚)의 내용이 시정(時政)에 관계돼 고증하고 채택할만한 것이 있으면 역시 모두 수집했다.

원래 실록을 편찬할 때 제출하게 돼 있는 겸춘추 및 이조의 비초(批草·인사기록 초본)는 당연히 내야 했다.
 
[참고]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우리가 소상히 알 수 있는 것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 때문이다.

의병 활동 기록도 선조수정실록에 많다.민간에 소장된 기록도 수집해야 했으니 각 관청 기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방 각 아문에 고증할만한 문서와 여러 도감(都監·국가 행사를 주관했던 임시 관청)의 '등록(謄錄)'과 '승정원일기' 전부 및 '승전단초책(承傳單抄冊)'과 연도별 소·차 및 관상감의 연도별 '역년기(曆年記)' 등을 모두 실어 보내도록 했다.


지방은 팔도 감사들에게 급히 하유(下諭·지방관리에게 서울로 가져올라오게 함)하고, 서울은 각 아문과 한성부(漢城府)의 오부(五部)가 책임지도록 했다.
광해군 원년 10월 일실된 사료를 모아 실록 편찬을 시작할 당시 총재관(總裁官)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었다.
그리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광해군 3년(1612) 11월에 대제학에 오르며 편찬에 참여하고, 이정구의 건의로 현헌(玄軒) 신흠(申欽·1566~1628)이 합류했으니 실록 편찬의 진용은 이항복-이정구-신흠이라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관료로 짜인 것이었다.

 

실록 편찬 라인
이런 인연 때문인지 이정구는 후일 이항복을 가리켜 "그가 관직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항복은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와 연루돼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한직인 중추부로 옮긴 후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를 반대하다 함경도 북청에 유배돼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이정구와 신흠 역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박응서 등의 역모사건과 이어진 김제남 옥사에 연루돼 파직됐지만 이정구는 광해군 13년 외교문서를 담당할 전문가가 없자 다시 등용됐고 춘천으로 유배를 갔던 신흠 역시 인조반정으로 조정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이항복-이정구-신흠으로 구성된 실록편찬 라인이 각종 사건으로 실각하자 이를 대체한 사람은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이이첨(李爾瞻·1560~1623)이었다.
그는 김제남 옥사의 와중이었던 광해군 5년 8월 예조판서 겸 대제학을 맡아 실록 편찬을 주도했다.

 

선조실록 완성
광해군 8년 11월 드디어 실록이 완성됐다.
통상 2~3년 안에 끝나던 편찬이 무려 10년 가까이 걸렸다.
선조실록은 실물 책제(冊題)에, '선종실록'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통상 '선조(宣祖)'라고 하지만, 선조의 묘호는 원래 '선종(宣宗)'이었다.
그러다가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李仁任)의 자손이라는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오기(誤記)를 바로잡은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극복을 이유로 '선조'로 바뀐 것이 광해군 8년 5월이었다.
이에 따라 실록 명칭도 '선조대왕실록'이 되어야 맞지만 그해 11월에 편찬된 실록에는 '선종대왕실록'으로 그대로 뒀다.

아마 5월 당시에 활자로 인쇄가 끝난 상태여서 굳이 수정하지 않고 놔둔 듯하다.

다시 찍으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록이 완성되면 편찬에 사용된 사초 등은 자하문 밖 세검정에서 물에 씻어 지운 다음 재생용지로 사용했다.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편찬에 참여한 신하들을 위로하는 잔치인 세초연을 여는 한편, 춘추관을 비롯한 각처의 지방 사고(史庫)에 실록을 봉안(奉安)한다.

'봉안'은 '받들어 모신다'는 뜻으로, 실록의 위상을 용어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선조실록'은 편찬에 참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고 광해군 10년 7월에 지방의 4개 사고에 봉안됐다.
그런데 '선조실록'은 편찬이 늦어진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실록의 내용,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선조실록'을 수정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졌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기에 수정 논의가 나온 것일까?
'선조실록'이 편찬된 뒤 광해군 때는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잠복해 있었을 뿐이고, 드러났다 해도 바로잡을 의지도 경황도 없었다.

 '선조실록'에 대한 수정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계해반정으로 정권이 인조로 바뀐 뒤의 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조실록'의 수정은 무엇보다 인상이 좋지 않다.

손을 댄 실록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거시적으로는 조선이 식민지로 귀결됐다는 역사적 현실, 미시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이후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맞물리면서 '선조실록'의 수정은 '선조(宣祖) 이래 격렬한 당쟁(黨爭)의 결과'라는 뻔한 해석에 그쳤다.

 

수정 논의
하지만 그렇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선조실록'의 수정 논의는 인조 원년에 처음 제기됐지만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계속 중단되다가 효종 8년(1657)에 이르러 마무리됐다.

인조 원년 8월 경연 석상에서 특진관 이수광(李?光), 이정구 및 임숙영(任叔英) 등은 '선조실록'이 '역적(賊臣)'의 손에 의해 편찬됐으며, 애초 이항복이 총재관이 돼 제학 신흠 등과 찬수하다가 계축옥사(광해군 5년·1613) 때 이들이 쫓겨나고는 이이첨 등이 초고를 산삭(刪削)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료를 없앴다고 주장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쓴 그분이다.
원래 이수광은 당색으로 치면 북인이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 시기에 낙향해 있다가 반정 후에 조정에 들어온 경우다.

임숙영도 귀양을 갔다가 반정 후에 조정에 들어왔다.

이정구는 '선조실록' 편찬관으로 참여했다가 김제남 옥사 전후로 배제됐던 인물로, 앞서 다룬 바 있다.
이정구 등의 발론이 있은 지 이틀 뒤 좌의정 윤방(尹昉)은 구체적인 선조 지문(誌文)의 실례를 들어 '선조실록'을 수정해야 할 이유를 제기했다.

그는 '선조실록' 편찬의 총재관이었던 이산해(李山海)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세자에게 국정을 전담시킨 것은 게을러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한 점과 선조의 자손을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수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후 수정 논의는 '선조실록'이 '사실이 왜곡된 역사(誣史)'라는 공감대가 이뤄지면서 해를 넘겨 계속됐다.
'선조실록'의 수정은 '광해군일기'의 편찬에 의해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이어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적절한 착수 시점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인조 19년(1641) 2월에 올린 이식(李植)의 상소로 다시 수정 논의가 시작됐는데 선조 병신년(선조29년·1596년)까지의 기록은 그의 손에서 개수(改修) 작업이 대체로 마무리됐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도 '선조실록' 수정에 대한 논의는 계속됐다.

이때에도 인조대 실록을 먼저 편찬할 것인지 '선조실록'을 수정할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다가 이번에도 '인조실록'을 먼저 편찬하기로 함으로써 '선조실록' 수정은 뒤로 늦추어졌다.

결국 '선조실록' 수정은 '인조실록'이 완성된 효종 4년 이후에야 추진될 수 있었다.

어디를 수정했나
'선조실록' 수정은 기록의 보완과 사론(史論)의 수정이라는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수정을 위한 '범례'를 확정했다.
이는 이식의 '간여본(刊餘本·문집을 편찬하고 남은 필사본)'에 잘 나타나 있다.
 '선조실록' 원본과 수정본의 기사를 비교하다보면 일반적인 보완 기사와는 달리 몇몇 사건을 중심으로 보완됐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 분량으로 보면 수정본이 원본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이는 수정본이 원래의 사초를 이용할 수 없었다는 한계와 '수정'이라는 특수한 목적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수정실록은 선조시대의 중요한 사건에 대해 필요한 기사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편찬됐다.

보완된 기록은 선조대의 주요 사건인 동서분당(東西分黨)·기축옥사(己丑獄事)·임진왜란에 대한 기사들이다.

동서분당과 기축옥사는 당론과 관련이 있으므로 그렇다 치고, 임진왜란은 의병 활동의 비중이 높아졌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도 의병과 조정의 대립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도주했던 감사(監司) 김수(金?)를 처단하려고 한 일부터, 이후 군공을 세운 의병장에 대한 포상의 배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군데서 그 갈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병들의 활동 자료를 보완한 것은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을 수정 담당자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하는 관점과 관련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조가 이어져 해전에서의 승리로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이순신에 대한 기록도 수정본에서 많이 보완됐다.

그러니까 우리가 의병 활동, 이순신 장군의 승전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주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통해서다.

 

사론의 수정

사론이란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말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수정 편찬자들은 사론에 가장 주의를 기울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서 왜곡이 가장 심하다고 알려진 부분도 이 사론이었다.

사론 중 해당 인물이 죽었을 때 기록하는 졸기(卒記) 등을 근거로 몇몇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은 '선조실록', (수)는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다.

 

① 유성룡(柳成龍·남인) : (원) 왜(倭)와 강화(講和)를 주장하고, 근친(覲親) 중에 술을 마셨다. → (수) 학행과 효우(孝友)가 있었고 부친의 간병을 극진히 했다.

② 이이첨(李爾瞻·대북인·편찬자 본인) : (원)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간쟁하는 기품이 있었다. → (수) 선조실록 편찬 때 자신의 일만 기록했다.

③ 한준겸(韓浚謙·북인·유교7신) : (원) 겉은 관대했지만 속은 음험했다. 사류(士類)를 공격했고 유성룡 다음으로 나라를 망친 죄인이다. → (수) 당시에 위인(偉人)이라 칭송했고 주로 외직(外職) 생활을 했으며 실록의 서술은 모함이다.

④ 기자헌(奇自獻·북인·편찬자 본인) : (원) 과묵했으며 바르고 아부하지 않았다. → (수) 음험하고 흉악했다. 헛된 명예를 만들어 후세를 속이려 한 것이다.

⑤ 이정구(李廷龜·서인) : (원) 사부(詞賦, 漢詩)에 재능이 없어 인망(人望)이 부족했다. → (수) 중국 사신 전담, 문사(文詞)로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선조실록의 거짓이 심하다.

 

필자가 조사해보았더니 '선조실록'의 사론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수정한 인물이 40명인데, 위에서 보듯 대북인(大北人) 또는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 몇몇을 빼곤 모두 깎아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편찬자 자신인 이이첨이 스스로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간쟁하는 기품이 있었다"고 평가한 데 이르면 낯간지러운 점도 없지 않다. 기자헌에 대해, "과묵했으며 바르고 아부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과묵하고 아부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방납(防納)을 하면서 대동법을 무력화했던 인물이고 보면 바르다는 평은 옳지 않은 듯하다.

 

또한 인간이라면 서인이나 남인, 소북인(小北人) 중에서도 능력 있고 존경받는 인물이 없을 리 없고, 또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 것이 사람일진대, 원본에서 보여주는 대북인 정권 담당자들의 자찬과 배타성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런 점 때문에 결국 실록 수정 논의가 제기되었고, 실록 수정의 명분이 그른 것이 아니었음을 '선조실록' 자체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신동아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12.10.25

이분에 대해선 조금씩 알아가고자 합니다.

김첨경[ 金添慶 ] 예조판서

1525(중종20)~1583(선조16) 자: 문길(文吉), 호: 동강(東岡), 장주(?洲), 시호: 숙간(肅簡)

강릉김씨시조의 묘를 찾은분이기도 합니다.또한 서울에서 유명한 청와대 옆 팔판동에 사셨던 분이기도 하지요.여기서 팔판동이라고 생긴 이유는 강릉김씨 집안에 8명의 판사가 모인곳이라고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한 요즘 고서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여, 시간상 여유로 이사람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보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옛 고전 문헌도 현재언어로 해석할수 있어, 지금 이 시대에서 이 글을 읽어볼수가 있습니다.

우선 이분의 묘비의 글이 요즘과는 다르게 몹시 장문의 글이 쓰여져 있네요.

추후로 이분의 자료를 모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종윤(宗胤)이고, 아버지는 사예(司藝) 충정(忠貞)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경(粳)의 딸이다.


내용1546년(명종 1) 진사가 되고, 154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의 천거로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봉교(奉敎)ㆍ예조좌랑ㆍ정언(正言)ㆍ헌납(獻納)ㆍ충청도어사ㆍ부수찬(副修撰)ㆍ전적(典籍)을 거쳐 지평이 되고, 1559년 정언으로 있을 때 당시의 이조판서 윤개(尹漑)가 불공평한 인사행정을 하자, 이를 비난한 김규(金?)가 모욕죄로 몰려 죽게 된 것을 구하였다가 이듬해 이로 인해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61년 첨정을 거쳐 강릉부사로 나갔다가, 1565년 검상(檢詳)ㆍ사인(舍人)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ㆍ교리(校理)ㆍ응교(應敎)ㆍ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냈다.
1567년 동부승지ㆍ좌승지ㆍ강원도관찰사ㆍ대사성ㆍ호조참의에 올랐다.


1572년(선조 5)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대사간ㆍ병조참의ㆍ전주부윤ㆍ부제학ㆍ대사헌ㆍ호조참판ㆍ형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역학에 자득(自得 : 자신이 스스로 지식이나 인식을 얻음)의 묘를 얻었고, 경학에 전력하여 모든 의론이 다 거기에서 유출되었으며, 기품이 청아하고 효우(孝友)가 매우 뛰어났다.

 

[비문의 내용]

세상에서 일컫는 낙산(洛山) 아래 동촌(東村)은 옛날부터 유명한 재상이 많이 나왔는데, 그중하나는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공(金公)으로 휘(諱)는 첨경(添慶)이고 자(字)는 문길(文吉)이다.
그의 선대는 강릉(江陵)에서 비롯되었는데, 신라(新羅)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후손이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김인존(金仁存)은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문성(文成)의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세 명이 모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왕사(王謝)(각주 참고)에다 비유하였다.


할아버지 김종윤(金宗胤)은 감찰(監察)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의 벼슬을 추증(追贈)받았고, 아버지 김충정(金忠貞)은 사예(司藝)로 좌참찬(左參贊)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참찬공이 여흥(驪興) 민경(閔梗)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유년(乙酉年, 1525년 중종 20년)에 공을 낳았다.


공이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고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가 사국(史局)으로 추천되었고,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가 예조 좌랑(禮曹佐郞),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되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정언(正言),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선발되었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정언(正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사류(士類)들이 고상한 의논을 견지하여 오로지 청탁(淸濁)을 가리기에 주력하였으므로 축출된 소인배들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먼저 김홍도(金弘度), 김규(金叫)를 죽이려고 꾀하였다.


공이 사헌부에서 항의하여 구하려고 하다가 곧바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년이 넘어 비로소 사면되어 또다시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었는데, 그때 달단(韃靼)이 길을 막고 있었으므로 당국자가 공을 사지(死地)로 밀어넣으려고 한 것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병조 정랑에서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이 되었다가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갔고, 을축년(乙丑年, 1565년 명종 20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간당(奸黨)이 퇴출(退黜)되자 검상(檢詳), 사인(舍人)으로 추천되었고 장령(掌令), 사간(司諫), 집의(執義), 사예(司藝), 사성(司成), 교리(校理),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정시(庭試)에 장원하여 통훈 대부(通訓大夫)로 승진한 뒤 누차 예빈시 정(禮賓寺正), 군기시 정(軍器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전직되었다.


정묘년(丁卯年, 1567년 선조 즉위년)에 산릉 도청(山陵都廳)을 맡아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얼마 안 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승진되어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으며,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자 대사성(大司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임명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에 천추사(千秋使)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대사간(大司諫),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고,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병조 참의, 대사간, 부제학(副提學),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참판(戶曹參判),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재차 대사헌, 부제학이 되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품계가 승진되어 특별히 예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동지경연 춘추관사(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經筵春秋館事)가 되었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병환이 나 향년 59세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 오봉산(五鳳山) 선영 북북서로 향하는 자리에 묻히었다.


공이 처음에 학생(學生) 이임(李稔)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재차 생원(生員) 신임미(申任美)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여, 세 번째 봉훈랑(奉訓郞) 김부(金溥)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김씨는 연안(延安)의 유명한 씨족으로서 현명하여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시부모를 섬길 때 효성을 다하였는데, 공보다 38년 뒤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묻히었다.


2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김선여(金善餘)는 일찍부터 재주로 명성이 났으나 벼슬이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그치었으므로 지금까지 세상에서 일컫고 있으며, 둘째 아들 김선징(金善徵)은 음덕(蔭德)으로 벼슬길에 나가 통정 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선여는 장령(掌令) 유대수(兪大脩)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아 큰딸은 생원(生員) 윤정(尹珵)에게, 둘째 딸은 현감(縣監) 안응인(安應仁)에게 시집가고, 아들이 없어 종질(宗姪) 김득원(金得元)을 양자로 들였는데, 진사(進士) 에 합격하였다.


김선징은 광양군(廣陽君) 안황(安滉)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뒤에 부제학(副提學) 홍인경(洪仁慶)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측실(側室)에게서 김득용(金得容), 김득건(金得謇), 김득완(金得完) 3남을 낳았다.


윤정은 4남 3녀를 낳았다.
큰아들은 진사(進士) 윤익형(尹益亨)이고 다음은 윤태형(尹泰亨)ㆍ윤풍형(尹豐亨)ㆍ윤진형(尹晉亨)이며, 큰딸은 장령(掌令) 김덕승(金德承)에게 시집가 아들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윤익형은 4남을 낳았다.

안응인은 4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안시수(安時秀)ㆍ안시호(安時好)ㆍ안시웅(安時雄)이고 큰딸은 이유(李烠)에게, 둘째 딸은 이초망(李楚望)에게, 셋째 딸은 성후담(成後聃)에게 시집갔다.


공은 청수하고 단아하며 풍채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멀리서 바라보면 엄연(儼然)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옥(玉)처럼 온화하였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타고나 9세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상복(喪服)을 입고 곡(哭)하면서 모두 예절에 따라 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경이(驚異)롭게 여기었다.

 

성품이 본래 청렴하고 검소하여 한 가지 고기 반찬에 거친 밥을 먹었고 평소 뇌물을 받지 않아 문전에 잡인(雜人)이 없었다.

사람과 사귈 때 인정한 바가 드물었고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후배의 의논이 더러 엇갈려도 항상 중립(中立)을 지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고 사람들도 감히 표적으로 삼지 못하였다.

 

오직 김계휘(金繼輝) 공을 지기(知己)의 벗으로 삼아 매양 말하기를, “평탄할 때나 험난할 때나 지조가 한결같아 백수가 되도록 잊기 어렵다.”고 하였다.

한림원(翰林院)에 있을 때 동료가 왕실(王室)의 외척을 미리 추천하려고 하자 공이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그 사람은 음험하므로 후일 필시 사림(士林)에게 화를 입힐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공의 말처럼 되었다.

 

공이 중년에 침체된 것은 모두 그로 인한 것이었다.

 정여립(鄭汝立)이 흉측한 꾀로 세상을 속여 헛된 명망이 조정을 휩쓸자, 사람마다 그를 추종하여 뒷전에 설까 염려하였으나 공 혼자 말하기를, “그의 외모가 그처럼 생겼으니, 필시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부임하였을 때 정여립이 고을에서 횡행(橫行)하면서 관청을 제압하고 또 스스로 서원(書院)을 지으면서 관청의 힘을 빌려 기와를 만들려고 하자, 공은 꾸짖어 허락하지 않고 이어 절교(絶交)하니, 정여립이 매우 분노하여 온갖 방법으로 모함하였다.

 

공이 죽은 뒤에 정여립이 임금의 앞에서 공을 헐뜯자 선조(宣祖)가 말하기를, “김 아무개는 너의 성주(城主)인데, 그처럼 비방한단 말인가?”라고 하니, 주위 사람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공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섭렵하지 않은 서적이 없었고 눈에 한번 거치면 대뜸 기억하였는데, 특히 역학(易學)에 깊어 상당히 스스로 터득한 묘리가 있었다.

 

누차 경연(經筵)의 장관이 되어 항상 직언(直言)을 개진하고 오로지 성학(聖學)에 힘쓰는 것을 법연(法筵)의 제일주의(第一主義)로 삼아 역전(易傳)의 심오한 뜻을 토론하니, 여러 신하들이 힐난(詰難)하지 못하였고 임금이 매우 감탄하여 특별히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임명하였다.

공이 그 명을 듣고 수심띤 얼굴로 말하기를, “이는 옛날 대종백(大宗伯)의 직책이니, 내가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극도에 이른 것이다.” 하고 누차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자 더욱더 힘을 쏟아 헌신하여 교화를 닦아 밝히니, 예악(禮樂)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 하늘이 왜 그리 빨리 공을 데려갔단 말인가?

내가 비록 까마득한 후배이지만 평소부터 이웃에서 사모해 왔었으니, 감히 묘갈명(墓碣銘)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선비는 시발점이 중요하고 불변한 것이 귀중하도다.

오직 공은 정도를 견지하여 죽음을 돌아가듯이 보았도다.

사람을 알아보기도 어려운데 기미를 예견한 것이겠는가?

오직 공은 일찍이 알아보고 미리서 간사한 꾀를 꺾었도다.

올곧은데다가 명철까지 겸하니 우매한 자들이 승복하였도다.

이는 공이 학문한 힘이었으니 대체로 주역에서 얻었도다.

수명이 짧아 펼치지 못하니 고금이 다같이 애석하였도다.

저 보개산(寶盖山)에 꿈틀거리는 기운 있어, 쌓여서 펼치지 못하니 이게 대종백(大宗伯)이 묻혀 있는 묘역이도다.

 

각주
1) 왕사(王謝) : 육조(六朝) 시대에 왕씨와 사씨가 대대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항상 아울러 일컬었다. ≪남사(南史)≫ 후경전(侯景傳)에 “후경이 왕씨나 사씨 집안으로 장가를 가게 해달라고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왕씨와 사씨는 가문이 높아 상대가 안 되니, 주씨(朱氏)와 장씨(張氏) 이하의 성씨에게 물색하라.’고 하였다.” 하였음.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월사집(月沙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에 이미 밭에서 농작물을 재배했음을 보여주는 동아시아 최고(最古) 경작유구(耕作遺構)가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확인됐다고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말했다.
사진은 밭 유적 전경(남북 방향).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동아시아 최초 `밭' 발굴 농경생활 증거 확인 
고성 문암리 유적(사적 제 426호)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신석기시대 밭 유적지가 발굴돼 고고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김영원)는 26일 죽왕면 문암리 발굴현장에서 기자브리핑 및 현장설명회를 갖고 문암리 유적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밭 유적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견된 사례가 없는 동아시아 최초의 밭 유적이라고 밝혔다.
현장에서는 크게 2개 층에서 밭이 확인됐다.
해발 2.71~2.89m 높이에서 드러난 상층 밭은 조사 지역 전체에 걸쳐 확인됐으며 현재까지 드러난 면적은 1,260㎡ 정도지만 동쪽과 서쪽, 남쪽으로 더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실제 밭은 훨씬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층 밭은 상층 밭과는 다르게 복합구획 밭의 형태로 원시적인 모습을 띤다.
또 신석기 중기(기원전 3,600~3,000년)의 토기편(짧은 빗금무늬토기), 돌화살촉과 함께 집자리 등도 확인됐다.
그동안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농경에 대해서는 석기(돌괭이·뒤지개·보습·갈판·갈돌 등)와 탄화곡물(조·기장)을 근거로 가능성은 추정됐으나 구체적인 농경의 증거인 `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영원 소장은 “신석기시대 농경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발굴된 만큼 한반도 신석기인들이 밭을 중심으로 농경생활을 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 종합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부터 발굴을 시작한 문암리 유적은 지금까지 신석기시대 집자리 5기, 야외노지 13기 등 유구와 함께 경작유구인 밭이 확인됐다.

출처:연합뉴스 정래석기자

임금도 막을 수 없다 조선의임금도 막을 수 없다 조선의 묘지 소송 묘지 소송

볼만한 프로그램으로 난사회에 자료를 올려봅니다.

우리가 성묘를 왜 하게 되었는지,또한 성묘를 하게되는 배경등.

교양프로그램으로 추천드립니다.

 

링크주소 밑의 주소를 클릭하시면 사이트주소로 갈수 있습니다.

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index.html


 
춘천이궁(春川離宮) 관아 정문 도청 내로 이전
9억 투입 이달 중 착공 전통수법으로 12월 완료
조선시대 고종(高宗)이 유사시 사용하기 위해 현 도청 터에 조성했던 춘천이궁(春川離宮)의 건물 가운데 조양루(朝陽樓)와 위봉문(威鳳門)이 100여년 만에 제자리를 찾는다.
4일 도는 춘천이궁의 관아 정문이었던 위봉문과 조양루를 도청 내의 제자리로 이전 복원한다고 밝혔다.
위봉문은 도 유형문화재 제1호, 조양루는 도 유형문화재 2호다.
총 사업비는 9억원이며 지난해 말 도 문화재위원회의 현상 변경허가를 거쳐 실시설계를 마쳤다.
이달 중 공사에 들어가 12월께 완료할 계획이며 전통수법으로 복원된다.
위봉문과 조양루 이전은 도의 `지역 주권찾기 사업'에 따라 도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도민 화합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또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승화시킨다는 의미도 있다.
이전 복원 장소는 도청 휴게소 앞이다.
1895년 작성된 춘천 관찰부 관아도를 바탕으로 제 위치를 찾았다.
위봉문과 조양루는 조선 인조 24년(1646년) 춘천 부사 엄황이 관청 옆에 임금의침실인 문소각(聞韶閣)과 함께 지었고 고종 27년(1890년) 춘천이궁의 내삼문과 문루로 각각 사용했다.
위봉문은 1955년 현 도청을 신축하면서 인근 세종호텔 입구 쪽으로 이전했다가 1972년 다시 도청 앞 공영빌딩 옆으로 이전했다.
조양루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현재의 우두산으로 이전됐다.
최두영 행정부지사는 “위봉문과 조양루는 그동안 제자리를 잃고 옮겨져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영서지역의 유일한 관아건물”이라며 “이번 이전으로 수부도시인 춘천의 자긍심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강원일보 이규호기자


조선왕조실록·왕실의궤 제자리찾기 범도민 추진위 성명
문화재청에 국립평창세계기록문화유산 전시관 건립 요구도
조선왕조실록 및 왕실의궤 제자리 찾기 범도민 추진위원회(위원장:원영환·이하 추진위)는 4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문화재청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의 관리단체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지정한 데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추진위는 성명서에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의 서울대 규장각 임시 보관이 적절치 않아 보관처 이전 결정은 환영하지만 보관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아닌 제자리인 오대산이어야 한다”며 “문화재청의 이번 결정은 산하기관 만을 생각하는 조직 이기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2018평창동계올림픽이 문화올림픽으로 승화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며 “문화재청에서 이를 보관·전시, 활용할 수 있는 `국립평창세계기록문화유산전시관'을 건립해 직접 운영하길 요구한다”고 밝혔다.
추진위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의 귀향이 지방문화 육성과 문화 분권이라는 중앙정부의 의지를 확인하는 잣대로 삼고자 한다”며 “조선왕조실록 및 의궤 오대산 사고본을 제자리인 오대산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각 당의 대통령 선거공약에 반영되기를 요구한다”고 천명했다.
출처:강원일보 오석기기자

 

몇년전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유물에 관련된 자료인데, 백제시대의 타임캡슐을 꺼내는 순간이 정말 놀라왔었는데,지난주 TV KBS1 역사스페셜에 서동요에 관련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미륵사지 석탑의 조성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를 토대로 베일에 쌓인 미륵사지의 조성연대를 밝힐 수 있었다고 19일 말했다.
서동설화 도시 익산이 흔들렸다.
그 진원지는 익산시가 보석과 함께 상징물로 내세워온 미륵사.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륵사는 '서동왕자'인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합작해 지은 사찰이다.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서동요'는 삼국유사에 수록돼 전하며, 얼마 전에는 '서동요'를 소재로 하는 TV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익산 서동축제'를 매년 개최해 온 익산시는 드라마 세트장을 유치하는가 하면, 도시 곳곳에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캐릭터를 내걸 정도로 서동요를 내세운 각종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각 분야에서 활용해 왔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리장엄을 발견했다.
이런 마당에 미륵사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고, 거기에서 미륵사(혹은 석탑)를 창건한 주체가 '백제왕후'(百濟王后)이기는 해도, 그가 신라 출신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라는 기록을 담은 사리(舍利) 봉안기가 공개된 것이다.
석탑 해체보수단인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이들 사리장엄구 관련 유물과 해체 현장을 공개하기 하루 전인 18일만 해도, 익산시는 물론이고 시가 추진하는 '서동요' 문화콘텐츠 사업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상당한 기대감을 보였다.
이들은 특히 익산이 백제의 도읍이었다는 증거가 이 유물들에 포함돼 있을지를 주목했다.
하지만 막상 이튿날 공개된 사리 봉안기에는 그런 내용은 보이지 않고, 전혀 생각지도 않은 "우리 백제왕후는 좌평인 사탁적덕의 따님이시니"라는 구절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명문 내용을 접한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장 최완규 교수는 "솔직히 당혹스럽다"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또 다른 익산 지역 학계 인사는 "패닉 상태"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익산시 반응 또한 비슷하다.

시 문화관광 담당 직원은 "각종 언론매체에서 미륵사 창건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고 단정 보도하고 있어 매우 당황스럽다"면서 "벌써부터 서동설화와 관련한 축제와 행사를 일부 수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명문의 해석과 이를 토대로 한 주장에 반론이 잇따르기 시작했다.

백제사 전공인 계명대 노중국 교수는 "이제 사리 봉안기가 막 공개됐을 뿐"이라며 "지금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최완규 교수도 당혹스런 기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듯 21일에는 "사리 봉안기가 미륵사 사찰 창건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면서 "미륵사가 639년이라는 한 시점에 모두 창건됐다는 생각은 오산이며, 무왕에게 여러 명의 왕비가 동시에, 혹은 시기를 달리 해서 있었을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고, 따라서 선화공주가 왕비가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고 반박했다.
최 교수는 이어 "설혹 서동과 선화공주를 얼개로 하는 설화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설화를 역사로만 치환해 생각할 수는 없으며 설화는 설화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갖는다"고 덧붙였다.
'서동축제'의 남정숙 총감독도 "산타 할아버지가 아빠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던 그 때만큼이나 (이번 사리봉안기 발견에) 억울하고 배신감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설화는 역사와 달라 실망할 필요는 없으며, 진위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출처:(연합뉴스)   2009/01/22

[우리 동네 옛이야기]
 회기동의 유래는 폐비 윤씨 묻혔던 '회묘'
"내 죽거든 건원릉 가는 길목에 묻어주시오. 원자가 장차 보위에 올라 능행 가시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나마 지켜보고자 하오."
탤런트 구혜선은 작년 2월 SBS드라마 '왕과 나'에서 소복을 입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

조선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역을 맡아 성종이 내린 사약을 받아드는 장면이었다.

이 대사를 끝으로 극중 윤씨는 피를 토하며 숨을 거뒀다.
실제 폐비 윤씨는 죽기 전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 가는 길에 묻어달라 소원했다.

마지막 소원이 받아들여져 윤씨는 한양 도성과 현재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건원릉 사이에 묻혔는데, 그 무덤 이름인 회묘(懷墓)가 지금 동대문구 회기동(回基洞)의 유래가 됐다.

처음엔 일대가 회묘동(懷墓洞)이라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며 회묘리(回墓里), 회기리(回基里)로 바뀌었다고 한다.
회기리에서 흥인지문(동대문)으로 가는 길엔 '떡전거리' '병점리'(餠店里)로 불리던 마을도 있었다.

도성으로 향하는 길손들을 상대로 떡 파는 가게가 많아 떡전거리란 이름이 붙었는데, 일제시대 회기리에 병합됐다.

지금도 청량리에서 회기동 가는 길목에는 '떡전다리' '떡전교사거리' 등이 남아있다.
폐비 윤씨가 묻힌 회묘는 1969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는 경희의료원이 들어섰다.

요즘 전농·이문뉴타운 개발 등으로 주변이 모두 상전벽해(桑田碧海)중이니, 윤씨의 혼백이 남아있었더라도 이곳에 머무르긴 번잡했을 것이다. 출처:조선일보 김진명 기자  200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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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城 박사' 김준혁씨 '이산 정조' 펴내


경기도 수원시 학예연구사가 정조(正祖)의 삶과그가 축성한 화성(華城)을 다룬 역사서를 펴내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정조대왕의 고뇌와 삶을 다룬 MBC-TV 드라마 '이산'이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수원시 화성사업소 학예연구사인 김준혁(41) 씨는 24일 역사서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여유당ㆍ368쪽)를 출간했다.

정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 씨는 정조의 개혁정책과 그 개혁의 완성인 화성에 대해 '정조실록'과 '화성성역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 등 사료에 근거를 두면서도 옛날 이야기를 하듯 흥미롭게 풀어내 독자의 지적 갈증을 풀어준다.

 

그는 이 책에서 정조와 홍국영, 현륭원의 수원 천봉과 신도시 수원의 육성 그리고 화성의 축성, 화성 각 시설물, 정조의 8일간의 화성행차 등

크게 4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정조 즉위 직후 국왕 시해 사건과 정조의 독살설에 대해 정확한 사료를 통해 분석하는 한편 드라마에 나오는 '송연'이라는 여인이 도화서 다모가 아니라 실제정조의 여인이었고 그녀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등의 흥미로운 사실을 밝힌다.

그는 "정조의 후궁 가운데 궁녀출신의 '창녕 성씨'(출산 후 의빈 성씨)가 정조의 아들(문효세자)을 낳았는데 아들이 다섯 살때 죽은 직후 세상을 떠나 실록에 독살 가능성이 언급돼 있다"며 "정조의 후궁 중 유일한 평민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드라마 속 송연이는 의빈 성씨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불임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효의왕후가 후손에 대한 심리적 압박으로 상상임신을 했다는 새로운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도화서(圖畵署)는 정조대 이전까지 궐 밖에 있었으나 정조가궐 안으로 옮겨 규장각 내에 자비대령화원을 설치했다며 정조의 그림 사랑을 소개했다.

 

그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정조는 그림을 사상과 문화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화원들을 배려했고 김홍도, 신윤복 등이 모두 자비대령화원 출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밖에 1789년에 있었던 사도세자의 묘소가 수원으로 천봉되는 정치적 의미와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신도시 수원의 조성과 화성의 축성에 대해 기존의 평면적 연구와는 다르게 정조시대 정치사 연구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그는 "정조는 화성의 100여 개 시설물 모두 의미를 부여하며 당대 최고의 건축기술자로 하여금 짓게 했다"며 "장안문과 팔달문은 한반도에 현존하는 성문 중 가장크고 그 중 장안문은 최근까지 수원 시민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화성 시설물 중 백미로 평가받는 화홍문이 1922년 대홍수에 파괴됐다가 1925년부터 수원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중건했다는 대목은 일제시대 신문기사에서 찾아내 처음으로 소개했다.

그는 "군왕 정조와 인간 정조를 함께 보여주고 정조시대 개혁정치의 실체와 정조가 꿈꾸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려고 책을 썼다"며 "정조는 화성을 통해 부유, 건강, 번성을 추구하고 조선을 대표하는 세계문명중심도시를 건설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공사기간을 10년에서 2년9개월로 단축한 화성 축성방식은 과학정신과 위민정신이 반영된 대단한 성과"라며 "축성 중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던 사실은 성곽사에 길이 남을 기록"이라고 말했다.
네 살 때부터 수원에서 살고 있는 김 씨는 중앙대 사학과를 거쳐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석사과정 이후 14년째 정조와 화성을 연구하고있다.

그는 지금까지 '조선 후기 정조의 불교정책', '정조대 장용위 창건의 정치적 추이', '정조대 무예도보통지 편찬 의도와 장용영강화', '정조대 군제개혁과 수총양영혁파' 등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우리 전통문화와의 만남', '강좌 한국사', '이순신', '전태일' 등의 전기를 썼으며 지난해 11월에는 '이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라는 어린이용 정조 전기를 펴냈다.
출처:연합뉴스 200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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