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하여라 調信(조신)의 꿈
오랫동안 북한의 제2인자로 행세하던 장성택의 급작스러운 처형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북한 정권의 비인간적인 잔인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제 겨우 서른 살밖에 안 된 김정은은 할아비 김일성도, 아비 김정일도 차마 하지 못한 고모부 장성택의 숙청을 하루아침에 단행했던 것이다.
자세한 내막이야 언젠가 북한 3대 세습 독재 정권이 멸망한 다음에나 밝혀지겠지만 어쨌거나 참으로 경악스러운 사건이었다.
40년간이나 북한 정권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던 장성택의 급격한 몰락은 권력 무상을 넘어 인간사의 허망함을 새삼 절감하게 해주었다.
인간의 한 삶이란 이렇게 허망한 것이다.
장성택의 숙청을 바라보며 새삼 ‘삼국유사’에 조신(調信)의 꿈 이야기가 떠오른다.
조신이 낙산사서 사랑을 빌었다
조신은 신라 때 강원도 영월 세달사의 중인데 절이 소유한 명주군(강릉)의 농장 관리인이 되었다.
조신은 명주로 가서 일하다가 그곳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보고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조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낙산사 관음전에 가서 관세음보살에게 빌었다.
“거룩하고 전능하신 관세음보살님께 비나이다.
 제가 이곳 태수의 따님을 그지없이 사모하오니 저를 가엾게 여기사 그녀와 제가 부부로 맺어지게 해주소서! 저의 꿈이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간절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렇게 빌기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달도 아니고 해가 몇 차례나 바뀌도록 거듭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랴.
그 사이에 태수의 딸은 혼처가 생겨 시집을 가버리고 말았다.
그날도 조신은 낙산사 관음전에 가서 관세음보살에게 빌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처자와 맺게 해달라고 빈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애틋한 꿈을 이루어주지 않은 관음보살을 원망했던 것이다.
그렇게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아침부터 날이 저물도록 관음보살에게 하소연하던 조신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조신이 정신없이 잠결에 휩쓸려 들어가는데, 갑자기 눈앞에 꿈에서도 그리던 김씨녀가 그지없이 밝은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희고 고운 이를 드러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스님, 스님! 제 말씀을 들어보소서!
소녀가 일찍이 스님의 얼굴을 어렴프시 기억하여 마음속으로 사랑하여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부모님의 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이제는 죽더라도 한 구덩이 안에 묻히기 원하여 이렇게 찾아온 것이랍니다. 으흐흐흑….”
그 말을 듣자 조신이 너무나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리하여 김씨 처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그로부터 무려 40년을 함께 살았다.
그렇게 더불어 살면서 자식을 다섯이나 낳았으나 가난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집은 속이 텅텅 빈 네 벽만 남았고, 일곱 식구가 끼니도 제대로 이를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견딜 도리가 없어 조신은 식구를 모두 이끌고 집을 떠나 동냥길에 나섰다.
집을 떠난 지 어언 10년, 온 식구가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건만 사정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아내가 헤어져 살자고 했다


명주 해현 고개를 자는데 드디어 열다섯 살 난 큰아들이 굶어서 죽어버렸다.
남은 식구가 통곡을 하면서 길가에 묻고 다시 길을 떠났다.
조신이 아내와 나머지 네 자식을 이끌고 우곡현에 이르러 길가에 움막을 엮어 살았다.
조신 부부가 늙고 병들어 거동조차 불편하자 열 살짜리 딸아이가 동냥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사나운 개한테 물려 울부짖으며 움막 앞에 와서 쓰러져버렸다.
조신 부부는 그저 눈물만 흘리며 울 따름이었다. 마침내 아내가 눈물을 훔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에 당신은 젊었고 얼굴도 잘 났으며 옷차림도 깨끗했지요.
 맛있는 음식 하나라도 생기면 당신과 내가 나누어 먹었고, 몇 자 되지 않는 옷감이 생겨도 우리는 나누어 옷을 지어 입으며 벌써 50년을 더불어 살았어요.
이처럼 우리 정분과 사랑은 그지없이 아름다웠건만, 근래 들어 쇠약해져 여기저기 안 아픈 곳도 없이 해마다 없던 병도 생기고, 굶주림과 추위는 나날이 더해 가는데 누구 하나 음식 한 그릇 나누어주는 사람도 없이 우리를 멸시하고, 아이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우리가 부부의 사랑을 나눌 것이며 즐거운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겠는지요?

오오, 붉은 얼굴에 아리땁던 웃음도 풀잎의 이슬처럼 사라져버렸고, 지초 난초 같던 꽃다운 약속일랑 소소리바람(회오리바람)에 버들꽃처럼 흩날려 없어지고 말았군요!

여보,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로움이 끊일 새 없고, 나 또한 당신 때문에 걱정이 끊일 새 없으니 이제 어쩌면 좋으리까?

우리가 어찌하여, 전생에 무슨 죄가 많기에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새 여러 마리가 함께 모여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로 나누어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이젠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가고 머무름을 우리 뜻대로 못 하고, 만나고 헤어짐도 우리 뜻대로 하지 못하나니, 이제부터는 서로 헤어지는 것이 어떨는지요?

으흐흐흑…”

탐욕이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구나

조신이 듣기에 참으로 난감하고 부끄러웠으나 어쩔 도리가 없어 부인의 뜻대로 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부부가 각각 남은 아이 둘씩 나누어서 헤어져 각자 길을 떠났다.
작별하기 전에 아내가 말하기를,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터이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셔요.”라고 했기에 조신은 두 아이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부부가 작별을 하고 길을 떠나려는 참에 잠을 깨어보니 타다 남은 등잔불이 가물거리는데 밤이 이미 깊은 뒤였다.
그렇게 해서 밤이 가고 아침이 밝았다.
조신이 아침에 보니 밤새 머리카락이 죄다 하얗게 세고 정신이 멍한 것이 도무지 인간세상 같지 않았다.
세상살이가 지난 밤 꿈처럼 그렇게 괴로운 것이라면 도무지 살고 싶지도 않았다.
아아, 내 탐욕이 그처럼 부질없는 것이었구나!

참으로 인간의 한 삶은 어리석은 미망(迷妄)에 불과한 것이구나!
조신은 관세음보살을 대하기가 그지없이 부끄러웠다.
조신이 꿈속에서 큰아들을 묻었던 해현에 가서 그곳을 파보니 돌로 만든 미륵불상 한 구가 나왔다.
조신은 그 미륵상을 깨끗이 씻어서 가까운 절에 모시고, 본사로 돌아가 장원 관리의 소임을 내놓고 자기 재산을 정리하여 정토사(淨土寺)를 세웠다.
그러고 나서 더욱 열심히 불도를 닦았는데 그 뒤의 소식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 제4 탑상 편 ‘낙산의 두 성인 관음, 정취와 조신’의 뒷부분에 나온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조신이 신라시대 어느 임금 때의 인물인지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김씨 부인의 아버지 김흔이 제 31대 임금 신문왕 때의 인물이란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일연선사는 조신의 꿈 이야기를 소개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비단 조신의 꿈만 그러하랴.
인간세상의 낙이라는 것은 즐거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건만, 사람들은 오로지 즐거움만 좇아서 괴로움이 있음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시를 한 수 지어 붙였다.


달콤한 한 시절도 지나보니 허망하네.
나도 몰래 근심 속에 이 몸이 다 늙었네.
허무한 부귀공명 다시는 생각 마오.
괴로운 한평생이 꿈결인 줄 알리니.
착한 행실 위해서는 마음부터 닦을지니
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재물을 꿈꾸네.
어찌 가을 밤 푸른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을 꿈꾸리오
출처:© 경제풍월  글/황원갑(소설가, 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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