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할아버지의 산소는 아직 찾아뵌적이 없습니다.

1787년생(정조년)-1859년(철종)졸
용정 수곡리 양지산선영
부인남양홍씨, 삼척김씨

시간이 되면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아마,우리가 말하는 핏줄(생물학적)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바로윗분인 할아버지가 김성조 할아버지인데,우리가 자주 명절때마다 찾아가 마지막으로  성묘하는 곳 

김이덕할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김성조할아버지를 양자(흔히 말하는 양자는 대부분 강릉김씨 가까운 친척분)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김성조 할아버지는 어느파에서 왔을까? 아니면 같은 파일까?

그것은 역사적 흔적에 가리워져 있을껍니다.

그래서,삶의 흔적은 어딘가에 기록에 되있을꺼란 생각도 들여집니다.

그런데 이분의 산소는 가본적이 없어 사진을 첨부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시간이 된다면 난사회 여러분들과 이분의 산소를 찾아가보고 싶습니다.

이분의 족보에 참조된 내용을 참조해보면

김학인 할아버지는 조선순조경진오월생~1888 순조 1888고종때돌아가심/부인은 강릉최씨(1827-1888년)
이분이 살던 시대적 배경은 순조 [純祖, 1790~1834]가 즉위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조선의 제23대 왕으로 이때 흔히말하는 암행어사들이 많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순조는 11세에 즉위하여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경주김씨 김관주(金觀柱)와 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 후로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국사책에 나오던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 추신 ]

작업을 하면서 느낀점은 족보책을 보면서 너무나도 모르는 어휘가 나타나 당황하기 일쑤이고,시간이 될때마다 서울강릉김씨 종친회에 전화를 걸어, 궁금한점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경험과, 문서로 통해 이야기를 꾸려가고 있지만 다른삼촌들 및 고모들의 경험을 살리면 그분들의 흔적을 찾을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난사회의 특징은 소통부족이라는걸 느끼네요.

진필삼촌이 말하는것처럼 자주 이곳에 글을 남겨, 서로 안부도 묻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옛이야기를 이곳에 남기는 센스가 필요할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강릉할아버지가 역사학과를 졸업하셔서 많은 이야기를 알고 계실듯 합니다.

할아버지~컴퓨터 자주 활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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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2.0 2015.09. 추석연휴때]집안모임때 사진 받음

 

나의 고조할아버지[김병래1862-임술년10월]가 사셨던 시대적 배경은 헌종의 뒤를 이은 조선왕조 제25대[1849~1863] 왕 철종 시대[흔히들 알고 있는 강화도령으로 졸지에 왕이 된 인물]와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의 시대였다.

대부분 고조할아버지가 사셨던 대부분은 고종시대일꺼라 사료되어진다.

철종때에는 이시기엔 왕의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한 상태이고 ,최제우(崔濟愚)가 주창한 동학사상은 학정에 허덕이는 민중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파급,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었으며,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사상도 일반 민중은 물론 실세(失勢)한 양반층에까지 침투되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고종때에는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었다.

원래 고조할아버지는 두분의 부인이 계셨다고 한다. 첫째부인은 밀양박씨인데,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고, 두번째 부인인 삼척김씨와 결혼을 해서 우리증조할아버지[김연경]을 낳았다고 한다.

지금 봉분에 보이는 옆분은 삼척김씨 묘인데, 밀양박씨 부인묘는 증조할아버지묘 근처에  있다고 용정할머님한테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이 되면 한번가고싶은데,난사회때에는 다른분들의 묘를 볼 기회가 부족한점이 안타깝다.

난사회때가 아니라, 하루 시간을 내서 친척분들과 함께, 다른날을 찾아, 한번 조상묘 탐방을 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PS)여기서 임술년은 몇년인지 모르겠다.^^

 


 

 

 

사실,진택삼촌묘는 매년 다녀오고 있지만,난 진택삼촌에 대해선 잘 몰라서 넘어가겠다.

형제가 같은곳에 묻혀있는 모습이 보기좋았다.

진수삼촌은 정말 나의 어린시절의 추억의 대부분을 갖고 계셨던 분이었다.

어린시절 잠시나마 초등학교 방학때마다 강원도 양양에서 지냈다.

그때 내가 처음으로 낚시대를 잡아보았고, 야영생활이라는 것도 처음해보았다.

텐드안에서 삼촌이랑 작은어머님이랑 이야기꽃을 피웠던 기억도.....

많은 기억이 많았지만,거기에대한 서론은 그만쓰겠다.

진수삼촌이 하늘나라에 가시기전 마지막 가는 길에 같이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진수삼촌이 하늘나라에 가시고, 한달도 안돼, 나에겐 소중한 후배동생이 우연찮게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다.

나에겐 몇명안되는 친구중에 하나였는데,그 친구랑 삼촌이랑 컴퓨터문제로 알게되어, 자주 연락이 되던사이인데,

우연찮게도 같은 화장장터에서 한숨의 재로 변해버린 모습은~~

인생이란것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진수삼촌~~조카가 작은어머님 자주 챙겨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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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몇일동안 사진을 올리고 있지만, 병래할아버지(나의 고조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면서,

그 윗분들부터는 알고 있는 지식이 없기때문에, 문헌조사와 함께 우리할머니에게 추석즈음에 그분들에 대한 녹취가 필요할듯하다.

 

그래서,우선 나의할아버지(춘경)과 바로 밑에 묘소인 막내작은할아버지(윤경)에 대한사진을 올려보았다.

막내할아버지는 대부분 친지분들이 삶의 한부분을 같이 지내셨기에  첫째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올리겠다.

형과 막내동생의 묘소가 같이 있는모습이 보기좋다.

나의할아버지는 1919에 태어나 51년도에 돌아가셨다. -32년의 짧은 생애였다.지금으로 치면, 나보다 동생이었네.~~

그러보고니, 용정할머니는 너무나 홀로 지내셨다.

옛사진을 보면서 나의할아버지를 모색해본다.근데, 어떤분일까?

그분들 대부분이 과연 연애라는것을 하고 결혼은 안하겠지.그때사람들 모든이가, 집안끼리의 만남이였으니까...

유독,자료조사를 하면서 느낀점은, 윗분들 모두가 삼척김씨,남양홍씨,강릉최씨 집안과 결혼을 많이 하셨던걸로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강릉김씨 우리집안이 너무나 오랫동안 삼척에 정착해있었다.

그당시만해도 버스도 없었고..그냥 그곳에서 자자손손, 이웃과 어울려 살아간듯하다.

동해시 용정동 근처가 집성촌이기에 아마도, 집안식구들이 주변에 많이 살았다.그래서,옛날에는 가족이 이웃이되고,그러니,서로가 서로를 도울수 있는 여러가지 향약이나 두레라는 제도가 일상회된듯하다. 지금으로 치자면 난사회여러분들 모두가 한동네 살았다고나 할까?

지금현실은, 세계화라는 명분으로,서로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서로간의 예의나,무관심이 일상화된 모습이 안따까울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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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부터는 조상의 흔적을 떠나는 여행을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순서는 성묘를 찾아가는 동선을 따라 시작을 해볼까 합니다.
오늘이야기의 첫번째는 나의 증조할아버지[1892-1947 김연성]와 증조할머니[강릉최씨00 1899-1982]로 시작을 해볼려고 합니다.

이 두분이 살아계실적 시대적 상황을 정리하자면 조선26대 왕인 고종이 정권을 잡던 시기였지요.

또한 흥선대원군이 10년 집정시대를 열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고,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아마도, 이시기엔 동해의 모습은 외국인[노랑머리]들이 자주 있었을겁니다.서방세개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찼겠지요.그분들이 요즘 우리들이 해외를 자주가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게 생각하겠지요.^^

 

아무튼,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증조할아버지는 나와의 추억은 없지만, 동해용정댁에 가면 그옛날 사진들이 많이 있지만, 유독 증조할아버지의 사진들은 없습니다.

단지 향을 피우는 영정속의 사진[농군의 모습]으로만 해석이 될뿐입니다.

개인적으로 큰할아버지의 인상이,좋아보입니다.

하지만 증조할머니는 어린시절 나와의 추억이 많았습니다.
큰키와 부리부리한 눈매.정말 호랑이 할머니의 모습같네요.그래서 그런지,할아버지네 식구들이 키가 다들 큰것 같습니다.
어린시절 자주 동해 용정에 가서 자주 지내게 되었는데, 할머니댁 문풍지의 작은 유리구멍속의 멀리보이는 도로의 불빛만이 기억이 많이 나네요 그때는 할머니댁에 가면 무지 심심했었던것같아요.나의 친구들은 춘천에서 오락실 다니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저는 시골에서 내동생들과 함께,감(과일)따던데,뒷산에 가서 소갈비(소나무잎)줏어서 부뚜막에 앉아 방불 때우던기억만이 남아있습니다.

증조할머니가 운명하시던 날은 제가 9살이었더군요.(근데 이날의 기억은 제가 국민학교 5학년쯤인줄 알았는데,비석에 나와있는 문구로 확인해보니 지금의 초등학교 2학년이던군요)
친지모든이들이 흰색 상복을 입고, 상여를 매고 양지골로 가던 길이 생각보다 멀었던 기억이 납니다.상여소리와 구슬피게 울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어이어~디여어...]


이제는 세월이 좋아져, 이런모습은 옛전통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네요.

개인적으로,어른들인 삼촌들께서 증조할아버지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이곳에 그분들의 삶의 모습을 글로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증조할아버지호를 난사라고 한 이유에 대해 궁금합니다.

원래 어떤일을 주로 하셨은지도 궁금하고요? 사람마다 개인의 취미나 특기가 있듯이 이분은 어떤쪽으로 잘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거기서, 저의 핏줄의 유전적 특징이 어디에 숨어있는지에 대해 호기심이 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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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많이 좋아진듯 하다.

어릴적 성묘가는길은 여름에도 긴옷을 입고,계곡같은 산길을 따라 올라갔지만,

이제는 몇년전쯤인가 동해에 산불이 나서 목장가는길처럼 걸어다니기에 수월하다.

멀리보이는 동해바다의 모습은 성묘를 가러가기보다는 국립공원과 같이 등산로를 걸어다니며(샐러리맨 대부분이 운동시간이 부족하던 찰나에 간만에 건강을 위해 등산을 하니) 아름다운 풍경 또한 좋았다.

 

나 어릴적에는 동해가는길이 싫었지만(아마도 다들 알듯이, 할머니댁은 슈퍼마켓이 없어, 군것질 할거리가 너무나 없었다.기찻길까지 가야만 시장이 나와있기에 그거리는 어린시절의 나에겐 너무나 먼거리로 기억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여행을 하듯, 따스한 추억이 있어, 동해에 자주 가고 싶어진다.

 

누군들, 서울생활이 좋다고 하지만, 나처럼 촌아이는 고향의 농촌풍경의 멋스러움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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