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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고모 손자(심명옥 아들)
동희가 피아노를 독일에서 전공하고있어요. 여자친구랑 피아노 음악방송을 개설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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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1년 5개월간 교제한 연인과 결혼 준비를 밟아가던 중 여성의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할아버지는 남성에게 본관을 물었고, 경주 김씨라는 대답을 듣자 버럭 화를 내면서 ‘우리는 서경 정씨라서 혼인할 수 없다’고 폭탄 선언을 합니다.
두 사람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장애물이 나타난 것은 고려 때 벌어진 사건 때문입니다.
서경천도운동, 묘청의 난을 두고 다툰 김부식과 정지상의 갈등이 대대로 전해지면서 이들의 결혼을 막은 것이죠.
조선 후기 심환지 가문에서 남긴 '피혐록'은 적대적 관계에 놓인 가문에 대한 기록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황당한 사건 같지만 이런 갈등 관계에 놓인 집안이 경주 김씨-서경 정씨 뿐만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엔 많은 가문이 ‘세혐록(世嫌錄)’이라는 기록을 남겨 후손에게 전했습니다.
‘세혐’은 두 집안 사이에 대대로 내려오는 미움과 원한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서로 교류도 끊고 혼인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게 되면 어느 한쪽은 사표를 내야 했습니다.
파평 윤씨 VS 청송 심씨, 갈등의 시작은 묘자리 싸움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에 소재한 파평 윤씨의 선조 문숙공(윤관) 분묘에 청송 심씨의 선조 만사(심지원) 상공 분묘가 압뇌(壓腦)돼 있어 윤ㆍ심 두 성 사이의 송사가 수백 년에 걸쳐 계속돼왔는데, 두 성 사이의 세혐으로 인한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양가의 대표가 이 증서를 작성, 각각 보관하기로 한다.”
1969년 7월 경기도 파주에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들이 모여 특별한 행사를 열었습니다.
400년 동안 묘자리를 두고 싸웠던 두 가문이 화해하는 행사였는데, 여기엔 파평군수와 파주경찰서장도 참석할 만큼 세간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유서 깊은 두 집안의 갈등은 400년 전 묘자리에서 시작됐습니다.
1614년 영의정 심지원이 고려 시대 윤관 장군의 묘 근처에 부친의 묘를 만들고 주변을 집안 묘역으로 조성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윤관 장군이 죽고 500년이 지난 이 때는 묘비가 사라지고 무덤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뒤늦게 윤관의 후손들이 조상 묘자리를 찾겠다며 심지원 부친의 묘 주변을 파헤쳤고, 이를 본 청송 심씨 측이 반발하면서 400년이 넘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에도 난제였습니다.
심씨 문중의 고발로 고양군수가 조사에 나서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파평 윤씨와 인척이라는 이유로 결국 송사를 담당하는 것은 피했습니다.
그러자 경기감사는 파주목사와 교하군수에게 조사를 지시했는데, 이들 역시 파평 윤씨 집안의 인척이라며 판결을 기피했죠.
사실 두 집안은 모두 조선시대에 왕비를 3~4명씩 배출한 명문가이고, 혈연으로 엮인 유력 가문도 많았습니다.
국왕조차 입장을 내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영조도 중재에 나섰다가 실패했고, 파평 윤씨 측 인사가 영조의 중재를 거부했다가 태형으로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2006년 파평 윤씨 측이 인근 토지를 구입해 청송 심씨에 기증하고, 청송 심씨는 심지원의 묘를 기증받은 지역에 옮기는 것으로 두 집안의 다툼이 마무리됐습니다.
왕후 자리 때문에… 청송 심씨와 여흥 민씨
한편 청송 심씨는 반남 박씨 집안과도 사이가 나빴습니다.
반남 박씨와 청송 심씨가 사이가 틀어진 건 조선 세종 때입니다.
개국공신 박은이 세종의 장인 심온을 시기해 상왕 태종으로 하여금 사약을 내리게 만들었다는 의혹 때문인데요.
심온이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도 병권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벌어진 이 사건은 훗날 박은의 무고로 밝혀졌습니다.
이런 갈등 때문에 심온은 “앞으로 박은 집안과는 혼사를 맺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심씨 집안에서 전해진다고 합니다.
다만 현재 학계에선 이 사건의 배후가 태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강력한 왕권을 위해선 외척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태종은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집안을 도륙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반남 박씨(16만1000명)는 밀양 박씨(310만4000명)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소수인데 유명 인사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조선 후기엔 북학파 박지원, 개화파 박규슈·박영효 등 개혁지향적 지식인들을 배출했는데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엔 소설가 박완서, 영화감독 박찬욱, 배우 박신양·박보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또 조선 시대에 유명한 왕후들이 많이 나온 여흥 민씨는 인동 장씨와 앙숙입니다.
숙종 때 희대의 스캔들로 불린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 때문입니다.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TV 드라마로도 수 차례 만들어질 정도로 많이 다뤄져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숙종 때 왕비 자리는 당시 치열했던 남인과 서인 간의 당파 싸움과 맞물려 주인이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현왕후는 희빈 장씨에게 자리를 뺏겼다가 되찾는 일이 있었죠.
이로 인해 민씨 집안도 장씨 집안과 원수가 됐습니다.
지금도 일부 여흥 민씨 집안에선 ‘(배우자로) 인동 장씨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한편 청송 심씨와 묘자리를 다툰 파평 윤씨는 은진 송씨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두 집안은 모두 당대 기호지역(충청)을 대표하는 학자 집안이었는데,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하면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친구이자 윤증의 스승이었으니, 자연스러운 부탁이었죠.
그런데 윤증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윤선거는 과거 송시열과 다투던 남인 윤휴를 두둔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앙금을 품고 있었던 송시열은 윤선거의 묘지명에 병자호란 당시의 행적을 비난하는 내용을 남겼습니다.
묘지명은 대개 고인에 대한 찬사로 채워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윤증은 펄쩍 뛰었고, 송시열은 다시 써달라는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이때부터 두 집안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습니다.
역사에선 이 사건을 ‘회니논쟁(懷尼論爭)’이라고 부릅니다.
송시열이 살던 충남 회덕과 윤증이 살던 충남 이성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온 것이죠.
두 집안은 자연스럽게 노론과 소론의 중심축이 됐고, 이후 교류나 혼인 등을 일절 끊어버린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1908년에는 충청지역 유지들이 모여 '세혐 때문에 이웃 간에도 교류하지 않는 것이 큰 병폐'라면서 지역의 단결을 위해 송시열의 후손과 윤증의 후손이 결혼할 것을 제안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원수 집안사람 만나면 사표 제출
결혼이야 원수지간끼리 안 시킬 수 있지만 직장에서 만나면 어땠을까요.
둘 중 한 명은 사직서를 내야 했습니다.
다만 이런 경우는 하급자가 먼저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숙종 때 이조참판에 제수된 조태채는 세혐 관계였던 이조판서 김구 밑에서 일하게 되자 수 차례 사표를 썼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안전부 차관이 장관의 집안이랑 사이가 안 좋아 사표를 낸 셈이죠.
두 집안이 세혐 관계가 된 것은 50년 전 김구의 부친 김징이 조태채의 조부를 탄핵했기 때문입니다.
숙종의 만류에도 조태채가 뜻을 굽히지 않자 숙종은 "세혐이라는 것이 끝끝내 너무 지나치다"라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예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때문에 국왕은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삼국지연의』에서 오나라 무장이었던 능통과 감녕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달래기도 했지만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 심환지 가문의 '피혐록'에는 세혐 관계인 가문의 인물과 인척 사항 등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승지 김만채는 좌승지 이선부가 일찍이 그 아비 김익훈을 탄핵하였으므로, 의리상 상대할 수가 없다고 하며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삼국(三國) 때 감녕이 능조를 쏘아 죽였으나, 손권이 그 아들 능통에게 명하여 복수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물며 같이 조정에 있는 사부(士夫)로서 어찌 감히 늘 사사로이 혐의한단 말인가?
상대할 수 없다는 말은 몹시도 심히 불온하다.
속히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고 하였다. 최중태는 잠깐 출사(出仕)하였다가 바로 체직(물러남)되었다”
(『숙종실록』 29년 7월 20일)
흥선대원군은 세혐 관계였던 채동술과 홍은모를 불러 자녀를 결혼시키라고 요구했지만 두 집안은 끝내 사돈을 맺지 않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 세혐 집안의 인사가 감독관으로 참석했는데도, 시험장에서 나오지 않고 답안지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이를 비난하는 상소가 빗발치기도 했습니다. .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사라지고 족보와 가문이 덜 중요해지긴 했는데 그렇다고 힘이 없는 건 아닙니다.
얼마 전 황희석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이 페이스북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남명 조식 선생의 직계후손이라고 주장했다가 남명 조식의 진짜 후손 측에서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한 일이 있었죠.
황 최고위원은 그 전에도 조국 전 장관을 조광조에 비유했다가 한양 조씨 대종회에서 “한양 조씨 문중을 모독하지 말라”며 사과를 요구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토록 무리하게 조선시대 유명 가문과 조 전 장관을 연결지으려 했던 것은 지금도 가문의 위상이 무형의 자산으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비록 과거에 세혐 같은 부정적 유산도 있었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주는 긍정적 요인을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또 최근에는 새로운 명문가의 기준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3대가 병역의 의무를 이수한 병역명문가 등이 대표적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는데, 왕조가 아닌 민주공화정에 맞는 명문가의 기준이 더욱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출처:2020.08.09.
중앙일보 유성운·김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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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東西가 뚫렸다” 고속도로로 쏟아져나온 환영 인파
영동고속도로 개통
강원인의 삶을 가장 많이 바꿔 놓은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1975년 10월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을 들 수 있다. 산들로 가로막혀 보이지도 않던 강원도가 온전히 외부에 드러날 수 있는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남긴 '상봉집(三峰集)'에는 강원도 북부와 함경도를 잇는 철령고개를 지나면서 남긴 그의 시(詩) '철령(鐵嶺)'이 실려 있다.
그는 철령고개를 지나면서 높고 험한 산세를 두고 '칼날' 같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바라본 강원도의 모습에 대해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해천동망정망망(海天東望正茫茫). “동쪽 하늘과 바다는 아득하다”는 뜻이다.
동해~서울 3시간30분 획기적 단축
'강원도=오지' 등식 바뀌기 시작해
경제· 사회· 교육 균형발전 전기 마련
철령은 서울의 북쪽 관문이었고,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강원도를 '관동'이라고 불렀는데 선인들이 생각하는 강원도에 대한 거리감은 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득'한 곳, 그 자체였다.
일제강점기 강원도에도 철길이 놓이기는 했지만, '강원도=오지'라는 등식을 조금이라도 바꿔 놓은 데는 영동고속도로의 공(功)이 거의 절대적이다.
영동고속도로는 4년여에 걸쳐 완성됐다.
1971년 12월 신갈분기점과 새말나들목 구간이 1차로 먼저 개통됐고, 4년 만에 새말나들목을 지나 대관령, 강릉 구간에 이르는 2차 구간이 완공된 것이다.
정부가 1968년 IBRD(세계은행)의 차관을 얻어 진행하려던 공사가 차관 도입의 지연으로 공사가 미뤄지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당초 계획보다는 늦어진 개통이었다.
무엇보다 2차 공사 구간인 새말~강릉 구간의 공사 상당수가 산악지대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건설 일꾼들은 말 그대로 사투를 벌여야 했고 비로소 우리나라 일곱 번째 고속도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고속도로'라기보다는 왕복 2차로 자동차 전용도로에 더 가까웠지만 당시 강원도가 거는 기대감은 상당했다. 그동안 산에 가려 접근할 수조차 없었던 미지의 땅 강원도가 그 속내를 드러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영동고속도로 개통식이 열린 1975년 10월 14일 이후 강원일보를 들여다보자.
15일자 1면에 실린 기사 내용에는 개통된 영동고속도로의 거리와 사용된 예산 등이 상세하게 나온다.
기사 중간중간에는 구호 같은 작은 제목들이 눈길을 끈다.
'嶺東開發에 活力線(영동개발에 활력선)', '설악·오대산·경포·낙산 등 관광개발 촉진', '경제·사회·교육·문화 등 균형발전의 전기' 등이 그것.
그중에서 가장 와닿는 제목은 사진 제목으로 나온 '東西가 뚫렸다!…'이다. 두말 필요없는 외침이었다.
16일자 신문에도 고속도로 개통에 대한 소식은 이어진다.
개통식 날 주민들의 반응을 소개하며 '영동일대 주민들 경축 일색'이라는 제목과 함께 오색풍선이 하늘을 수놓았고 대관령 정상까지 인파 물결이 이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또 동해에서 생산되는 싱싱한 생선이 3시간30분 만에 서울의 시장에 운송될 수 있고 서울의 주말 레저 인구가 관광을 할 수 있게 된 점 등을 들며 '유통구조'와 '생활구역'이 서울과 밀착하게 됐다는 다소 과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당시 8시간30분 걸리던 거리를 5시간이나 단축한 것이니 장밋빛 전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특집기사는 개통 10일이 지난 후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24일자에는 '신비의 베일을 벗는 오대산'이라는 제목으로 고속도로 개통 이후 오대산에 많은 관광객이 몰릴 것이라는 기사를 한면에 걸쳐 실었다.
그 예측은 맞아들어 오대산과 월정사는 사계절 관광명소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강원일보 창간 75주년 취재사진 현장 속으로/2020-7-30 - 오석기 기자·김남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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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일부자료 도난 기능 축소… 교육 활용위해 지원 절실
강릉지역의 토착 성씨 족보와 경서 등을 모아 보관해 온 ‘장보석실(藏譜石室)’이 무관심 속에 잊혀져 가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장보석실은 조선시대 부터 강릉시 대전동에 터전을 잡고 살아 온 여흥민 씨의 강릉 종손인 민영태 씨가 1938년 집 근처 바위를 깨고 돌을 다듬어 마련한 서실(書室)이다.
당시 민 씨는 강릉지역에 분포해 있는 옛 서적들의 가치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개인 가정에서 습기와 좀벌레 등으로 훼손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집 인근에 서실을 마련, 강릉 27개 성씨의 족보와 백패, 홍패를 비롯한 경서 등을 모아 일괄 보관했었다.
하지만 지난 1980년 장보석실에 보관하고 있던 족보와 도서 등의 자료를 도난 당하면서 여흥민 씨의 후손이 이에따른 책임을 지게 되자 후손들은 민씨 족보를 제외한 모든 족보를 각 문중에 나눠줌으로써 장보석실은 ‘여흥민 씨 세보(世譜) 보관소’ 정도로 의미가 축소됐다.
이에따라 강릉지역 문화계 일각에서는 장보석실을 역사 기록물의 지속적인 관리와 공유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장보석실에 대한 관심과 함께 행정적 지원 등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임영민속연구회 최기순 이사는 “장보석실은 일제시대 때 지역문화자료의 유실을 막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돌문으로 인해 화재로 부터도 귀중한 서적을 지킬 수 있었다”며 “예전에는 1년에 한번 하지(夏至)때 석실에 있는 서적을 모두 꺼내 말리며 마을 대동계를 갖는 등의 역할을 한 만큼 주변정비와 스토리텔링 발굴 등 관리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강원도민일보 박경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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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가문이 5代 걸쳐 주고받은 편지 85통 현대어로 번역해 출간
아내에게 "하옵니다"쓰며 존댓말… 가부장제 탈피한 표현들에 눈길
"여성은 조선후기 한글문화 주체, 세책가의 주요 필자와 독자였죠"
"조선시대엔 한자만 쓰다가 근대에 와서야 한글 전용이 시작됐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는 이미 한글 시대였죠.
정부 공식 문서나 양반 사대부들의 저술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한글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정창권(53)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초빙교수가 지난달 펴낸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돌베개)는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그 일가 사람들이 5대(代)에 걸쳐 주고받은 한글 편지 85통 전체를 현대어로 옮긴 책이다.
어머니가 아들딸에게,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친지의 안부를 묻고 집안 살림을 의논하는 편지에서
18~19세기 조선의 일상에 뿌리내린 한글의 면모가 드러난다.
여성들이 부지런히 편지를 주고받은 점도 특징.
최근 만난 정 교수는 "당시 여성과 소통하기 위해선 한글이 필수였다"면서 "한글이 퍼져 나가면서 조선 후기에 꽃핀 다채로운 문화의 배경이 됐다"고 했다.
조선시대 한글 소설을 전공한 정 교수는 '유물로 보는 한글의 역사'(공저) 집필에 참여하는 등 한글의 시대사를 꾸준히 연구해왔다.
붓으로 흘려 쓴 편지는 한글인데도 '번역'하기가 한문보다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한글은 말이 나오는 대로 썼습니다. 요즘 채팅 비슷하죠.
띄어쓰기도 없어서 한 문장이 한 페이지가 돼 버리기도 했습니다." 말의 의미가 시대마다 달라지는 문제도 있었다.
정 교수는 "조선 중기에 처가살이하는 남성이 본가에 다녀가는 일을 가리키던 '근친'이 후기에는 여성의 친정 나들이로 뜻이 바뀐다"고 했다.
“조선 후기 사회상을 밝히기 위해 한글 자료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위).
유배지 제주에 북어를 보내달라며 아내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아래 왼쪽)와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며느리에게 보낸 편지의 봉투(오른쪽).
해독한 편지의 행간에선 추사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다.
정 교수는 "퇴계(이황)나 다산(정약용)의 편지엔 꾸중이나 훈계가 많은 반면 추사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다.
추사의 한글 편지 40통 중 38통이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것이다.
추사는 온양 친정에 근친 간 아내와 장모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아내의 답장이 늦어질 땐 '나는 마음이 매우 섭섭하옵니다'라며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주도 유배 시절엔 옷이며 반찬을 아내에게 부탁하는 편지가 많다.
'대님을 하나 접어 보내게 하옵소서' '북어도 좋은 것으로 두어 쾌 부치게 하옵소서'.
정 교수는 "이를 두고 추사가 까칠한 성미였다고도 하지만, 아내에게 시시콜콜한 일까지 얘기하면서 애정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또 "추사는 아내에게 '하옵소서'라고 극존칭을 썼다"며 "당시 여성들도 존중받았다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조선 후기가 극단적 가부장제 사회였다는 통념은 일제 시대에 '조선시대 여자들은 고분고분했는데 요즘 여자들은 드세다'는 식으로 신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꾸며낸 허구라고 봅니다."
조선 후기의 여성은 마냥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며 한글 콘텐츠의 생산·유통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정 교수의 견해다.
예컨대 세책가(貰冊家·도서 대여점)의 인기 콘텐츠였던 한글 소설은 주요 필자와 독자가 여성이었다.
"대표적 인기작이었던 '완월회맹연'은 소론 집안의 '이씨부인'이 썼습니다.
소설을 써서 최고의 영예를 얻겠다는 포부까지 남겨놓았죠.
대갓집 여성들이 180권씩 되는 이런 소설들을 요즘 TV 연속극 보듯 즐겼습니다."
정 교수는 "여성과 소통하기 위해 남자들도 예닐곱 살이면 교양으로 한글을 깨쳤다"면서 "한글이 보편화되면서 서민층에서 영웅소설이나 판소리계 소설 같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의학책·요리책처럼 대중적 전파가 필요했던 실용서들도 한글로 많이 나왔습니다.
이런 한글 자료 중엔 아직 연구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하면 지금의 상식과는 또 다른 시대상이 드러날 겁니다."
출처: 추사 한글편지 엮은 정창권 교수 2020.03.19 조선일보 채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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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퇴에서 발굴된 청동가면상. 길이 1m38, 폭 85㎝, 높이 66㎝ 무게 71.1㎏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이다.
이번 ‘삼성퇴’ 특별전에 소개된다.
“올해 국립중앙박물관이 준비하고 있는 전시 중 볼만한 것이 뭐지요?”
“아무래도 삼성퇴 특별전이 아닐까요.”
얼마전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와 올해 열리는 특별전 이야기를 나누던 기자의 귀가 번뜩 뜨였다.
말로만 듣던 ‘삼성퇴’ 특별전이라. 필자는 오래전에 읽었던 삼성퇴 관련 단행본을 다시 들춰보았다.
삼성퇴 특별전은 올해 7월21일부터 10월2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삼성퇴와 삼성퇴 관련 유물이 120점 오는데, 이중 24점이 한국의 국보에 해당되는 ‘1급 유물’이란다.
해외에 대여되는 중국유물의 경우 국보가 20%를 넘을 수 없다는 대여 규정이 있다고 한다.
1990년대에서 삼성퇴 특별전을 개최하려고 중국측과 접촉했지만, 중국측이 대여료로 1억5000만원을 요구하면서 무산된 바 있다.
이번에는 대여료가 한 푼도 없다.
중국 측도 ‘교류전’의 형식으로 한국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측은 한국의 역사를 통사로 볼 수 있는 유물들을 지목했단다.
청동으로 된 사람머리상. 높이 29㎝ 폭 20.6㎝ 무게 4.483㎏이다. 처음 삼성퇴 유적에서 이런 청동머리상이 확인되자 발굴단원들이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삼성퇴 박물관
.
■세 개의 금성과 조각달
그렇다면 삼성퇴(三星堆)가 대체 무엇인가,
중국 발음으로는 ‘싼싱두이’지만 이 기사에서는 쉽게 ‘삼성퇴’라 하겠다.
혹자는 한국의 대표 기업인 삼성과 관련이 있느냐고 짓궂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물론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삼성퇴는 양쯔강(揚子江) 중류인 쓰촨성(四川省) 광한시(廣漢市)에서 서북쪽인 야쓰허(鴨子河)와 마무허(馬牧河) 등의 두 강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유적 이름이다.
왜 하필 삼성퇴일까.
드넓은 평지 위에 유독 두드러진 황토 둔덕 3곳이나 우뚝 솟아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에 세개의 금성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강 건너에는 웨량만(月亮灣)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조각달 같다.
그러니 멀리서 보면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개의 금성이 고운 조각달과 어우러진 느낌을 준다.
그 덕분에 청나라 가경 연간(1796~1820년)에 편찬된 <한주지>는 이곳의 경관을 ‘삼성반월(三星伴月)’ 혹은 ‘삼성반월퇴’라 했다.
훗날 이 일대에서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지면서 ‘삼성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남아있는 높이 40.2㎝, 길이 23.3㎝, 폭 20㎝, 무게3.046㎏인 청동상. 출토된 청동상은 각기 다양한 형태의 헤어스타일과 얼굴을 자랑하고 있다.
■사람 머리 청동상에 벌벌 떨다
삼성퇴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웨량만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옥으로 만든 유물이 나와 주목을 끈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삼성퇴에는 벽돌제조공장이 들어서 벽돌제조에 쓰일 흙이 마구 파헤쳐지고 있었다.
뜻있는 고고학자들은 1980년부터 삼성퇴 발굴을 시작해서 다량의 옥기와 석기 등을 품고 있던 무덤들을 발굴했다.
학자들은 삼성퇴 유적의 연대를 중국 하나라(기원전 2070~1600)와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와 비슷한 3000~4000년 전으로 판단했다.
1986년 7월18일 오후 벽돌공장 노동자 2명이 벽돌제조용 흙을 파내려고 곡괭이를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컹’하는 소리와 함께 흙 속에 있던 돌 부스러기가 위로 튀어올라 두사람의 얼굴과 종아리를 때렸다.
노동자들은 “큰일 날 뻔 했다”고 투덜거리면서 바닥을 살폈다.
뭔가 단단한 물건 위에 흙이 엷게 덮여있었다.
조심스레 흙을 치워보니 너비 20㎝ 길이 40㎝ 가량의 큰 칼 모양의 옥석이었다,
본격발굴이 시작되었다.
7월26일 이 구덩이에서 중국 상나라 전기 시대에 해당되는 대형 청동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란 발굴단원들이 사진을 찍고 한바탕 난리굿을 펼치는 그 순간 어디선가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기 봐요. 아! 이건 사람 머리예요.”
사람들이 덜덜 떨면서 발굴 현장에서 뛰쳐나갔다.
정신을 차린 발굴자 중 한사람이 그 현장에 찾아가보니 과연 청동으로 만든 사람머리상(靑銅人頭像)이 보였다.
실물 크기와 비슷했다.
사람머리상은 머리부분은 입 구(口)자 모양이었고, 마늘쪽 같은 코에 콧대가 두드러졌다.
두 눈에는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청동 사람머리상은 한 둘이 아니었다.
신화 속에 나타나는 영웅호걸처럼 각각 다른 자태와 품격을 지닌 청동인두상이 속속 발굴됐다.
삼성퇴 유적에서 발굴된 가면. 대부분의 얼굴상이 쓰고 있다. 순금판으로 압축한 황금가면이다.
■황금지팡이 소문에 1만명 몰려와
다음날인 27일에는 더욱 놀라운 유물이 나왔다.
발굴단이 찾아낸 것은 대나무 껍질 모양의 황색물체였는데, 불빛 아래 반짝 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황금유물이 나왔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졌다.
황금 허리띠와 황금갑옷, 황금투구를 찾아냈다느니, 금으로 만든 사람(금인·金人)이 발굴됐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나중에는 용맹한 금인(金人) 무사가 황금 투구와 갑옷을 걸치고, 황금 말을 탄채 황금빛 뱀모양 창을 들고 구덩이에서 튀어나와 삼성퇴를 몇바퀴 돈 뒤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번졌다.
이와함께 무장한 공안(경찰)이 신비로운 괴물을 잡으려고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까지 이어졌다.
현장은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고자 한 주민들로 북적였다.
오후들어서는 1만명 정도가 현장으로 몰려왔다.
공안은 물론이고 재빨리 구성한 민병들이 현장을 보호했다.
이 유물은 전체 길이 1.42m, 직경 2.3㎝, 463g 정도였다. 전체가 황금은 아니었고 나무 막대기에 황금을 얇게 두들겨 붙인 것이었다.
이 유물은 금장(金仗), 즉 금지팡이로 판단됐다.
보통 금지팡이는 나라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알려져왔다.
그렇다면 중국 중원의 왕조인 하· 상· 주가 모두 구정(九鼎), 즉 주변 9개의 부족이 비용을 들여 만든 청동 솥을 왕권의 상징으로 숭상했던 것과 다른 문화가 아닌가.
고대 촉나라가 같은 시대(하 ·상) 중원문화와 서로 다른 기원과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겠다.
특히나 이런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금지팡이는 고대 이집트 파라오나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 등만이 차지할 수 있는 신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중국 서남 지역인 삼성퇴에서 왕권과 신권을 상징하는 금장이 출토되었다니….
청동으로 만든 서있는 사람상. 전신을 다 갖춘 인물상이다.
옷자락에 4마리 용이 새겨져있다.
용은 후대에 황제나 임금을 상징하는 신령한 동물이다.
또 무언가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청동으로 만든 서있는 사람상. 전신을 다 갖춘 인물상이다.
옷자락에 4마리 용이 새겨져있다.
용은 후대에 황제나 임금을 상징하는 신령한 동물이다.
또 무언가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눈알 튀어나온 청동상
14일간이나 진행된 발굴결과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진 구덩이에서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다.
발굴유물은 청동제 사람머리상 13점과 청동 얼굴상, 앉아있는 사람상, 청동구슬, 청동술잔, 청동단지, 청동쟁반 등 청동기 178점과 다양한 옥기류 429점, 석기류 70점, 도기류 39점, 조개류 124점, 금기류 4점 등이었다.
다시 8월16일 재개된 터 발굴에서 다시 한번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엄청난 크기의 청동가면이 나왔다.
훗날 복원된 청동 가면은 높이가 65㎝, 너비가 138㎝, 두께 0.5~8㎝였다.
두눈은 옆으로 길고 안구는 심하게 과장되어 직경만 13.5㎝가 되며 눈언저리가 16.5㎝ 정도 돌출되어 있었다.
청동가면과 함께 세밀하게 조각된 다양한 청동유물이 출토됐고, 역시 각양각색의 청동 사람머리상도 나왔다.
이밖에도 크기가 각기 다른 청동 얼굴상과 눈알이 톡 튀어나온 짐승 얼굴 청동상과 청동신수(神樹)등 기이한 유물 투성이었다.
이밖에도 상아(67점)와, 상아구슬(120건), 조개껍질(4600건) 등도 나왔다
1호 구덩이에서 나온 황금지팡이. 길이가 1m43㎝이고, 무게는 463g이다.
■중원과 사이(四夷)의 차별
그런데 중국인들이 어떤 이들인가.
중국인들은 중국 문화의 발상지로 황허(황하·黃河) 중상류의 남북 양안을 ‘중원(中原)’이라 했다.
중화의 중심지이자 중국문명의 요람이 바로 중원이라 자랑했다.
이곳은 바로 하나라(기원전 2070~1600년)와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 주나라(1046~252) 등이 차례로 문명을 일군 곳이라 했다.
현재의 허난성(하남성·河南省), 싼시성(산서성·山西省) 등과 산둥성(산동성·山東省), 허베이성(하북성·河北省)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중국학계는 특히 이 황허 중류에서 이른바 양사오문화(仰韶文化·기원전 5000~기원전 3000년)를 중국문명의 뿌리라 했다.
그러면 그외의 지역은?
그저 사이(四夷)라고 해서 사방 4곳의 오랑캐 땅이라 했다.
예컨대 중원의 동쪽에는 동이(東夷·활 잘쏘는 동쪽사람), 서융(西戎·창쓰는 서쪽 사람들), 남만(南蠻·벌레가 많은 남쪽), 북적(北狄·이리가 많은 북쪽)으로 낮춰불렀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자부심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삼성퇴 유적 전경. 멀리서 보면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개의 금성이 고운 조각달과 어우러진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곳의 경관을 ‘삼성반월퇴(三星伴月堆)’라 한다.
■오랑캐의 소굴에서 속속 밝혀지는 문화
하지만 1970년대말부터 중국 전국 각지의 발굴에서 수상한 흔적들이 대거 확인되기 시작했다.
우선 중국인들이 ‘동이의 땅’으로 폄훼했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기원전 6000년 전 유적인 차하이(査海)에서 용 형상의 돌무더기가 확인됐다.
이 차하이 문화는 뒤에 이어지는 훙산문화(紅山文化ㆍ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의 원형이 되었다.
즉 1983년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시(朝陽市) 뉴허량(牛河梁)과 둥산쭈이(東山嘴)에서는 무덤과 제단, 신전(여신묘) 등 고대사회의 3요소를 갖춘 유구와 유물들이 대거 확인됐다.
남쪽에서는 어떠했나.
역시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양쯔강·揚子江)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량주(양저·良渚ㆍ기원전 3200~기원전 2200년)문화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훙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량주문화의 찬란한 옥기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터와 제사유적 등이었다.
중원의 중화주의가 골수에 박힌 중국학자들은 이른바 오랑캐 소굴에서 중원문화와 비슷한, 아니 중원문화를 능가하는 정교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1986년 7월18일 오후 삼상퇴에 조성된 벽돌공장 노동자 2명이 곡괭이질을 하다가 흙이 덮여있던 큰 칼 모양의 옥석을 발견했다 이 발굴을 계기로 삼성퇴 문화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원숭이도 황학도 넘을 수 없는 땅
바로 그런 와중에 고촉, 옛 촉나라의 땅에서도 이른바 중국 중원과는 확연히 다른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발굴이 이어진 것이다.
사실 옛 촉나라가 어느 곳인가.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그 유명한 ‘촉도난(蜀道難)’을 보라.
“와아! 높고도 높구나. 촉도의 험난함이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구나…
땅이 무너지고 산이 꺾이고 장사가 죽자 하늘사다리며 잔도가 고리처럼 이어졌네….
황학 날아 넘어가지 못하고 원숭이 건너려 해도 매달릴 것 걱정하네…
촉도의 어려움이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운지라 서쪽 바라보면서 길게 탄식만 하누나.”
‘촉도난’의 내용처럼 촉나라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옛 촉, 즉 고촉(古蜀)와 관련된 사료는 그리 많지 않다.
촉나라의 전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기술한 서한 시대 양웅(기원전 53~기원후 18)의 <촉왕본기>이다.
“촉나라 땅에서 가장 먼저 왕으로 칭해진 자들은 잠총, 백관, 어부, 두우, 개명 등인데 당시 촉나라 백성들은 상투를 늘어뜨리고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했으며, 문자도 모르고, 예악도 존재하지 않았다.”
옛 촉국은 주나라 무왕이 상(은)나라 마지막 군주 주왕을 정벌하기 전 목야에서 회맹한 8개 부족 중 하나였다.
기원전 7세기에는 촉왕 두우가 황제를 칭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농토를 개척했다.
이로써 촉은 서남 지역의 대국이 됐다. 그러나 촉나라는 기원전 316년에 멸망하고 만다.
청동신수. 신수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나무 사다리로 인식되어 왔다.|삼성퇴박물관
■황금똥 싸는 황금소를 잡아라
진나라 혜문왕(기원전 337~311년)은 쓰촨 지역을 정벌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어 고민 중이었다.
이때 사마착이라는 신하가 나섰다.
사마착은 “나라가 부유해지려면 광활한 토지자원이 뒤를 받쳐야 한다” 는 등의 이유를 들어 서촉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황학도 원숭이도 넘지못했다’는 촉나라를 어떻게 정벌한단 말인가. 진나라는 꾀를 낸다.
“우리가 황금 똥을 싸는 황금 소를 만들어 사신을 통해 촉나라 왕에게 전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아니나다를까.
이 소문이 촉왕의 귀에 들어갔다.
황금똥을 누는 황금소를 차지하겠다는 헛된 꿈에 부풀었던 촉왕은 5명의 장사를 보내 현재 지앤먼관(劍門關)을 통하는 길(금우도·金牛道)을 뚫었다.
그러자 진나라 군대는 길을 뚫은 촉 장사들을 죽이고, 그 길(금우도)을 통해 거침없이 사천 지방을 정복했다.
■상나라 저 너머에서도 또다른 문명이…
삼성퇴 유적의 연대는 대략 5000년 전부터 3000년 전으로 편년된다.
그 궁벽한 땅에서 신석기시대 초기에서 중국인들이 그토록 신줏단지처럼 모셨던 중원의 하· 상· 주(초)까지를 아우르는 기나긴 세월동안 문명을 일굴 줄 누가 알았으랴.
물론 신기한 것은 ‘원숭이도 황학도 넘기 어려웠다’는 관문을 뚫고 촉-중원 문화 사이에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삼성퇴에서 출토된 청동예기 가운데 술그릇과 다양한 옥제품은 당대 중원의 상나라 문화와의 교류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교류의 흔적은 제한적이다.
반면 이곳에서 발굴된 다양하고도 엄청난 규모의 청동유물은 중국 중원은 물론이고, 그외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높이가 2m62㎝에 달하는 청동입상(서있는 청동상)과 폭이 무려 1m38㎝에 이르는 청동가면, 높이가 최고 3m95㎝가 되는 청동신수(神樹) 등은 보는 이를 전율에 휩싸이게 한다.
특히 2호 구덩이에서 찾아낸 대형청동상(높이 2m62㎝)은 무게가 180㎏이나 되며, 과장되게 큰 두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2호 구덩이에서 출토된 청동상의 소인상들의 경우 옷깃이 겹쳐지지 않은 웃옷을 입거나, 무릎을 꿇거나 하는 모습인데, 이는 신분의 차이를 뜻한다.
또 사람 얼굴 형상의 청동인두상도 모두 57점이나 나왔다.
이 얼굴상을 첫 발견한 발굴단원이 벌벌 떨었다는 바로 그 유물이다.
형태가 엄청 다양하다.
정수리가 평평하고 머리카락을 뒤로 땋은 것, 평평한 머리에 모자를 썼거나 화(回)자 무늬의 관을 쓴 것,
변발을 머리 뒤에 둘둘 감거나 머리 뒤로 나비모양의 비녀를 꽂은 것, 양쪽에 뿔이 달린 투구를 쓴 것 등등….
삼성퇴에서 확인된 청동기룡수면상.
기룡은 파충류를 일컫는 말이지만 중국 순 임금의 신하인 기(夔)와 용(龍)을 일컫기도 한다.
기는 음악을, 용은 간언(諫言)을 담당했다.
훌륭한 신하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이 짐승얼굴상(수면상)은 상나라 시대의 도철(괴물)상과 사뭇 달라 촉나라의 독특한 문화로 운위된다.
삼성퇴에서 확인된 청동기룡수면상. 기룡은 파충류를 일컫는 말이지만 중국 순 임금의 신하인 기(夔)와 용(龍)을 일컫기도 한다.
기는 음악을, 용은 간언(諫言)을 담당했다.
훌륭한 신하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이 짐승얼굴상(수면상)은 상나라 시대의 도철(괴물)상과 사뭇 달라 촉나라의 독특한 문화로 운위된다.
■돌출이마와 하늘사다리
그런데 더 특별히 주목해야 할 유물은 바로 대부분의 얼굴상이 쓰고 있는 가면이다.
1·2호 구덩에서는 순금판으로 압축한 황금가면들이 여럿 확인됐는데, 고대 촉나라 사람들은 왜 이런 가면을 끈 청동상을 제작했을까.
신비롭기 그지없다.
또 특이한 유물은 반원형의 가면형태로 출토되는 이른바 얼굴상이다.
모두 20점이 출토됐다.
얼굴의 형태가 다양한데, 어떤 얼굴상은 눈썹과 안구는 검은색으로. 입술은 붉은 색을 칠하기도 했다.
어떤 가면상은 폭이 1m38㎝나 되고, 안구가 뚜렷히 돌출했으며, 양쪽 귀가 지극히 과장된 짐승 귀만큼이나 크다. 또다른 가면상은 새의 날개와 꼬리 모양의 말린 뿔, 즉 사람과 짐승(새)의 특징을 융합한 가면상도 있다.
또하나 의미심장한 유물은 청동신수(신령스러운 나무)이다.
그런데 ‘신수(神樹)’는 하늘과 인간의 교류를 의미하는 나무이다.
<회남자> ‘지형훈’을 보면 “여러 천제가 오르내리는 곳이 바로 건목(建木)”이라 했다.
건목은 뿌리가 휘감기고 줄기가 엉켰으며 잎이 무성한 통천신수인데, 신기한 하늘 사다리라 했다.
단적인 예로 고대 제왕인 복희씨와 곤륜 등이 사다리로 하늘세계에 올랐다고 한다.
이와같은 상징물의 주인공은 하늘과 땅을 소통시키는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이 아닐까.
‘왕(王)’자가 바로 하늘(一)과 땅(一)을 이어주는 사람, 즉 제사장(ㅣ)을 형상화한 상형문자가 아닌가.
■깎아지른 벼랑 사이에 놓은 잔도로
촉나라 사람들이 이토록 규모가 크고도 정교한 청동기를 제작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중국인들이 그렇게 깔봤던 족속인데….
그렇다면 삼성퇴가 대표하는 고촉국의 문명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국학계는 “삼성퇴에서 나타나는 청동 술그릇과 제기그릇, 관(瓘·옥) 등은 당대 중원의 하나라 시대(기원전 2070~기원전 1600년) 것과 차이가 없다”면서 촉나라와 중원의 문화교류는 그 뿌리가 깊다고 했다.
학자들은 촉나라와 중원(하나라·상나라)은 때로는 장강(양쯔강)을 통해, 때로는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선반형태로 아슬아슬 매단 이른바 잔도(棧道)를 통해 교역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사기> ‘화식열전’도 “파촉은 사방이 가로막혀 잔도를 1000리에 걸쳐 만들어 물자가 오갔다”고 기록했다.
촉국은 동시대의 중원문화를 일부 받아들였지, 결코 동화되지는 않았다.
중원은 물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하고도 다양한 청동인물상과 가면상, 가면 등이 그것을 웅변해준다.
예컨대 삼성퇴 출토 금지팡이(금장·金仗)는 권력자만이 지녔던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반면 중원이라는 하·상·주는 모두 구정(九鼎), 즉 주변 9개 부족의 비용 갹출로 만든 청동 솥을 왕권의 상징으로 받들었다.
■수레바퀴론
한때는 오랑캐의 소굴로 손가락질 당했던 중국변방에서 중원문화에 버금가는, 아니 능가하는 문화가 속속 출현하자 중국학계는 호떡집에 불난듯 했다.
결국 잠시 패닉에 빠졌던 중국학계는 결국 ‘통고적(痛苦的·쓰라린) 아픔’ 을 겪으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황허 중류는 중국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중국 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우선 신석기 시대인 ‘양사오 문화’와, ‘훙산문화’, ‘량주문화’, 그리고 청동기 시대인 상나라와 고촉국 문화의 관계를 재설정했다.
쑤빙치는 “북에서 훙산문화, 남에서 량주문화가 차례로 중원으로 몰려와 중화대지의 4000~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또 “(고촉국과 같은) 다른 지역의 문화도 각기 독자적인 특징과 경로로 발전해서 중원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이것을 수레바퀴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러 곳의 문화가 수레바퀴 살처럼 한가운데로 모여 화려한 중국문명을 꽃피웠다는 것이다.
뭐 돌이켜보면 황허 유역에서만 문명이 발달했다는 주장인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중화주의’였다.
왜냐면 중국대륙에는 황허만 있나. 양쯔강과 랴오허 유역을 터전으로 삼은 각각의 문명이 있었을 것이 불문가지였을테니까….
삼성퇴는 바로 중국문명의 기원론이 일원론에서 다원론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수천년동안 뒤집어쓴 오랑캐의 오명을 벗은 삼성퇴 유물을 볼 수 있다니 벌써 기대가 된다.
<참고자료>
황젠화, <삼성퇴의 황금가면>, 이해원 옮김, 일빛, 2002
웨난, <삼성퇴의 청동문명-사라진 고대왕국, 고촉국의 신비>, 2002
안신원, ‘사천 삼성퇴 제사갱 유적의 성격에 대하여’., <역사와 사회> 4권, 한국샤머니즘 학회, 2002
김선자, ‘도상으로 본 중국신화-암각화에서 삼성퇴까지’, <중국어문학논집> 제40권, 중국어문학연구회, 2006
출처: 2020.02.1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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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강원도 정신의 진수, 본태는 자력갱생, 자급자족"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경제난 정면 돌파전을 '강원도 방식'으로 할 것을 제시했다.
일종의 '롤 모델'을 제시한 셈이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9일 '정면 돌파전과 강원도 정신'이라는 제목의 정론을 실었다.
노동신문의 정론은 중요한 정치적 메시지를 내부적으로 전파할 때 활용된다.
신문은 "사회주의 강국의 위대한 승리를 성취해야 할 이 시기에 우리 당은 강원도를 본보기, 기수로 내세웠다"라고 밝혔다.
신문은 강원도가 당 창건 75돌을 맞는 올해 10월까지 6개의 군민발전소와 원산온실농장, 원산양어사업소, 평강가죽이김공장, 송도원통조림공장, 매봉산의료용소모품공장, 원산기초식품공장, 갈마바닷가양식사업소를 건설할 것이라며 "경제 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에서 큰 걸음을 내 짚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보도는 강원도에 집중되고 있는 경제 관련 건설 사업의 성과를 다른 도에서도 따라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후 마식령스키장과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등 강원도 일대에 대규모 관광지를 조성하고 있다.
'강원도 정신'이라는 말은 김정은 위원장 시대의 경제 발전 구호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김일성 주석은 '천리마 운동'을 경제 발전의 구호로 삼았다.
그는 1956년 12월 당 전원회의에서 '자력갱생의 혁명정신'과 '혁명적 군중노선'을 제시한 후 강선제강소(현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찾았다.
이를 계기로 '천리마 운동'이 본격화됐다.
당시 천리마 운동이 제안된 배경도 경제난 때문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강계 정신'을 구호로 내세웠다.
북한이 1990년 중후반 고난의 행군을 겪던 시절 자강도는 가장 모범을 보인 지역으로 꼽혔다.
강계시는 자강도의 대표 도시로, 1998년 2월 노동신문은 사설을 통해 처음으로 '강계 정신'을 본받을 것을 주장했다.
강원도 정신은 지난 2016년 12월 처음 제시됐다.
대북 제재의 심화 국면이던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당시 북한이 '자력갱생의 창조물'이라고 지칭한 원산군민발전소를 시찰했고 그 뒤 북한 매체에서 강원도 정신이 등장했다.
신문은 이날 정론에서도 "강원도 정신으로 돌진할 때 정면 돌파전의 승산은 확고하다"라며 "적대세력들의 면상을 후려갈기는 강원 땅"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또 "우리 원수님(김정은 위원장)께서 '전 당이 따라 배워야 한다'라고 하신 강원도당위원회의 사업에 본보기적인 것이 많다"라며 "그중에서도 기본 부서들과 경제 부서 사이의 배합 및 협동작전이 원활하다는 것이 좋은 점"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강원도는 김정은 위원장의 고향으로 파악되는 원산이 위치한 곳이다.
일각에서는 '강원도 정신'의 탄생 배경으로 이 같은 점을 지목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간 척박하다는 이유로 개발에서 밀린 강원도가 자력갱생의 시기에는 성과를 부각하기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분석도 있다.
신문도 이날 "사실 강원도는 우리나라에서 발전 조건이 제일 불리한 지역"이라며 "그런 강원도가 든든한 뱃심을 가지고 비약의 보폭을 줄기차게 내 짚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력갱생의 덕"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올 들어 정면 돌파전을 선언한 뒤 지속적으로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경제 발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북미, 남북대화는 일단 후순위로 밀린 모양새다.
이날 정론의 보도로 봤을 때 북한은 한동안 대외 행보를 중단한 채 정면 돌파전의 '주타격전방'으로 내세운 농업이 본격화되는 봄철까지 강원도 정신을 거듭 부각하며 내부 결속 및 경제 행보만 이어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국경을 사실상 폐쇄하는 조치를 내린 북한은 정책 결정에 있어 대외적 요인이 차단된 이번 국면을 내부 결속에 집중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출처:(서울=뉴스1)서재준 기자 입력 2020.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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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뉴스에서 재밌는 기사가 나왔네.강원도 사람으로 난 듣기는 좋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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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서 역사 해설하며 연 9천만원 지원받는 '황실 후손'
부실한 법적 근거, 회당 100만원 역사 강의
무상 임대로 한옥민박 지내며 생활
"조례 포괄적으로 적용한 문화 활동 산업"
"개인에게 과도한 특혜가 돌아가고 있다"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의 승광재, 전주 이씨의 조선 건국 전 사저이며 현재는 황실문화재단 이석 이사장이 지내고 있다.
한옥마을에서 역사 해설 콘텐츠를 진행하는 '황실 후손'에게 지자체가 연 9000만 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어 개인에게 과도한 특혜가 돌아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주시는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10남인 '이석'씨에게 '황손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 체험' 콘텐츠를 맡기고 있다.
'황손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 체험' 사업비 구성 및 집행 계획에 따르면 전주시는 이 이사장에게 활동비, 명사 강사비, 물품구입비, 홍보비, 교재 인쇄비 등 총 7000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특히, 이 이사장의 1회당 강의료는 100만 원으로 전주시는 '역사이야기 활동비'로 연간 360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동시에 이 이사장에게 '명사 강사비'(1명) 명목으로 2000만 원을 추가 지급하고 있다.
전주시 지방 보조금 관리 조례' 상 이 이사장에게 회당 백만원씩 강사비를 지급할 법률상 규정이나 국가 지정 여부, 여타 조례에 따른 지출근거는 불명확하다.
이에 연간 7000만 원의 예산 편성을 뒷받침할 법적 근거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전주시는 2000만 원의 예산을 편성해 공공요금(전기· 수도 ·가스)과 업무지원비를 전주문화재단에 지급하여 이 이사장이 한옥민박인 '승광재'와 '삼도헌'에 무상으로 머물며 관리토록 하고 있다.
승광재는 조선 왕조 발상지이자 현재는 한옥민박으로 평일 7만원, 주말 11만원의 숙박료를 받고 있다. 승광재와 삼도헌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전주문화재단이 가져가고 있다.
전주문화재단의 출연금 사업인 승광재 운영지원 계획, 황손의 거주 공간과 체험을 위해 공공요금과 운영비 등 2천만원을 출연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사진=전주문화재단홈페이지 갈무리)
강의료 선정과 지원이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에 전주시는 조례를 포괄적으로 적용한 것이라고 답했다.
전주시 관계자는 "황손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 체험은 문화적 활동으로 '문화예술진흥에 관한 조례'를 포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며 "한옥마을에 대한 문화 활동 사업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업이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진행되도록 점검하고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덧붙였다.
전주시 서난이 의원은 "인건비나 강의료에 맞는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위촉해서 인건비를 선정하지도 않았다"며 "개인에 대한 특혜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명인명가'도 조례를 만들어 월 1000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며 "황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조례도 없이 법 위에서 지원을 해줘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 "(전주시)의회에서 과거부터 승광재 공간을 쓰는 문제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며 "법과 원칙을 지키는 태도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출처:[전북CBS 송승민 기자]
#02.
나에 대한 비판도 여론이다. 시간이 지나면 내 진심을 알게 될 거다.”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78)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 최근 측근들에게 한 말이다. 전북 전주시가 재단에 ‘황손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 등의 명목으로 연간 9000만원을 지원한다는 소식에 특혜 논란이 일자 이 이사장이 보인 반응이다.
2004년부터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495㎡짜리 ‘민박형 한옥’ 승광재(承光齋)에 머물고 있다.
김완주 전 전북지사가 전주시장일 때 “전주를 상징하는 존재가 있어야 전주 한옥마을이 관광지로 발돋움한다”고 부탁해서다.
이 이사장은 2006년 8월 황실문화재단을 만들어 ‘조선 황실 복원 운동’을 펼치고 있다. “대통령이 있어도 상징적인 왕실을 만들어 역사· 문화· 전통으로 삼자”는 취지다.
전주시는 2010년 ‘황손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 체험’을 시작하면서 해마다 재단에 보조금을 주고 있다.
보조금은 이 이사장의 강의료와 활동비, 재단의 물품 구입비 등에 쓰인다.
이 이사장의 강의료는 1회당(4~5시간) 100만원으로 책정됐다.
이를 두고 지난해 12월 서난이 전주시의원은 “마지막 황손을 예우하고 콘텐트로 활용하려면 관련 규정을 마련해 인건비나 재단 관리비를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전주시는 “해당 프로그램은 ‘문화예술진흥에 관한 조례’를 폭넓게 적용할 수 있고, 황손 개인이 아닌 재단을 지원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조선왕조 발상지로서 전주의 위상을 높이고 전주 한옥마을의 콘텐트를 강화하는 효과가 커 지원금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온라인에서는 “계급 사회도 아닌데 지자체가 황손에게 예산을 지원하는 건 특혜”라는 반대론과 “놀면서 받는 것도 아니고, 왕실 후손이 역사 해설까지 하는데 이 정도 지원은 괜찮다”는 찬성론이 맞섰다.
재단 내부에선 “억울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이 이사장은 “일절 대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이사장은 지난달 24일 김승수 전주시장 등과 함께 저소득층 청소년 등에게 후원금 800만원을 전달했다.
그는 측근을 통해 “내가 받은 사랑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에서 매년 소소하지만 후원금을 내고 있다”며 “국민이 잘살고, 다 같이 상부상조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출처:중앙일보 김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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