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난사회모임이 있을예정이니 가족들과 다같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울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가 큽니다.
삼촌~~ 빨리 공지 부탁드립니다.^^
신문을 읽다가 읽어볼 자료가 있어 올려봅니다.
편의를 위해 전통적이지 않은 제사 음식을 쓰거나, 제사를 모아지내거나, 벌초를 생략하는 경우에 대해 성균관과 전통문화 전문가는 어떻게 생각할까?
성균관 전례위원회 서정택 위원은 "수입과일을 올린다고 해서 잘 못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교육원 유충규(60) 원장도 비슷한 의견이다.
유 원장은 "외국에서 온 것은 절대 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며 "하지만 옛날에도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맛있는 것, 좋은 물건이 있으면 가져와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렸다"고 말했다.
위 3가지 질문에 대한 이들의 견해와 해석은 이렇다.
1. 수입 과일이나 피자를 제사상에 올려도 될까?
서 위원 설명에 따르면 가례집람(家禮輯覽) 등 옛 예서(禮書)에는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적과 밥, 술 등을 놓도록 하면서 가장 앞에 과일을 두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과일의 종류에 대해서는 언급돼 있지 않다.
서 위원은 다만 "방산시물(方産時物)이라고, 그 지방에서 그 시기에 나는 과일'을 올리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조율이시(棗栗梨枾)니 홍동백서(紅東白西)니 하는 규정들도 예서에는 없는 후대 사람들이 지역에 따라 만든 말"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서 위원은 현재 많이 먹고 흔해진 바나나나 파인애플, 망고 등을 제사상에 올린다고 '불효' 이거나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가급적 국내에서 생산되는 과일을 올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밝혔다. 유 원장은 "바나나나 파인애플 등 외래 과일을 차례상에 올려도 된다"고 말했다.
좋은 물건, 맛있는 음식을 조상에게 바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나아가 유 원장은 피자와 케이크 등을 차례상에 올리는 것에 대해서도 "전통 계승이라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하지만은 않지만, 역시 같은 차원에서 보면 떡 옆에 올려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떡은 없이 케이크만 올리는 것은 '성의 부족'으로 보일 수 있는 만큼 보기에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2. 제사를 모아서 지내도 될까?
성균관 서 위원은 "옛 예서만을 근거로 해서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는 문제"라며 "형제 등 집안에서 상의해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원 유 원장도 "좋다 나쁘다 말할 문제는 아니다"라며 "시대 흐름에 따라 제사를 모아 지내도 된다고 생각한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3. 벌초를 생략해도 될까?
조상 묘 벌초는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후손들이 조상의 묘를 돌본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
서 위원이나 유 원장 모두 "벌초를 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바쁜 일상으로 직접 벌초를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도록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했다.
유 원장은 "옛날에도 조상 묘를 돌보는 비용 충당을 위해 마련한 위토(位土)를 다른 사람에게 경작하게 한 뒤 벌초 등을 대신하도록 한 예가 많다"고 설명했다.
전통문화 전문가들은 "제사든, 차례든, 벌초든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닌 조상을 기리는 마음, 정성"이라고 강조했다.
경주문화재연구소 보고서 받고도 문화재청, 언론에 미공개 뒤 건물 착공 “유적파괴·과정도 사기 가까워” 비판
“어? 이거 연못터잖아?”
2010년 3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들은 경주 황룡사터 서쪽 외곽의 황룡사연구센터(현 황룡사역사문화관) 건립 예정터를 발굴하다 눈이 휘둥그래졌다. 신라왕경의 집과 도로터가 나오리라 짐작했던 곳에서 뜻밖에도 장방형의 큰 연못터가 드러난 것이다. 연못터는 남북으로 최대 길이 33. 7m, 동서 최대 너비 22.3m에, 면적은 244평이나 됐다. 밤자갈층으로 바닥을 고르고 배수로를 틔웠으며, 정성껏 석축을 쌓은 신라 귀족의 저택 정원 일부임에 분명했다. 석축 앞에는 돌다리 부재로 보이는 귀틀석까지 나와 연못 안에 다리로 연결되는 인공섬을 쌓은 흔적까지 확인됐다. 몇안되는 경주의 신라시대 연못터들 가운데 장방형 연못은 처음 나타난 희귀 사례였다. 앞서 연구소는 1999~2005년 인근 분황사 동쪽 일대를 황룡사전시관터로 점찍고 사전 조사를 벌이다 역시 연못이 나와 건립을 포기한 바 있다. 연구소 한 관계자는 “전시관 터 자리마다 연못이 나타나 우연치곤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황룡사 역사문화관터를 발굴한 결과 드러난 신라시대 연못 유적. 네모진 방형의 연못으로 발굴갱 사이로 네모진 연못가 석축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유적 경관 훼손으로 논란을 빚고있는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이런 사연이 있는 신라 연못터 위에 2013년부터 건립되고 있다. 연구소는 연못터를 조사한 뒤인 이듬해 11월 발굴보고서까지 냈지만, 문화재청은 쉬쉬하며 건물이 착공된 뒤에도 보고서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개관시점인 내년 5월까지 황룡사 목탑 복원 모형과 출토품, 사찰 원래 모습을 가상복원한 3D 영상관 등이 들어설 이 건물은 경주시의 건립 과정에서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시 쪽은 애초 심의를 맡은 문화재위원들에게는 “가건물로 지어놓고 다시 걷어낼 것”이라고 설명해 허가를 받았다가 2013년 관람편의와 건물 안정성을 내세워 콘크리트건조물로 바꿔 재승인을 받았다.
석연치 않은 건립 경위 탓에 당시 문화재위원들이 연못유적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시 쪽의 문화유산 훼손에 눈을 감았다는 뒷말이 여전히 떠돌아다닌다.
주민들 반발도 만만치않다.
현지에 사는 조각가 김원태씨는 “도심 다른 곳은 문화재보호를 이유로 재개발을 불허하면서 이 건물만 핵심유적지에 짓도록 해준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
주민들의 민원이 계속 일고 있다”고 전했다.
국립박물관의 한 연구자도 “유적 경관을 파괴할 뿐 아니라 건립과정 자체도 사기에 가까운 졸속투성이 흉물”이라고 꼬집었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채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는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 기적비를 복원해 지역의 관광상품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고성군에 따르면 고성군문화원과 경동대 산학협력단은 최근 사명대사 기적비 복원과 관련한 계획을 군에 전달, 관계자들과 향토사학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를 개최했다.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건봉사 사명대사 기적비는 왕명에 의해 강원도관찰사 남공철이 건립했으며 비문에는 ‘건봉사는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모집한 곳이며 대사의 화상이 간직돼 있고 금가사 한벌과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등이 보관돼 있다’고 적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0여년 후인 1800년에 세워져 일제강점기인 1928년까지 현존했으나 일제에 의해 고의적으로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또 “사명대사 기적비의 존재는 초대 고성문화원장을 지낸 고 함병철씨가 지난 1986년 최초 발굴하면서 지역에 알려졌으나 3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훼손된 채 원형을 복원하지 못해 안타깝다”며 “고성지역에서 활동안 역사적 인물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고 관련 유적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고성군 등은 앞으로 지속적인 간담회 등을 통해 복원 활동을 추진하고 국도비 확보 등에 힘을 모아 나가기로 했다. 특히 사명대사 기적비 복원을 통해 건봉사 입구의 사명대사 동상과 함께 새로운 문화관광지로 조성하고 건봉사가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을 모집,훈련한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켜 나가기로 했다.
고성군 관계자는 “기적비 복원을 위해 국도비 등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지연되고 있다”며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복원 계획을 확실하게 수립, 완전한 복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때 약탈당했다가 사명대사(오른쪽)가 환수해온 석가모니 부처의 치아 진신사리. 사리 중 12과를 강원 고성 건봉사에 봉안해 두었다.
건봉사·동화사 소장 얼마 전 문화재청이 강원 고성 건봉사터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승격 지정했습니다.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합니다.
건봉사는 금강산 일만이천 봉 남쪽 끝인 향로봉 자락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520년 고구려 여인(고도령)과 중국 위나라 사신(아굴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또한 ‘염불만일회’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기도 합니다.
758년 수행승 31인과 향도계원 1280명과 함께 1만일(27년 5개월) 동안 ‘아미타불’ 염불을 외는 의식을 벌였다죠.
1만일이 되던 787년 어느 날 아미타부처의 가호로 31인의 육신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961인의 향도와 함께 극락세계로 왕생했답니다.
능파교(보물)와 불이문(문화재 자료) 같은 문화유산이 존재하고 있죠. 선조·광해군이 대를 이어 칭송한 스님 이 대목에서 저는 건봉사를 빛낸 인물에 주목합니다.
사명대사 유정(1544∼1610)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볼까요. 1593년(선조 26) 4월 12일 선조가 흥미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승장 유정의 정예병이 왜적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공을 여러 번 세웠다.
그러나 속세를 떠난 유정이 군대의 직함을 원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특별히 파격적 상을 내려… 당상관(堂上官·정3품 이상)의 직을 제수하여….” 1610년(광해군 2) 9월 28일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광해군이 애도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산인(山人) 유정은 임진왜란 때 몸을 잊고 난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으니 참으로 의승(義僧)이라고 할 만하다.
그가 죽었으니 매우 슬프다.”(<광해군일기>) 선조에 이어 광해군까지 사명대사를 극찬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1593년 4월 12일자 실록 기사의 말미에 단 사관의 촌평에 눈길이 머뭅니다. “…전란을 당해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머지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 “선승의 참뜻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 그랬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명대사는 통곡합니다.
“국왕의 깃발이 서쪽으로 향하니 궁성이 텅 비고,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길 가운데서 헤맨다….
초의(승려 자신)가 머리를 돌이키니 눈물이 그지없다.”(<사명당대사집>) 사명대사는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강원 고성 건봉사에 소장돼 있던 사명대사 관련 유물들.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와중에 융단폭격을 당해 소실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료 “나라와 백성을 등지는 것이… 불자의 도리는 아니고, 산중에서… 마음을 닦는 선승의 참뜻은 결국 세상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분충서난록>) 대사는 건봉사에서 머물면서 “지금 이처럼 어렵고 위태로울 때를 만나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고 설득하며 승병을 모았습니다.
사명대사는 그렇게 모집한 승병을 건봉사에서 훈련시킨 뒤 천릿길을 달려갑니다.(1592년 10월) “왜적이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고 길가에 송장이 서로 베고 있네. 통곡하고 다시 통곡하니 날은 저물고 산은 창창하다.
미인(국왕)을 하늘 한끝에 바라보네.”(<사명당대사집>) 그래도 전쟁이 나자 줄행랑친 임금을 ‘미인’이라고 불러주었네요. “10월… 의병이 건너가니… 칼집 속 보검은 밤중에도 울부짖네. 원컨대 왜병을 베어 성명에 보답코자….”(<사명당대사집>) 사명대사는 조련시킨 승병들을 거느리고 대동강 남쪽으로 건너가 왜적의 통로를 차단했습니다.
1593년(선조 26) 1월 벌어진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은 명나라군과 함께 모란봉의 적진을 향해 진격해 적병 2000여명을 죽였습니다.
(<건봉사 사적 비문>) “내가 나서겠다”고 담판을 자처한 스님 전투뿐이 아니었습니다.
1594년(선조 27) 들어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요.
명나라 사신 심유경(?~1597)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 사이에 강화협상이 진행됐죠.
사명대사는 선조에게 “허락하신다면 다시 싸움터로 달려나가 왜적을 몰아낼 것이고, 혹시 강화회담에 나서라고 하면 반드시 그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글을 올립니다.
마침내 사명대사는 서생포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진영에 들어가 4차례나 회담했습니다.
이때 왜가 명나라에 제안한 강화의 4가지 조건을 알게 됐는데요.
그것은
1)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2)예전처럼 교린할 것,
3)조선땅을 떼어줄 것,
4)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이었습니다.
사명대사는 펄쩍 뛰었습니다. “…조선땅을 떼어 일본에 준다고? 일본이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조선의 땅을 짓밟아놓고…. 그런 마당에 땅을 떼어줄 리가 있는가….
또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낸다? 이게 말이 되는가.” 가토 기요마사는 “명과 일본의 협상이 깨져 전쟁이 계속되면 조선 백성들은 한꺼번에 굶어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사명대사는 “조선은 예와 의에 죽고 사는 나라다. 백번 죽는 한이 있어도 명나라와 일본의 화약조건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버텼습니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는 ‘악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최근 사적으로 승격 지정된 고성 건봉사터. 한국전쟁 전까지는 642칸(속암 전각까지 766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거의 전부가 소실됐다.
/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악귀’ 가토 기요마사까지도 존경한 스님 그런 가토도 당당한 사명대사의 태도에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가토는 “내가 함경도에 있을 때 ‘강원도 금강산에 귀한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대사가 바로 그분일 것”이라면서 “이렇게 만나주니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가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답니다. 종이와 부채를 여럿 가지고 와서 사명대사의 글씨를 받아갔답니다.
사명대사는 가토에게 “옳은 일이 아니면 이로움을 찾지 말라….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 올이라도 탐내지 말라(正其誼而 不謀其利…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고 써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엔 보배가 없다. 우리나라의 보배는 바로 당신의 머리니까….” 가토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사명대사는 응수했습니다. “오직 그대의 목이 하나 있으면 조선은 전쟁 없이 편안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머리를 가장 값비싼 보배로 여긴다.”(<해인사 사명대사 석장 비문>) 이를 두고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은 “사명대사는 ‘조선이 그대의 목에 천근의 금과 1만 가구의 읍을 상으로 걸어놓았으니 어찌 보배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송운사적’)고 기록했습니다.
‘환속하면 장관시켜주마!’ 이와 같은 사명대사의 분투에 선조는 크게 감읍했습니다.
“스님인 유정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했고, 적진에서 적장과 담판을 짓고 있다.
후한 상급을 내려라.”(<분충서난록>) 선조는 그러면서 “형세가 어려운 지금 그대가 환속한다면 지방장관의 중임을 맡겨 장수로 삼을 텐데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얼마나 형세가 급급했으면 사명대사 같은 고승에게 그와 같은 염치없는 부탁을 했겠습니까.
선조는 위급할 때마다 사명대사를 찾습니다.
강화조약 결렬로 1597년(선조 30) 1~2월 사이 왜군이 재침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선조는 “유정(사명대사)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유정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비록 중이지만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다. 유정을 영남으로 내려보내… 승군을 거느리게 하고….”(<선조실록> 1596년 12월 5일) 사명대사를 향한 선조의 무한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쟁 후에도 사명대사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명대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울산 서생포에 주둔한 적진으로 들어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인다.
이때 사명대사는 조선땅을 떼어줄 것과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 왜군이 명나라에 제시한 4가지 강화조건을 알게 된다.
사명대사는 “백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본의 강화조건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버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04년(선조 37) 왜국 사신이 갑자기 조선을 방문하자 조정이 우왕좌왕합니다.
그때 국정최고기구인 비변사가 “빨리 유정에게 역마(驛馬)를 보내 불러들이자”고 건의합니다.
실록 기사를 쓴 사관이 혀를 끌끌 찹니다. “세상에 조정에 얼마나 인물이 없으면… 적의 사신이 오자 어쩔 줄 몰라 하며 하찮은 중(사명대사)의 손에 맡기는가…. 나랏일을 도모할 자가 유정 한 사람뿐이라니 아, 마음 아프다.”(<선조실록> 1604년 2월 24일) ‘뼈 때린 팩폭, 세상에 사명대사뿐!’ 사관의 한탄은 ‘뼈 때리는 팩폭’이었습니다. “유정(사명대사)이 왕년에 여러 차례 가토(기요마사)의 진영에 드나들며 가토와 협상을 벌일 때 큰소리를 치며 굴하지 않았습니다.
가토가 이를 매우 좋게 여겨 유정의 사람됨을 일본인에게 칭찬했기 때문에….”(<선조실록> 1604년 3월 14일) 비변사는 “유정이 일본에 간다면 고승으로 지목돼 왜인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사명대사는 ‘전후 처리’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적지로 떠납니다.(1604년 6월 22일) 일본인들은 도쿄(東京)를 방문한 사명대사를 보자 “저 스님이 설보화상이다”라고 환영했습니다.
‘설보화상’이란 사명대사가 일본 진영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보고 “네 머리가 보배”라고 한 것에서 비롯됐죠.
일본인들은 ‘보배를 그렇게 멋지게 설명한 스님이 어디 있냐’고 우러러본 거죠. 사명대사는 일본의 유력인사 및 고승들과 교유했습니다.
사명대사는 마침내 1605년(선조 38) 3월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성립시켜 조선의 근심을 없앴습니다.
특히 일본에 잡혀갔던 3000여명의 포로와 약탈해간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도 환수해왔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을 방문한 사명대사의 글과 글씨를 받으려고 일본의 승려와 유명인사들이 줄을 섰다.
사진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한 일본 교토 고쇼지 소장 사명대사 유묵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쪽같이 사라진 진신사리 대사가 환수해온 진신사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643년(선덕여왕 12)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불두골(머리뼈)과 불아(치아) 등 불사리 100과와 석가모니 부처가 입었다는 비라금점(붉은 비단에 금점을 찍은 가사) 한 벌을 가져왔는데요.
가져온 진신사리는 셋으로 나눠 황룡사 탑, 태화사 탑 그리고 통도사의 계단(戒壇·계를 수여하는 단)에 두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양산 통도사에 난입해 사리를 탈취해갔습니다.
1605년 약탈 사리를 환수한 사명대사는 전란의 재발을 우려해 100과 중 12과를 빼서 승군을 일으킨 건봉사 낙서암(사명대사 본사)에 봉안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도굴의 화를 입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1986년 6월 10일 민통선 이북지역이라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해 치아사리 12과를 훔쳐갔습니다.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부터 모든 도굴꾼의 꿈에 연일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었다는 겁니다.
불안해진 일당은 한 달여 만에 서울의 한 호텔에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습니다.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달아나는 바람에 안타깝게 증발하고 말았습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꾸짖음으로 일부나마 사리를 되찾은 이 사건을 ‘불사리의 이적(異蹟)’이라 합니다.
무차별 폭격에 초토화된 건봉사 건봉사의 수난사 중에 한국전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51년 5월 10일 유엔군이 후퇴하던 공산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무차별 공습과 함포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이 불탔고요.
이때 국보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모조리 소실됐습니다.
이게 다가 아니었죠.
전선이 고착화하자 건봉사 지역은 휴전 때(1953년 7월 27일)까지 2년간 처절한 고지전의 현장이 됩니다.
휴전 직전까지 벌어진 16차례의 공방전에서 수십만 발의 포탄이 떨어져 그야말로 초토화됩니다.
고비 알타이 아이막의 ‘바양 올’이라는 마을 주변에 있는 ‘수직 바위’라는 뜻의 ‘하난 하드’.
성소처럼 느껴지는 이곳에 그려진 대단위 암각화와 그 전경.
[토요판] 르포
▶ 박하선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지난 9월21일부터 이달 4일까지 중앙아시아 알타이, 고비 등을 다녀와 사진과 글을 보내왔다.
낯선 땅에서 만난 벽화를 통해 그의 작업 주제 중 하나인 한국 고대사와의 연관성을 탐구했다.
박하선 사진가는 외부인이 접근하기 힘든 티베트의 장례의식을 담은 ‘천장’ 작업으로 2001년 세계적인 월드프레스포토 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아시아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삶과 죽음, 역사와 시원을 담고 있다.
‘알타이’(Altai)라는 말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기 때문인지 낯설지가 않지만, 정확하게 어느 지역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알타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들에겐 아직 생소하다.
몽골 알타이 암각화 위치 알타이 산맥은 몽골과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하는 고지대 오지이다. 요즘 들어 이곳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학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여러 설화나 민속 등을 통해서 우리 한민족의 원류 중 하나인 ‘부여족’의 뿌리가 이곳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도 그 가능성이 조금씩 입증되고 있다. 특히 ‘알타이’는 ‘황금(金)’이라는 뜻으로 ‘신라’의 지배층이었던 경주 ‘김(金)’씨가 이곳 알타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천마총 발굴 자료 등을 통해 알려지고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생생한 고대문명의 흔적의 흔적 세계 곳곳의 고대 인류가 살았던 곳에는 그 흔적들이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알타이의 암각화도 그중의 하나다. 특히 몽골 알타이의 암각화들이 시대성과 다양성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따라서 이번 취재의 목적은 몽골 북부 알타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암각화들을 찾아 기록 촬영하는 것이었다. 몽골 알타이 산맥의 중심이라 말할 수 있는 곳은 서쪽 끝인 ‘홉드 아이막’(Hovd aimag: 아이막은 한국의 행정단위인 ‘도’에 해당)과 ‘바양얼기 아이막’(Bayan-ulgii aimag)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프로펠러가 달린 항공편을 이용해 3시간 정도 날아가 도착한 곳이 ‘홉드’다.
유네스코에 지정된 암각화군이 있는 곳은 바양얼기 쪽이지만, 그보다 먼저 동남쪽의 고비 알타이 아이막의 ‘바양 올’이라는 마을 주변 일대에 흩어져 있는 또 다른 암각화군을 찾았다.
고비 알타이 아이막의 ‘노곤 혼드’의 산 위 바위에 집단으로 그려져 있는 암각화.
몽골 북부 알타이 지역에 흩어진 암각화들을 찾아 기록·촬영 작업 사진이나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손짓 발짓으로 물으며 현장 찾아 넓은 저수지에서 바늘찾기 형국 초원·사막 지나고 산 넘어 만나는 암각화들은 그야말로 보물찾기 염소와 양, 사슴, 소, 사람 그려져 마치 현대의 회화를 보는 듯 ‘하난 하드’(수직 바위)의 일부는 오랜 세월을 견디다 못해 무너져 내렸지만 위아래,
좌우 곳곳에 빽빽하게 그려져 있어 당시에 제사 터를 비롯한 어떤 특정한 장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각화 앞에서 향토사 학자인 파슨 도르처가 안내를 하고 있다.
이곳은 수년 전 국내의 학자들이 답사를 하고 난 뒤 알려진 곳이다. 일단 그 보고서의 정보에 의존해 찾아 나서기는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길다운 길이 없고, 안내판 하나 없으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막성 지형물들이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또 말은 잘 통하지 않는데 사진이나 그림을 보여주면서 손짓 발짓으로 물어보고 싶어도 사방 천지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넓은 저수지에 빠진 바늘 찾기를 하는 형국이었다.
한참을 헤매다 다시 마을로 돌아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관공서에서 한 노인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며 그 노인이 있는 곳을 알려주기에 차를 타고 10여㎞ 초원길을 달리니 그 노인이 사는 ‘게르’가 나왔다.
향토 사학자인 듯한 파슨 도르처라는 그 노인은 일전에 국내 학자들이 왔을 때도 안내를 맡았다고 하면서 길 안내에 흔쾌히 응해줘서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각종 동물들과 마차가 등장하는 ‘하난 하드’의 암각화.
초원과 사막을 지나고 산을 넘어 만나는 암각화들은 그야말로 보물찾기였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나는 그것들은 보석처럼 다가왔다. 염소와 양, 사슴, 소, 그리고 사람 등등이 그려져 있는 암각화들은 마치 현대의 회화를 보는 듯했다.
수천년 전의 목동들에 의해 그려졌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로 산 아래쪽 어두운 색깔의 판판한 바위에 분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바위그림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사냥하는 모습은 물론이고 수레바퀴도 등장하고,
고대 목동들이 그냥 심심해서 낙서하듯 그렸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짜임새도 있고 예술성도 있어 보이는 고대 예술가들의 작품이라 해야 할 듯하다.
어떤 바위에는 집단적으로 그려져 있으면서 내용 또한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해 문자가 없는 그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카메라를 다루는 손끝이 가볍게 떨려왔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수직 바위’라는 뜻의 ‘하난 하드’라는 곳인데, 일부는 오랜 세월을 견디다 못해 무너져 내렸지만 위아래, 좌우 곳곳에 빽빽하게 그려져 있어 당시에 제사터를 비롯한 어떤 특정한 장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 시작되는 계절이라 하루해가 무척 짧다.
마을까지는 너무 먼 곳이기에 캠핑을 하기도 했지만 밤에는 눈까지 내려 너무 춥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유목민의 게르에서 그 식구들과 함께 하룻밤 신세를 졌는데 난데없는 손님맞이에도 부담없어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양얼기 아이막의 아랄 톨고이에서 만난 사냥꾼과 큰 사슴이 새겨진 암각화. 널찍한 바위에 집중적으로 갖가지 동물과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아랄 톨고이의 ‘첼링 동굴’ 안에 그려진 1만2000년 전 벽화.
“여기는 금지구역, 돌아가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암각화군들은 바양얼기 아이막에 속해 있는데 ‘차간 살라’와 ‘차간 골’, 그리고 ‘아랄 톨고이’라는 곳이다. 국립공원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와의 국경이 인접해 있는 서쪽 끝 고지대의 오지이기 때문에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국경수비대의 특별 허가를 먼저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차량 수배였다.
고비 알타이 지역에서 함께했던 운전수가 그쪽은 잘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이 계절에는 너무 위험해 갈 수 없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다른 차량을 수배하게 되었고, 몽골어가 통하지 않는 카자흐족들이 사는 곳이라 길 안내를 받기 위해서는 카자흐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에 더 많은 정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사진 한 장 구경하지 못한 무지의 상태에서 그 깊숙한 오지로 찾아 나섰다. 안내판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길조차 없어 우리가 가는 곳이 길이 되었다. 먼저 ‘차간 살라’와 ‘차간 골’을 찾아 나섰다.
어쩌다 유목민 게르가 하나씩 보이는 것이 고작이고 주변의 산에는 벌써 눈이 쌓여 하얗게 빛나고 있는 오지다.
하지만 운이 좋았는지 도중에 만난 노인 한 명이 그쪽을 잘 알고 있어 동행했다.
알고 보니 그 일대의 ‘이장’쯤 되는 분으로 암각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산을 넘고 넘어 도착한 ‘차간 살라’의 암각화는 러시아 국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하긴 그 옛날 이 암각화를 그린 당사자들은 국경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지역의 암각화들과는 사뭇 달랐다.
먼저 널찍한 바위들의 형태가 달라 보였고, 집단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내용이 좀더 풍부하였다. 거기다가 연조가 좀더 오래되어 보이는 것으로 봐서 과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느 한 바위에는 동물들 사이에 사람의 옆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어 마치 현대미술을 연상케 하는 것도 있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동물들도 큰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적어도 3500년 이상 된 것이라는데 그 많은 세월을 견디고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이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분명 시원찮은 도구만으로 그린 고대 유목민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지금 누구에게 그리게 한다고 해도 예술적 감각 없이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큰 산’이란 뜻 ‘아랄 톨고이’엔 화살 맞은 채 도망가는 동물들 거대한 뿔 사슴은 단연 압권 유네스코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곳의 그림은 12000년 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지만 안내판과 특별 보호장치 없이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워 암각화 표면의 코팅처리가 고작 유목민과 가축이 밟고 지나다녀 마지막으로 찾아 나선 곳이 ‘큰 산’이라는 뜻의 ‘아랄 톨고이’의 암각화다.
이곳은 중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오지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험한 곳이다.
도중에 만난 군인들은 허가를 받고 왔음에도 금지구역이라며 길을 막고 돌아가라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 없는 일, 통사정도 하고 억지 세금도 더 내며 위기를 넘기다 보니 암각화를 찾기도 전에 산간에서 밤이 되었다.
텐트도 챙겨 가고 먹을 식량도 있었지만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추위 속에서 야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깊숙한 오지에 다행스럽게도 유목민 집이 하나 있었다.
몽골족도 아니고, 카자흐족도 아닌 ‘투바족’ 내외가 밤늦게 난데없이 나타난 이방인들에게 서슴없이 잠자리를 내주었다.
아랄 톨고이의 알타이 암각화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찬드만 벌판엔 고대 묘지군이 있다.
이곳에서 마을주민이 ‘쿠누 초도’라 하는 사람 모양의 돌비석을 만지고 있다.
운주사 석인상과 흡사한 ‘쿠누 초도’ 두 군데로 나뉘어 있는 아랄 톨고이의 암각화는 또 달랐다.
널찍한 바위에 집중적으로 갖가지 동물들과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사냥하는 모습에서 날아가는 화살들과 화살을 맞은 채 도망가는 동물들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거대한 뿔을 가진 큰 사슴 그림이 단연 압권이다.
이곳이 예사로운 자리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네스코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암각화들은 놀랍게도 1만2000년 전쯤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 암각화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평지에 고대 묘지군이 있었다.
‘키릭수르’라 말하는 수십개의 돌무지와 ‘쿠누 초도’라 말하는 사람 모양의 돌비석이 서 있는 곳이다.
‘쿠누 초도’는 마치 전남 화순 운주사의 석인상과 아주 흡사하다.
이 무덤들은 기원전 ‘훈족’들의 지배층 무덤이라 알려져 있다. 특이하고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보그트’라 말하는 여러 개의 돌비석들이 각각의 무덤과 무덤 사이를 1열로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돌무지 무덤들이 별자리를 의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독특한 장례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암각화의 주인들이 기원전의 훈족들이었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중에 1만2000년 전의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직까지는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이곳의 원주민이었다는 ‘알타이 부여족’이 동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남긴 흔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전남 화순 운주사의 석상과 비슷해 보이는 아랄 톨고이의 고대 무덤 앞 쿠누 초도.
이곳에 집단으로 몰려 있는 무덤들은 기원전 훈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암각화들이지만 안내판은 물론이고 특별 보호장치 없이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암각화 표면에 코팅처리한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래서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일까. 유목민들이나 가축들이 거리낌 없이 밟고 지나다닌다.
어쩌면 수천년의 세월을 이렇게 지내왔는데 지금에 와서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닐 성싶다. 알타이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출처:고비 알타이·홉드·바양얼기/박하선 사진가 201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