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 거쳐 일본열도 정복 주장…

한반도 지배 미화 논리로
가야 고분에서 일본 토기 나오는 건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의 교류 증거일 뿐

 

[책&생각]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17)신화에서 역사로: 우리의 숨겨진 역사, 가야

01.가야를 대표하는 판갑(갑옷). 당시 초원의 유목 전사들은 사용하지 않은 형식이다. 실제 전쟁용이라기보다는 신분을 과시하는 가야인들만의 갑옷이다.

 

최근 삼국 중심의 역사에서 소외되어왔던 신비의 나라 가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가야의 유물은 삼국시대의 어느 나라 못지않게 풍부하다.

그럼에도 가야가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배경에는 20세기 초부터 가야를 일본 침략의 합리화 도구로 사용했던 식민지 역사 연구가 존재한다.

원래 임나는 가야를 말하는 별칭이다.

일제는 <일본서기>에 가공되어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들어서 모든 가야는 곧 일본의 식민지라고 왜곡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임나일본부를 이용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약간의 표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임나일본부라는 망령을 주장하며 한국을 비하하는 주요 근거로 사용한다.

최근 가야를 실증하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지만 여전히 가야가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야의 진정한 재평가는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의 가야사 왜곡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야 한다.

 

 

02.1922년 현지 조선인을 앞세워 김해 패총을 조사하는 일본인들. 

 

왜 조선총독부는 가야에 집착했을까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함께 쇼군이 각 지방 세력에게 영지를 나누어주고 각자 통치하던 바쿠후(막부) 체제는 종말을 맞았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는 서양의 식민지 개념을 본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정한론이 대두했다.

일본열도 안에서 천년 가까이 바쿠후 체제로 살던 그들이 갑자기 바다 건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니 표면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꺼내 들었다.

한반도 남부에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했고,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인 낙랑이 존재했다는 논리를 세운다.

한반도는 태생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일본 학자들은 그들의 명분을 입증할 자료를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찾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일제강점 이전이었던 1907년에 도쿄대학교의 이마니시 류는 김해의 봉황대 언덕에 있는 김해 패총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 야요이시대~고분시대에 사용했던 토기와 유사한 것들이 발견되었다.

김해는 현해탄을 두고 일본을 바라보는 지역이니 교역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것이 곧바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상징한다고 단정했고, 이후 30여년간 수많은 일본 학자가 김해 패총을 조사했다.


2016년 나온 책 <고대 일본은 최강의 침략국가였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지금도 공공연히 거론된다.

 

일제의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의 조사를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했다.

1910년대에 일제의 고적 조사를 담당한 야쓰이 세이이쓰라는 일본인은 강연록의 끝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신공황후에 의해서 신라와 백제, 임나는 우리(=일본)를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 후 남한은 우리의 손을 떠났지만, 1200년을 지나 드디어 한반도 전체가 우리의 보호국이 되었다.”
총독부는 그들의 지배논리를 역사를 이용해서 선전하려고 했다.

1915년에 개관한 총독부 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전신)에서도 주요한 전시를 ‘임나와 낙랑’으로 삼았다.

총독부의 한국 고대사 정책은 전방위적이어서 인류학에도 미쳤다.

당시 서양 제국주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인류학자들은 한국인의 형질을 조사해서 북조선계와 남조선계로 나누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들은 천손의 단일민족이지만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혼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까지도 한국인의 생김새를 들어서 북방계와 남방계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제 이후 관습적으로 쓰일 뿐 형질인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다.
왜 일제는 특히 가야에,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욕망을 투사했는가.

그이유는 가야에 대한 문헌 기록이 너무나 적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는 점진적으로 신라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자료에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중국의 기록에도 삼한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가야’라는 나라는 등장하지 않는다.

유독 <일본서기>에서만 가야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수많은 왜곡된 서술로 점철된 <일본서기>는 자기 나라를 찬양하기 위해서 수많은 부분에서 한국과 관련된 부분들을 왜곡하거나 과장했다.

다시 말해, 가야에 대한 기록은 많지만 가야를 위한 역사서는 아니다.

게다가 외국 학자들이 난해한 <일본서기>를 제대로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이 대두하면서 가야는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이용되기 좋은 조건이었다.

지금도 일본에는 가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다.

 

03.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전에서 선보인 일본의 옹관과 토기들. 가야에서 출토된 일본 토기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 지역의 교류의 증거에 불과할 뿐인데, 일제는 이를 임나일본부의 역사적 증거라고 왜곡했다.

 

 

임나일본부에서 기마민족설로
가야는 영토를 확장하는 대신에 교역 네트워크로 작지만 강한 나라들의 연맹으로 남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들은 가야에 강대국의 이미지를 덧씌우고자 했다.

임나일본부설에 큰 영향을 미쳤던 도쿄대 쓰다 소키치는 <임나강역고>에서 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점을 언어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임나가 전라도 일대까지 널리 퍼져서 한반도 남부 전체를 지배했다는 ‘한반도 남부 경영론’으로 확대했다.

당시 일본은 가야를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로 둔갑시켰으니 가야를 거대한 나라로 보는 것이 한국의 식민지 경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가야에 대한 왜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한 기마민족설로 이어졌다.

에가미 나미오가 제기한 이 설은 서기 4세기에 송화강 중류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열도를 정복했다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북방의 유목전사가 세운 일본의 야마토국은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고, 따라서 한반도 남부를 정복할 수 있는 국력이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즉, 기마민족설은 변형된 임나일본부설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막연하게 가야의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실제 배경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가야 하면 흔히 철이 떠오른다.

가야는 이 철을 사방과 거래하면서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으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가야의 무덤에서는 갑옷(판갑)은 물론 화려한 마구(말에 끼우는 갖춤새)가 발견되니 군사강국이라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북방 유라시아를 호령한 흉노와 선비족들 사이에서 판갑은 없었으며, 마구도 가야처럼 화려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다.

게다가 가야가 있었던 지역은 험난한 산과 강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말이 달릴 평원이 없다.

실제 무기로 정복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가야 세력은 지리산 자락을 따라서 전라도 일대로 퍼졌다.

이것을 지도로 보면 가야의 영토가 아주 넓어졌기 때문에 가야도 거대한 국가로 보인다.

하지만 새롭게 가야로 편입된 남원이나 장수 같은 지역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산악지역이다.

그러니 이들 전라도 지역은 사실상 토착민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지역의 가야 무덤에서는 가야 물건뿐 아니라 백제의 왕족들이 가장 아끼던 귀중품들도 나왔다.

가야에 편입은 되었지만 독자적으로 백제와도 밀접한 사신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

역사 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야를 폄하하는 것도 문제지만,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결여한 채 거대한 나라로 보려는 것은 자칫 일제의 논리로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04.1931년 일제가 현지 조선인을 앞세워 가야고분(창녕 117호분)을 파헤치는 장면. 

 

새로운 가야사 연구를 위하여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이 초래한 또 다른 피해는 우리 역사 안에서 가야가 소외되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있다.

가야가 일본 식민지의 정당화에 이용되어왔고, 가야와 관련한 많은 역사 기록을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일제가 만든 프레임을 벗어난 다양한 시각의 연구가 어려웠다.
최근 오랜만에 가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며 과거 가야 연구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잡았다.

식민지 시대의 가야 연구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하여 우리 속에 남은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한다.

아울러 세계사의 보편성에 근거해 가야의 특성을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가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가야를 알리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막연하게 가야의 고분이 크고 유물이 풍부하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세계적으로 보면 가야보다 더 눈에 띄는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만 해도 북방 유라시아나 중원에는 가야 것보다 거대한 크기에 황금 유물을 넣은 고분이 셀 수 없이 많다.

가야의 소중함은 그 규모가 아니라 독특한 그들만의 삶에 있다.

가야는 세계적으로도 무척 독특한 나라다.

서로 정복하여 통일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고 웬만한 나라 못지않은 거대한 고분들도 만들었다.

첨단 소재인 철로 무역을 하며 살았던 그들의 언어는 지금도 남아 있다.

경상도 일대에는 유독 고대의 언어 흔적이 잘 남아 있고 각 지역의 사투리가 잘 남아 있다.

그 기원을 가야에서부터 찾는 언어학자들이 많다.
작지만 부유했으며 사방과 교역하며 자신만의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의 참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가야가 지난 세월 어떻게 왜곡되어왔고,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땠는지 돌아보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성급하게 짧은 기간에 가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지난 세기를 돌아보며 가야가 우리 역사 안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부터 알아내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출처:한겨례신문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22292.html?_fr=mt2#csidx3c0375ef04f7db88df01e9a5a475de4

 

 


병자호란 전문가 한명기 교수, 화친 이끌어낸 최명길의 삶과 철학 재조명
나라 구했지만 ‘진회보다 더한 간신’ 비난…‘끼어있는 나라’ 운명 반추
소설과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인간 최명길을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최명길 평전>을 읽어야 할 까닭이 있다면, 그건 이 책의 지은이 때문일 것이다.

한· 중· 일 사료를 두루 섭렵하며 두 번의 왜란과 두 번의 호란에 관한 한 최고 권위자로 통하는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끼어 있는 나라” 조선이 속절없이 휘말려 들어갔던 전쟁을 오래 연구해온 그는 왜 숱한 인물 가운데 최명길(1586~1647)에 주목했을까,

그가 본 최명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이 이어진다.

한 교수는 병자호란 당시 목숨을 걸고 홀로 적진에 들어가 화친을 이끌어 냈던 최명길의 삶을 담담하고 명확한 문장으로 되살려 낸다.

 “왜소하고 병약한 볼품 없는 외모”에 “나이 마흔도 되지 않아 이빨이 반이나 빠져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했던 최명길은 어떻게 당대의 주류 척화론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지행합일’을 강조한 양명학 영향을 받은 건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 교수는 최명길의 독특한 독서 경험을 추가한다.

어릴 때 집에 불이 나 역사책인 <좌전> 등 서너 권만 불에 그슬린 채 겨우 남아 있었고, 인조에게도 <서경> <춘추> 같은 역사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일화들이다.

광해군 조정에서 쫓겨나 가평 대성리에 은거할 때는 <주역>을 수천번이나 읽었다.

주자학 말고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이들과 달리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띠게 된 배경이 드러난다.

적과의 화친을 강조했던 사람이니 늘 둥글게 살았을 것 같지만, 그는 인조반정의 주역이었다.

광해군을 ‘폐모살제’의 패륜아로 규정하고 일찌감치 역모를 논의했으며, <주역>에 통달한 역학자답게 점을 쳐서 거사일을 정할 정도로 깊이 간여했다.

반정에 성공한 뒤 김류와 이귀 등이 광해군 정권의 권세가 저택을 차지하는 등 제 잇속 차리기 바쁠 때 최명길은 광해군 정권의 평안도 관찰사 박엽을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잔혹한 성품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던 박엽이지만 청나라와 통하는 유일한 외교관이었던 그를 살려두어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하지만 박엽은 끝내 처형되고 만다.
한 교수가 최명길을 묘사할 때 강조하는 덕목은 ‘용기, 책임감, 희생정신’이다.

남한산성에서의 활약에 앞서, 청나라 군대 선봉이 서울 한복판까지 들이닥쳤을 때 홀로 적진에 들어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도 최명길이었다.

“사신들의 목을 친 뒤 나라의 존망을 걸고 청과 싸우자고 외쳤던 척화신들”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최명길을

‘진회보다 더한 만고의 간신’으로 깎아내린다.

진회는 남송을 금나라에 넘긴 희대의 간신이다.

반면, 명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인조까지도 옥쇄(玉碎, 공명이나 충절을 위해 깨끗하게 죽음)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낙향했던 김상헌은 ‘조선의 정사(正士)이자 영원한 사표’로 추앙받는다.

지은이는 이 기막힌 대비가 조선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시각’을 정확히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그때 못지 않게 사납고 복잡하다.

임진왜란 때 망해가는 나라를 살려줬으니 후금을 치는 데 앞장서라고 강요했던 명나라와, 그런 명나라를 위해선 임금의 목숨도 바쳐야 한다던 척화신들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미국과 친미보수세력을 떠올릴 수 있다.

또 누군가는 한국이 분수도 모르고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시도했다가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점이다.

최명길의 실리주의가 가리키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는 논쟁의 영역이지만, 명분과 의리를 앞세우며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자들의 말은 예나 지금이나 믿을 게 못 된다.

최명길 평전/한명기 지음/보리·3만3000원

출처:2019-12-06 한겨례신문 이재성 기자

경북 경산 '임당 고총' 유골 조사

경북 경산시 임당동 조영동 고분군에서 2017년 발견된 압독국의 지배층 무덤.

금제 귀고리와 은제 허리띠가 함께 출토됐으며 무덤 주인의 발치에서는 순장자로 추정되는 아이 인골이 나왔다. [동아일보DB]


고대 한반도의 ‘가족 순장(殉葬)’ 습속이 DNA 분석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영남대 박물관(관장 정인성 교수)은 경북 경산시 ‘임당 고총’에서 출토된 고(古) 인골의 유전자 분석 결과 무덤에 함께 순장된 이들이 부부와 딸, 부녀관계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시간차를 두고 다른 무덤에 순장된 남매도 있었다.

이들은 무덤 주인의 가족은 아니고 순장된 사람들끼리 가족이었다.

김대욱 영남대 박물관 학예연구원은 10월 4일 경북 경산시 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학술세미나 ‘고대 인골 연구와 압독국(押督國) 사람들’에서 ‘임당 고총에서 확인된 가족 순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임당동 고분에서 출토된 5세기 압독국 여성의 인골과 이를 바탕으로 복원한 얼굴(작은 사진). 영남대박물관 제공  


발표문에 따르면 경산시 조영동의 5세기 고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인골 외에 순장된 이들의 유골 4개체가 출토됐다.

DNA 분석 결과 이 가운데 3개체는 부부와 어린 딸인 것으로 나타났다.

무덤의 주곽(主槨)에 무덤 주인과 함께 순장된 2명 가운데 1명이 4∼8세의 여아였는데, 부곽(副槨)에 순장된 2명이 이 여아의 부모로 확인된 것이다.

조영동의 또 다른 5세기 고분 부곽에서 발견된 인골 2개체도 부녀 사이로 밝혀졌다.

10세 안팎의 여아와 아버지가 나란히 순장된 것이다.

5세기 말과 6세기 초의 서로 다른 무덤에서 각각 발견된 유골이 남매 사이로 밝혀지기도 했다.

경산시의 한 5세기 고분의 모식도. 주곽(오른쪽 네모)에 무덤의 주인(1)과 함께 어린 여자아이(2)가 순장됐는데, DNA 분석결과 부곽(왼쪽 네모)에 순장된 남성(3)과 여성(4)이 이 여아의 부모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산시의 한 5세기 고분의 모식도. 주곽(오른쪽 네모)에 무덤의 주인(1)과 함께 어린 여자아이(2)가 순장됐는데, DNA 분석결과 부곽(왼쪽 네모)에 순장된 남성(3)과 여성(4)이 이 여아의 부모인 것으로 드러났다. 김대욱 연구원 제공  
김대욱 연구원은 “DNA 분석으로 고대 경산 지역 가족 순장의 습속을 파악했다”면서 “경주를 비롯한 신라 지역과 고령을 비롯한 가야 지역 고총에서 확인된 다수의 순장자들 중 일부도 가족일 가능성이 짙어졌다”고 밝혔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정확히 절반씩 물려받지만 촌수가 멀어질수록 특정한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떨어진다. 이를 이용하면 인골의 촌수를 알 수 있고, 어머니가 자식에게 전달하는 미토콘드리아 DNA의 일치 여부를 통해 모계친족도 가릴 수 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정충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발표문에서 “유전자 분석 결과 무덤의 주인으로 보이는 일부 성인 남성들은 부계 친족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전장 유전체(전체 유전자 염기서열)’ 자료를 분석해 순장자 사이의 직접적 혈연관계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 통해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에서 출토된 남성 순장자 4명이 같은 모계혈족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번 분석 결과가 순장자들의 신분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순장된 이들을 노예나 전쟁 포로로 보던 견해 대신 시종이나 시동(侍童), 호위무사, 재산 관리자 등 무덤 주인과 가까운 사이라고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순장자를 위한 제사 유물이 부장되거나, 각종 장신구를 착용한 순장자의 유골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임당 고총’은 신라에 병합된 소국 압독국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학계는 파악하고 있다.

1980년대 3차례 대규모 발굴조사에서 인골 259구가 출토됐다.

2012년부터 인골 분석이 시작됐고, 지난해 9월부터는 독일 막스 플랑크 인류사 과학연구소에서 DNA 분석을 진행했다.

인골 시료 46점 가운데 35점에서 DNA가 추출됐다.

영남대 박물관은 최근 가톨릭대 의과대학 연구팀과 함께 5세기 말 임당동 고분에 묻힌 21∼35세가량의 여성 인골을 컴퓨터단층촬영(CT)해 얼굴을 복원하기도 했다.

박물관은 ‘고인골, 고대 압독 사람들을 되살리다’ 특별전을 11월 29일까지 열 예정이다.

출처:동아일보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김대욱 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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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주제 학술 심포지엄에서
일본쪽 “임나4현 영산강 일대 위치”
한국쪽 “고고학적 물증 거의 없어”
결론 안 나 가야사 연구 소홀 아쉬움


순천 왜성의 성곽 모습.

16세기 말 정유재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쌓고 대치했던 성이다.

순천은 고대 가야의 서쪽 변방인 임나 4현의 하나로 지목되는데 옛적부터 한반도, 일본 열도의 사람과 물자가 빈번하게 왕래했던 요충지였다.
“가야의 역사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가야 대신 임나라는 명칭을 주로 씁니다. 임나의 영역을 경상도 동쪽부터 전라도 서쪽의 영산강 기슭까지 한반도 남부권 전역으로 보고 일본 교과서 지도에도 그렇게 영역을 표기해요.

문제는 이게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4~6세기 조선반도의 남부를 일본 야마토 정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강역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에요.

왜 아직도 낡은 견해를 고수하는 것일까요.

사실 임나일본부설의 중요한 근거로 내세운 게 바로 ‘임나 4현’이란 한반도 남부의 옛 지역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확실히 짚어야 합니다.”
토론자는 흥분했다.

지난 12일 전남 순천 도심의 한 호텔 회의장에선 한·일 학자들이 ‘고대사 토론 배틀’을 벌였다.

주제는 악명 높은 ‘임나일본부’와 그에 얽힌 옛 가야의 영역을 가려내는 것이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호남과 영남 경계의 가야’란 제목으로 연 학술 심포지엄의 일부였다.

포문을 연 이는 순천 운평리 가야 고분을 발굴한 이동희 인제대 교수였다.
그가 토론에서 언급한 임나 4현 내용은 7세기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의 512년 게이타이 천황 6년조 기록에 나와 있다.

백제 사신의 간청으로 왜국이 지배하던 임나국의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라는 4개 현을 천황의 명으로 떼어주었다는 대목.

당시 왜곡된 사관이 반영된 기록인 만큼 현재 국내 학계는 백제가 가야의 땅을 영역화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교수는 공격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영호남에 걸친 가야의 서쪽 경계를 논할 때 임나 4현 위치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국내 학계는 전라도 동쪽 섬진강 기슭의 순천·광양·여수 일대를 실제의 임나 4현이자 가야의 서쪽 끝 가야 4현으로 봅니다.

그런데 일본 쪽 연구자들은 임나 4현을 여전히 구체적 근거도 없이 전라도 서쪽 영산강 일대에 있었다고 봅니다.

식민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이런 설을 낸 이래 100년 이상 고집하고 있어요.

일본에서 오신 발표자도 스에마쓰 견해를 따르고 있네요.

들어보니 임나 4현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회피하고만 있어요.”
그가 지목한 발표자는 다나카 아키라 사가대 명예교수.

한국 고대사에 두루 해박한 친한파 역사학자다.

‘일본에서 본 영호남 경계지역의 가야’에 대해 <일본서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논지를 발표했는데, 일본 학계의 고루한 견해를 답습하고 있다며 이 교수가 강하게 비판하는 질의를 제기하자 다나카는 곤혹스러운 기색을 띠었지만 차분하게 답변했다.
“임나 4현 위치에 대한 제 학설은 스에마쓰 견해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보완한 것입니다. 저는 스에마쓰의 <임나흥망사>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책을 내기도 했고, 일본 학계에서도 스에마쓰 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전무합니다.

스에마쓰가 임나일본부설의 입장이니까 그가 세운 임나 4현 위치설을 수정해야 한다면 학문적 태도가 아닙니다.”
그는 “<일본서기>에 언급된 임나 4현은 가야의 서쪽 경계를 의미하는 가야 4현과는 의미와 맥락이 다른 것”이라며 “역사적 진실과 부합하는지 여부를 떠나 <일본서기>를 쓴 당대 집필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내 입장”이라고 했다.
논란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사서와 사료의 성격을 철저히 파악하며 개별 사실에 대해 꼼꼼한 확인과 사료 분석을 거쳐야 한다고 다나카는 강조했지만, 임나 4현 영역에 대해서는 일본 학계의 설을 고수했다.

영산강 유역까지 임나 강역으로 둘 경우 입증할 가야 유적 유물 등의 고고학적 물증이 거의 없다는 국내 학자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임나란 말은 <삼국사기>나 진경대사탑비 등 국내 옛 문헌에도 드물지만 언급된다.

그러나 <일본서기> 등 식민사학의 임나일본부설에 자주 나와 악용된 명칭인데다, 그 지역적 범위도 한·일 사서, 학자들 견해에 따라 금관가야, 대가야, 또는 가야 전체, 신라·백제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 나라 전체 등 천차만별이어서 논의의 기준점을 잡기도 어렵다.

두 한·일 학자의 토론 뒤에도 임나 4현의 구체적인 위치를 둘러싼 쟁점, ‘반파’ ‘기문’ 등 미지의 가야 소국 성격을 놓고 학자들 간에 논의가 이어졌지만 명쾌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다.

20세기 일제강점기와 1960~70년대 고고역사학의 성장기를 거치면서 알게 모르게 임나일본부의 덫에 가려 외면하고 소홀히 했던 가야사 연구 역량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좌장으로 토론을 지켜본 이영식 인제대 교수가 총평을 말했다.

“임나 명칭을 갖고 한·일 학자들이 왈가왈부하게 된 것만 해도 큰 진전입니다. 과거엔 <일본서기> 자체를 거짓말 사서라고 해서 인용하는 것조차 꺼렸는데, 이제 가야 지역 고고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일본 쪽 임나 자료들도 비판적으로 활용하고 공유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오늘 자리는 한·일 학계의 관심이 새롭게 모아지면 가야사도 알찬 내실을 갖출 수 있음을 나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출처:한겨례신문 :2019-07-21  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02653.html?_fr=mt6#csidx0751672b9425babaad0150c3e6488de



한반도 고대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북방 유적 기행 ②



북만주 유목민 탁발선비족
 남쪽 이동로에서 전환점 이룬
 인산산맥 일대 답사

 북위왕조 수비거점 무천진 고성서
 백제 기와 특징 담은 조각 발견
 네이멍구박물관 공예품 벽화도
 한반도 고대문화와 인연 증명



허린거얼 고분벽화의 묘주도 세부.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이나 안악 3호분 벽화의 묘주도와 기본 구성이 비슷하다.

바싹 마른 바람이 휭휭 몰아쳤다.
쉼 없이 지그재그로 굽잇길을 올라가는 참이다.

해발 2000m 가까운 산맥 고개들을 버스가 털털거리면서 넘어갔다.

키 작은 관목과 먼지 덮어쓴 풀이 듬성듬성 자란 골짜기와 기슭의 언덕들이 보였다.

한눈에도 황량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뜻밖에도 내려가는 길목의 둔덕엔 노란 해바라기 밭들이 간간이 널려 여행자의 시선을 어루만져 준다.

지난달 15일 답사단은 중국 내몽골(네이멍구)과 외몽골 공화국 사이를 가로지르는 인산산맥 남북 기슭을 가로질러 갔다.

초원 스텝 지역과 농경 지역의 접경지대다.

남쪽에서 부는 습한 바람을 산줄기가 막으면서 북쪽으로는 더욱 건조한 바람이 내려친다.

이른바 높새바람이다.

그 바람 탓에 산맥 어귀는 고대부터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생활권이 자연스레 접점을 이루는 경계지대가 됐다.

교역과 전쟁이 번갈아 일어난 건 당연지사다.

무천진 성벽의 자취를 걷다 발견한 기와 조각.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올록볼록한 요철 형상을 만든 것은 백제의 기왓장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어서 답사단의 눈길을 끌었다.
국내 고고학, 문헌사 연구자 20여명으로 구성된 북방문화 답사단은 북만주 후룬베이얼 초원에 이어 이 산맥 일대를 중요한 답사 기점으로 삼았다.

답사 노정의 길잡이가 된 1~3세기 유목족 탁발선비의 이동로에서 큰 전환점을 이룬 길목이 여기였기 때문이다.

북만주 후룬베이얼 초원에서 남서진해 내려오면서, 선비족은 인산산맥을 넘어 중원 화북 지방의 들머리로 진입했다.

유목민에서 서서히 정착민으로 삶의 양태를 바꾸기 시작했고, 4세기 북위 왕조를 건국한다.

북방 유목민족으로는 처음 중원의 고급 문화와 한족의 제도를 개방적으로 흡수하고 융화시켰다.

북위는 5세기 초 화북 일대를 통일하면서 후대 그들의 후예들이 세운 수당제국의 터전을 닦게 된다. 
지난달 13일 밤 네이멍구 자치구의 주도 후허하오터에 도착한 답사단은 다음날 아침 북쪽의 인산산맥을 타고 넘어 북위 왕조의 북방 수비 거점 6진의 하나인 무천진 고성을 찾았다.

6진은 고비사막 이북의 다른 이민족 유연을 막기 위해 5세기초 북위 태무제가 인산산맥 기슭에 세운 여섯개의 군사적 거점을 말한다.

무천진은 이 육진 가운데서도 우문태, 양견, 이연 등 북위의 후대 왕조인 북주, 수, 당 왕조의 창업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새로운 제국 권력의 터전을 닦은 곳이었다.

탁발선비족이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숱한 고난을 안고 내려와 거꾸로 북방 이민족을 막으려 한 아이러니한 방어선이기도 하다.


내몽골 시라무렌 초원과 특유의 이동식 주택 게르가 보이는 풍경.
3시간여를 걸려 고성으로 비정되는 터에 도착했다.

토성 유적 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위를 살폈다.

성벽 한변 길이만 700m를 넘는 토성으로 고구려 수도 국내성만 하고, 중국 한나라의 웬만한 지방 성곽보다는 큰 규모였다.

지금은 메마른 햇빛이 내려쬐는 허허벌판 폐허지만, 성벽이 꺾어지는 각루 터와 성벽터는 장대한 풍채를 과시했다.

한참을 걸어가다 젊은 연구자 한명이 기와 조각을 발견했다.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올록볼록한 요철 형상을 만든 것은 한눈에 들어왔다.

백제고고학 전문가인 박순발 충남대 교수가 반색하며 말한다.

 “이건 사비(충남 부여) 유적 등에서 나오는 백제 기와편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수천 킬로 이상 떨어진 북방 초원 지대에서 백제 기와 특유의 스타일을 찾게 되다니, 예사롭지 않은 발견이군요.”
유심히 성터를 살펴본 뒤 무천진에서 북쪽으로 차를 돌려 찾은 곳은 바오터우의 백령묘 사원이었다.

청나라 시대 세워진 내몽골 라마불교의 중심 사원이지만, 동으로는 허베이성, 서쪽으로는 서역 둔황(돈황)까지 이어지는 대초원의 중간 거점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통치와 교역 기관의 구실까지 떠맡았던 곳이다.

티베트와 중원 양식이 혼합된 대웅보전과 현종전, 사대천왕전 등의 주요 전각과 내부의 밀교풍 불상들을 바라보면서 이곳 초원 특유의 노래하는 신령스러운 새이자 지명의 연원이 된 베링가에 얽힌 전설을 들었다.


네이멍구 지역의 군사 교통 요지였던 바오터우에 자리한 불교사원 백령묘. 티베트에서 유래한 라마불교 특유의 불탑과 금당건물이 보인다.


답사단은 다시 남하해 푸른 바다와도 같은 시라무렌 초원을 헤치며 게르 숙소를 향해 갔다.

초원의 날씨는 다혈질 같다.

한번 소나기가 퍼부으면, 초원과 언덕 일대에 순식간에 큰 천이 곳곳에 넘쳐흘렀다.

이런 이색 풍경을 보며 찾아간 초원의 게르에서 답사단은 양고기 구이와 백주를 마시며 보름달 훤하게 비치는 초원의 하룻밤을 보냈다.


한동안 비가 내린 뒤 물바다로 변한 몽골 초원. 한번 소나기가 퍼부으면, 초원과 언덕 일대에 순식간에 큰 강과 천이 곳곳에 넘쳐흘렀다.


15일 후허하오터로 돌아온 일행은 시내 네이멍구박물관과 남쪽 성락박물관 등을 찾았다.

초원문화와 한반도 고대문화의 끈끈한 인연을 보기 힘든 금속공예품과 벽화무덤 공간들을 보면서 다시금 실감한다.

네이멍구박물관에서는 내몽골 초원지대 남북축 지대에서 잇따라 출토되는 호랑이 모양의 버클 장식과 허리띠, 이파리 모양의 관 장식구 등을 통해 한반도 청동기, 철기 문화 유물들과 신라 금관과의 양식적 연관관계를 뚜렷이 살펴볼 수 있다.

홍산문화의 발상지로 최근 주목받는 내몽골 남쪽의 츠펑에서 출토된 동그란 자루가 달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일본열도는 물론 내몽골 일대까지 널리 퍼진 만주 비파형 동검 문화의 폭넓은 전파 영역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16일 오후 북위 왕조의 옛 수도 다퉁으로 남하하기에 앞서 답사의 대미는 후허하오터 남쪽 성락박물관에서 만난 후한대 허린거얼의 벽화무덤 재현 공간이었다.

3세기 후한대 오환교위라는 이민족 관리의 직책을 맡은 벼슬아치의 무덤 벽화다.

사신도와 신수도는 물론, 부부가 나란히 앉은 묘주도와 푸줏간, 부엌 등의 생활 풍속과 말을 탄 출행도 행렬 등에서 후대 고구려 벽화에 구성, 도상 등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고구려 벽화 연구자 김근식씨는 “중원과 네이멍구 쪽의 후한대와 북조의 무덤벽화와 고구려 벽화와의 연관관계는 국내에서 제대로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실물을 보면서 북방 초원 접경지대의 벽화 문화가 동아시아 고대 벽화의 공통된 연원임을 새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고조선을 비롯한 한반도, 만주권의 특유의 칼 양식의 비파형 동검을 네이멍구박물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

네이멍구 자치구의 츠펑 부근에서 출토된 자루달린 비파형 동검이 전시 중이어서 눈길을 모았다.


네이멍구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호랑이 모양의 버클 장식. 한반도 청동기, 철기 문화 유물들과 양식적으로 직결돼 주목되는 금공예품이다.


무천진 고성의 토성 유적 위를 답사단이 걸어가고 있다.

성벽 한변 길이만 700m를 넘는 큰 규모의 토성이다. 북위가 북방 방어를 위해 인산산맥 기슭에 쌓은 6진 가운데 하나다.


내몽골 초원의 날씨는 다혈질이란 인상을 준다. 한번 소나기가 퍼부으면, 초원과 언덕 일대에 순식간에 큰 강과 천이 곳곳에 넘쳐흘렀다.


초현대식 건축물로 지어진 후허하오터시의 네이멍구박물관.


한반도 청동기, 철기 문화 유물들과 양식적으로 잇닿는 내몽골 지역 출토 동물형 금공예품. 네이멍구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소장품이다.


내몽골 지역에서 출토된 이파리 모양 장식구. 신라 금관 등의 기물 모양과 양식적으로 뚜렷한 연관관계가 확인된다. 네이멍구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성락고성박물관에 복제 공간으로 재현된 허린거얼 신점자 벽화고분. 3세기 후한대 오환교위의 벼슬을 맡은 유력자의 무덤 벽화다. 후대 고구려 벽화에 구성, 도상 등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출처:한겨례신문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910432.html?_fr=mt3#csidxc6bd1874f075fa882818cfa15d5b2d6



도플갱어 연구 참여한 ‘닮은꼴 사람들’ DNA 검사해보니
당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 즉 ‘도플갱어’를 만날 확률은 100만 분의 1도 안 된다.
그런데 3여년 전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당시 20대 여성 니암 기니(30)는 SNS를 통해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찾아나섰고, 이를 통해 인근 지역에 한 명, 이탈리아에 또 다른 한 명의 도플갱어가 산다는 것을 알아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었다.

니암 기니는 자신이 만난 도플갱어 캐런과 루이사 그리고 아이린과 각각 기념 사진을 찍었다.
기니는 18일 오후 8시30분(현지시간) 호주에서 방영한 채널세븐 방송의 뉴스 프로그램 ‘선데이 나이트’와의 인터뷰에서 “ 내 첫 도플갱어 캐런 브래니건과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두 시간 동안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묵묵히 바라봤다”면서 “정말 멋지지만 기분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이어 “외모는 닮았지만, 성격이나 성향은 전혀 달랐다”고 덧붙였다.

그 후로 그녀는 두 번째 도플갱어 루이사 구이차르디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이에 대해 그녀는 “닮은 사람을 만나는 데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3개월 뒤 그녀는 세 번째 도플갱어를 찾았다.

이번에도 아일랜드 인근 지역에 사는 여성이었다.
아이린 애덤스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당시 도플갱어를 찾아나선 기니의 소식을 친구들로부터 전해들었다고 밝혔었다.
기니는 “자신이 특별하고 독특해서 이 세상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다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 자신이 생각만큼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니라는 여성만이 자신의 도플갱어들을 기적적으로 찾아낸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날 방송에는 영국 에식스 카운티에 사는 닐 리처드슨(73)과 존 제미선(79)이 등장했다.
두 남성은 거의 똑같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사실 리처드슨은 지난 2014년 아내 매리언 리처드슨과 함께 브레인트리라는 이 작은 마을로 이사를 왔는 데 그 후로 주민들이 그를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리처드슨은 “난 마을에서 누구도 알지 못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모습에 의아했다”면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내게 다가와 ‘안녕 존! 오늘 어때?’라고 인삿말을 건넸다”고 회상했다.

또 그는 “아내와 한 카페에 갔는데 다른 테이블에서 한 남성이 내게 다가와 ‘내 아내는 당신이 존 제미선이라고 한다’고 말해서 난 ‘그럼 그는 틀림없이 잘 생긴 친구일 것’이라고 농담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리처드슨은 주민들에게 자신이 존이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날 카페 주인도 내게 다가와 ‘안녕, 존!’이라고 인사했다”면서 “그래서 난 ‘아니, 난 존이 아니라 닐이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닐은 그 주인에게 자신이 아직 실제로 만나지 못한 존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신분증까지 꺼내 보여줬다.

리처드슨과 제미선은 2015년 일일 런던 역사 여행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처음 만났다.

리처드슨은 “버스에 올라탔을 때 난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존을 봤다.

그래서 난 그에게 다가가 ‘실례하지만 난 당신이 존 제미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그 후로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됐다는 두 사람은 단지 외모만이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시를 매우 좋아하며 같은 대학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고 모두 종교 교육을 가르쳐 왔다는 것이다.

유사한 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각각 아내와 만난지 2주 만에 청혼했고 결혼한지 똑같이 50년이 됐다.

사실 두 사람의 각 아들들은 호주 전통악기인 디저리두도 똑같이 연주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닐은 “그것은 그야말로 운명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4년 전 도플갱어 미녀로 화제를 모았던 섀넌 로너건과 사라 노르드스트룀의 모습.

두 미녀는 호주 방송 출연을 위해 다시 만났다. (사진=트윈스트레인저스닷컴, 뉴스세븐)
아일랜드에 사는 섀넌 로너건(25)과 스웨덴에 사는 사라 노르드스트룀(21) 역시 눈에 띠게 닮았지만, 4년 전 처음 만난 사이다.

로너건은 “낯선 사람 같지만 그녀를 아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와 닮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면서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두 여성은 닮은 외모와 달리 성격은 전혀 반대다.

노르드스트룀은 “(섀넌은) 훨씬 더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로너건은 “그건 스웨덴 사람 특성인 것 같다. 난 약간 사교적이고 사라는 매우 조용하다”고 말했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팀 스펙터 유전학교 교수는 도플갱어 현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사진=팀 스펙터/인스타그램)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두 여성은 어떻게 이렇게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도플갱어를 연구하는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팀 스펙터 유전학교 교수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스펙터 교수는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됐던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나서 도플갱어 연구를 시작했다.

그 사진은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게 앉게 된 두 남성의 외모가 거의 똑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스펙터 교수는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됐던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나서 도플갱어 연구를 시작했다.

그 사진은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게 앉게 된 두 남성의 외모가 거의 똑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연구에 사람의 모든 얼굴 윤곽을 측정할 수 있는 첨단 얼굴매핑 시스템과 3D 영상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로너건과 노르드스트룀이 유전적으로 낯선 사람이었음에도 얼굴 유사성 점수가 90%로 매우 높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또 그는 리처드슨과 제미선에 대해서도 검사를 진행했고, 두 남성이 서로 알지 못하는 먼 조상이 같을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두 사람의 유사성은 81%인데 이는 앞서 두 여성보다 낮지만 일란성 쌍둥이의 점수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두 남성이 상당한 버릇과 보디랭귀지(몸짓 언어)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단계에서는 이를 검사할 방법은 없다고 스펙터 교수는 말했다.

스펙터 교수는 니암과 아이린에 대해서도 DNA 검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두 여성은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태어났을 가능성은 0.0006%, 부모 중 한 명의 피를 받았을 가능성은 0.1%, 2만 년 전 같은 조상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개연성은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출처:  윤태희 입력 2019.08.19. [서울신문 나우뉴스]

빌헬름 2세 배출 호엔촐레른 가문, 2차대전후 소련에 빼앗긴 재산 반환 요구

독일의 마지막 황제이자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빌헬름 2세의 후손들이 왕실의 보물과 재산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고

AP통신 등 외신이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호엔촐레른 가문이 소유했던 세실리안호프 궁전의 모습. [AFP=연합뉴스]  


빌헬름 2세의 후손들인 호엔촐레른 가문 대표들과 독일의 문화 재단 등은 왕실 유산 문제에 관해 2013년부터 비밀스러운 협상을 벌여왔던 사실이 최근 독일의 언론 슈피겔의 보도로 알려졌다.

호엔촐레른 가문이 과거 빼앗긴 자신들의 보물과 재산을 되돌려줄 것을 프로이센문화유산재단 등에 요구한 것이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1701년부터 독일을 통치했던 프로이센 왕국의 지배 세력이었지만, 1918년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몰락했다.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은 아무런 보상 없이 왕실 재산을 빼앗겼다가 1926년 수십 개의 성과 저택 등은 돌려받았다.

이 가운데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모여 전후 독일의 운명을 결정했던 포츠담 회담이 열린 세실리안호프 궁전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자 호엔촐레른 가문은 또 다시 당시 소련에 왕가의 자산을 모두 몰수당한다.

자산 대부분이 소련의 통치권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 독일 통일 뒤부터는 정부 소유의 프로이센문화유산재단, 독일 역사박물관 등이 세실리안호프 궁전을 포함해 호엔촐레른 가문이 남긴 보물과 재산 대부분을 관리해왔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왕가 재산 반환 요구에 대한 독일내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다.

볼프강 티에르세 전 독일 하원의장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행동을 "뻔뻔하다"고 비판했고, 크리스티안 게르케 브란덴부르크주 재무장관은 "수용할 수 없는 주장으로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지적했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변호사는 소련으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들은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독일 법률에 근거해 반환 요구는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나치 정권에 협력한 사람들의 경우 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데, 일부 학자들은 왕가와 나치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에든버러 대학의 역사학자 슈테판 말리노프스키 교수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빌헬름 2세의 아들과 나치당 사이에 매우 강한 연관성이 있다는 논쟁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서울=연합뉴스) 김형우 기자




울진군, 동굴서 ‘명문’ 발견
왕호 변화·선박 이용 등 확인
학계선 “신라사 새 역사책” 


경북 울진 성류굴 안 제8광장 1지굴의 큰 석주면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명문 중 일부.

진흥왕이 560년 6월 이곳에 행차했음을 알 수 있는 ‘庚辰六月日(경진유월일)’이라는 문구(왼쪽 사진)와 ‘眞興王(진흥왕거)’라는 문구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신라 제24대 임금인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경북 울진 성류굴에 다녀갔다는 내용의 ‘명문’(쇠붙이나 돌 등에 새긴 글)이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신라사 연구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울진군은 최근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 내부 제8광장에서 발견된 다수의 신라시대 명문 중 진흥왕이 560년쯤 성류굴을 다녀간 기록을 확인했다고 23일 밝혔다.

진흥왕은 북한산과 마운령, 황초령에 순수비를 남겼다.

이번에 확인된 명문(심현용·이용현 박사 공동판독)은

‘庚辰六月日(경진유월일)/

柵作 父飽(책작익부포)/

女二交右伸(여이교우신)/

眞興(진흥)/

王 (왕거)/

世益者五十人(세익자오십인)’ 등 25자다.

제8광장 1지굴의 큰 석주면에 해서체로 가로 7~8㎝, 세로 7~12㎝로 음각돼 있었으며, 특히 ‘진흥왕거’ 4글자는 다른 글자보다 크게 써서 강조됐다.

문구의 의미는 “경진년(560년·진흥왕 21년) 6월○일,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 둘이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다.

진흥왕이 다녀가셨다(행차하셨다).

세상에 도움이 된 이(보좌한 이)가 50인이었다”로 해석된다.

잔교는 부두에서 선박에 닿을 수 있도록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이다.

연구진은 “진흥왕이 560년 6월 울진 성류굴에 다녀간 사실이 확인됐으며, 왕의 이동에는 선박이 활용됐고 동굴 내부를 잇는 잔교가 설치됐다는 사실 등이 파악됐다”고 밝혔다.

이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기존 문헌에 없는 내용으로, 신라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당시의 정치·사회 변화상을 엿볼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라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20~22년(559~561년) 기록이 비어 있다.

또 북한산 등지에서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에는 ‘진흥태왕(眞興太王)’으로 기록돼 있지만, 이번 발견으로 경진년에는 ‘진흥왕’으로 기록돼, 시기 및 정치적 상황에 따른 왕호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는 평가다.

또한 연구진은 이번 명문 발견으로 성류굴이 삼국시대부터 신라 화랑이나 승려의 수련 장소였다는 사실이 힘을 얻게 됐다고 평가했다.

앞서 울진군과 문화재청은 지난 3월 성류굴에서 신라 원성왕 14년(798년)에 화랑 등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각석 명문 30여개를 발견했다.

진흥왕 역시 이곳을 찾은 만큼 국가적인 수련장으로 활용됐음이 증명됐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문화재청 및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나서 동굴을 전수조사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심현용 울진군 학예연구사는 “앞으로 울진에서 진흥왕 순수비가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면서 “성류굴의 신라 명문들은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에 버금가는 신라 금석문의 보고로, 한 권의 역사책이 새로 발견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출처:2019.05.23 경향일보 백경열 기자 merci@kyunghyang.com
 


두 가문의 후손 10월에 결혼식
19세기초 적대 끊고 정략 결혼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의 자손인 청년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후손인 여성이 결혼한다.

두 가문 결합은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이혼하고 1810년 오스트리아 왕 프란츠 2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한 이후 209년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프랑스 등 유럽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12일(현지 시각)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나폴레옹 남동생 제롬의 5대손인 프랑스 청년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33)이 마리 루이즈 조카의 직계 후손인 올림피아 폰 운트 주 아르코-지네베르크(31)라는 오스트리아 여성과 오는 10월 결혼식을 올린다.


나폴레옹 가문의 프랑스 청년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오른쪽)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후손인 약혼녀 올림피아 폰 운트 주 아르코-지네베르크가 지난 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결혼식장으로 잡은 앵발리드는 프랑스군 전몰 용사 추모 공간과 군사박물관 등으로 구성된 파리의 손꼽히는 명소다.

영국에 의해 유배된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숨진 나폴레옹의 유해를 파리로 가져와 안치한 곳이 바로 앵발리드다.

장-크리스토프는 올림피아에게 청혼할 때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이 쓰던 왕관에 있던 40캐럿짜리 대형 다이아몬드로 만든 반지를 건넸다.

이 반지는 곡절을 겪었다.

올림피아가 파리 시내 한 호텔 앞에 벤츠 승용차를 세워뒀는데, 누군가 그 반지가 든 핸드백을 차량 안에서 훔쳐가 버린 것이다.

다행히 며칠 후 경찰이 절도범을 검거하고 무사히 반지를 회수했다.

장-크리스토프는 명문 그랑제콜인 프랑스 고등상업학교(HEC)를 마친 뒤 하버드대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따고 런던에서 사모펀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올림피아 역시 미국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신접살림은 런던에 꾸릴 예정이다.

장-크리스토프는 정략적인 결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나는 올림피아의 아름다운 눈에 빠져들어 갔을 뿐 그녀의 가계도를 염두에 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부러 첫 부인 조제핀과 이혼하고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던 선조 나폴레옹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유럽을 제패할 욕심이 가득했던 나폴레옹은 영국·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우군을 확보한다는 전략적 차원에서 조제핀을 버리고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5세기 중반부터 1차 대전까지 500년가량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다.

프랑스와는 오랫동안 적대 관계로 싸웠다.

1807~1809년 사이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는 프랑스군에 연거푸 패배해 코너에 몰렸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제안을 받아 딸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과 결혼시켰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크게 패해 위세가 쪼그라들자 기다렸다는 듯 영국·러시아와 손잡고 1814년 나폴레옹을 권좌에서 쫓아냈다.

나폴레옹은 1814년 엘바섬으로 1차 유배를 가면서 마리 루이즈와의 4년간의 짧은 결혼 생활을 끝냈다.

프랑스인들은 장-크리스토프의 결혼을 '현대판 왕자와 공주의 만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간 더타임스는 "유럽을 호령하던 프랑스의 전성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며 "프랑스에는 장-크리스토프에게 영국 왕실 사람들에 준하는 리더 역할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보도했다. 장-크리스토프도 그런 기대를 의식하고 있다. 그는 일간 르피가로 인터뷰에서 "프랑스를 위해 헌신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그는 "EU(유럽연합) 통합의 가치를 지켜 하나 된 유럽을 지향한다"고 했다.

나폴레옹이 무력으로 하나 된 유럽을 꿈꿨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유럽 통합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출처;조선일보    파리=손진석 특파원 입력 2019.05.1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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