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혼자 한가할때 강릉김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곤 한다.
만기형님에 비해선 미약하지만 ,자료를 공유하고 정보의 홍수속에 내가 원하는 자료를 찾아본다는것은 . 수집하는 즐거움이 있다.우연히 부산에 살고 있는 강릉김가의 흔적이 인터넷의 자료가 납아 있어,스크랩을 해본다.
글을 쓰신 김강식이라는 분에게 고마움을 남긴다.이글은 그분의 글을 인용해본다.
01.부산의 자연지리적 환경
[정의]
부산 지역에서 특정한 성씨가 모여서 대대로 세거한 지역.
[개설]
세거지는 집성촌, 동족 부락, 동족 촌락과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
집성촌은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의미이며, 특정 성씨가 마을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지역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특정 성씨가 마을의 이름이 되는 경우도 있다.
동족 부락(同族部落), 동족 촌락 역시 집성촌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마을 구성원이 친족이라는 의미를 더 부각하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세거지 역시 집성촌에서 출발하였지만, ‘집성(集姓)’이라는 의미보다 적은 수의 가호라도 세대를 계승하면서 거주해 온 마을, 오래된 거주지라는 공간적 측면을 더 강조한 말이다.
이는 19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급격한 도시화, 해방과 귀환 동포, 6·25 전쟁과 피난민, 산업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전근대 도시 형태를 점차 탈피한 부산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온 마을이 같은 성을 가진 일가친척 관계의 촌락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부산광역시 내 기장군, 강서구, 금정구 일대에 집성촌으로 알려진 마을이 존속하기는 하지만 다른 성씨를 가진 이주민이 증가하고, 분가·이사·개방 등으로 특정 성씨가 마을 전체를 대표하던 외형은 사라졌다.
중구, 서구, 동구, 부산진구 등에서는 처음부터 집성촌이 없었거나, 있었다고 해도 거의 사라졌다.
이러한 지역에 이주민, 피란민 등이 거주하면서 그들의 삶터로 일구고 있기 때문에 몇백 년의 세거는 아니더라도 4~5대에 걸쳐 거주를 이어 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는 부산 지역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며, 이들 역시 부산을 구성하는 구성원이므로 집성촌이 아닌 세거지란 의미로 포괄하고자 하였다.
[변천]
조선 시대 동래부는 크게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읍치(邑治)인 동래읍성, 수군 기지인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좌수영성], 부산진성(釜山鎭城), 다대진성(多大鎭城)이다.
이러한 성은 행정,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중심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거주지도 대부분 성 주변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1740년(영조 16) 당시의 행정 구역과 거주지를 보면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한 읍내면[동래구, 금정구], 읍성 동쪽의 동면[동래구, 해운대구, 금정구], 읍성 서남쪽 좌수영성 주변의 남촌면[수영구, 남구], 읍성 남쪽 부산진성 주변의 동평면[부산진구, 동구], 낙동강 위쪽과 아래쪽 마을을 합친 사천면[사상구와 사하구, 중구], 읍성 서쪽의 서면[동래구, 연제구, 부산진구, 북구], 읍성 북쪽의 북면[현 금정구]으로 되어 있다.
당시 동래부에 속하지 않았던 기장군과 강서구를 제외하면, 부산의 주거지는 위 지명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 중구, 서구, 영도구는 18세기 중엽 당시에는 사람이 모여 산 큰 마을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은 근대의 개항과 산업화, 6·25 전쟁, 도시 개발 등으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일제 강점기 중엽까지 존속하던 세거지는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조선의 성(姓)』[1934]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성』의 「동래군」에는 오늘날 중구, 서구, 동구, 동래구, 연제구, 사하구, 수영구, 영도구, 금정구의 집성촌은 보이지 않는다. 강서구 지역은 「김해군」 편에 나타나 있다.
전근대의 세거지는 산업화와 도시 개발 전에는 큰 변화가 없었음을 감안할 때 부산의 세거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동래의 세거 성씨와 우거 성씨가 사는 곳을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동래군지(東萊郡誌)』[1937] 성씨 조에 나타나 있는 세거 성씨와 우거 성씨는 입향조, 주요 자손 등을 정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강서구는 아직 부산광역시에 편입되기 전이므로 강서구의 성씨는 조사되지 않았다.
또한 중구, 서구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확대되면서 형성된 구(區)이므로 전통적으로 세거하는 성씨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부산진구, 동래구, 남구, 해운대구, 금정구, 사상구, 기장군 일대에 아직 세거 성씨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것을 알 수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1970년대 부산의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면서 세거지는 더욱 감소되었다.
1971년과 1976년 부산의 동족 부락을 조사한 글에는 12개의 부락만 소개되어 있다.
전수 조사가 어려운 점을 감안하더라도 해당 동의 인구가 증가하는 반면, 동족 부락에 해당하는 가호 수는 동일하거나 감소하고 있다.
12개의 부락 가운데도 3곳은 내부적으로 동족 의식, 혈연 의식이 희박해져서 지역 사회 리더로서의 힘을 읽어 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서구 역시 녹산 공단으로 대표되는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전통적인 자연 마을은 이주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렇듯 부산 지역은 광역시로 형성되어 가는 동안 산업화와 근대화의 제일선에 있었기 때문에 행정 구역의 분화 및 편입이 많고, 6·25 전쟁에 이은 도시 개발 등으로 거주지의 변화가 많았다.
[현황]
그렇다면 2014년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중구는 조선 후기에 사람이 사는 큰 마을은 거의 없고, 오늘날 용두산 공원 주변으로 일본인 마을 왜관(倭館)이 있었다.
또한 근대 이후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자리해서 수백 년을 내려오는 전통적인 의미의 세거지는 없다.
그러나 귀환 동포, 6·25 전쟁 피난민 등이 자리 잡았던 중구에는 3대 이상 세거하는 주민이 증가하고 있다.
서구는 중구와 인접한 대신동, 부용동, 부민동, 아미동은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중구와 세거지 유형이 거의 같다.
동구는 부산진성이 있었던 지역이므로 오래전부터 세거하던 사람이 많았으나 개항 이후 이주민이 급격히 증가하고, 일본인의 세력 확대 등으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전통 자연 마을 구조는 사라졌다.
영도구는 조선 시대 이래 목장이 있었기 때문에 목장을 관리하거나, 어업에 종사하는 극소수의 주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큰 마을은 형성하지 못하였다.
영도구 역시 근대 개항 이후 개발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6·25 전쟁 때 피란민들이 많이 정착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극히 드물지만 100년 이상 세거를 하는 가호가 있다.
부산진구는 서면 일대 개발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세거지가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조사된 바 있는 여러 세거지와 세거 성씨들이, 세거 가호가 줄어들었지만 외형을 유지한 채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동래구는 조선 시대에는 읍치가 있었던 곳인 만큼 세거 성씨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1976년 조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수안동과 온천동에서 특정 성씨 세거지를 확인할 수 있다.
1995년 동래구에서 분구된 연제구는 거제동에서 몇 개 성씨 세거지만 발견될 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남구는 개성 왕씨(開城王氏)의 세거지로 유명한 용호동을 포함하여 다수의 세거지를 찾아볼 수 있는 지역이다.
임진왜란 전에 이거한 성씨를 비롯하여 600년 이상 세거하고 있는 특정 성씨들이 남구 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하며 살고 있다.
남구 역시 타성 이주민이 증가하고, 세거 성씨들의 분가, 이주가 늘어나 명맥을 유지하는 세거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1995년 남구에서 분구된 수영구는 좌수영성이 있었던 곳이며, 「수영 야류」·「좌수영 어방놀이」의 계승 등으로 전통의 맥을 이어 나가는 문중이 있다. 이들 문중으로 형성된 몇 개의 세거지가 남아 있다.
북구는 화명동, 구포동, 만덕동이 주된 세거지다. 금정산, 넓은 평야와 강, 계곡을 끼고 있으면서도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큰 문중들이 자리 잡았고, 그 때문에 세거 성씨도 다양하다.
그러나 대규모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세거지 모습이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해운대구는 현재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는 번화한 해운대의 이면 지역에 세거지가 발달하였다.
여러 기록에서 빠지지 않는 석대동 세거지를 비롯하여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 문화재 제1호인 삼절사를 중심으로 한 반송동, 반여동, 재송동, 송정동 지역에는 여러 성씨 재실이 현존한다.
좌동·중동·우동 지역에도 세거하던 성씨들이 있었으나 1970년 이후 해운대 개발이 급격히 이루어져 세거하는 가호가 크게 줄어들었다.
사하구는 낙동강 하구의 넓은 삼각주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던 곳이다.
더욱이 조선 시대 다대진성이 있는 지역이여서 성 주변으로 큰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세거한 마을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이후 입향한 성씨들이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금정구는 조선 시대 동래읍성의 북면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역이 넓고, 『동래군지』에서 보이듯 우거 성씨가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현재 금정구 13개 법정동 중 금성동, 남산동, 청룡동, 노포동, 두구동, 선동, 오륜동, 회동동, 금사동, 서동 등에는 적은 가호지만 세거를 하는 성씨들이 존속하고 있다. 구서동, 장전동, 부곡동 지역에 공공기관 및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섬에 따라 세거 주민이 많이 이주한 상태다.
강서구는 일부 지역이 1978년 부산직할시 북구에 편입되고, 1989년 현재의 강서구 지역이 강서출장소에서 구(區)로 승격되었다.
오랜 기간 김해군에 속하여 대도시로부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부산 지역 가운데 세거 성씨가 가장 많아 있는 지역 중 하나였다.
현재 가락동, 녹산동, 강동동, 대저동, 명지동, 가덕도동에 세거 성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강서구 역시 김해 공항과 부산 신항 개발, 해안가 매립, 대규모 공단 입주 등으로 이주되고 사라지는 마을이 많다.
사상구는 임진왜란 이후에 입향한 성씨가 대부분이며, 1601년 동계(洞契)를 결성했던 기록이 있어 세거지의 특성을 알려 준다. 사상구의 세거지는 일제 강점기 조사, 1970년대 조사 때 빠지지 않고 소개되었다. 학장동, 주례동, 괘법동 등은 현재까지 특정 성씨들의 세거지로 존속되고 있다.
기장군은 1995년 부산광역시에 편입된 곳이다.
동해를 끼고 있지만 장안, 정관, 철마 등 내륙 지역도 넓어 세거지가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조선의 성』의 「동래군」 편에는 45개의 집성촌이 소개되었는데, 이 가운데 집성촌 21개가 기장군에 소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소개된 세거지는 지금도 거의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02.부산에 터를 잡은 강릉김씨
(01)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명칭 유래]
노포(老圃)란 오래된 채전(菜田)[채소밭]을 뜻하며, 노포동은 농사를 잘 짓는 마을이란 말이다.
다른 유래로는 노포동 뒤쪽 당산이 쥐가 채소밭에 먹이를 구하러 내려오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늙을 노’와 ‘채전 포’를 쓴 것이라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노포동 강릉 김씨 세거지(老圃洞江陵金氏世居地)는 조선 초부터 금정구 선동(仙洞)에 정착하여 살아온 동래부(東萊府)의 대표적인 유력 성씨였던 강릉 김씨 충순공(忠順公) 산저파(山底派)가 임진왜란 이후에 옮겨 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다. 입향조는 알 수 없다.
금정구 노포동에는 노포 마을, 녹동(鹿洞) 마을, 대룡(大龍) 마을, 작장(鵲掌) 마을 등 4개 마을이 있다.
1904년 편찬된 『경상남도 동래부 가호안(慶尙南道東萊府家戶案)』에는 노포 마을에 양씨·김씨·정씨·박씨·최씨·강씨·문씨 등 34가구가 있었으며, 작장 마을에는 김씨와 이씨가 10가구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 환경]
서쪽에는 금정산지의 계명봉(鷄鳴峰)[602m]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계명봉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청룡동과의 경계를 이룬다.
계명봉은 수영강, 온천천과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소하천의 분수계를 이룬다.
북쪽에는 양산과 교통로 기능을 하는 지경 고개[조선 시대에는 사배현으로 부름]가 있으며, 이곳으로 경부 고속 도로가 지난다. 서쪽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수영강과 합류하는 유역에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현황]
호수(戶數)의 증감을 보여 오다가, 2013년 현재 약 3가구가 살고 있다.
(02)금정구 남산동
[명칭 유래]
남산동(南山洞)이란 지명은 이곳의 남산(南山)[165m]에서 비롯되었다.
남산은 금정산 동쪽 기슭 아래에 솟은 구릉성 산지이다.
지명은 이곳에 범어사의 사전(寺田)을 소작하는 농민들이 많았는데, 범어사에서 보면 이 지역이 남쪽 산등성이에 해당하므로 남산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다른 유래로는 지세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집을 지으면 모두 남향으로 지었다 하여 남산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남산동 강릉 김씨 세거지(南山洞江陵金氏世居地)는 조선 초부터 금정구 선동(仙洞)에 정착하여 살아온 동래부(東萊府)의 대표적인 유력 성씨였던 강릉 김씨 충순공(忠順公) 산저파(山底派)가 임진왜란 이후에 옮겨 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다.
입향조는 알 수 없으며, 1904년 편찬된 『경상남도 동래부 가호안(慶尙南道東萊府家戶案)』에 남산 마을에는 김씨·송씨·최씨·한씨 등 42가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 환경]
서쪽으로는 금정산지의 원효봉과 의상봉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산록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가잿골을 지나 온천천으로 흘러든다.
온천천 양쪽 기슭의 완만한 비탈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현황]
호수(戶數)의 증감을 보여 오다가, 2013년 현재 3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03) 금정구 선동
[개설]
조선 전기 동래부(東萊府)의 대표적인 유력 성씨였던 강릉 김씨(江陵金氏) 충순공(忠順公) 동래파가 조선 문종(文宗) 이후 금정구 선동으로 옮겨 와 선동 강릉 김씨 세거지를 이루었다.
이후 충순공 산저파(山底派)와 여고파(余古派) 등으로 분파되었다.
[명칭 유래]
선동(仙洞)이라는 지명은 지역에 선돌이 있어 유래되었다는 설과 오륜대와 인접하여 신선이 노닐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선리라 불렀다.
[유래 및 변천]
임진왜란 이전 입향조인 북계 김선(金璿)이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선동 강릉 김씨 문중의 유명 인물로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활약하고 소산(蘇山) 전투를 벌여 공을 세운 김정서(金廷瑞)가 있다.
이곳에는 김정서의 묘소도 있다.
[자연 환경]
선동 동쪽은 기장군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자리하고, 서쪽으로 계명봉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있다.
이들 두 산줄기 사이로 수영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중앙부는 회동 수원지의 상류 구역에 해당된다.
[현황]
60여 전까지 금정구 선동에는 강릉 김씨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2013년 현재는 한 집도 살고 있지 않다. 다만 문중 재실(齋室)인 상현사만 남아 있다.
02. 부산진구
[개설]
부산진구 일대는 삼한 시대에 거칠산국이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 동래군 동평현에 속하였다가 1021년(현종 12) 양주 동평현이 되었다.
이후 1519년(중종 14) 동래현에 귀속되었다.
1547년(명종 2) 동래현이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914년 동래군 서면에 소속되었다가 193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51년 부산진출장소가 설치되어 독립적인 행정 구역이 되었다.
1979년 양정동, 개금동, 부암동이 29개 동으로 분동되었고, 1998년 행정동이 통합되어 25개 동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지리적으로 백양산과 황령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대부분 지역이 평지이다.
성지곡을 비롯한 당감천과 부전천, 전포천 등의 하천이 발달하여 농경지로서도 적합하여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면서 사람이 살기에 용이한 지역이었다.
[특징]
부신진구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다양한 성씨가 세거를 이루어 살아왔다.
『조선의 성(姓)』에는 초읍동의 밀양 손씨(密陽孫氏) 35가구, 당감동의 파평 윤씨(坡平尹氏) 30여 가구, 당감동의 여양 진씨(驪陽陳氏) 20여 가구, 가야동의 달성 서씨(達成徐氏) 22가구, 부전동의 강릉 김씨(江陵金氏) 30여 가구, 부전동의 김해 김씨(金海金氏) 35가구, 전포동의 김녕 김씨(金寧金氏) 30여 가구, 양정동의 청도 김씨(淸道金氏) 26가구, 가야동의 영양 천씨(潁陽千氏) 10여 가구 등이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개금동에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분성 배씨(盆城裵氏), 은진 송씨(恩津宋氏) 등이 세거하였는데, 옛 안동네에는 은진 송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한다.
당감동에는 여양 진씨, 김해 김씨 달성 서씨, 파평 윤씨(坡平尹氏), 영월 신씨(寧越辛氏), 나주 정씨(羅州丁氏) 등이 살았는데, 본동에는 좌수영 수사 후손인 신씨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성안 마을에는 여양 진씨 집성촌도 있었다.
범전동에는 김씨, 이씨, 박씨, 문씨, 정씨 등 여러 성씨가 혼재하여 거주하였으며 부암동에는 양씨(梁氏), 황씨(黃氏), 정씨(鄭氏), 문씨(文氏), 박씨(朴氏) 들이 살았고 부전동에는 강릉 김씨 38가구, 김해 김씨 35가구가 살았다고 하니 상당히 큰 마을이었던 것 같다.
양정동에도 경주 이씨(慶州李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은진 송씨 등이 살았는데 제일 큰 문중이 청도 김씨로 26가구가 살았다고 하며, 지금은 60여 가구가 모여 산다.
연지동에는 김씨, 장씨, 양씨, 박씨, 문씨 등이 살았고, 초읍동에는 여러 성씨가 혼합한 중에 원당골에 밀양 손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이들을 ‘초읍 손씨’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대부분 병자호란, 정묘호란, 세조 대의 사육신 사건 맟 유배 등으로 한양을 떠나 경상남도나 동래로 이거하고, 이후 부산진으로 옮겨 세거지를 형성하게 된 경우들이다.
예를 들어 달성 서씨는 입향조가 직무에 대해 고언하였다가 동래로 유배된 후 그 후손이 계속 부산진에 거주한 경우고, 파평 윤씨는 정묘호란 이후, 강릉 김씨는 병자호란 이후 울산 온양에서 이거하였으며, 김녕 김씨는 사육신 사건으로 이거한 후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현황]
부산진구는 1970년대 이후 도시 개발로 세거지가 허물어져 갔다.
특히 이 지역은 부산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개발과 함께 전통적인 모습이 사라지는 속도도 빨랐다.
1971년과 1976년의 세거지 변화를 그리고 있는 「동족 부락-부산시 동족 부락의 변모」[조갑제, 『신동아』 1976년 10월호]에 보면 이 지역의 세거지 변모 형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양정동의 청도 김씨는 1971년 57가구, 1976년 6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또 초읍동의 밀양 손씨는 각각 33가구, 38가구가 있었다.
이들 성씨들이 그때까지 세거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광복 이후 신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문중 내의 전통과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밀양 손씨의 손정줄[부전동 삼성병원 건립자]은 개화 바람이 불 때 서당 공부 대신 명륜소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사립동명고등보통학교를 거쳐 32세에 서면 면장이 되었다.
이후 밀양 손씨 외 다른 집안에서도 앞 다투어 손정줄의 행로를 따라갔고, 많은 유명 인사를 배출하면서 세거지를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를 지나 개발 속도가 빨라지면서 세거지를 지키는 가문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가야동의 달성 서씨 70여 가구, 당감동의 파평 윤씨 10여 가구 등이다.
(1)부산진구 부전동
[명칭 유래]
부전동은 본래 부현리라 불렀다.
부현리는 현 부산진구 당감동 입구 부암 고개에 있던 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있던 바위가 마치 가마솥을 거꾸로 엎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가마 고개라 하였고, 이를 한자화한 지명이 부현이라는 것이다.
부전의 ‘전(田)’ 자는 비교적 논밭이 많은 평지에 붙여진 명칭으로, 부현 고개 아래가 평지[인근에 전포동(田浦洞)과 범전동(凡田洞)이 있음]라서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형성 및 변천]
강릉 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주원의 22세 김윤신(金潤身)[호 괴당(槐堂)]이 괴당공 옥가파(玉街派) 파조이다.
이후 돈령 참봉 김세달(金世達)→ 예빈시 직장 김광언(金光彦)→ 증공조 참의 김임(金銋)→ 첨지중추 김몽상(金夢祥)-김귀남(金貴南)으로 이어 졌다.
김귀남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 김정진(金貞震)이 결혼하고 김지봉(金之奉)을 낳았을 무렵 마침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난을 피하려고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조선 효종 때 울산 온양에 정착하였다.
김지봉의 아들 김일소(金日蘇)는 동지중추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원실(金元實)이 밀양으로 옮겨 갔다.
김원실의 아들 김수익(金壽翼), 김수익의 아들 김학재(金學載)에 이르러 울산으로 돌아갔다.
이후 김학재→ 김병인(金秉仁)→ 김연복(金演福)·김연영(金演榮)으로 이어졌다.
김연복의 둘째 아들 김주경(金注卿)이 생업을 위해 기장으로 이거하면서 동래 입향조가 되었는데, 그때가 철종 초인 1850년대이다.
김주경이 동래로 내려온 이후로는 족보에서 누락되어 그 후대를 알 수 없으나, 기장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아들 대에 해안 통을 따라 이거하여 부전동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부전동에 정착한 첫 입향조는 분명하지 않으나 1904년 발간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총 12가구 중 김씨가 8가구로, 여기에 기록된 호주 김내종(金來宗), 김차종(金且宗) 두 형제의 아버지가 연대로 보아 부전동에 처음 정착한 입향조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까지 살고 있는 후손을 찾을 수 없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자연 환경]
부전동이 속한 지역은 대부분 평지이다.
성지곡 일대에서 발원한 부전천이 남쪽으로 흘러 동천으로 유입하며, 과거 광무교가 있었다.
현재는 부전동을 지나는 유로는 대부분 복개되어 복개로라는 명칭으로만 그 흔적을 알게 한다.
[현황]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성(姓)』에는 부전동에 강릉 김씨 30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2013년 현재는 강릉 김씨 가구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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