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 [ 溟州 ]
강원도 강릉 지역에 있었던 지명.
본래 예국(濊國)에 속했다가 고구려가 이곳을 차지한 뒤에는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주(何瑟羅州)로 불리었다.
신라 선덕여왕 때에는 이곳에 소경이 설치되었으나 658년(무열왕 5) 다시 주(州)로 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명주로 고쳐졌다.
고려 건국후 936년(태조 19) 동원경(東原京)으로 승격된 명주는 지방 관제가 정비되는 성종대에 많은 변혁을 거쳤다.
983년(성종 2)에 하서부(河西府)로 고쳐진 것을 비롯하여 986년에는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로, 992년에는 목(牧)으로 바뀌었다.

뒷날 1916년 북일리·북이리·남일리면이 합쳐져 강릉면이 되었다가 1931년 강릉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55년 강릉읍이 성덕·경포면을 합쳐 시로 승격되면서 강릉군이 명주군으로 바뀌었다.
1963년 1월 현남면이 다시 양양군으로 환원되어 명주군은 2개 읍 7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73년 7월에 왕산면 남곡·구절리가 정선군으로 이관되었고, 1980년 4월 묵호읍이 삼척군 북평읍과 합쳐져 동해시가 되어 명주군은 1읍 7개 면 145개 이를 관할 하에 두게 되었다.
1983년 구정면 안별리가 감동면으로, 산북리가 성산면으로, 연곡면 방내리가 주문진읍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88년 당시 명주군의 면적은 945.64㎢, 인구는 8만 2658명, 1개 읍 7개 면 66개 이로 되어 있었고, 군청은 강릉시 교동에 있었다.

명주군은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시 인구는 약 7만명으로, 강릉시와 통합되어 새로운 강릉시가 되었다. →강릉시

[출처:두산백과]

 

江陵史 개관

江陵(강릉)이 최초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후한서및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동예로 부터이다.
동예는 삼국유사에 마한편도 등장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에 말하길, "명주(溟州)는 옛날濊國 (예국)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 예왕의 印章(인장)을 얻어서 바쳤다."라고 하였다.

또한 실제로 동예 군장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된 동제 도장이 발견됨으로써 이 기록은 분명한 사실로 밝혀졌다.
신라시대 명주는 현재 북한의 고성지방을 포함하여 경주지역 이전까지의 동해안 지역을 지칭한다. 
여기서 강릉은  명주지역의 중심도시였으며,  강릉시와 명주군이 1995년 통합될때 까지 명주라는 이름을 유지하였다. 
강릉이 명주지역의 중심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조선시대까지 영동지역을 총괄하는 부서가 설치되고 관리가 파견된 지역은 강릉이었다. 

그리고 왕위세습에서 밀려난 김주원 일파가 새롭게 터전을 잡은것도 강릉이었다.

마지막으로 영동지역의 도시중 문화유산의 밀집도가 가장 높고, 가장 우수한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점을 본다면 강릉이 중심지 역활을 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강릉의 역사는 저 멀리 구석기 시대까지 올라가며 신석기를 거쳐 동예국으로 탄생되었다.

그리고 동예국은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에 하서량, 하슬라 라고 불려지는 것으로 보아, 함경도 쪽은고구려에 흡수 되고 강원도 쪽은 신라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 고구려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 시대 때 부터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한때 강릉은 경주에 이어 신라 2경으로 불려졌으나, 이것은 강릉의 경제적 가치보다는 군사적 가치를 중요시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슬라경은 패쇄되어 통일신라 시대인 신라 35대 경덕왕(757년) 때에 溟州가 되고 1260년(고려 원종)에 江陵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려 태조(936년) 때 東原京으로 개칭하고, 임영관을 설치하였다.
현재 임영관은 복원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이고, 유적지는 도심 중앙에 위치해 있어 관람하기는 편리하나 주차시설은 불편한 편이다.
940년에다시 명주라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년)에 河西府라 개칭하였으며, 986년 溟州道라 고치고, 995년 지방구역을 10도로 나눌 때 朔方道(삭방도)라 개칭하고, 1178년(고려 명종 8년) 滄海溟州道(창해명주도)라 개칭하고, 1263년(고려 원종 4년)에 江陵道라 개칭하고 1389년(고려 공양왕 원년)에 대도호부로 승격되어 별호를 臨瀛(임영)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명실공히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대도호부가 되어 嶺東을 통괄하게 되었다.

조선 세조때 진관부를 두어 2부(府:삼척, 양양), 4부(部:평해, 간성, 고성, 통천), 2현(縣:울진, 흡곡), 2속현(우계, 연곡)을 두었다.
1660년(조선 현종) 도의 명칭이 원양도(原襄道)로 바뀌고 강릉은 현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격기도 하였다.
또 1675년(조선 숙종)에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1782년(조선 정조)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고 도의 이름은 원춘도(原春道)로 바뀌었다가
1895년(고종) 관찰부를 두었으며 다음 해인 1896년(고종)에 갑오개혁으로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 강원도 강릉군이 되어 21개 면을 관할하는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1914년 북일리 북이리 남일리면을 합쳐 군내면(郡內面)으로 고치고 가남면을 하남면(河南面)으로 고쳤고 1916년 다시 군내면을 강릉면으로 1920년 성덕면 성남면 자가곡면을 합쳐서 성덕면(城德面)으로 고치고 1931년 강릉면이 정(町) 8개와 7개리(홍제리 교동리 포남리 초당리 송정리 강문리 견소진리)를 합해 강릉읍이 되었다.
현재 위의 7개리는 모두 동으로 편제되었다.

1935년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1937년 신리면이 주문진면으로 1938년 정동면이 경포면으로 바뀌고 1939년 임계와 도암면을 정선군에 대화 진부 봉평면을 평창군에 내면을 인제군에 각각 이관하고 1940년 주문진면이 주문진읍으로 승격 되었다.  

1955년 강릉읍이 성덕면과 경포면을 합하여 강릉시가 되고 나머지 지역이 명주군이 되었다.

1973년 왕산면 구절리와 남곡리가 정선군 북면으로 이관되고 1980년 명주군 묵호읍이 삼척군 북평읍과 합쳐 동해시로 승격되고 1995년 도농(都農) 통합으로 강릉시와 명주군이 강릉시로 흡수 통합 되었다.

강릉시는 과거의 강릉시 지역과 명주군 지역의 주문진읍 연곡면 사천면 성산면 왕산면 구정면 강동면 옥계면을 합하여
1읍 7면 39개 법정동 20개 행정동 65개 법정리 140개 행정리로 구성되었다.
면적은 1039.87평방KM 인구는 약 23만명으로 남쪽으로 동해시 서쪽으로 정선군 일부와 평창군 북쪽으로 홍천군 일부와 양양군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아직도 명실공히 영동지방의 교육 문화 행정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명주민란 [ 溟州民亂 ]
고려시대 1199년(신종 2) 2월-3월
고려 신종 때 명주(溟州:지금의 강원도 강릉)에서 일어난 민란.
내용1199년(신종 2) 2월 명주에서 도둑이 들고 일어나 삼척과 울진 두 현(縣)을 함락하였다.
이 때 동경(東京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에서도 도둑이 들고일어나 명주의 도둑과 합세하여 주군(州郡)을 약탈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낭장(郎將) 오응부(吳應夫), 차함합문지후(借銜閤門祗候) 송공작(宋公綽)을 명주도(溟州道)에, 장작소감(將作少監) 조통(趙通), 낭장 한지(韓祗)를 동경에 보내어 이를 초무(招撫)하게 하였다.
같은 해 3월 동경적의 괴수 김순(金順), 울진적의 괴수 금초(今草) 등이 와서 항복하니, 왕은 주식(酒食)과 의복을 주어 돌려보냈다.


무신정권이 성립된 뒤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으며 명주의 민란이 일어났던 신종 초만 하더라도 개성의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 진주리(晉州吏) 정방의(鄭方義)의 난 등 2, 3년간에 7, 8건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주식과 의복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을 무력으로 억누르기보다는 되도록 회유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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