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단오제 主神… 실존 인물
유명 가문 태생… 중국 유학파 지식인
15세 출가… 영동지역 사찰 중창건 관여
새 봄에 시작하는 이야기는 현실과 염원 사이에 선 인물에 대한 것이다.
영웅은 올곧은 삶을 살아왔지만 민중들은 그들에게 또 다른 삶도 원하였다.
영웅의 삶은 파편이 되어 민간에 흩어졌고, 새롭게 각색되면서 민중이 환호하는 삶을 사는 또 다른 영웅으로 탄생했다.
그런 탓에 역사적 삶과 민중 사이에 전하는 영웅의 삶은 같을 수가 없다.
본고는 한 사람이 가진 두 가지 영웅 상에 대한 온도 차이를 통해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탐색하고자 한다.
매년 5월 5일, 강릉시에서는 단오 날을 중심으로 민속축제인 강릉단오제가 열린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 등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축제이다.
이러한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범일국사이다.
범일국사는 중국에서 선종을 들여와 사굴산문을 개창한 실존인물이다.
범일(810~889)은 강릉에서 태어나 굴산사에서 입적하였다.
문성왕 13년(851)에 당시 명주도독 김공이 청하여 굴산사 주지로 부임해 40여 년간 영동 지역에 선종을 일으켰다. 강릉의 굴산사와 신복사(神福寺), 동해 삼화사(三和寺), 양양 낙산사(洛山寺) 등 영동지역 사찰의 중창건에 관여했다.
경문왕, 헌강왕 등이 범일에게 국사로 입조를 청했지만 범일은 수련에만 정진했다.
선종의 역사를 기록한 『조당집(祖堂集)』에는 범일국사의 시호는 통효(通曉)이며 이름은 품일(品日)이라고 나와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명주도독 김술원이고 어머니는 문씨이며 13개월 만에 태어났다.
15세에 출가, 829년(흥덕왕 4년)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왕자 김의종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마조도일의 제자인 염관, 제안에게 6년간 사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렇게 보면 범일은 상당한 가문 태생으로 중국에 유학까지 다녀온 당대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범일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신이하게 태어나 난관을 헤치고 대업을 이룬 뒤 민중을 구제하였으며 사후에는 지역의 수호신으로 좌정시킨 것이다.
즉, 옹달샘에 비친 태양을 삼킨 처녀가 임신하여 태어난 범일은 곧 버려진다.
하지만 학의 도움으로 비범함을 인정받고 자라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는 대관령에서 도술을 부려 왜구를 물리쳐 민중을 구했고 죽은 뒤에는 강릉의 수호신이 되었다.
하지만 범일국사가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등극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즉, 조선 후기로 본다.
범일국사 이전 대관령 산신은 신라 명장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전국 곳곳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범일은 강릉이 유일할 것이다.
학계에서는 지역 출신의 인물을 성황으로 모시는 것은 지역의 역사를 반영하고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기능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것뿐일까?
민중 아픔 씻어주는 ‘자비 수호신’
대관령 선자령 인근 성황사 당집 위치
민중이 바라본 범일 성황 모습 간직
▲ 대관령 성황당 범일 탱화
구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에서 선자령 방향 멀지않은 곳에 신터가 있다.
강릉단오제가 시작되는 곳으로 성황사와 산신각 그리고 용정, 칠성당이 있다.
성황사 당집은 목조건물로 기와지붕이다.
성황사란 현판이 있고 문을 열면 국사성황 범일의 화상이 있다.
지난주 본지(上)에 실렸던 범일의 화상은 근엄하면서 자애로움이 가득하다.
복장이나 소품 등에서 선승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민중이 바라본 범일은 성황의 모습이다.
범일은 시종과 호랑이의 호위를 받으며 활과 화살통을 메고 백마를 탄 위엄 있는 수호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
▲ 대관령 성황사
범일국사를 강릉단오제의 신으로 모시려면 선승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범일의 실제 삶도 충분히 영웅적이다. 하지만 민중들은 보다 현세적이고 구체적인 캐릭터를 원했다.
『조당집』에는 범일의 조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민중들은 이 틈새를 신화로 스토리텔링했다.
우리 민족의 건국 신화에 이야기를 얹어 천부(天父)형 탄생신화를 만들고 굴산사가 존재했던 구정면 학산 일원에 석천과 학바위 등 신화 속 현장을 곳곳에 남겼다.
하지만 성황의 존재 이유는 지역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이다.
강릉은 영동지역에서 비교적 넓은 평야를 가졌고, 많은 인구가 밀집된 남북의 교통 요지였다.
때문에 상고대에는 중국과 싸웠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 왜구나 말갈의 침입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더욱이 왜란과 호란 등 대규모 전란 속에서 민중은 기댈 곳이 없었을 것이다.
범일이 국사성황으로 좌정하는 시기는 조선 후기로 본다.
이 시기는 조선시대에 있어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가는 시점이다.
이젠 전쟁을 수행하는 장수보다는 전란 속에서 입은 심신의 상처를 아물게 도와줄 성황이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김유신보다는 자애로운 범일국사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대관령 성황사의 탱화는 무신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무력의 상징인 칼보다는 다소 무딘 활을 가지고 있다.
민중이 원했던 국사성황은 민중의 아픔을 씻어주는 선승의 자비를 갖춘 수호신이다. 용장보다는 덕장을 원했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 안광선 2014.0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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