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라 평생을 살아 온 ‘진짜 강릉사람’이 강릉 거리에 켜켜이 쌓인 옛 이야기를 풀어내는 역사문화 해설서 2권을 냈다.
박삼균(69) 영동인문학연구소 대표가 펴낸 ‘강릉 고샅길 사용 설명서’다. 
저자는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퇴직 후 골목투어 프로그램을 만들고 가이드 역할을 해았다. 
그가 강릉 거리 곳곳에 배어 있는 이야기들을 씨줄 날줄을 엮듯이 기록하고 해설한 강릉 이해 지침서다. 
강릉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1부-원도심지역 및 월화거리’ 편을 낸 데 이어 올해 ‘2부 구정면 성산면 편’을 내놓았다.
1부에서는 읍성과 관아 이야기, 역사 속 월화정 이야기 등 강릉 도심 명소와 문화유산에 대한 해설부터 용강동과 서부시장, 동부시장과 아파트 이야기 등 근·현대 강릉 거리의 변천 과정에 이르기까지 강릉 시가지가 품고 있는 모든 이야기 보따리가 낱낱이 풀어 헤쳐진다.

올해 펴낸 2부에서는 구정면과 성산면 각 마을의 역사와 명소, 생성 과정, 생활 문화가 마치 박물관 해설서를 대하듯 시선을 사로잡는다.

구정면 어단리 편에서 필자는 “어단(於丹)이라고 쓰지만, 그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의 표기이고, 그전에는 어단(御壇)이라고 썼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야기와 기록에 의하면, 고려·조선 교체 초기에 강릉의 문사들이 고려 우왕의 위패를 모신 어단을 쌓아 놓고 충절을 지키며 조선 조정에서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겠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그후 조선 왕조가 자리잡으면서 어단은 해체되고, 다만 그들의 선비정신을 가상히 여겨 추방하자 그들이 언별리 깊은 골로 들어가 단경(壇京)이라고 부르며 충의를 지켰다는 얘기가 잘 알려져 있다”는 풀이가 더해진다.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저자와 동행, 숨어 있던 얘기를 들으며 강릉 여행의 흥취를 배가할 수 있다. 
저자는 “내가 겪고 경험한 과거사도 조만간 역사 속에서 매몰될 것이 분명하니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억의 파편이라도 남겨두자는 결심”이라며 “앞으로 강릉시 해변지역을 비롯 주문진 등 나머지 읍·면 지역의 고샅길 이야기도 완성해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 황선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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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현대화 권고안 발표(종합)"
치킨·피자 제사상에? "고인 최애음식도 가능"·"부모 제사 합쳐서 지내도 무방"
"제사 오후 6시부터 지낼 수 있어"…'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 전통제례 보존 및 현대화 권고안' 공개
전통제례 보존 및 현대화 권고안 기제사상
 "제사로 인해 불화가 생긴다면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제사음식 준비도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준비해야 좋다.

부모님의 기일이 다르더라도 합해서 지내도 좋다.

지방을 쓰기 어렵다면 사진을 사용하면 된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위원장 최영갑)는 2일 오전 10시 국회의사당 국회소통관에서 이같은 '전통제례 보존 및 현대화 권고안'을 발표했다.

이번 발표는 일반 가정이 각자의 형편에 맞게 제사를 지내던 방식을 대부분 수용한 내용이다.
권고안의 진설을 살펴보면 기제(조상의 사망일에 지내는 제사)의 경우 밥과 국, 술과 과일 3종 등을 포함, 간소화했다.

묘제(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는 술과 떡, 간장, 포, 적, 과일이 진설되고, 과일의 경우 한 접시에 여러 과일을 같이 올렸다. 또한 가정의 문화, 지역의 특성, 제사의 형식, 형편에 따라 달리 지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영갑 위원장은 "제사의 핵심은 사랑과 공경으로 정성을 다함에 있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는 가족이 모여 안부를 묻고 화합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며 "제사상은 간단한 반상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더 올리거나 생일상처럼 차려도 좋다"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제사 시간은 오후 6시부터 지낼 수 있으며 제사음식은 고인이 평상시에 좋아하는 음식을 올려도 무방하다"며 "제사의 주재자도 성별을 따지지 않고 가장 가까운 연장자가 주재할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이번 전통제례 보존 및 현대화 권고안은 최근 설문조사 결과 등을 반영한 결과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6명이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앞으로 제사를 지속할 의향이 있는 사람은 4명 남짓인 것으로 조사됐다.
'제례 문화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5.9%가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반면에 제사를 지낼 계획이 있다는 답변은 44.1%로 나타났다.
이같은 결과는 최근 조사기관 리서치뷰에 의뢰,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결과에서 드러났다.
이번 조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는 이유로는

△간소화하거나 가족 모임 같은 형태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 41.2%

△시대의 변화로 더는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가 27.8%

△종교적 이유나 신념이 13.7%순이었다.

 

제사를 계속하려는 이들은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 42.4%

△가족들과의 교류를 위해서 23.4%

△부모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 15.9%

△전통 유지 10.0% 등의 이유를 꼽았다.

제사를 지낼 때 가장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제수 음식의 간소화 25.0% 

△형식의 간소화 19.9% 

△남녀 공동 참여17.7%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제사 17.2% 

△제사 시간 변경 5.3% 등이 뒤를 이었다.

출처:"(서울=뉴스1) 2023. 11. 2.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인간이 무덤을 만든 역사는 약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사피엔스의 역사와 함께하는 셈이다.

무덤을 썼다는 것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내세가 있다고 믿는 셈이니 종교와 제사의 기원도 된다.

멀쩡한 무덤을 다시 파헤치는 파묘의 풍습도 적어도 약 1만2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거대한 석조 기념물로 유명하여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튀르키예 괴베클리에서는 제단에 걸었던 해골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그 위에는 화려한 색칠을 하기도 했는데, 제사에서 영정 사진을 올려놓듯이 해서 조상을 기억했다는 뜻이다.

괴베클리 이후에 발달한 차탈회위크의 신석기시대 마을 사람들은 집 안 마루 밑에 무덤을 만들던 풍습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 이전에 만들었던 무덤을 건드리면 급하게 덮어버리거나 따로 꺼내서 제단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렇게 파묘를 하는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고고학과 인류학에서는 전문 용어로 ‘이차장(second burial)’이라고 한다.

한번 묻은 무덤을 다시 파헤쳐서 인골을 수습하여 화장하고 골호(뼈를 담는 항아리)에 담아서 따로 묻는 풍습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그러한 증거는 고인돌과 독무덤(옹관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의 경우 그 밑에 만든 무덤의 크기로 이차장의 흔적을 짐작한다.

무덤의 길이가 30cm 정도도 안 되는 작은 것들이 종종 발견된다.

이는 어딘가에서 무덤을 만들었다가 후에 파묘하고 다시 꺼내어 그 뼈를 모아서 넣어둔 것이다.

또한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한 독무덤도 같은 원리이다. 이렇듯 파묘라는 풍습은 사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오랜 전통이다.

아스테카문명에서는 무덤에서 꺼낸 해골을 보석과 황금으로 화려하게 치장해 숭배하기도 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성인 유골 파내 숭배한 중세 서양

인골 자체를 숭배하는 풍습은 중세 서양이나 중남미로도 이어졌다. 

특히 해골 숭배 사상이 특별히 발달한 아스테카문명에서는 해골에 화려한 보석과 황금을 붙여서 아름답기까지 한 예술품을 만들었다. 서양 중세 시대는 더욱 극적이다.

서기 9세기에 기독교를 보급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은 우상을 믿던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서 성인의 유골에 믿음의 서약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각 교회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성인의 유골’이라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훔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성인이 갑자기 늘어날 리 없으니 나중에는 공동묘지에서 엉뚱한 유골을 파서 성인으로 둔갑시켰다. 

지금 같은 유전자 검사가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해골의 숭배로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진 경우가 있으니, 바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는 828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코 성인(마가복음의 저자)의 유골을 훔쳐온 것을 기점으로 크게 흥성하여, 수많은 교회 건물과 광장이 지어졌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산마르코 광장도 바로 마르코 성인의 유골을 기념하여 지어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성인의 유골이 세계적인 도시를 탄생시킨 격이다.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주로 해골에 집착하는 반면에 한국은 땅에 집착한다.

조상의 유해 자체는 터부시하고 그 대신에 좋은 곳에 무덤을 만들어서 시신이 곱게 자연으로 돌아가면 후손들이 발복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골보다는 그들의 유택(幽宅)을 중시하는 풍수 사상이 발달하는 배경에는 한국만의 독특한 지리 지형의 조건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과 러시아 극동 지역은 산성이 매우 강한 토양인지라 매장을 하면 인골은 빠르게 풍화한다.

삼국시대 고분의 경우도 수백 개를 파도 제대로 된 인골은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풍수 사상은 한국이라는 풍토에서 독특하게 발달해 온 역사를 가진 셈이다.


다른 사람 묫자리 가로채기까지
무덤과 인골에 대한 믿음은 심지어 다른 사람의 묫자리를 가로채거나 다른 무덤을 함께 넣는 풍습으로도 이어진다.

유명인이나 귀족의 무덤을 재단장할 때 슬쩍 자기의 조상 인골로 바꿔치기하거나 자기 가족의 사주를 넣어서 자손이 흥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첩장’이라고도 불리는 이런 풍습도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어서 고고학에서는 ‘추가장’ 또는 ‘배장’이라는 전문 용어가 있다.

예컨대, 약 2500년 전 알타이 초원에서 살던 족장들이 남긴 쿠르간(대형 고분)의 근처에서는 예외 없이 작은 무덤들이 발견된다.

스키타이문화가 사라지고 1000년 가까이가 지난 직후 소규모로 쪼개져서 살던 튀르크(돌궐) 계통의 주민들이 만든 것이다.

자기들이 거대한 무덤을 만들 능력이 없으니 큰 고분의 영험한 능력에 기대어서 자신들의 무덤을 끼워 넣은 것이다.

면에 높은 권력을 지닌 왕들은 다른 사람의 무덤을 빼앗기도 한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죽은 이집트의 투탕카멘 왕이 그러하다.

왕권이 약했던 투탕카멘은 자기의 묫자리도 제대로 못 만들고 죽었다.

그 바람에 다른 귀족이 잡아놓고 준비했던 무덤에 대신 들어가기도 했다.
‘배장’이라는 풍습도 있는데, 이것은 왕이나 주군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그 부관들을 주변에 함께 묻는 것을 말한다.

흉노의 왕인 선우의 대형 무덤에는 주변에 수십 개의 배장묘가 함께 발견된다.

죽어서도 주군을 지키라는 바람인 것이다.

파묘, 이장… 죽음 체화하는 과정
무덤에서 꺼내 온 유물에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한 전통은 5000년 전 홍산 문화의 옥기에서도 볼 수 있다.

홍산 문화의 옥기는 5000년 전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옥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홍산 문화의 옥기는 그보다 2500년 후인 중국 춘추시대의 산시성 량다이춘(梁带村)이라는 곳에서 발굴된 춘추시대 ‘예국’이라는 나라의 귀족 부인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어쩌다 수천 년이 지난 후에 직선거리로 1000km나 떨어진 곳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녀의 몸 주변에는 홍산 문화는 물론이고 양쯔강 유역과 상나라에서 가져온 수많은 옥기도 함께 묻혀 있었다.

아마 이 부인은 점사를 치던 사람으로 옛 무덤에서 발견된 옥기에 신령한 기운이 있다고 생각해서 모아서 치장한 것 같다. 당시에도 옛 무덤을 골라서 도굴하여 옥기를 꺼내는 풍습이 있었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무덤을 만들게 되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죽음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죽음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면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이 삶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담아 무덤을 만들고, 먼저 간 이들을 기억하는 축제인 제사를 지내며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바로 인간의 죽음을 매장과 제사라는 과정을 통해 받아들이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체화시키는 과정이 무덤이다.

우리가 때만 되면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고 또 파묘를 해서 이장을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무덤의 발굴이 고대인들의 삶에 접근하는 1차 자료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러시아 화가 플라빈스키는 중앙아시아의 버려진 이슬람 묘지를 거닐면서 “공동묘지의 언덕 위에서 영생을 갈구하던 영혼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무덤을 만들고 다시 파묘를 하는 그 죽음을 대하는 과정의 본질은 결국 삶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출처: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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