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관동별곡으로 강원도 전국에 알려
강릉김씨 25세손 김첨경(金添慶)은 호를 동강(東岡)이라 했고 강릉부사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동강은 강릉부사로 있을 때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을 수축하여 지금에 있게 하였다.
동강이 이곳에 재임하고 있을 때 화비령(火飛嶺)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백성을 해친다기에 제문을 지어 화비령 산신각에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에 “정성을 다하여 지내는 제사이니 이 제사 뒤에도 호랑이를 시켜 백성을 해하면 산신각을 불태워 버릴 것이니 그리 알라”고 협박을 했다.
필자는 조선총독부에서 수집 발간한 ‘부락제(部落祭)’라는 책에 실려 있는 100편이 넘는 한국의 부락제 축문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서 신을 공갈하고 협박하는 축문은 한 편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오직 동강의 화비령 제문에서만 신을 협박하는 축문을 읽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내용의 축문이 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이한 축문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선조시대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강원도 사람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한강이 관찰사로 있을 당시 원주에 있는 여말 선초에 절의를 지켜 세상에 이름이 난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의 묘소에 제사를 지날 때 그 제문에 “산에 고사리가 있으니 굶주림이 없을 것이고 집에 거문고와 책이 있으니 스스로 즐길 수가 있으니 천고의 텅 빈 산 속에 한 줄기 맑은 바람이로다”라는 글이 있다.
한강은 당시 명문(名文)으로도 알려졌던 사람으로 강원도의 관찰사로 어떤 업적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운곡의 제문은 유명하다.
강원도 관찰사로 가장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은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저자 정송강(鄭松江)이다.
지금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송강의 관동별곡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으나 건국 이래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가장 오랫동안 실렸던 글이 관동별곡일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학령기(學齡期)의 거의 80% 정도는 고등학교 교육을 받고 있다고 보면 우리나라 상당수의 사람은 송강의 관동별곡을 알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관동별곡이 이들에게 강원도 인식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때 송강이 강원도의 관찰사로 왔었다는 것은 강원도로서는 큰 혜택이다.
강원도의 관찰사로서 후대에 강원도를 이만큼 알려준 사람이 송강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강원도에 송강의 선정비가 없지만 관동별곡시비가 강릉의 경포대에 세워져 있어 길이 그를 기리고 있다.
송강은 가사의 명인일 뿐만 아니라 단가(短歌)에도 뛰어나 ‘송강가사(松江歌辭)’에 그의 단가가 79수 실려 있고 이것 외에도 ‘이선본(李選本)’에 단가 3수가 있다.
이 많은 단가 가운데 ‘훈민편(訓民編)’에 속할 수 있는 것이 여러 수 있어 그가 목민관(牧民官)임을 알게하는데 특히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지었다는 단가가 한 수 있다.
“강원도 백성들아 형제 송사하지 마라
종뀌밭뀌(종이나 밭)는 얻기에 쉽거니와
어디가 또 얻을 것이라 흘깃할 길
하난다.(눈을 흘려 적대시함)”
강원도의 목민관으로서 강원도 백성에게 훈계한 단가이다.
재물 때문에 형제 송사를 일으켜 형제까지 적대시해서는 아니되고 재물은 얻기가 쉽지만 형제가 어떤 사이인데 적대시하느냐는 목민관의 심정을 노래한 글이다.
도지에 400여명의 관찰사가 등재되어 있지만 도민을 직접 타이른 노래는 이것 외에 또 있을 것 같지 않다.
송강의 강원도 관찰사로서의 치적은 고사하고 관동별곡의 후광(後光)이 전국적으로 미친 영향이 너무도 크기에 그 때문에 송강 이후의 관찰사는 인지력이 약해지고 말았다.
도지의 도선생안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나 조선조 초기에는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진 관찰사가 거의 없다가 인조(仁祖) 이후부터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선조 초엽의 방촌이나 최만리와 같은 사람은 그 행적이 청백하여 청백록에 올라 있으나 도지에 선정비가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인조 때부터 선정비가 세워진 기록이 있고 청백록에 올라 있는 사람 중 선정비가 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인조 이후에 성행했던 관습으로 보인다.
조선조 중기의 관찰사 가운데는 선정비가 있다는 기록의 사람이 많다.
더욱이 그 행적이 청백하여 세워진 선정비도 물론 많겠으나 개중에는 관속들의 농간으로 재임 중에 세워져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고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종 연간의 강원도 관찰사 가운데 민(閔)씨 성을 가진 사람이 4명이나 된다.
이것은 민비의 동족으로 보이고 일제 때 지사였던 이범익(李範益)은 동상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태평양전쟁 당시 공출되었는지 지금 도내에는 없다.
다만 춘천의 소양정(昭陽亭) 노변의 비석군 속에 이범익 지사의 비석이 남아 있다.
출처:강원일보 [강원문화 회고]최승순 강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