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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납치된 ‘한 조선 도공의 신화’… 진실은 본관도 족보도 잘 모른다

koreasam 2023. 12. 14. 15:32


  • [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_ 납치도공 신화 바로보기 ①

    지난 7월29일 자신의 가마 작업실을 방문한 답사팀에 작업 중인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15대손 심수관씨. 노형석 기자
    16세기 말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자기 장인들은 역경을 딛고 현지 백자 생산을 이끌어낸 근세기 한·일 문화교류 공로자들로 평가된다.
  • 한일수교 50주년을 앞두고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 특히 1598년 전라도 남원에서 규슈로 끌려갔다는 설이 전해지는 도공 심당길 15대손으로, 규슈 남단 가고시마에서 특산 도자기 ‘사쓰마야키’ 생산가마를 운영하며 가업을 잇고있는 장인 심수관(64·본명 오사코 가즈데루)씨의 행보가 주목된다.
  • 그는 2019년 주가고시마한국명예총영사로 임명됐고 명예남원시민 인증도 받는등 문화외교의 가교를 자임하며 활동중이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대해 학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 심수관 가문을 비롯한 납치 도공과 후손들의 역사적 뿌리, 활동 내력, 작품의 의미 등과 관련해 객관적 사실들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있을뿐 아니라 상당수 내용들이 과장되거나 가공됐다는 의문까지 제기되기 때문이다
  • . ‘한겨레’는 도자사학계의 권위자인 방병선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팀과 지난 7~8월 일본 규슈 일대의 조선 도공 관련 유적과 유물들을 답사했다.
  • 이를 토대로 납치 도공 신화에 대한 논란과 진실을 다룬 칼럼을 2회에 걸쳐 싣는다..

    가고시마현 미야마에 있는 조선도공 심당길의 15대손 심수관씨의 가마와 전시관. 지난 7월29일 답사단이 방문했을 때 찍었다.
    “심수관 선생 선조들은 조선에서 옹기를 만들던 장인이었을까요? 백자를 만들었던 장인이었을까요?”

    “일본에 온 저의 선조 1대 장인(심당길)은 도자기 굽던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자기나 옹기 어느 쪽도 안 만들었던 것 같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 나왔다.
  • 지난 7월29일 일본 규슈 가고시마현 미야마시에 있는 도예가 심수관씨의 가마 작업장 회의실에서 열린 심씨와의 대담 자리는 방병선 교수 답사팀원들에게 당혹스러운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 그렇다면 심씨의 선조 심당길은 도공으로 끌려온 게 아니라는 말인가? 심씨는 말을 이었다.


    “옹기나 도자기를 만든 사람은 성도 없는 천민이었죠. 선조 심당길은 성과 이름이 있었고 찬이라는 어릴 적 이름도 있었다고 해요. 400년 전 조선에서는 성을 갖는 사람이 일부였을 텐데요.
  • 당시 가고시마를 지배하던 시마즈 가문의 군이 부산에서 잡아서 데려온 포로들을 긴카이, 즉 김해(金海)라고 불렀어요. 사람 이름 대신 부산 인근 김해 지명으로 불렀는데 나중에 그게 그들 성이 됐어요.
  • 우리 선조는 초대 도공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난 생각해요. 야키모노(도자기)는 여기 와서 하게 된 것 같아요. 도공이 어떻게 어렸을 때 이름을 갖고 있겠어요.”

    그의 발언은 일본 내 조선 납치 도공의 본적과 현지 도착 경위, 작업 활동 성격에 대해 양국의 학계와 언론계에서 좀 더 면밀하고 심층적인 사실 찾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 방병선 교수는 “수년 전만 해도 심씨는 자신의 선조들 뿌리와 족보 등에 대해 물으면 모르니 한국에서 알아봐달라는 대답을 꺼내곤 했다.
  • 그의 발언이 달라졌다”고 했다.

    15대 후손 심수관씨는 현재 일본에서 독특한 뚫음무늬인 투각 기법과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정교한 인물과 동물 등의 조형물 도자상으로 건재를 과시하며 가고시마를 대표하는 도자기 업체를 운영 중이다.
  • 지난 7월 대담자리에서 선조인 조선 도공의 혼을 이어받아 생명이 약동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모국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 지난해와 올해 본관이라고 밝힌 경북 청송과 선조 심당길이 피납됐다는 전북 남원, 조상묘가 있다는 경기 김포 등지를 방문해 기념관 건립 등의 선양 사업을 논의했다.
  • 국립중앙박물관도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그를 초청해 한일수교50주년 특별전 추진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 2일엔 국악인들이 가고시마현 공연장에서 심씨를 초청한 가운데 심수관 찬가를 열창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최근 그의 행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조상의 뿌리를 찾았다고 알려진 대목이다.
  •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장에 초대받아 갔다가 청송 심씨 종친들을 만나 김포에 선조 심당길의 부친 심우인과 조부 심수의 묘소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해 7월 예복을 차려입고 무덤 앞에 가서 제사를 지내며 후손임을 고한 것이다.

    피납도공의 후예임을 역설해온 심씨가 가문의 본관이 청송이라고 밝힌 것과 선조들이 남원 등 조선에서 활동한 행적에 대해 언급해온 내용들은 가문의 구전과 도공 심당길이 납치된 조선의 본래 거처를 남원으로 지칭한 유명작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랴’ 외에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 임진왜란 당시 가고시마의 지배세력인 시마즈번의 군사들이 전라도 순천과 남원 등지로 출병해 80여명의 도공들을 연행했다는 기록이 있어 심당길이 끌려간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인다.
  • 그러나 본관이 청송이고, 남원에서 선조들이 활동했으며, 김포에 조상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선시대나 일본 에도시대의 객관적인 세부 기록과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 후반 유럽에 수출돼 선풍을 일으킨 12대 장인 심수관의 걸작 대화병. 전면에 금박채색을 하고 일본의 전형적인 자연풍경과 전통복식의 인물상을 화병 표면에 여백이 거의 없게 빽빽하게 채워넣은 것이 특징이다. 가고시마 역사자료관(레이메이칸) 소장품.
    단적인 사례가 족보 문제다.
  • 청송 심씨 문중은 수년 간격으로 족보를 재간행하고 있는데, 2000년에 펴낸 ‘경진보’ 족보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심당길이 2017년 나온 족보인 ‘정유보’에 의금부도사 등을 지낸 심우인(1549~1611)의 아들 찬의 초창기 이름으로 돌연 등장한다.
  • 정유보에서는 심찬의 초기 자(이름)가 당길이라면서, 일본으로 피랍된 정황을 세세히 기술했다.
  • 무관인 건신도위에 재직할 당시 왜란이 일어나 일본에 납치됐고 가고시마에 정착해 사스마야키를 창설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더해 15대손 심수관까지 이어지는 심당길 후손들의 명단과 주요 활동이력까지 모두 족보의 계보에 편입시켰다.
  • 앞서 지난 2013년 15대손 심씨가 집필한 ‘심수관가 역대 수장고’ 설명서를 보면 원조인 1대 심당길이 청송 심가 12대손 심찬으로 왜군의 2차 출병(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싸우다 끌려갔고, 포로가 된 것을 수치로 여겨 평생 아명인 당길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고 기술해놓았다. ‘정유보’는 사실상 이 내용을 토대로 족보 내용을 대대적으로 고친 것에 가깝다. 심씨가 지난 7월 방 교수팀과 한 대담을 통해 자신의 가문이 원래 도공 집안이 아니라고 말한 데는 그의 집필본 내용에 따라 6년 전 바뀐 청송 심씨의 족보가 근거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심수관 도자 가문의 명성을 전세계에 알리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 브랜드로 성장시킨 12대 장인 심수관(1835~1906). 그의 업적이 단연 독보적이어서 이후 13~15대로 이어지는 후대 가문의 장인들은 모두 그의 이름만을 쓰게 되었다.

    심수관 도자 가문의 명성을 전세계에 알리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 브랜드로 성장시킨 12대 장인 심수관(1835~1906). 그의 업적이 단연 독보적이어서 이후 13~15대로 이어지는 후대 가문의 장인들은 모두 그의 이름만을 쓰게 되


노형석입력 2023. 12. 11. 08:05수정 2023. 12. 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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