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역사이야기

토착민 성씨란(평창)

koreasam 2015. 10. 14. 09:37

평창이씨는 경주이씨나 전주이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토성土姓이다.
토착민 성씨란 삼한이전부터 이 땅에 정착해 살았는데, 그 당시에는 왕족이 아니고서는 성씨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므로 성을 가지지 않았다가 고려 중기에 성씨를 가진 가문을 말한다.
고려의 왕실조차도 왕건의 아버지가 용건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작제건이다.
즉, 성이 없었다. 왕건이가 왕이 되면서 개성왕씨를 만든 장본인이 된 것이다.

작제건 이전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기록될만한 에너지를 가지지 못한 가문이었다는 반증이다.
성이 만들어지고부터 가문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
우리나라의 성씨가 대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광종(재위:949-975)이 960년 과거를 실시하여 전국에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1055년 문종(재위:1046-1083)이 성이 없는 자에게 과거를 볼 수 없도록 조치한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평창이씨는 명종(재위:1170-1197) 때에 태사(정1품)를 지낸 이광李匡을 시조로 한다.

평창이씨는 이광에서부터 중앙에 진출하여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이광이 명종으로부터 백오군白烏君으로 봉군封君된다.

봉군이란 왕족이나 공신들에게 군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백오는 평창의 신라시대 때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봉군의 명칭은 자기 고향이 된다.
그러므로 이광은 평창출신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광의 5세손 이숙李肅의 딸이 목조비穆祖妃이다.
목조란 이성계의 고조高祖 이안사이며, 그의 부인이 평창이씨 효공왕후孝恭王后이다.
이에 이숙은 노산부원군으로 봉해졌다.

 “노산魯山은 평창의 다른 이름이다.
목조(穆祖)의 왕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어머니 정씨(鄭氏)의 무덤이 군(郡) 서산(西山) 서쪽 4리쯤에 있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명기되어 있다.
평창읍의 노산魯山 노산은 평창읍의 우측 뒷동산으로 평창천을 밀어내어 평창읍의 공간을 널직하게 만든 산이다.
목조의 국구, 노산부원군 이숙李肅의 군호가 된 지역명칭이기도 하다.
명칭이외에는 평창이씨의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시조가 살았던 유허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국구사우國舅祠宇가 있었다 하나 일제시대에 헐려서 유적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이숙과 그의 처 정씨의 묘가 평창군에 있어서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호장이 주관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서각대만 남아 전해질뿐이니, 정조는 군청 옆에 따로 한 채의 원우(院宇)를 세워 사판(祠版)을 봉안하고, 본군 호장으로 하여금 제례를 행하게 하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평창이씨는 멸족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가진다.
평창이씨 시조 이광李匡의 7세손 이천기는 위화도회군에 반대한 이원계 휘하의 장군이었다.
이원계는 이성계의 이복형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직전에 이원계를 따르는 장군들의 목은 모조리 베었다.
그 후 이원계는 고려의 충신으로 자살을 택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천기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이천기가 귀국할 때는 이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성공한 뒤라서, 자식들과 함께 장단에 숨어들어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창군으로 봉해진다.
고려의 권문세도가로, 고려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키면서도 조선의 대접을 받은 가문이 평창이씨이다.
그 당시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고려의 충신들은 자살을 택하거나 죽임을 당한 것이 비하면 엄청난 배려였다.
그 배려는 100년전의 은혜를 갚는 것이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전주로 임명되어온 지방관과의 갈등과 불화로 충돌이 일어나자 일가와 무리를 이끌고 피신하게 되었는데, 자기의 외가(삼척이씨)와 처가(평창이씨)가 있는 강원도로 이주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듯이 이주를 하게 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양식을 조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평창이씨 12대 이계의의 무덤_평창읍 주진리 평창에 있는 평창이씨의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시조의 무덤은 강원도 이천면에 있다.

이래서 무덤은 건물과 달리 타임캡슐이라 한다.
이계남과 3남 이창이 중종반정 공신이 되고, 평창이씨가문에 중흥기가 찾아온다.

 이계남은 평창이씨의 이광의 11세손으로 평원군이 되고, 이계남의 사촌동생 이계의는 이조판서에 이른다.

이계의의 21세 종손 이욱환(평창문화원장)씨가 평창을 지키고 있다.
평창이씨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천기의 현손 이계남이 중종반정 공신이 된 후 이다.
그는 이조판서가 되고 그의 아들(이창)도 공조판서가 된다.
그의 손자 이희문의 가계에서 13명의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지만, 조선 말기에 이희문의 후손인 이승훈이 천주교에 입문하여 세계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민족적 자진 귀의세례를 받았고, 귀국해서는 조선천주교회를 세우고 활약하다가 조정의 천주교 탄압으로 평창이씨에게 엄청난 시련을 가져오게 하였다.
도가적인 성향의 땅에 불교의 성지가 자리하고 있고, 천주교의 씨앗이 뿌려진 아이러니가 있는 곳이 평창이다.
평창군에는 평창, 봉평, 용평, 방림, 진부, 대화 등 평・방・부・화자가 들어간 지명은 평평하거나 부드럽다는 의미이다.
우리 시대에 각광받는 고지대의 특색을 살린다면 동계올림픽 이후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리와 생리를 확보한 평창군의 변모
명종 16년 2월. 평창군수(平昌郡守) 양사언(楊士彦)의 상소를 보면, 민호가 40호에 불과하니 고을을 없애자고 청원하고 있다.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은 지리地利가 우선이고 생리生理가 좋아야 한다고 택리지는 적고 있다.
평창은 첩첩산중이라 지리적 이점도 없고, 논밭이 적어서 농작물 생산도 풍족하지 못하니 생리도 부족한 지역이다.
군계일학이라고 사람이 많아야 그 중에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는데, 평창은 사람이 살기에도 척박한 만큼, 다산多産도 기대할 수 없고 물도 부족하고 들이 좁아서 사람이 많이 모여 살기에는 어렵다.
지리적 접근성이 용이하지 못하거나 작물의 소출이 적은 지역에 살면 그 지역의 지기의 영향으로 가구수가 줄고, 가계의 인구수도 적고,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진다.
백두대간이 가까울수록 가지가 급한 경사를 이루는 곳이 많아서 성격이 급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산중에는 고향을 떠난다는 이향사도 자주 발견되므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평창은 산이 부드럽고 능선이 잘 발달되어 있어 깊은 산중임에도 산의 기운이 순하다.

다만 불이 부족한 것이 흠이라 하겠다.
평창사람은 성장하면서 타지로 나가서 물의 기운을 보충해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이 될 것이다.
출처: 김 규 순 (서울동인학회원장, www.location‍art.co.kr풍수지리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