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 초기인 144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패륜에 통분, 끝까지 세조에게 저항하고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매운 절개와 고고한 지성,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강릉김씨의 정신적인 지주다.
3세 때 이미 시에 능했고 5세 때 ‘중용’과 ‘대학’을 통달, 신동으로 이름났다.
이런 천재적 재능이 온 세상에 알려지자 세종대왕은 승정원 지신사 박이창을 시켜 시험에 보도록 분부를 내렸다.
이에 박이창은 “동자의 배움은 백학이 청송 끝에서 춤추는 것 같도다”라는 글귀로 그 댓구를 재촉했다.
이에 김시습은 서슴지 않고, “성주의 덕을 비유하건대 황룡이 벽해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도다”로 화답했다.
이때 시습의 나이 겨우 다섯 살로 비범한 문재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은 크게 경탄, 장차 요직에 등용할 것을 약속하고 명주 50필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신동-김5세’라 불렀다.
후일 그가 은거하던 설악산의 암자도 이런 연유로 ‘오세암’이라 명명되었다.
5-15세까지 성균관대사성 김반과 개국 이래 사범지종(師範之宗)이라 불리었던 윤상의 문하에서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춘추, 예서, 제자백가 등을 배웠다.
그 후 나이 스물한 살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시습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역리의 시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잠깐 개는가 하면 곧 비가 내리고 다시 개네, 하늘도 이 같거니 세상 인심이야 어이하리, 나를 기리는가 하면 돌아서서 헐뜯네, 이름을 숨기고 사는 것이 명예를 찾음일세...”
김시습은 그의 유시처럼 갰다 곧 비내리는 변덕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영원한 야인으로 살았다.
경주의 금오산에 은거, 자조적인 자화상을 그려놓고 ‘진흙 구덩이에 얼굴을 처박아야 마땅한 놈’이라고 자학하면서.....광기와 독설로 울분을 삭였다.
이같은 김시습의 기행을 함석헌씨는 그의 저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시습이 21세의 청년으로 삼각산에서 독서하고 있더니 변보를 듣고 통곡한 후 책을 불사르고 발광하여 승려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명산, 사찰 등에서 보내며 시대에 대한 울분을 풀었다.
취한 몸으로 하수구에서 절벅거리기도 했다.
그렇듯 그는 일개 광승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단순한 광인 이상의 것이 있었다.
항상 비분강개하여 지축을 끼고 냇가에 앉아서 글을 지어 물에 띄워 보내고는 울기도 했고 농부의 목상을 만들어 안상에 벌려 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통곡하기도 했다.
또 곡식을 심어 그것이 자란즉 하루아침에 낫을 휘둘러 베어버리고 방성대곡했으며 관리의 비행을 보고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하고 부르짖으며 호곡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는 것을 들으면 그의 가슴 속을 가히 헤아릴 수 가 있다.
그의 미침은 의로써 미친 것이었다.
그 가슴의 아픔이 너무 도를 지났기 때문에 미침이요 정상인으로 살기에는 그 사회가 너무 부끄러워서 미친 것이다.
어떤 때는 세조가 법회를 모으매 그도 뽑히었더니 새벽에 문득 거처를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찾게 하니 길가 변소에 짐짓 빠져 얼굴의 반만을 겨우 내놓고 있었다.
그 세상을 부끄러워함이 이러하였다.
그는 실로 세조와 그의 사업에 향하여 유령과 같이 음울한 냉소를 보내는 자다.”이렇듯 김시습은 숱한 기행과 일화를 남겼다.
성종 2년 그의 나이 37세 되던 봄, 그는 왕의 부름을 받고 금오산을 떠나 서울로 왔다.
2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을 두고 방황하던 그가 서울에 와 보니 젊어서 친했던 서거정은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있었고 정창손은 영의정, 김수온은 좌리공신이 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이중 정창손은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할 당시 사위 김찬과 함께 이 사실을 세조에게 고해 바쳐 사육신 사건의 참화를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 공으로 그는 세조 때부터 영의정에 올라 영화를 누려 왔다. 이 때문에 시습은 그에 대해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어느 날 정창손이 초헌을 입고 입궐하는 것을 보고 ‘야, 정가 도둑놈아 아직도 살아 있느냐.’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러자 정창손은 시습의 기에 눌려 못 들은 체하고 그냥 지나쳤다.
일국의 영상을 감히 ‘도둑놈’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닥칠 화가 두려워 이때부터 누구도 시습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당대의 문장이었던 김수온과 서거정만이 의리를 지켰을 뿐이다.
성종 13년 48세 되던 해, 조정에서‘윤씨폐비문제’를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자 이를 보다 못해 다시 괴나리봇짐을 꾸렸다.
다시 시작된 유랑과 방황의 생활 10여 년. 마침내 성종 24년 2월 충청남도 부여의 무량사에서 숨을 거두니 이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난 불행한 천재였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문학에서 찾았다.
금오산에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할 당시 국문학 사상 불후의 명작인‘금오신하’와‘매월당집’‘십현담요해’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유교적 성리를 근거로 하여 불교 사상의 중핵적인 율법을 체득함으로써 유. 불혼합 일치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국적인 규격과 구조주의로부터 의연히 독립된 이방이었다.
충렬과 의협심으로 끝까지 의를 저버리지 않고 매운 절개를 지켰던 김시습.
그‘서릿발 같은 야인정신이 강릉김씨의 문중혼’이라고 후손들은 말한다.
출처:정변의 역사 2009.11.3.화 ( 정복규 논설위원 )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은 실패로 끝났다.참혹하게 처형당한 이들의 시신을 위험을 무릅쓰고 거두어 묻어주었던 이가
김시습(1435~1493년)이다.그는 신동으로 유명했었지만,21세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소식을 듣고, 책을 다 불태워
버린후 방랑길에 오른다. 관서지방을 돌던 그가 평양대동강에 닿은 것은 아마도 그의 소설집 금호신화의 취유부벽정기[취하여 부벽정에서 놀다]
에서처럼 가을달밤이엇을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5세때 세종대왕 앞에 불려가 시를 지을정도로 신동이었으나,수양대군의 왕위찬탈소식을 듣고
촉망되던 장래를 내던졌다.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승려로 자처하며 10년가까이 방랑했다.
전국을 방랑한 경험과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아우르는 섭렵은 그의 사상과 글을 독특하고 생기있게 만들었다.
30대에 경주 남산 금오산실에서 쓴 금오신화에 이런특징들이 잘 나타난다.
성종이 즉위한후 새조정에서 관직에 나아가려했으나 잘되지 않았고 40대후반에 환속해서 아내를 맞았으나,
곧 사별하고 조정의 어지러움으로 다시 방랑을 떠났다.
출처:20110922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