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역사이야기

김예와 왕순식

koreasam 2013. 4. 5. 15:22

 

이분..우리파의 시조라고 해야하나? 역사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고려시대에는 강릉김씨중 우리파만 왕씨라는걸 알았다. (만일 고려라는 나라가 계속 존재했다면 나의 이름은 왕씨였겠네요..)고등학교 역사시간에 고려시대에 왕건에 의해 지방호족세력들과 혼인을 통해 왕씨로 개명되었다는걸 알고는 있었지만, 자료를 읽다보니,자세한 사항이 나와 글을 옮겨본다. 또 몇해전 TV 사극 왕건을 주제로 한 일요드라마 에 왕순식이라는 사람이 등장인물로 나온적이 있다.

 

 

 

 

 

강릉호족 -태조 왕건에 귀부...고려통일 선봉
왕순식(王順式)은 신라말 고려초 명주(강릉) 지방에서 독자적인 호족으로 활약하였던 인물이다.
원래는 김씨였으나, 후일 왕건에게 귀부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아 왕씨가 되었다.

그의 세계(世系)에 관해서는 그 족적 계보를 알만한 자료가 없다.
다만 `고려사' 왕순식전에 그의 아버지 허월(許越)과 그의 아들 수원(守元) 장명(長命)의 3대가 나타날 뿐이다.
현재 전하는 `강릉김씨 족보' 중의 어느 것에도 그의 가계가 찾아지지 않기에, 그가 김주원의 직계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당시 명주지역에서 왕순식이 김주원의 세력과 별개로 존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평창군고기(平昌郡古記)'에 왕순식이 김주원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왕순식은 김주원의 직계후손이거나 그와 관계가 깊은 호족세력이었다고 하겠다.
김주원이 명주로 퇴거하게 되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혜공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선덕왕이 재위 6년만에 후사(後嗣) 없이 죽자, 그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때 신라의 지배세력들은 김주원을 지지하는 세력과 김경신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 대립하였다.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었던 김주원은 혈통 계보로 보나 지위에서 보나 김경신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당시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은 화백회의의 의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다수 귀족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먼저 왕실에 들어가 즉위식을 올렸던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김경신이 알천신(閼川神)의 도움으로 즉위하게 되었다고 한 것이라든지 하늘의 뜻으로 비를 내려 재선출한 결과 왕이 되었다고 한 표현은 김경신의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후대에 꾸민 것에 불과하다.


김주원이 명주를 퇴거지로 택한 것은 어떤 배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명주지역이 김주원의 선대부터 긴밀한 관계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다.
<명주군왕 고도기적비문(溟州郡王古都紀積碑文)>에는 강릉을 `김주원의 어머니 고향'(王之母鄕也)이라 하였다.
그리고 `강릉김씨세보(江陵金氏世譜)'에는 “김주원의 어머니는 연화부인(蓮花夫人) 박씨(朴氏)인데, 집이 명주(溟州)의 대천(大川) 남쪽 연화봉(蓮花峰) 밑에 있었고, 무월랑(惟正을 말함)이 벼슬로 명주에 왔을 때 인연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즉 명주는 김주원의 외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주원은 명주로 퇴거한 2년 후에 원성왕으로부터 `명주군왕(溟州郡王)'이라는 봉작(封爵)과 식읍(食邑)을 받는다.
여기서 `명주군왕'이란 `명주(溟州)의 군왕(郡王)'을 말한다.

김주원이 받은 `명주군왕'의 지위는 그 후손에게 세습되었다.
즉 김주원의 아들 김종기(金宗基)는 `명주군왕'으로, 김종기의 아들 김정여(金貞汝)는 `명원공(溟原公)'으로, 김정여의 아들 김양(金陽)은 `명원군왕(溟原郡王)'으로 각각 봉해졌다.
그리고 식읍은 왕족, 공신, 봉작자 등에게 지급하였던 영지(領地)를 말한다.
식읍을 받은 자는 그 지역에서의 토지뿐만 아니라 주민에 대한 지배도 인정되어서 조세(租稅)와 공물(貢物)· 역역(力役)의 수취까지도 가능했다.

김주원이 식읍으로 받은 곳은 그와 연고가 있는 명주 관할의 익령현(翼嶺縣, 지금의 양양)· 삼척군· 근을어군(斤乙於郡, 지금의 평해)·울진군 등이었다.

결국 김주원계는 4대에 걸쳐 `명주군왕'의 지위와 식읍을 세습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김주원계는 선대 때부터 연고권이 있던 명주 일대를 지반으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주원 후손들은 강릉을 중심한 동해안 일대에 강력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다가 후삼국시대를 맞이했다.
명주는 진성여왕대의 농민봉기를 거치면서 궁예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894년(진성여왕 8) 궁예가 처음 명주에 들어올 때의 군사는 600명이었으나, 이곳에 도착한 후에는 군사가 증원되어서 3,500명으로 불어났다.
궁예는 이들 군사를 14개 부대로 나누고, 각 부대에는 사상(舍上)이란 지휘관을 두어 250명의 병력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14부대 3,500명의 군사력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였는데, 이러한 군사력이 바로 궁예의 강력한 세력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궁예는 이곳 명주에서 확보한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였다.
궁예가 명주에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 이면에는 이곳 호족들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당시 명주에는 왕순식(김순식·金順式) 계열과 김예(金乂) 계열이 있었다.
김예는 김주원의 7대손이었다.

당시 세력관계 면에서 볼 때 왕순식은 김예보다 훨씬 우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고려정부와 명주세력과의 교섭에도 왕순식이 주요대상이 되고 있으며, 통일전쟁시에도 김예가 왕순식의 휘하에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한편 궁예는 명주 땅에서 승려 허월(許越)과 연고를 맺게 된다.

그는 다름 아닌 왕순식의 아버지였다.
그는 궁예가 명주 땅에서 성공적으로 민심을 수습하는 데 큰공을 세웠고, 그러한 인연과 공로로 인해 훗날 궁예가 왕국을 건설한 후에 궁궐 안의 사원인 내원(內院)에 거처하게 된다.
명주세력은 일찍부터 궁예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데 지지기반이 되었고, 그 뒤 국가를 세우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 후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자 명주세력은 왕건에게 불복하였다.
왕건은 왕순식이 오랫동안 항복해오지 않자 그를 귀부시키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하였다.
그리하여 922년(태조 5) 7월에 왕건이 순식의 아버지 허월을 보내어 타이르니, 순식은 그의 장자 수원(守元)을 보내어 귀부하였다.
이 때 왕건은 수원에게 왕성(王姓)을 하사하고 토지와 집을 주었다.
그러나 순식의 이러한 귀부는 왕건에게는 매우 소극적이고 불만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왕건은 순식 자신의 완전한 귀부를 위해 더욱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927년(태조 10) 8월 순식은 아들 장명(長命)에게 군사 600인을 주어 왕건의 숙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는 순식의 아들 장명에게 염(廉)이란 이름과 원보(元甫)라는 관계를 주었다.
오랫동안 왕건에게 불복하던 순식이 몸소 직접 무리를 이끌고 왕건에게 완전히 귀부하는 것은 928년(태조 11)에 와서이다.
이때 왕건은 순식에게 왕성을 하사하고 대광(大匡)이라는 관계를 주었다.
대광은 `크게 나라 일을 바로잡을 만한 위치'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대광은 살아있는 인물에게 주었던 관계 중 최고위였다.
태조 8대에 대광의 관계를 수여한 예는 재경세력(在京勢力) 중에는 몇몇 있었으나, 지방세력 중에서는 순식이 유일하였다.
왕건은 귀부한 순식으로부터 군사적 도움을 받아 이듬해 12월부터 시작된 고창군(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이 전투의 승리로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10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의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순식은 936년(태조 19) 후백제를 공멸(功滅)할 때에도 부하장병을 인솔하고 전투에 참전하였다.
순식은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大峴, 대관령)에 이르러 범일국사를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당’에 제사를 지내고, 후백제와의 마지막 격전지인 일리천(一利川)에 이른다.
이 때 고려측에서는 중앙군은 물론 각 지역에서 온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였는데, 그 병력은 무려 9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시 순식은 왕예(王乂) 등의 지휘관과 마군 2만을 지휘하는 활약을 보여 고려의 통일 전쟁에 크게 기여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이래 명주(溟州)로 불려오던 강릉이 동원경(東原京)으로 읍호가 승격된 것도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강릉김씨족보'에는 “후삼국 통일전쟁 때 명주장군 순식이 가서 도왔더니 명주를 동원경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통일 이후 얼마 안 가서 왕순식 계열은 중앙정계에서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936년(태조 19) 이후부터 왕순식에 관해서는 전혀 자료가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가문은 그후에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도태되었거나, 아니면 광종의 호족 억압책으로 제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김예 계열은 건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현손 왕국모(王國●)가 헌종 때 역신(逆臣) 이자의(李資義)를 제거한 공로로 참지정사(參知政事) 및 수사도(守使徒) 등을 역임한 것이라든지, 왕백(王伯)이 충렬왕 때 급제 출사한 것에서 확인된다.

 

 

왕국모(王國髦, ? ~ 1095년)는 고려의 무신이자 왕족이다.

본관은 강릉. 시호는 경렬(景烈), 정항의 장인이자 정서(鄭敍)의 외조부이다.

강원도 강릉(江陵)태생의 김예계의 후손인 동시에 고려 태조의 아들 왕유(王裕)의 여계후손으로 태어났다.

선종 1년(1086년)에 위위경(衛尉卿)에 올라 이어서 상장군(上將軍), 직문하성(直門下省)등을 역임하였다.

헌종 1년(1095년) 권상서병부사(權尙書兵部事)에 올라 왕자지와 협력하여 이자의를 죽였으며 이로 인해 숙종이 즉위하면서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로 승진하였다.

이어 우복야, 참지정사, 판병부사, 판도병마사등을 역임하였으며, 수사도(守司徒)까지 이르렀다.

 

 

 

 

※평창군고기(平昌郡古記)-`증수 임영지'에 의하면 이 책은 1596년(선조 29) 강릉부사 정구(鄭逑)가 강릉부(江陵府) 내를 순시하다가 평창에 이르러 마을 사람에게서 얻은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강릉은 영동 15면과 영서 6면을 관할하였는데, 영서 6면은 임계면, 도암면, 진부면, 봉평면, 대화면, 내면이었다.

 

 출처:<관동대 역사문화학과 박도식 겸임교수2004 [강원의 인물·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