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군왕릉[김주원]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5대손이며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金周元)
김주원의 집안은 여러차례 상대등가 시중을 지낸바 있으며(신라하대 혜공왕과 선덕왕 때에 시중과 상대등의 반열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신라 중앙조정의 권력의 중심권에서 활약하였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위치는 적어도 태종무열왕계의 좌장의 위상을 시사하며, 그의 왕위승계의 좌절은 그간에 200여년을 이어온 무열왕계의 왕위계승이 단절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
그의 부친인 유정은 명주에 벼슬을 받아와서 이지방 토호의 딸 박연화와 결혼하여 주원을 낳았다.
선덕왕(宣德王)이 후계자 없이 죽자 그는 왕위계승자로 유력하였으나 조카인 상대등(上大等)인 김경신(金敬信) 이 왕위에 오르자
주원은 자진해서 그가 연고권을 가지고 있던 강릉으로 물러났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주원을 택하여 왕위에 오르려 하려했으나, 주원이 마침내린 큰 비로 강을 건너지 못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이에 신하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하여 원성왕이 즉위하게 되었다고 한다.
789년 원성왕은 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하고 명주,익령(翼嶺),양양,삼척(三陟),울진(蔚珍) ,근을어(斤乙於),평해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후 주원의 아들 헌창과 손자 법문이 중앙정계에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모두 실패하였다.
자손이 이에 따라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삼았다.
출처:(두타산의 역사-문헌자료편(김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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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계 김주원 강릉 정착 정치·지방사적 의미 커
그는 신라 하대에 경주로부터 강릉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이곳 강릉에서 생활하였고 생을 마쳤다.
그의 후손들은 강릉에 세거하였다.
물론 족척 모두가 이곳에서 세거한 것은 아니다.
자손들 중에는 출사하여 중앙으로 옮겨 살았으며, 또한 향리에서 생활기반을 마련하고 가계를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말여초(신라말 고려초)에 이르러 본관이 제도화되는 시기에 그는 강릉김씨의 낙향시조로 추존되었다고 이해된다.
이렇듯 강릉지방에서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로서 부각되어 있다.
이러한 시조인식은 조선중기 이래로 종법과 족보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종회와 문중이 결성되면서 보편적 사유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종법인식의 추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른바 `명주군왕릉'이 주목된다.
즉 종회와 문중이 번성하면서 시조숭배의식이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563년 강릉부사 김첨경이 후손으로서 묘소를 수축하였다는 기록에서 이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1942년에 건립되는 `명주군왕고도기적비'와 1960년에 건립되는 `신도비'는 이러한 시조숭배의식과 그 기반으로서 문중과 종회가 번성했던 지방사회의 사회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더욱이 그간에 연례적으로 지내온 `능제'에서 지방사회의 수장으로서 수령의 역할은 적어도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양상으로서 주목된다.
즉 강릉에서 세거해 온 재지세력과 왕권을 대행하는 수령의 역학관계를 담보하는 기제로서 능제의 사회적 의미가 주목된다고 하겠다.
또 그 치제의례와 제수마련을 위한 절목도 이러한 사회적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이러한 지방사적 의미와 맞물려 있을 것으로 보이는 김주원의 행적에 대한 인식은 강릉지방에서 매우 단선적이다.
즉, 천재지변에 따라 왕권을 선양하였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인식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며, 여기에 종회와 문중적 성향이 담지되면서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은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될 필요가 있으며, 이로서 그 인물됨과 아울러 그것과 맞물린 지방사회의 변화상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단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적어도 그는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강릉으로 퇴거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로 정치사적 의미를 갖거니와 아울러 이로부터 당시 강릉지방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단초가 마련될 것이기에 지방사적 시각에서 매우 주목될 수 있다.
그리고 김주원의 퇴거와 그 직계후손들의 활약상 즉 시중에 올랐던 김종기, 상대등에 올랐던 김정여, 김양 등의 활약상은 지방사적 시각에서 그 내재적 변화상과 맞물린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강릉지방의 내재적 사회상은 강원도 일원의 여타 세거세력과 유대성을 주목함할 때 훨씬 역동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주목할 때, 적어도 김주원에 대한 이해는 종회와 문중적 인식과 아울러 지방사적을 인식으로 분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동일상에 대한 양면성일 뿐 별개일 것 일 수 없다.
다만 문중적 인식의 한계를 벗어날 필요는 제기될 수 있으며, 또한 지방사회의 변화라는 시각에서 그 인물을 파악하려는 시각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로부터 김주원의 진솔한 삶과 그 역사적 의미가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강원일보 이규대(李揆大) 강릉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