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문신

조선 중기 이후 계속된 당파 싸움의 시작은 선조 때의 문신인 성암 김효원(省庵 金孝元 : 1542~1590)과 손암 심의겸(巽菴 沈義謙 : 1535~1587)의 전랑(銓郞)이라는 관직을 둘러싼 암투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한성의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에 사는 김효원을 동인으로, 서부에 사는 심의겸을 서인(西人)으로 불렀다.
동인은 주로 신진사림과 퇴계 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서인은 구사림세력과 율곡 이이(李珥)가 가세하여 그를 중심으로 하는, 즉 신․구의 대립을 벗어나 학연성의 대립으로 발전하여 정치운명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다.
성암 김효원은 1565년(명종 20)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평을 맡고 있을 때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척신계가 몰락함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한 신진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572년 김효원은 이조전랑으로 오건(吳健)을 추천하였으나 과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의 관직은 절대로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고 반대하여 좌절된 바, 이때부터 동․서로 나뉘어지고 훈구와 척신의 싸움으로 발전하게 된다.
심의겸을 척신이라 함은 명종(明宗)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의겸은 권세와 간계를 배척하고 사림의 입장을 옹호하는데 힘을 씀으로서 당시 사림간에 폭넓게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사림의 분열로 이어지고,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사신과 부제학 이이 등은 분쟁 완화의 조정안으로 두 사람을 한성을 떠나 외직으로 보낼 것을 임금께 아뢰니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김효원이 더 외딴 외직에 배치되었다는 동인의 반발로 그 조정안은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골만 깊어갔다.
선조 때는 당쟁이 더욱 고조되어 김효원은 자청해서 안악군수로 나갔다.
이때부터 김효원은 입을 굳게 다물고 붕당의 책임을 통감하여 세상 돌아가는 일에 개의치 않았다.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 중 죽으니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김효원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아버지는 현감 홍우(弘遇)이니 선누대 묘소가 별내면 화접6리에 있다.
주을천 옆 묘소 입구에 옥개형 신도비가 있는데 이준(李埈)이 짓고 김세렴(金世濂)이 글씨를, 허목(許穆)이 전액하여 1743년에 세웠다.
남의 허물을 굳이 들추어 싸움만 일삼는 작금의 정치판과 400년 전 동서 붕당과 얼마만큼 다르단 말인가.
국리민복을 도외시한 정치는 결국 국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이유가 있더라도 대화로 푸는 길을 모색하여 국민이 걱정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요원할 뿐이다.


성암 김효원과 삼척
성암은 34세부터 4년여에 걸쳐 삼척도호부사를 지냈다.
그는 미신 타파는 물론 인재 양성, 농사, 양잠을 권장하였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선행을 포장하여 1년여 만에 고을의 면모를 일신했다.
은혜에 감복한 지역 주민들은 성암이 세상을 떠난 뒤 사당을 세워 기렸고, 후에 태수로 온 창석 이준(서애 문하의 대표적 문인)이 글을 지어 이를 역사에 남겼다.
인조9년(1631)에 삼척시 부정산 아래 세운 사당은 현종2년에 이건했고 순조24년에 중수와 함께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현종3년 강원도관찰사 한익상이 강당을 창건했다.
이후 고종5년에 훼철되어 학전(學田)과 서책을 삼척향교로 이관해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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